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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관계/중 국

‘제1부인’ 수난사… (주간조선 2013.04.01)

제1부인’ 수난사

왕광메이 조리돌림 장칭 자살

 

▲ (왼쪽부터) 마오쩌둥의 부인 장칭. 덩샤오핑의 부인 줘린. 장쩌민의 부인 왕예핑. 후진타오의 부인 류융칭. 시진핑의 부인 펑리위안.
시진핑(習近平) 신임 중국 국가주석의 부인 펑리위안(彭麗媛·51) 여사가 중국 정가에서 주목받은 것은 2007년 6월 30일 홍콩 반환 10주년 전야제에서다. 분홍색 여왕드레스를 입은 펑리위안은 ‘향강명월야(香江明月夜)’란 곡을 특유의 애간장 녹이는 고음으로 소화했다. 펑리위안은 공연 직후 기념식에 참석한 후진타오 당시 주석과 악수했다. 이날 펑리위안의 왼쪽에는 후진타오 주석, 오른쪽에는 도널드 창 홍콩행정장관이 자리를 잡았다. 이날 기념식을 찾은 당시 제1부인 류융칭(劉永淸) 여사는 무대에도 못 올랐다. 4개월 뒤인 2007년 10월 시진핑 당시 상하이시 서기는 17차 당대회에서 최대 라이벌인 리커창(李克强)을 꺾고 서열 6위 부주석으로 올라서며 차기 대권을 예약했다.

지난 3월 23일 시진핑 중국공산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의 부인인 가수 펑리위안이 ‘제1부인’으로 공식 데뷔했다. 지난 3월 14일 국가주석으로 선출된 시진핑의 러시아·탄자니아·남아공·콩고 등 4개국 첫 해외순방길에 ‘제1부인’ 자격으로 동행하면서다. ‘제1부인’은 중국에서 영부인을 뜻하는 말로, 영어 ‘퍼스트레이디(First Lady)’를 중국식으로 옮긴 말이다. 중국에서는 대외적으로 국가를 대표하는 국가주석 등 최고실력자의 부인을 ‘제1부인’으로 불러왔다.

펑리위안이 시진핑 총서기의 팔짱을 끼고 전용기 트랩을 내려오자 한동안 나돌던 이들 부부의 불화설도 쏙 들어갔다. 심지어 ‘모의천하(母儀天下)’란 얘기까지 나왔다. ‘어머니가 천하(天下)를 주관한다’는 뜻의 ‘모의천하’는 중국에서 ‘황후(皇后)’를 지칭한다. ‘모의천하’란 제목의 궁중비사 드라마가 중국을 강타한 적도 있다. 펑리위안은 세련된 외모에 탁월한 가창력까지 갖춘 가수 출신으로 ‘중국판 브루니’(프랑스 사르코지 대통령 부인)로도 불린다.

중국의 제1부인이 이 정도로 주목받는 일은 1978년 개혁개방 직후 전례가 없다는 평가다. 중국의 역대 ‘제1부인’들이 공개석상에서 활동을 꺼린 것은 왕광메이(王光美)의 트라우마 때문이다. 왕광메이는 작고한 류샤오치(劉少奇) 국가주석(1959~1969)의 부인이다. 우아한 외모에 석사 학력, 영어통역 실력에 세련된 매너까지 갖춘 왕광메이는 대외적으로 국가를 대표하는 ‘제1부인’ 역을 수행했다. 중국에서 ‘퍼스트레이디 외교’가 시작된 것도 왕광메이부터다.

하지만 왕광메이는 일거수일투족은 상하이의 2류 배우 출신인 마오쩌둥의 부인이자 실제 ‘제1부인’ 장칭(江靑)과 비교됐다. 왕광메이에 대한 장칭의 질투가 문화대혁명을 촉발했다는 것은 중국에서 거의 정설이다. 장칭은 문혁 와중에 “딸(류핑핑)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거짓말로 왕광메이를 납치했다. 또 왕광메이에게 치파오를 입히고 탁구공 목걸이를 걸어 조리돌림을 시켰다. 1963년 류샤오치 부부의 동남아 순방 때 치파오에 진주목걸이를 건 자태로 찬사를 받은 왕광메이에 대한 복수였다. 또 이름에 ‘미(美)’ 자가 들어간다는 이유로 미국 간첩으로 몰아 12년간 감옥에 수감했다.

