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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의 역사, 개략 및 상고시대

월남의 역사, 개략 및 상고시대
파워boolingoo
2006.09.09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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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선사시대

50만년 전에 최초인간 거주했던 흔적이 있으며,

기원전 7000년경부터 원시농업 종사

기원전 13세기에 청동기시대의 세련된 동 썬 Dong Son 문화 출연

2. 중국지배

기원전 111년~ 938년까지 1천여년 동안 중국지배를 받음

679년 남비엣 Nam Viet으로 명명되었던 베트남의 이름을 중국이 안남(安南)으로 명명

3. 독립왕조시대

939년 응오꾸엔 Ngo Quyen 장군이 밧당 Bach Dang강 전투에서 중국군을 격파하고 베트남 최초의 응오(Ngo, 吳)왕조를 수립, 사상 처음으로 중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최초로 독립하게 된다. 965년 딘(Dinh, 丁)왕조 건립했으며 972년 딘 왕조는 국호를 다이 비엣 Dai Viet 정했고, 중국은 베트남의 독립을 인정하게 된다.

4. 구엔 왕조 및 프랑스 식민시대

1802년 구엔왕자는 그의 본거지인 후에 Hue 에 수도를 정하고 비엣남(越南)을 건국하고 지아롱황제가 된다. 1859년 프랑스군 사이공 점령 후 코친차이나 Cochin China 로 이름붙여 식민지화하였으며 1887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가 성립한다. 인도차이나는 베트남을 3개국 -코친차이나, 안남 Annam, 톤킨 Tonkin으로 분리하고 라오스, 크메르를 포함한 지역에 걸쳐 통치권을 확보한다.

1927년 베트남은 베트남 국민당 결성후 옌 바이 Yen Bay 봉기를 하지만 실패로 돌아갔으며

1930년에는 베트남 공산당 결성된다. 1941년 5월 호치민은 결성한 베트남 독립동맹 Viet Nam Doc Lap Dong Minh은 베트민(Viet Minh, 越盟)이란 명칭으로 알려진다.

1945년 9월 2일 호치민은 프랑스로 부터 독립을 선언 하고 임시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설립한다. 그후 1945년 연합군 베트남 진주, 1946년~1954년 항불전쟁(1차 인도차이나 전쟁), 1950년 베트남 민주공화국 성립 (동구권 국가들이 승인)이 성립되면서 남북부가 대치상황을 접어든다.

5. 대미 항쟁시대

1954년 제네바 협정으로 프랑스군은 철수하게 되고 북위 17도를 기점으로 베트남은 남북으로 분단된다.

1955년 남부에 미국지원하는 베트남 정부가 설립(초대 대통령 '응오 딘디엠') 되고,

북부에는 1960년 민족해방전선(NLF, 속칭 베트공)이 결성된다.

1964년 미국의 전쟁개입(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 투입병력 900만명, 투하폭탄은 760만톤), 1964년 9월 24일 한국군 참전(종전까지 군인 30만명, 근로자4만여명 투입),

1973년 1월 파리에서 평화협정 체결, 미군 철수 개시로 이어지는 베트남 전쟁이란 현대사의 아픔을 겪게된다.

6. 통일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시대

1975년 4월 30일 사이공이 함락되면서 베트남은 공산화 통일을 이루게 되고

1976년 4월 26일 남북통일 총선거를 실시해 1976년 7월 2일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The Socialist Republic of Vietnam이 수립된다.

1977년에 UN 가입을 가입했으나 1978년 10월 캄보디아 침공을 침공해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았으며,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에 반발한 중국은 1978년 02월 베트남과 교훈전쟁을 치루기도 한다.

1986년 도이 머이 (Doi Moi: 개혁) 정책 추진이 6차 전당대회에서 결정되고,

1990년 종전후 최초로 미국과의 공식대화 재개,

1991년 10월 캄보디아 평화협정 체결, 11월 중국과 관계 정상화 합의,

1992년 4월 신헌법채택, 12월 22일 한국과 수교,

1995년 7월 12일 미국과 수교, 7월 15일 ASEAN 가입,

1996년 제8차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총리, 총서기장 연임

1997년 판 반 카이(Phan Van Khai) 촐리 및 쩐 득 르엉(Tran Duc Luong) 대통령 취임

1998년 11월 APEC 가입 등 개방정책의 일환에서 적국들과의 관계개선을 통한 수교, 국제기구 가입등을 통한 외국자본의 유치 도모

2001년 4월 제 9차 전당대회에서 농 득 만(Nong Duc Manh) 총서기장 선출, 10개년(2001~2010) 경제 사회 안정과 벌천 전략 채택,

11월 미베트남 무역협정 발효

베트남의 역사는 기원전 2,000여년 전부터 청동기 문화가 발달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고고학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건국 신화에 의하면 베트남의 역사가 기원전 7세기부터 거슬러 올라가는데 최초의 부족 국가인 반랑(Văn Lang)국을 시작으로 어우락(Âu Lạc)국, 남비엣(Nam Việt-南越)국으로 이어지다가, B.C 111년 한(漢)무제 때에 남비엣국을 멸망시키고 7개군을 설치함으로써 중국에의 직·간접적인 지배가 시작되었다. 남비엣(Nam Việt)국을 베트남 국가로 보느냐 아니면 중국의 베트남 통치선 상에서 보느냐 하는 관점에 따라 연대의 조정이 필요하다. 이는 전적으로 사가들의 판단에 맡긴다.

300여년간 존속한 반랑(Văn Lang)국

퐁 쩌우(Phong Chau)에 다다른 어우 꺼(Âu Cơ)의 아들 50명은 맏형을 왕으로 선출하고 이로 하여금 베트남 최초의 국가인 반랑(Văn Lang)국을 다스리도록 하였다. 반랑국의 위치는 현 푸 토(Phu Tho)성(省)을 중심으로 한 퐁 쩌우(Phong Chau)지역으로서 그 영토가 어디까지 이르렀는지 명확치 않으나, 씩뀌(Xich Quy)국의 영토보다는 넓었으리라는 점에서 북으로는 중국의 광동, 광서 지방까지는 못미치고 남으로는 현 중부 베트남 이북으로 잡고 있다.

