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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오랑캐는 어떻게 제국을 이뤘나 (한겨레 2013.05.10 19:47)

만주 오랑캐는 어떻게 제국을 이뤘나

 

여진 부락의 의사결정 조직은 청나라 정치기구의 원형을 이룬다. 사진은 병자호란기를 배경 삼은 영화 <최종병기 활>에서 청 팔기군의 우두머리(버일러)로 분한 배우 류승룡.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소부락이던 여진족 조직·제도가
청나라때 어떻게 발전했나 고찰
300년간 제도사 변화 체계적 서술

여진 부락에서 만주 국가로
류샤오멍 지음, 이훈 이선애 김선민 옮김
푸른역사·3만5000원

 

동아시아 변방을 ‘떠돌던’ 민족인 여진족이 어떻게 중국 대륙, 중원을 품는 광대한 국가를 통치하게 되었을까? <여진 부락에서 만주 국가로>는 쉽게 말해, 이런 질문에 답하는 학술서이다.

14세기 중엽, 몽골의 원나라가 망한 뒤 동아시아에는 명나라와 조선 국가가 들어섰지만 여진족은 두 나라의 틈바구니에서 통일된 국가체제를 갖추지 못했다. 현 중국의 동북지역과 러시아 연해주를 포괄하는 광활한 지역에서 소규모 씨족·부락 단위로 분산된 채 조선과 명으로부터 ‘견제’와 ‘시달림’을 받고 있었다.

여진족은 조선 사람들이 부르던 지칭일 뿐 그 스스로는 ‘주션’이라고 칭했던 민족이다. 훗날 청 태조가 되는 누르하치가 1616년 여진족을 통합한 뒤 금(후금)을 세웠고, 그 후계자인 여덟째 아들 홍타이지(청 태종)는 1635년 내몽골 지역까지 평정한 뒤 ‘주션’이라는 명칭을 금하고 ‘만주’로 개칭했다. 홍타이지는 이듬해 만주족, 몽골족, 한족 관료가 공동으로 거행한 예식에 따라 황제 자리에 올랐다. 청제국의 시작이었다.

주션족, 곧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1644~1911)는 300년 가까이 존속하며 17~18세기 화려한 중국 문명을 꽃피웠을 뿐 아니라 현대 중국의 광대한 강역과 다민족 국가라는 성격의 밑그림을 그렸다.

중국의 청대 팔기제도 연구의 권위자인 류샤오멍(유소맹·61·사회과학원 근대사연구소 교수)이 쓴 이 책은 만주족이 씨족·부락 제도의 기반 위에서 발전중이던 14세기 후반부터 거대 국가를 건립하는 17세기 초반까지 과정을 ‘조직’과 ‘권력’이란 개념을 발판 삼아 제도사 측면에서 고찰한 책이다. 1995년 중국에서 처음 출간된 뒤 2001년과 2007년에 개정판이 나왔다. 청대 역사 전공자인 옮긴이들의 말을 빌리면 “종래엔 별개의 사회처럼 인식되어온, 이른바 부락시대의 여진과 누르하치가 국가를 세우고 제도 체계를 갖춰나가는 시기의 여진을 통합적으로 연속선상에서 고찰했다는 점에서 독보적인” 책이다.

지은이는 금의 국가체제의 근간을 이뤘던 ‘팔기’와 사회조직과 관습법 등의 제도의 원형을 300여년 전 여진 부락에서 찾아낸다. 요컨대 여진 부락 시기 여러 제도가 국가 시기 제도의 기반이 되었다. 여진, 곧 만주족이 수립한 국가는 “만주족·몽골인·한족이 팔기 체제를 통해 효율적으로 혼합된 다민족 국가”였다.

여진족은 14세기 중반까지도 할라, 무쿤, 가샨, 구룬 같은 씨족 부락이 각기 활동하던 단계에 머물렀으나, 15세기 중기에 송화강 유역과 파저강 유역에 잇따라 ‘해서’ 여진과 ‘건주’ 여진이라는 선진적 부락연맹이 생겨나면서 부락연맹시대를 맞는다. 두 부락연맹에서는 부락에서 국가로 발전해 가는 과도기의 이중적 특징이 나타났는데, 곧 ‘가샨’과 ‘구룬’(부락)은 지연 집단이었지만 여전히 혈연적 성격도 띠었다. 이런 과도기적 이중성은 15세기 말까지 부락 관리 조직에서도 나타났다. 추장은 한 가문 내에서 선출됐으나 엄격한 부자 계승은 아니었고, 그 귀족 가문이 추장을 독점했지만 강제력이 부족했기에 추장 권력은 제한적이었다.

16세기 초부터 1582년까지 해서와 건주 여진이 대외무역을 발판 삼아 힘을 키우면서 인근 부락과 평등한 연합체가 아니라 군사정복과 강제합병에 따른 불평등한 부락연맹이 형성되고 이 부락 상층부에서 특수화된 세습귀족인 ‘한’, ‘버일러’ 같은 계층이 형성된다. 1583년 형성된 건주 부락연맹 출신의 누르하치는 군사력을 앞세워 권력을 구축한 뒤 금을 건국했다. 그는 여진 씨족 부락의 제도를 일부 개조하고 몽골식 제도를 일부 수용하여 금나라 정치기구의 기초적 형태, 곧 팔기(8구사) 조직과 의정회의를 만들었다. 청 건국 14년 전인 1622년에 수립된 ‘여덟 호쇼이 버일러’의 공동 집정제도는 과거 부락 귀족의 결정권 전통을 그대로 유지한 것이었다.

청이 영토 확장을 계속하면서 팔기는 만주족만의 조직이 아니라 다민족 조직으로 확대되었다. 청나라 때 편찬된 <팔기 만주 씨족통보>에는 ‘팔기’에 속한 1266개의 성씨가 수록돼 있는데, 그 다수는 만주족·몽골인·한족이지만, 조선의 성씨도 43개나 포함돼 있다고 한다. 이 책에는 한문 사료와 만문(만주 문자) 사료가 광범하게 동원되는데, <조선왕조실록>이 <만주실록> 등과 함께 주요한 사료로 쓰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