장칭이 왕광메이에게 조리돌림을 가하고 핍박한 것은 한(漢)고조 유방의 황후 여치(여후)가 척부인을 질투해 ‘인간돼지’로 만든 것에 비유됐다. 유방의 부인인 여치는 유방이 총애하는 척부인의 수족을 자르고, 눈을 뽑고, 벙어리로 만들어 변소간에 집어넣었다.

장칭 역시 ‘사인방(四人幇)’을 이끌고 문화대혁명을 주도하며 홍위병을 동원해 반대파를 구타고문했다. 장칭은 당시 ‘여후’와 ‘측천무후’의 공적을 미화하는 공정을 추진했다. 장칭도 남편 마오쩌둥의 사후 ‘제1부인’의 지위를 넘어 ‘황제’를 꿈꿨다. 1972년에는 미국의 여성사학자 록샌 위트케를 불러 ‘장칭 동지’란 제1부인 최초의 자서전을 냈다. 미국 기자 에드거 스노를 불러 자서전을 쓴 마오쩌둥을 본뜬 행동이었다. 남편 사후에는 상하이에서 민병을 동원해 정권을 탈취하려는 계획까지 세웠다. 결국 장칭은 정변을 일으킨 화궈펑(華國鋒), 예젠잉(葉劍英) 등에게 잠옷 바람에 체포돼 사형을 선고받고, 가택연금 중이던 1991년 화장실 욕조 위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

비극적 전례로 덩샤오핑의 세 번째 부인 줘린(卓琳) 여사는 공개 행보를 거의 삼갔다. 윈난 출신의 줘린은 덩샤오핑과 옌안에서 결혼한 12살 연하의 띠동갑이다. 줘린은 덩샤오핑의 1978년 일본 방문과 1979년 미국 방문 때 동행했지만 엄밀히 따져 ‘제1부인’의 신분은 아니었다. 덩샤오핑이 사실상 아무런 직함이 없이 실권을 행사했기 때문이다.

덩샤오핑 집권 때는 대외적으로 국가를 대표한 리셴녠(李先念) 국가주석의 부인 린자메이(林佳媚) 여사가 제1부인 역을 대신했다. 줘린 여사가 세간에 드러난 것은 1992년 남편 덩샤오핑의 은퇴 후 남순강화(南巡講話)에 동행하면서다. 당시 덩샤오핑은 마지막 정치적 승부수였던 남순강화 때 줘린 여사와 세 딸(덩린·덩난·덩롱)을 대동했다. 영락없는 시골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모습이었다. 덩샤오핑은 1997년 사망 직전에도 부인에게 “내 사후에 밖으로 나서지 마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이에 줘린 여사는 홍콩과 마카오 반환식 때 작고한 덩샤오핑을 대신해 참석한 것 외에 외부활동을 삼가다 2009년 93세로 사망했다.

장쩌민 총서기 겸 국가주석의 부인 왕예핑(王冶坪·85) 여사도 시골 할머니에 가까웠다. 장쩌민과 장쑤성 양저우(揚州) 동향이다. 왕예핑은 장쩌민 양모의 조카딸로 인척 간이다. 왕예핑은 두 살 많은 장쩌민을 고교 때부터 사귀었으며 상하이외국어학원(대학)을 나온 뒤 식을 올렸다.

▲ 탁구공 목걸이를 목에 건 왕광메이 여사(가운데)가 문화대혁명 와중에 홍위병들에 의해 조리돌림 당하고 있다.


심지어 장쩌민은 자서전에서 “(아내는) 평범한 외모로 상하이시 당서기 관사에서 식모로 오해받은 적도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왕예핑은 남편이 1989년 천안문사태 와중 당총서기로 발탁됐을 때는 눈물을 흘리며 남편의 베이징행을 만류했다고 한다. 왕예핑은 1994년 장쩌민의 러시아 방문길에 따라나선 것으로 제1부인으로 데뷔했다. 왕예핑은 미국 빌 클린턴(1997년), 조지 W.부시(2002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때에도 동행, 미국의 영부인인 힐러리 클린턴, 로라 부시와 현저히 비교됐다. 힐러리 클린턴은 엘리트 변호사, 로라 부시는 텍사스주 로데오 미인대회 출신이다. 이에 장쩌민은 집권 동안 40살 연하의 가수 쑹주잉(宋祖英)을 비롯한 여성들과 숱한 염문을 뿌렸다. 쑹주잉은 펑리위안의 라이벌 가수이기도 하다.