반랑국에는 총 18명의 왕이 다스렸고, 왕을 훙 브엉(Hung Vuong)이라고 했다. 훙(Hung)은 소수 민족인 므엉(Muong)족과 타이(Thai)족 등에서 쓰는 kun, khun 또는 khunzt 에서 유래하였거나 한문에서 유래된 것으로 연구되고 있으나, kun, khun, khunzt의 의미는 수령(Thu Linh), 우두머리(nguoi dung dau)의 뜻이고, 브엉(Vuong)은 왕의 형제들에게 붙이는 칭호다. 훙 브엉(Hung Vuong)은 당시 통치자에 붙이는 직명이었고, 베트남어 고어(古語)의 뜻에서 발음이 변천되어 훙(Hung)으로 정착된 것으로 보는 것이 좋겠다. 어떤 자료에는 B.C2879~B.C258년 까지 2622년간 반랑국이 존속했다고 하나, 18명의 왕이 2622년간을 다스린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맞지 않고, 기원은 확실치 않으나 B.C 257 년 어우락(Âu Lạc)에 병합될 때까지 약 300여년간 존속한 것으로 베트남 각급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다.

어우 꺼[Âu Cơ]

어우 꺼(Âu Cơ)는 베트남 신화상의 인물로 락 롱 꿘(Lạc Long Quân)의 부인이며, 락 비엣(Lạc Việt)의 시조이다. 전설에 의하면 어우 꺼(Âu Cơ)는 알을 낳았는 데, 부화하니 100명의 아들이 탄생하였다고 한다. 아들이 장성하자 이중 50명의 아들은 어우 꺼(Âu Cơ)가 데리고 산으로 갔고, 나머지는 아버지를 따라 평야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그 이후 장자들이 나라를 다스리고 호를 훙 브엉(Hùng Vương)이라하고 국호를 반랑(Văn Lang)이라 하였다.

락 롱 꿘[Lạc Long Quân]

락 롱 꿘(Lạc Long Quân)은 본명이 숭 람(Sùng Lãm)이며, 낀 쯔엉 브엉(Kinh Dương Vương)의 아들이다. 락 롱 꿘(Lạc Long Quân)은 씩 뀌(Xích Quỷ)국의 제 2대 왕으로 데 라이(Đế Lai)의 딸 어우 꺼(Âu Cơ)와 결혼하여 커다란 알을 낳았고 알이 부화하니, 100명의 아들이 탄생하였다고 한다. 락 롱 꿘(Lạc Long Quân)이 부인에게 이르기를 "나는 바다의 왕인 용의 후예요, 당신은 산신의 딸이니 오랫동안 같이 지낼 수는 없다. 그러니 당신은 50명의 아들을 데리고 산으로 가고 나는 나머지 50명의 아들을 데리고 남해(Nam Hải)바다로 가겠소." 그 후 락 롱 꿘(Lạc Long Quân)은 장자로 하여금 반랑(Văn Lang)국의 왕위를 잇게하니 바로 훙 브엉(Hùng Vương) 왕이요, 락 롱 꿘(Lạc Long Quân)은 베트남의 시조이다.

숭 람[Sùng Lãm]

숭 람(Sùng Lãm)은 베트남의 시조 락 롱 꿘(Lạc Long Quân)을 말한다. 그는 어우 꺼(Âu Cơ)와 결혼하여 100명의 아들을 낳았다.- 1개의 알이 부화하니 100명의 아들이 알에서 나왔다는 난생 신화- 락 롱 꿘(Lạc Long Quân)은 아들 50명을 데리고 바닷가 지역을 중심으로 생활하고, 어우 꺼(Âu Cơ)는 나머지 50명의 아들과 산으로 가서 살았다. 반 랑(Văn Lang)국을 세우고 장자로 하여금 반 랑(Văn Lang)국을 통치하도록 하니 이들이 훙 브엉(Hùng Vương)이다.훙 브엉(Hùng Vương)은 18대를 이으며 존속되었다. 음력 3월 6일은 락 롱 꿘(Lạc Long Quân) 기념일인데, 락 롱 꿘(Lạc Long Quân) 유적이 있는 하이 즈엉(Hải Dương)성, 빈 다(Bình Đà)제물은 통상 100개의 쌀 떡, 바나나, 바인 제오(Bánh dẻo)떡, 아들 100명을 위한 의자 100개를 준비한다.

50여년간 지속된 어우락(Au Lac)국

어우락(Au Lac)국은 B.C 257~B.C 207까지 단지 50년간 존속하였는데, 어우락국을 세운 안즈엉 브엉(An Duong Vuong ·安陽王)은 이름이 툭 판(Thuc Phan)으로 B.C 257년 반랑국을 정복한 후 어우락이라 하고 도읍을 꼬 로아(Co Loa·현 하노이 외곽 지역 소재)로 정하였다. 안 즈엉 브엉에 대한 상세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어우락국은 왕이 안 즈엉 브엉 1명으로 그쳤으며, 어우락국은 중국에서 진(秦)나라가 진시황 사후 혼란스러워지자 현재의 중국 광동성에 위치하고 있던 남하이(Nam Hai) 군수 념 히에우(Nham Hieu)는 진나라로부터 독립할 것을 계획했으나, 질병으로 이룰 수 없게 되자 휘하의 찌에우다(Trieu Da)에게 자신의 염원을 부탁하고 사망했다. 이에 찌에우다는 광동성과 광서성 일대를 중심으로 남 비엣(Nam Viet)을 세운 후에 자신을 왕으로 칭하고 B.C 207년에 어우 락(Au Lac)국을 정복하니 어우락국은 50여년간 지속되다가 남 비엣(Nam Viet)국에 망했다.

안 즈엉 브엉[An Dương Vương] 0 ~ -207

안 즈엉 브엉(An Dương Vương)의 본명은 툭 판(Thục Phán)으로, B.C 257년 부터 B.C 207년 까지 어우 락(Âu Lạc)국을 세우고 통치한 왕이다. 툭 판(Thục Phán)은 훙 브엉(Hùng Vương)에 구원이 있어 B.C 257년 군사를 이끌고 반 랑(Văn Lang)국을 치고 자신이 왕위에 올라 국호를 어우 락(Âu Lạc)국으로, 도읍을 퐁케(Phong Khê)-현 동안(Đông Anh)현-로 하였다. B.C 208년 남 하이(Nam Hải)의 찌에우 다(Triệu Đà)가 쓴 위장 화친술에 속아 나라를 빼앗기고, 모 자(Mộ Dạ)산으로 쫒기다가 바다에 투신 자결하였다. 응에 안(Nghệ An)성, 동 타인(Đông Thành)현, 모 자(Mộ Dạ)산 근처의 까오 아이(Cao Ái) 마을에는 안 즈엉 브엉(An Dương Vương) 사당이 있다. 과거 베트남공화국에서는 안 즈엉 브엉(An Dương Vương)을 베트남 역사상 최초의 견고한 꼬 로아(Cổ Loa) 성(城)을 건축한 치적을 기려 공병부대의 신으로 섬겨왔다.

