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녀'만 될 수 있었던 궁녀, 감별하는 방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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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녀의 하루|박상진 지음|김영사|310쪽|1만4000원
왕과 왕비가 수라를 드는 동안 그날의 번인 궁녀 3명이 일렬횡대로 엎드린 채 지켜봤다. 왕이 물린 음식은 궁녀들이 먹었다. 물론 퇴선간(退膳間·궁중의 중간 부엌)에서 '재활용'될 때도 위계(位階)가 있었다. 처음에는 지밀상궁(큰방상궁)을 중심으로 예순 이상 선참 상궁들이 상머리에 둘러앉았다. 다음에는 50대에서 40대, 그다음은 30대, 마지막엔 젊은 나인과 10대 생각시 순서로 먹었다.
세수간(洗手間) 나인은 아침저녁으로 왕과 왕비의 세숫물, 목욕물을 대령했다. 옻칠한 함지에 더운물을 담고 작은 대야를 한데 받쳐 올렸다. 왕이 대소변을 봐야 할 땐 잡일을 맡던 복이처(僕伊處)의 나인이 매우틀(梅雨틀·이동식 변기)에 여물을 잘게 썬 매추라는 것을 뿌려 가져왔다. 왕이 일을 마치면 명주로 뒤처리한 뒤 매추를 뿌리고 덮어서 갖고 나갔다.
궁녀도 봉급을 받았다. 관리와 아전, 관노가 온갖 물건을 수레에 잔뜩 싣고 나타난다. "먼저 김혜순 상궁 앞으로 나오시오." "알겠소." "중미(중등품 쌀) 2되 5홉, 감장(단간장) 4홉, 청장(진하지 않은 장) 1홉 6작을 지급하도록 하게." 한 되는 한 말의 10분의 1, 한 홉의 10배(약 1.8리터)에 해당한다. 작(勺)은 한 홉의 10분의 1이다. 구한말에 돈으로 월봉을 받은 기록을 보면 가장 높은 지밀상궁의 보수는 196원, 요즘 화폐가치로 약 200만원이었다.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부터 궁녀가 있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백제가 망할 때 궁녀들이 낙화암에서 몸을 던졌다는 기록이 나온다. 하지만 저자는 "의자왕 삼천 궁녀 설은 중국을 본뜬 과장일 뿐, 일부에 할거한 백제가 그 정도 수의 궁녀를 둔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고 썼다. 조선시대 민간에서는 딸을 궁녀로 들여보내는 것을 기피했다. 궁녀가 되는 10세 안팎의 소녀는 매우 가난하거나 특이한 사연이 있는 경우가 많았다. 10년마다 정기적으로 궁녀를 선발했고 공백이 생기면 수시 충원도 했다. 조상 중에 죄지은 자가 없을 것, 조상이나 가까운 친척 가운데 중병을 앓은 자가 없을 것 등이 자격 요건이었다. 처녀만 궁녀가 될 수 있었고 비과학적 '처녀 감별'이 행해졌다. 의녀가 앵무새 피를 소녀 팔뚝에 떨어뜨려 피가 묻으면 처녀, 안 묻고 흘러내리면 처녀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조선시대 왕과 왕비가 사용했던 매우틀(이동식 화장실). 현대의 좌변기와 비슷하다. /김영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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