지난 10년간 제1부인으로 지낸 후진타오 주석의 부인 류융칭(劉永淸·73) 여사도 조용한 내조를 이어갔다. 류융칭 여사는 2005년과 2010년, 2012년 후진타오와 함께 세 차례 한국에 왔다. 베이징 출신의 류융칭은 후진타오보다 두 살 연상으로, 청화대 수리공학과 동기동창이다. ‘후꺼(胡哥·후 오빠)’란 애칭을 가진 후진타오는 대학 때 유명 경극배우 메이란팡(梅蘭芳)에 비견될 정도의 미남자였다. 청화대에서 인기가 상당했는데, 이들은 학내 댄스파티에서 만났다고 한다. 후진타오는 졸업 후 간쑤성 수력국에 배치받고 황하(黃河)의 유가협, 팔반협 댐 건설 현장서 류융칭과 살림을 차렸다.

류융칭은 2011년 1월 후진타오 주석이 미국을 국빈방문했을 때와 지난해 7월 홍콩 반환 15주년 기념식에는 남편과 동행하지 않아 의문을 자아냈다. 현재 홍콩과 대만의 일부 언론에 따르면 류 여사는 유선암(乳腺癌)을 앓고 있다고 알려진다. 공처가로 알려진 후진타오가 모든 직위에서 물러난 것도 “부인 병수발 때문”이라는 것이 홍콩과 대만 언론의 분석이다.

과거의 ‘제1부인’들과 다른 펑리위안의 모습에서 장칭을 떠올리는 사람도 간혹 있다. 연예인 출신이란 점이 같다. 장칭은 배우, 펑리위안은 가수 출신이다. 장칭은 원래 산동(山東)의 부호 집안 캉성(康生) 전 부주석 집에 딸린 식솔이었다. 비밀공작을 총괄한 캉성의 소개로 마오쩌둥은 21살 연하인 장칭과 옌안에서 만나 1938년 식을 올렸다. 펑리위안은 부농 집안으로 출신으로 극좌 문화대혁명 때는 출신성분으로 인해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 두 사람은 모두 산동 사람이다. 장칭은 산동성 중부 주청(諸城) 출신이고, 펑리위안은 산동성 서남부 윈청(鄆城)서 태어났다. 산동에서 태어나 산동예술학원에서 음악을 공부한 펑리위안이 발탁된 것은 덩샤오핑의 셋째 딸 덩롱(鄧榕)의 음악선생으로 있던 리링(李凌) 전 중앙음악학원장의 천거가 결정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덩롱은 덩샤오핑이 ‘마오마오(毛毛)’란 애칭으로 부르며 총애한 셋째 딸로 덩씨 집안의 실세였다.

이후 펑리위안은 리링이 원장으로 있던 베이징 중앙음악학원(대학)에 입학했고 점차 인민해방군 문공단(문예단)에 입대해 위 문공연 등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이후 펑리위안은 1982년 중국중앙방송(CCTV) ‘춘완(春晩)’의 출연 기회를 잡고 ‘희망의 들판에서’란 노래 한 곡으로 전국적 지명도를 얻는다. 춘완은 중국에서 시청률이 가장 높은 프로그램이다.

이후 펑리위안은 점점 유명세를 타며 쩡칭화이(曾慶淮), 쑹주잉과 같은 거물들과 관시를 맺는다. 태자당(太子黨)의 좌장인 쩡칭홍(曾慶紅) 전 부주석의 둘째 동생으로 문화계의 마당발인 쩡칭화이는 시진핑과 펑리위안 간에 다리를 놔준 것으로 알려진다. 당시 푸젠성 샤먼(厦門)시 부시장으로 있던 무명의 시진핑은 1987년 유명가수 펑리위안과 재혼에 성공한다. 이후 시진핑은 펑리위안을 매개로 장쩌민과 다리를 놓아 본격 출세가도에 올라탄다. 장쩌민은 직접 피아노를 연주하고 즉석에서 노래 실력을 뽐낼 정도로 음악 애호가였다. 이에 시진핑의 출세는 펑리위안이 시켰다는 얘기도 나온다.