베트남판 '로미오와 줄리엣' 남비엣(Nam Việt)국

찌에우다(Triệu Đà)는 중국 광동성과 광서성 일대를 중심으로 남비엣(Nam Việt)국을 세우고 스스로 왕이라 칭했다. B.C 207년에는 어우락(Âu Lạc)국을 침공하여 정복시켰다. 어우락국을 멸하기 위하여 찌에우다는 자신의 아들 쫑 투위(Trọng Thủy)를 안 즈엉 브엉(An Duơng Vương)의 딸 미 쩌우(Mỵ Châu)에게 정략 결혼 시켜 쫑투위로 하여금 어우락국의 정보를 수집케 하는 한편, 안 즈엉 브엉의 경계심을 풀게한 연후 급습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쫑 투위(Trọng Thủy)와 미 쩌우(Mỵ Châu)는 베트남판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비극적인 종말을 고한다. 우리나라의 '낙랑공주와 호동왕자'와 유사한 역을 하고 있는 '쫑 투위와 미 쩌우'가 이채롭다. 남비엣국은 5명의 왕이 재위했으며 B.C 111년 한(漢)무제의 공략으로 멸망했다. 일부 베트남 역사학자들은 찌에우다가 어우락국을 멸망시킨 해를 B.C 179년으로 보고 B.C 179년부터를 중국에의 북속기간으로 기산하고 있다. 이는 찌에우다가 중국 진(秦)나라의 관리였으며 진나라로부터 독립 남비엣국을 건설했을 뿐만 아니라, 북으로부터 베트남 영토내의 어우락을 멸망시켰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 문제에 대한 판단은 사가들에 맡긴다.

찌에우 다(Triệu Đà)는 B.C 207-111년 간 존속하였던 찌에우(Triệu)국을 개국한 왕이다. 찌에우 다(Triệu Đà)는 안 즈엉 브엉(An Dương Vương)을 축출하고 나서 B.C 196년 어우 락(Âu Lạc)을 병합하여 남 비엣(Nam Việt)국을 건국한 인물이다. 당시 왕도는 현재 중국의 꽝 쩌우 부근이었다. 당시 중국 진(Tần) 나라는 룩 지아(Lục Giả)를 보내 찌에우 부 브엉(Triệu Vũ Vương), 즉 무왕에 봉하였다. B.C 183년 한나라가 자국민으로 하여금 남 비엣(Nam Việt)국과 통상을 금하는 조치를 하자 찌에우 부 브엉(Triệu Vũ Vương)은 자칭 남 비엣 황제라 칭하고 더 이상 한나라에 복종하지 않았으며 현재의 중국 호남성을 취하니, 중국의 한 나라는 친히 군사를 이끌고 이를 토벌하게 된다. B.C181년 중국의 한 나라는 남 비엣(Nam Việt)국을 치나 실패를 하고 되돌아 가자 남 비엣국은 융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한나라 문제가 즉위하자 룩 지아(Lục Giả)로 하여금 다시 한 나라에 복종하라고 설득을 하니, 찌에우 다(Triệu Đà)는 황제의 칭호를 버리고 다시금 한 나라와 통교를 하게 된다. 찌에우 다(Triệu Đà)가 B.C 137년 사망하니 사가들은 그가 제위 70년에, 나이 121세로 장수하였다 한다. 뒤를 이어 손자가 왕위에 오르니 바로 찌에우 반 브엉(Triệu Văn Vương) 즉 문왕(文王)이다.

독립투쟁 활발한 북속기간(B.C 111~A.D 938)

중국의 지배기간은 한(漢) 무제의 남비엣(Nam Việt) 정벌로부터 A.D 938년 응오 꿴(Ngô Quyền)의 바익 당(Bạch Đằng)강 전투에서 승리 독립하기까지 약 11세기 간은 중국의 지배를 받는 북속기간으로서 그 기간중 한(漢)과 당(唐)나라는 베트남의 문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즉, 이 기간중 종교의 유입, 동양 철학적 사고 전개, 사회 경제적 발달, 중국식 관료제도 등등 사회 전방위로 중국의 영향은 지대했다. 한나라가 지배하던 시기에는 지방 - 나중에는 주(châu)- 밑에 태수(Thái thủ)가 다스리던 군(quận) 그 밑에 현(huyện)을 두었는데, 모두 중국에서 파견되어 온 중국 관리가 행정을 주도했다. 당나라가 지배하던 시기에는 안남도호부를 두고, 그 밑에 지방 관청으로 주(châu)와 현(huyện)을 두었다. 당나라가 안남도호부를 설치한 이래로 베트남을 안남(安南)이라고 부르게된 연유가 여기에 있다. 중국에의 북속기간중에는 수많은 독립투쟁이 전개 되었는데 주요 독립운동을 열거 하면 다음과 같다.

쯩(Trương)자매의 독립운동

A.D 40~43년 한(漢)의 광무제 때 지아오 찌(Giao Chỉ)군 쩌우 지엔(Châu Diên)현의 락장(Lạc Tường) 티삭(Thi Sách)을 살해하자 그의 부인 쯩짝(Trưng Trắc)이 쌍동이 동생 쯩니(Trưng Nhị)와 난을 일으켜 65개 성(城)을 함락하고 메린에 도읍을 정함과 동시에 국호를 찌에우(Triệu)로 하고 왕위에 올랐다. 중국의 마원(Mã Viên)장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는 베트남 최초의 중국지배에 대한 독립운동으로서 독립운동사의 기원을 이루고 있으며 하노이에는 두 자매의 사당(Đền Hai Bà), 그리고 선 떠이(Sơn Tây)성에는 핫 몬(Hát Môn)사당이 있어 쯩자매의 독립투쟁을 기리고 있다.

리 본(Lý Bổn)의 독립운동

541년은 지아오쩌우(Giao Châu)의 자사 띠에우 뜨(Tiểu Từ)가 폭정을 일삼자, 리본(Lý Bổn)은 지방토호들과 공모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여, 544년에는 자신을 남비엣의 황제라 칭하고 (즉, 리남데(Lý Nam Đế)를 말함), 연호를 티엔 득(Thiên Đức·天德), 국호를 반쑤언(Vạn Xuân·萬春)으로 하였으나, 양나라의 원정군과 대치 중 주민에 의해 암살되어(547년) 독립의 염원은 이루지 못했다.

마이 툭 로안(Mai Thúc Loan)의 독립운동

722년 마이 툭 로안(Mai Thúc Loan)은 당나라의 지배가 억압적이고 중국에서 파견돼온 관리들의 수탈이 심화되자, 현재의 하띤(Hà Tĩnh)성에서 독립투쟁을 시작으로 호안 쩌우(Hoàn Châu·현재의 응에안(Nghệ An)성)을 수복하고 자신을 흑제(黑帝-Mai Hắc Đế)로 칭했으나 당나라의 10만 대군의 원정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 난은 럼업(Lâm Ấp-Chămpa)와 쩐랍(Chân Lạp-Cambodia)까지 합세한 독립운동의 규모가 가장 컸던 독립투쟁운동으로 기록되고 있다.

보까이 다이 브엉(Bố Cái Đại Vương) 독립운동

782년 풍흥(Phụng Hưng)이 근처 지아오 찌(Giao Chỉ)에서 당나라 도호부 군사와 대항하여 독립운동을 일으켰는데, 풍흥과 동생 풍하이(Phụng Hải)는 힘이 장사며 의협심이 강하고 호걸로써 많은 주위 사람들이 그를 추종했다. 원래 드엉 럼(Dương Lâm)군-현재의 선 떠이(Sơn Tây)성-푹토(Phúc Thọ)현 출신으로 782년 군사를 일으켜 동향의 도 아인 한(Đồ Anh Han)의 도움으로 767년 현 하노이 근교에 건축된 라 타인(La Thành)성을 함락하고 자신을 도 꾸언(Đỗ Quân)이라 칭했으나 7년을 다스린후 사망하고 말았다(789년). 이에 뒤를 이은 아들 풍안(Phùng An)이 아버지인 풍흥을 민중의 지도자라는 뜻의 보 까이 다이 브엉(Bố Cái Đại Vương)으로 추증했고, 민중들은 그를 숭모해 사당을 건립했다. 풍안이 풍흥의 뒤를 이어 받은지 2년 뒤 당나라 조정은 당시 안남(安南) 문제 최고 전문가인 찌우 쓰엉(Triệu Xương)을 파견하여 난을 수습케하고 선정을 베풀어 민심을 수습했다.

하이 바 쯩[Hai Bà Trương] 14 ~ 43

하이 바 쯩은 베트남어의 둘을 의미하는 하이(Hai)와 Mrs를 의미하는 바(Bà)가 쯩씨 앞에 온 것으로 쯩짝(Trưng Trắc)과 쯩니(Trưng Nhị) 두 자매를 일컫는다. 두 자매는 쌍둥이로서 A.D 14년 8월 1일 현재의 하노이 서북쪽 빈푸성 퐁쩌우(Phong Châu) 현 메린 지방 꼬라이(Cô Lai) 마을에서 락장(Lạc tướng·고대 군사 조직의 우두머리)의 딸로 태어나 19세에 언니 쯩짝은 티 사익(Thi Sách)과 결혼했다. 당시 중국의 한무제는 B.C111년에 남 비엣(Nam Việt)을 멸망시키고 설치한 7군 중 3군을 현 베트남 영내에 설치해 사실상 식민통치를 시작했다. 당시 베트남을 지배하고 있던 한나라의 태수 또딘(Tô Định)이 쯩짝의 남편 티 사익(Thi Sách)을 살해하자, 쯩짝은 동생 쯩니와 함께 군사를 일으켜 또띤을 공격한다. 또띤이 한나라로 도망을 가고(A.D 40)쯩짝은 메린(퐁쩌우)에 도읍을 정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라 국호를 찌에우(Triệu)라 칭했다. 이에 한나라의 광무제는 마원(Mã Viện)에 군사 20,000을 보내(A.D 41) 쯩자매의 반란을 진압케 했는데, 쯩짝과 쯩니 군사는 한나라의 막강한 원정군과 고전 끝에 대패하여. 도피 중 (음력 2월 6일·쯩 자매의 죽음을 애도하여 민속 축제일로 하이바 쯩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홍강의 지류인 핫(Hat)강에 투신 자결했다(A.D 43). 이로써 쯩자매의 3년 천하는 막을 내렸으나, 쯩자매의 독립운동은 중국 한나라 지배에 대한 베트남인 최초의 대규모 조직적인 저항 운동이라는 커다란 역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한 오늘날까지 베트남인들에 의해 여걸로서 숭앙을 받고 있을 정도다. 이 쯩 자매의 독립 운동은 그 뒤 중국에서 파견되어 온 태수들의 악정과 수탈에 대한 지속적인 항쟁운동에 도화선으로 작용했다.