특히 펑리위안은 1989년 천안문사태 때도 계엄군을 위해 위문공연을 했다. 또 2008년 5월 쓰촨성 원촨대지진 때도 외동딸 시밍쩌(習明澤)와 함께 재해현장에 달려가 절도있는 거수경례를 하며 위문공연을 다녔다. 당시 시진핑은 국가부주석으로 2008년 8월 베이징올림픽 준비를 주관하고 있었다. 펑리위안이 시진핑의 첫 번째 부인은 아니다. 시진핑의 첫 번째 부인인 전 주영대사 커화(柯華)의 딸 커링링(柯玲玲)은 현재 영국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펑리위안 김정일 위해 꽃파는 처녀 부른 이유

 (주간조선 2013.04.01)

 

photo 로이터·뉴시스
중국의 퍼스트레이디 펑리위안(彭麗媛· 51) 여사가 과거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을 위해 북한 노래를 수차례 부른 것으로 확인됐다. 펑리위안은 1983년 6월 김정일이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했을 때 ‘꽃파는 처녀’란 노래를 조선어(북한말)로 불렀다. 당시는 펑리위안이 1982년 중국중앙방송(CCTV) 춘절 특집프로그램 춘완(春晩)에서 ‘희망의 들판에서’란 노래를 불러 전국적 유명세를 얻은 직후다. 당시 영상을 확인하면 21세의 앳된 펑리위안은 빨간 치파오를 입고 ‘꽃 사시오, 꽃 사시오, 어여쁜 빨간꽃’이란 가사로 시작하는 노래를 어설픈 북한말로 독창했다. 인민복을 입은 김정일은 노래가 끝난 후 앉아 박수를 쳤다.

당시는 2011년에 죽은 북한 지도자 김정일이 아버지 김일성의 후계자 신분으로 중국을 방문해 소위 ‘책봉례’를 치를 때다. 41세의 김정일은 오진우 인민무력부장, 연형묵 부총리를 대동하고 방중, 당시 중국의 최고실력자인 덩샤오핑(鄧小平)을 비롯해, 후야오방(胡耀邦) 중국공산당 총서기, 리셴녠(李先念) 국가주석, 펑전(彭眞)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 저우언라이(周恩來) 전 총리의 미망인 덩잉차오(鄧穎超) 여사 등 중남해(中南海)의 거물들을 모조리 접견했다.

펑리위안은 2004년 4월 김정일이 중국을 비공식 방문했을 때도 환영식에 등장했다. 당시 영상을 확인하면, 펑리위안은 ‘김정일 총비서 동지를 환영하기 위한 예술공연’이란 붉은 현수막 아래서 빨간 치파오를 입고 ‘꽃파는 처녀’를 독창했다. 펑리위안은 1절은 중국어, 2절은 북한말로 불렀다. 김정일은 후진타오 당시 주석과 함께 독창을 지켜봤다.

펑리위안은 2002년 4월에도 북한을 방문해 평양 봉화예술극장에서 ‘꽃파는 처녀’를 불렀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에 따르면, 당시 펑리위안은 북한 ‘4월의 봄’ 우의예술제조직위 초청으로 방북했다. 이날 공연은 김정일 위원장을 비롯해 조명록 당시 국방위 부위원장, 김일철 인민무력부장 등 2000여명이 참석했다.

펑리위안은 2010년 10월 21일 북한 동평양대극장에서 열린 중국 인민지원군 6·25전쟁 참전 기념행사에도 참가했다. 중국과 북한은 중국이 한국전에 개입한 10월 25일을 중국인민지원군 참전기념일로 삼아 함께 기념하고 있다. 당시 방북한 궈보슝(郭伯雄)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 등 중국 인사들은 6·25전쟁 때 혈맹으로 다져진 북·중 간 우의를 되새겼다. 이 자리에는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도 김정일과 함께 참석했다.