리 남 데[Lí Nam Đế] 500 ~ 548

리 남 데(Lí Nam Đế)는 퐁쩌우(Phong Chau·현 선 떠이성 지역)의 타이빈(Thái Bình)현 출신이다. 원래의 이름은 리 본(Lí Bổn) 혹은 리 비(Lí Bí)로 A.D 40~43년 사이 쯩(Trương)씨 자매의 대중국 독립 항쟁 이래 A.D 541년 최대 규모의 독립운동을 주도한 베트남 민족적 영웅으로 문무를 겸비했던 인물이다. 그는 중국 관리들의 학정과 약탈에 의분을 참지 못하고 군사를 일으켜 중국의 지배에 대항했다. 당시 중국에서는 502년 제 나라를 대신하여 양(梁) 나라가 건국되면서 양(梁) 나라 역시 베트남을 직접 통치하려 들자 베트남 토착민들의 불만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541년 리 남 데(Lí Nam Đế)는 쩌우 지엔(Châu Diên) 지방의 추장 찌에우 뚝(Triệu Túc)과 함께 자사 띠에우 뜨(Tieu Tu)를 공격하자, 양 나라로부터 파견되어 온 쟈오 쩌우(교주)의 자사 띠에우 뜨는 중국 꽝쩌우(廣州)로 도주했다. 양나라는 원정군을 파견해 이를 진압하고자 했으나, 군사들이 질병 등에 지쳐 쓰라린 패배를 맛보아야 했다. 544년 리 본은 자신을 남 비엣트(Nam Việt-남월)의 황제로 칭하고-리 남 데(李南帝)는 리씨라는 남 비엣트의 황제라는 의미를 갖고 있음- 국호를 반 쑤언(Văn Xuân·萬春), 연호를 티엔 득(Thiên Đức·天德)으로 정했다. 이렇게 되자, 545년 양(梁)나라는 즈엉 피엔(Dưuơg Phiên)를 태수로 하고, 쩐 바 띠엔(Trần Ba Tiên)을 사령관으로 해 공격을 단행했다. 중국 양(梁)나라 군사는 반 쑤언(Văn Xuân·萬春)국 군사와 대치했는데, 싸움에 패한 리 남데는 찌에우 뚝(Triệu Túc)의 아들 찌에우 꽝 푹(Triệu Quang Phục)에게 병권을 물려주고 548년 병사 하였다.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려는 리 본(Lí Bổn) 의 꿈은 사라졌지만, 베트남 사람들에게 자아의식과 독립 정신을 일깨워준 정신적 지주이자 민족적 영웅으로 오늘날까지 추앙받고 있다.

마이 툭 로안[Mai Thúc Loan] 0 ~ 0

마이 툭 로안(Mai Thúc Loan)은 당(唐)나라의 지배시기인 8세기에 당나라에 대항하여 의거를 주도한 민족 영웅으로 마이 학 데(Mai Hắc Đế)라고 칭한다. 기록에 의하면 마이 툭 로안(Mai Thúc Loan)은 얼굴이 검고 못생겼으나 신체가 건장하고 힘이 장사였다고 한다. 응에 안(Nghệ An)성, 남단(Nam Đàn- 호찌민 주석 鄕里) 소재 베 선(Vệ Sơn)산을 근거로 하여 對당나라 지배에 항거하는 의병을 조직 항거하였다. 722년 자신을 황제라 칭하고, 마이 학 데(Mai Hắc Đế-얼굴이 검어 黑帝라는 뜻)라 하였다. 당나라의 위협에 대항하기 위하여 성(城)을 쌓고, 진지를 구축하고 병마를 양성하여전투에 대비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럼업(Lâm Ấp)및 쩐랍(Chân Lạp)과 선린 우호 관계를 구축하였다. 당(唐)나라 조정에서 이를 토벌하기 위하여 군사를 보내자 세력이 약했던 마이 툭 로안(Mai Thúc Loan)은 돈 선(Độn Sơn)산으로 퇴각하였고 얼마후 사망하였다. 현재 베 선(Vệ Sơn)산에는 당시 구축하였던 성(城)과 항전 유적지가 있고 남단(Nam Đàn)에는 마이 학 데(Mai Hắc Đế)이 있다.

티 사익[Thi Sách] 0 ~ 39

티 사익(Thi Sách)은 하이 바 쯩(Hai Bà Trưng) 가운데 언니인 쯩짝(Trưng Trắc)의 남편이다. 20세때에 결혼한 이들은 양가 집안이 모두 부유하였고 애국자 집안의 자녀들이었다. 불행하게도 나라을 중국의 한(漢)나라에 빼앗겨 한나라의 통치에 대항하는 의병 운동을 일으켰고 한나라는 또딘(Tô Định)을 교지군 태수로 봉하고 새로 부임한 태수는 베트님민을 가혹하게 다루자 티삭이 시정을 요구하자 또딘(Tô Định)은 티 사익(Thi Sách)을 살해하였고 이에 부인 쯩짝(Trưng Trắc)은 여동생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베트남 민족 정신을 일깨워주는 역사적인 사건을 주도하게 된다. 한나라가 통치하던 시기 교지(Giao Chỉ)郡, 쭈 지엔(Chu Diên)현 태생이다.

쿡 트어 주[Khúc Thừa Dụ] 0 ~ 907

쿡 트어 주(Khúc Thừa Dụ)는 북속 시대 말기(중국 당나라 말기) 홍 쩌우(Hồng Châu-현 Hải Dương)에서 출생하였고, 당나라 말기 안사의 난 황소의 난으로 베트남 통치력이 약화되자 국민들에 의하여 쟈오 쩌우(Giao Châu)를 통치하도록 추대되어 절도사의 위치에 올랐고 906년에는 쇠약해진 당나라로 부터 절도사(Tiết Độ Sứ)로 정식 임명받았다. 이로 부터 사망하기까지 약 1년간 베트남은 쿡 트어 주(Khúc Thừa Dụ)에 의한 자치 형태로 유지 되었다. 한편, 중국에서는 907년 당나라가 망하고 5조 시대(907-960)가 시작되고 918년에는 남한(南漢)이 건국되어 베트남을 직접 통치하고자 930년 원정군을 파견하자 쿡 트어 주(Khúc Thừa Dụ)의 베트남 지배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쿡 트어 주(Khúc Thừa Dụ) 본래 성품이 관대하고 인정이 많아 많은 사람들로 부터 존경을 받았다. 907년 사망하자 아들 쿡 하오(KHúc Hạo)에게 절도사 직을 넘겨주었고 917년에는 쿡 하오(KHúc Hạo)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쿡 허우 쩌우(Khúc Hậu Châu)가 권력을 잡았다. 그는 남한(南漢)에 굴복하는 것을 참지 못해 중국 양(梁)의 절도사로 임명받았다. 이에 남한(南漢)은 923년 원정군을 파견하여 쿡 허우 쩌우(Khúc Hậu Châu)를 중국으로 잡아감으로 쿡씨 일가에 의한 베트남 통치는 완전히 끝이 나게 되었다. 사가들은 쿡 트어 주(Khúc Thừa Dụ)를 선주(先主), 쿡 하오(KHúc Hạo)를 중주(中主), 쿡 허우 쩌우(Khúc Hậu Châu)를 후주(後主)로 부른다. 이들 쿡씨 일가에 의한 종말을 고하면서 베트남은 938년 응오 꾸엔이 응오(Ngô)왕조를 세울때까지 다시금 중국 남한(南漢)의 지배를 받게 된다.

밧 난[Bát Nạn] 17 ~ 43

밧 난(Bát Nạn)은 밧 난(Bát Nàn), 밧 나오(Bát Não)공주로 쯩(Trưng) 자매의 독립 운동 봉기할 때의 여장군이다. 전설에 의하면 밧 난(Bát Nạn) 공주는 프엉 러우(Phương Lâu) 의 호장 보 꽁 쩟(Võ Công Chất)과 호앙 티 머우(Hoàng Thị Mầu)의 딸로 재색이 뛰어났다고 한다. 출생시 이름은 툭(Thục)으로 툭(Thục) 낭자로 불리었고, 남편은 팜 자인 흐엉(Phạm Danh Hương)으로 두 부부 모두 애국 애민 정신이 대단하였다. 39년 쯩짝의 남편 당 티 사익(Đặng Thi Sách)이 쩌우 지엔(Châu Diên)에서 또딘(Tô Định)태수에 의해 살해되었을 때, 밧 난(Bát Nạn) 공주의 남편 팜 자인 흐엉(Phạm Danh Hương) 역시 반역의 기질이 있다고 하여 주엔 하(Duyên Hà)에서 살해되었다. 이에, 남편의 복수를 결심하고 칼을 들고 준비할 때에 쯩 자매가 40년 봉기하자 같이 힘을 합하여 전투에 참가하고 독립 운동은 성공하여 쯩짝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 쯩(Trưng) 왕은 밧 난(Bát Nạn)를 대장군에 봉하였으나 사양하고 대신 적군의 수급을 달라고 하여, 적의 수급을 놓고 남편의 제사를 1주일이나 지내 원수를 갚았다. 중국의 마 비엔(Mã Viện)장군이 이를 진압하러 군사를 이끌고 오자 끝까지 저항하다가 쯩 자매가 43년 2월 6일 핫강에 투신하여 자결하자, 그녀 역시 43년 3월 16일 자결하였다. 후대에 각 조정에서는 밧 난(Bát Nạn)신으로 사당에 모셔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

레 쩐[Lê Chân] 0 ~ 41

레 쩐(Lê Chân)은 쯩(Trưng)왕 시대의 여걸로 친부가 태수 또 딘(Tô Định)에 의하여 살해 당하자 집안의 원수를 갚아 국가에 은혜를 갚고자 40년 쯩(Trưng) 자매의 봉기에 적극 참여하였다. 전투마다 선봉장으로 참여하였고 용감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쯩(Trưng)왕은 레 쩐(Lê Chân) 여장군에게 국방을 맡기었고, 레 쩐(Lê Chân)은 무과 시험을 보아 군사를 양성하고 무술 대회를 2-3일씩 연달아 개최하기도 하였다. 41년 한(漢) 광무제 때, 마 비엔(Mã Viện) 장군을 시켜 침공을 해오자 격렬한 전투 끝에 마이 동(Mai Động) 마을에서 전사하고 만다. 후대에 주민들이 사당을 짓고 위패를 모시고 매년 정월 3,4,5,6일이 되면 추모제를 올린다.

쿡 하오[Khúc Hạo] 0 ~ 917

쿡 하오(Khúc Hạo)는 부친 쿡 트어 주(Khúc Thừa Dụ)의 뒤를 이어 북속시대인 907년 절도사로 임명받아 중국을 위한 치국이 아니라 베트남민을 위해 통치한 장군이다. 절도사로 재임중 아들 쿡 트어 미(Khúc Thừa Mĩ)를 중국 후(後) 양나라에 사신으로 파견, 화친을 도모함과 적정을 살펴오도록 하였고, 특히 그는 자기 휘하의 신하들에 대한 용인술에 뛰어 났다. 그래서 그의 치세 기간중 국내 정치도 안정되었고, 중국의 후(後) 양나라와의 외교 관계도 원만하여 태평시대를 구가 하였다. 917년 사망하자 아들 쿡 트어 미(Khúc Thừa Mĩ)가 뒤를 이어 통치하였다.

쿡 트어 미[Khúc Thừa Mĩ] 0 ~ 0

쿡 트어 미(Khúc Thừa Mĩ)는 할아버지 쿡 트어 주(Khúc Thừa Dụ), 아버지 쿡 하오(Khúc Hạo)에 이어 917년 부터 절도사를 지낸 사람이다. 부친 만큼 통치력은 없었으나 결단성은 있었다. 923년 남한(南漢)이 리 칵 찐(Lý Khắc Chính)장군으로 하여금 베트남을 침공 다시금 자신들의 수중에 넣으려 군사를 파견하자 크게 대항치 못하고 절도사 쿡 트어 미(Khúc Thừa Mĩ)는 남한(南漢)으로 잡혀가게 되었고, 그 이후 베트남은 931년 쿡 하오(Khúc Hạo)의 부하였던 즈엉 지엔 응에(Dương Diên Nghệ)가 거병할 때까지 남한(南漢)이 파견한 관리 리 칵 찐(Lý Khắc Chính)장군, 리 띠엔(Lý Tiến)등의 통치를 받게 된다. 사가들은 쿡 트어 미(Khúc Thừa Mĩ)를 쿡 後主, 아버지 쿡 하오(Khúc Hạo)를 쿡 中主, 할아버지 쿡 트어 주(Khúc Thừa Dụ)를 쿡 前主라 부른다.