당시 펑리위안은 중국 인민해방군 총정가무단장을 맡고 있었다. 당시로 추정되는 영상을 보면, 펑리위안은 군복을 입고 ‘나의 조국(我的祖國)’을 불렀다. ‘나의 조국’은 6·25전쟁 때 치른 상감령전투를 소재로 한 곡으로, 미국을 ‘승냥이와 이리떼’로 비하한 노래다. 이 노래는 후진타오 주석의 2011년 미국 백악관 국빈방문 때 중국의 피아니스트 랑랑(郞朗)이 연주해 미·중 간 외교마찰을 불러온 바 있다.

중국의 ‘제1부인’ 펑리위안이 김정일 앞에서 수차례 북한 노래를 부른 사실이 국내에 알려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펑리위안이 수차례 방북했음이 확인된 것도 처음이다. 당시만 해도 펑리위안의 이름이 국내에 알려지기 전이었다.

▲ 1983년 ‘꽃파는 처녀’를 독창하는 펑리위안과 이를 지켜보는 김정일(오른쪽 사진 가운데). photo 여우쿠

펑리위안이 김정일을 위해 수차례 열창한 ‘꽃파는 처녀’는 ‘피바다’ ‘당의 참된 딸’ ‘금강산의 노래’ ‘밀림아 이야기하라’ 등과 함께 북한의 5대 혁명가극 중 하나다. 1930년 항일 유격대원들의 해방구였던 중국 지린성 우자쯔(五家子)에서 첫 공연됐다고 전해진다. 북측은 “꽃파는 처녀는 김일성 주석이 직접 쓴 창작물”이라고 주장해 왔다. 주 내용은 좁쌀 두 말 빚 때문에 일제 앞잡이 악덕 지주의 머슴살이를 하며 착취당하던 ‘꽃분이’를 조선혁명군 오빠가 구한다는 것으로 김일성의 항일 혁명투쟁을 미화하는 내용이다.

‘꽃파는 처녀’는 1970년대 같은 이름의 영화로도 제작돼 북한과 중국에서 흥행에 성공했다. 동명의 영화는 영화광이었던 김정일이 제작한 것으로 북한에서 알려졌다. ‘꽃파는 처녀’는 1972년 옛 공산권 체코의 카를로비바리 영화제에서 특별상을 받았다. ‘꽃파는 처녀’의 주인공인 꽃분이는 현재 북한에서 발행하는 1원권 화폐의 모델이기도 하다. 최근에도 북한의 피바다가극단 175명은 중국의 16개 주요 도시를 두 달간 순회하며 ‘꽃파는 처녀’를 공연했다.

현재 북한의 조선중앙방송에서 실황 녹화한 것으로 보이는 김정일을 위해 노래를 하는 펑리위안의 영상은 중국 인터넷에서 확산 중이다. 펑리위안이 김정일을 위해 노래를 부른 사실이 알려지자 중국 네티즌들도 시끌시끌하다. “상국(上國)의 국모(國母)가 소국(小國)의 번왕(藩王)을 위해 노래를 불렀다”고 분개하는 얘기도 나온다. 일부 네티즌들은 중국을 상국, 천조(天朝) 등으로 높인다. 반면 한국, 몽골, 베트남 등 과거 조공을 바쳤던 인접국을 ‘번방’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이들 국가의 수반을 ‘번왕’ ‘왕공’ ‘제후’로 격하해 부른다. 대신 중국의 국가주석은 ‘황상’, 제1부인은 ‘황후’란 식이다.

심지어 “펑더화이(彭德懷)는 김일성의 뺨을 후려쳤는데, 펑리위안은 김정일을 위해 노래를 불렀다”고 양펑(兩彭)씨를 비교하기도 한다. 펑더화이는 중국의 개국공신인 ‘10대 원수’ 중 서열 2위로, 6·25전쟁 때 중공군 사령관으로 참전했다. 중국에서는 미국의 맥아더 장군과 동급으로 취급된다. 괄괄한 성격으로 훗날 마오쩌둥에게 대들다가 숙청당하는데, 6·25전쟁 때 작전통제를 따르지 않는 김일성의 뺨을 두 차례 때렸다는 얘기가 중국에서 전설처럼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