안 빈 리[An Bình Lí] 0 ~ 43

안 빈 리(An Bình Lí)는 쯩(Trưng)왕 시대의 열사이다. 안 빈 리(An Bình Lí)는 땀 즈엉(Tam Dương) 지방을 다스리던 지방 관헌의 아들로 출생년도, 출생지 미상이며 담 느엉(Đạm Nương), 홍 느엉(Hồng Nương), 타인 느엉(Thanh Nương) 3명의 누님이 있었는 데, 모두 베트남 민족의 여걸로 칭송받고 있다. 안 빈 리(An Bình Lí)는 밤이면 누님들과 함께 군사 훈련을 하며 호걸들과 교류하면서 항쟁 의거에 대비할 인재를 선발하였다. 하이 바 쯩(Hai Bà Trương)이 독립 항쟁의 선봉에 서자 3명의 누님과 안 빈 리(An Bình Lí)는 타인 티엔(Thánh Thiên), 레 쩐(Lê Chân), 밧 난(Bát Nạn)의 의병장 군사와 함께 총공격에 합류하였다. 중국 한(漢)나라 태수 또 딘(Tô Định)을 몰아내고 독립을 회복하자, 쯩(Trưng)왕은 담 느엉(Đạm Nương)을 따 다오(Tả Đạo)장군에 봉하고, 안 빈 리(An Bình Lí)는 땀 즈엉(Tam Dương) 지방과 꿧 르우(Quất Lưu) 지방 수비를 책임지는 중책을 맡겼다. 한편 한(漢)나라 광무제가 파견한 마 비엔(Mã Viện) 장군의 공격으로 A.D 43년 11월 11일 홍 느엉(Hồng Nương), 타인 느엉(Thanh Nương)은 순국하고 안 빈 리(An Bình Lí) 마저 전사하였다. 그날 밤 맏누이인 담 느엉(Đạm Nương) 역시 자살하였으니 4남매 모두 자신의 조국을 위하여 몸을 바친 애국자 들이었다. 4남매의 열사와 뚜언 꽁(Tuấn) Công)은 빈 푸(Vĩnh Phú)성, 꿧 르우(Quất Lưu)에 있는 사당에 모셔져 있다.

즈엉 지엔 응에[Dương Diên Nghệ] 0 ~ 937

즈엉 지엔 응에(Dương Diên Nghệ)의 이름은 어떤 사료에는 즈엉 딘 응에(Dương Đình Nghệ)로 되어 있기도 하다. 출생 연도는 미상이며 쿡 트어 하오(Khúc Thừa Hạo)의 충직한 부하 장수였다. 쿡 트어 하오(Khúc Thừa Hạo)가 917년 사망하자 그의 아들 쿡 트어 미(Khúc Thừa Mĩ)를 도와 나라를 다스리는 데 전력을 다하였다. 923년 중국 남한(南漢)의 군사가 침입하여 쿡 트어 미(Khúc Thừa Mĩ)가 포로로 잡히자 호걸들을 모아 주군의 원수를 갚으려 최선을 다하였다. 931년 리 칵 찐(Lí Khắc Chính)태수와 리 띠엔(Lí Tiên)의 군사를 패퇴시키자, 남한은 쩐 바오(Trần Bảo)로 하여금 군사를 지휘케하여 또 다시 침공해오자 즈엉 지엔 응에(Dương Diên Nghệ)는 적군을 당당히 맞이하여 쩐 바오(Trần Bảo)의 목을 베었다. 그 전공으로 국민들은 그를 신봉하고 존경하여 절도사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는 부하 응오 꾸엔(Ngô Quyền)을 신임하여 사위로 삼고 아이 쩌우(Ái Châu)지역을 맡긴다. 한편, 절도사에 오른지 6년이 지난 어느 날 밤 즈엉 지엔 응에(Dương Diên Nghệ)는 부하 끼에우 꽁 띠엔(Kiều Công Tiễn)의 배반으로 암살 당하게 되자 사위인 응오 꾸엔(Ngô Quyền)이 즉시 군사를 이끌고 끼에우 꽁 띠엔(Kiều Công Tiễn)을 잡아 처형하고 베트남 최초의 독립 왕조인 응오(Ngô)나라를 건국하게 된다. 즈엉 지엔 응에(Dương Diên Nghệ)는 리(Lý) 왕조 시대의 찌에우 꽝 푹(Triệu Quang Phục)에 버금가는 장수중의 장수였다.

찌에우 꽝 푹[Triệu Quang Phục] 0 ~ 571

찌에우 꽝 푹(Triệu Quang Phục)은 전(前) 리(Lí)조 시대의 명장이다. 빈 푸(Vinh Phú)출신으로 541년 부친 찌에우 뚝(Triệu Túc)을 따라 리 본(Lí Bôn=Lí Nam Đế)을 도와 중국 양나라 군사를 무리친 장군으로, 544년 리 본(Lí Bôn)은 황제에 오르자 그의 전공을 참작 찌에우 꽝 푹(Triệu Quang Phục)를 따 뜨엉 꿘(Tả Tướng Quân-현 군총사령관격)에 봉하였다. 545년 양 나라 무제는 쩐 바 띠엔(Trần Bá Tiên) 장군으로 하여금 군사를 지휘케하여 침공해 오자, 찌에우 꽝 푹(Triệu Quang Phục) 장군은 이를 격퇴시켜 자 짝(Dạ Trạch)왕 칭호를 받았다. 548년 리 남 제(Lí Nam Đế)가 서거하자 찌에우 꽝 푹(Triệu Quang Phục)이 군권을 받아 계속하여 중국의 양 나라와 결전을 벌여 나라를 구하고 자칭 비엣 브엉(Việt Vương-越王)이라 칭하였다. 이때 리 티엔 브우(Lí Thiên Bửu), 리 펏 뜨(Lí Phật Tử) 도 배반하여 리 티엔 브우(Lí Thiên Bửu)는 자신을 다오 랑 브엉(Đào Lang Vương)이라는 왕으로 칭하게 된다. 551년 중국의 정변으로 쩐 바 띠엔(Trần Bá Tiên) 장군이 귀국하자 그 틈을 이용 롱 비엔(Long Biên- 현 하노이)성을 수복하니 위협을 느낀 리 티엔 브우(Lí Thiên Bửu)와 리 펏 뜨(Lí Phật Tử)는 서로 손을 잡게 된다. 555년 리 티엔 브우(Lí Thiên Bửu)가 죽자 리 펏 뜨(Lí Phật Tử)가 권력을 잡고 찌에우 꽝 푹(Triệu Quang Phục)왕에게 적대감을 표시하니 리 남 제(Lí Nam Đế) 휘하의 같은 부하였음을 생각 화해를 하고 찌에우 꽝 푹(Triệu Quang Phục)은 롱 비엔(Long Biên- 현 하노이)성을, 리 펏 뜨(Lí Phật Tử)는 하 동(Hà Đông) 지역을 중심으로 관할하는 것으로 합의를 맺게된다. 또한, 찌에우 꽝 푹(Triệu Quang Phục)은 화해의 표시로 딸을 리 펏 뜨(Lí Phật Tử)에게 시집 보낸다. 571년 리 펏 뜨(Lí Phật Tử)가 롱 비엔(Long Biên)을 치자 찌에우 꽝 푹(Triệu Quang Phục)은 대적치 아니하고 남 딘(Nam Định)에 있는 다이 냐(Đại Nha)강까지 도망하여 강에 투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남 딘(Nam Định)에는 그의 사당이 세워져 있다. 찌에우 꽝 푹(Triệu Quang Phục)은 용감하고 통이 큰 구국 영웅이었으나 배반을 당해 꿈을 다 못이룬 비운의 인물이다

베트남 역사-월남 민족의 저력

파워boolingoo
2007.04.29 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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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역사

1939년 제 2차 세계대전 발발과 유럽에서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하면서 1940년 6월 일본의 세력이 인도차이나로 미치기 시작했다. 이때 일본은 중국 중경(重慶)으로의 물자 반입을 막기 위한 중국과 베트남 간의 국경 폐쇄와 이를 감시하기 위한 감시단의 입국을 요구하였고 8월에는 일본군의 진주와 비행장 이용을 요구하면서 서서히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일본의 등장으로 베트남의 민족주의 세력과 인도차이나 공산당 세력은 일본의 세를 이용하여 프랑스 세력을 몰아내기 위하여 노력했다. 그리고 인도차이나 공산당 남부위원회는 1940년 11월 22일에 무력 폭동을 일으켰는데 이것을 남끼 커이 응이어(Nam Ky Khoi Nghia)라고 한다. 이때 처음으로 응웬 흐으우 띠엔(Nguyen Huu Tien)이 고안한 황성적기(黃星赤旗)가 사이공 일원에 나부끼었으며 프랑스는 이 무력 폭동을 잔혹하게 진압하여 8,000여명이 체포되고 100여명이 처형되었다. 1941년 5월에는 호찌민의 주재하에 개최된 제8차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베트남 독립연맹(Viet Nam doc Lap Lien Minh)이 결성되었는데 이를 비엣 민(Viet Minh·越盟)이라고 부는다. 우리가 월남과 구분하여 북부베트남을 월맹이라고 불렀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비엣민은 프랑스 식민정부와 일본을 공동의 적으로 하여 투쟁하여 나갔는데, 제2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렀던 1945년 3월 9일에는 베트남에서 일본은 무력으로 프랑스를 굴복시키고 일본군 사령관에 의한 군정을 실시 하였다. 1945년 8월 6일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원폭을 투하하고 구소련이 일본이 선전포고를 한다. 인도차이나 공산당은 총봉기를 격의하고 1945년 8월 19일에는 하노이를 장악, 1945년 8월 25일에는 사이공까지 공산당 통제하에 들어가게 되니 이를 8월 혁명(까익 망 탕 땀·Cach Mang Thang 8)이라고 한다. 8월 30일에는 응웬 왕조의 마지막 왕인 바오 다이(Bao Dai)왕이 권력의 상징인 황금의 보검을 비엣민 대표에게 넘겨줌으로써 143년의 응웬 왕조 역사는 종언을 고한다. 3일 후인 1945년 9월 2일 호찌민은 하노이 바딘 광장에서 자신이 직접 작성한 독립선언문을 낭독함으로써 베트남 민주 공화국이 탄생하게 된다.

출처
[타인글이나 자료 인용] http://worldnet.kbs.co.kr/vietnam/learn/learn1/main6.htm

도올의 남월(南越) | 월남

구룡초부 2011.11.03 16:07

도올 EBS 중용 강의 11 01일자 10장 자로문강(子路問强) 편에

남방지강(南方之强) 북방지강(北方之强) 이야기가 나온다.

(원문) 子路問强. 子曰: 南方之强與? 北方之强與? 抑而强與?

寬柔以敎, 不報無道, 南方之强也, 君子居之….운운

이 대목에서 도올은 남방, 남월(南越) 하다가 월남까지 건드리고 있다.

다시 도올의 중용 책을 들쳐보니 남방을 광동성 지역으로 비정하고 있다.

중용에 나오는 남방이 어디던, 원문 해석과 별 관계는 없다.

또 중국 고대 인문 지리가 도올 선생(?)의 관심사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는 관심이 있는 터라 이에 몇 마디 붙여 본다.

곧 나의 딴지는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 knowledge)의 영역이지,

도올 선생(?)이 애타게 전하고자 하는 지(:wisdom)는 아니라는 뜻이다.

선생 뒤에 물음표를 넣은 것은 난 어쩐지 선생 소리가 잘 나오지 않아 그렇다.

자로문강(子路問强) 편은 공자 말씀 인용(도올 표현 로기온) 부분인데

공자와 그의 손자이며 중용의 저자인 자사(子思) 당시,

북방은 중국 문명의 발상지 곧 황하 유역임이 틀림없고,

남방은 그 때 중국인의 지리적 지식으로 볼 때 양자강 유역이지

그 보다 더 남쪽이 될 수는 없다.

중국 고대의 월()

만물은 유전(流轉)한다? 누군가가 한 말 같고….

지명(地名)이나 부족, 종족 이름은 고정 불변이 아니다.

공자 당시 지명이나 부족 명은 후대의 그것과 다를 수 있다.

중국 고대사에서 ()은 시대가 내려가면서 확대되고

자꾸 남쪽으로 내려가는 경향이 있다.

공자와 자사(子思)가 살던 때-중국사에서 춘추시대라 부르는 시절,

()은 오늘날 상해 남쪽 절강성 일대, 그 살짝 북쪽이 ()였다가

부차(夫差)와 구천(句踐) (공자의 제자 자공 시대) ()에 합병된다.

지도: 중국 전국시대

지금 상해에 한국인들이 몰려 사는 거리 이름이 오중로(吳中路) 인데,

득히 오()나라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연고가 있는 이름이다.

그뒤 한족의 활동 무대가 확대됨에 따라,

양자강에서 더 남쪽 민강 연안 오늘 날 복건성 일대 부족을 민월(),

(민은 +벌레 충, 오늘 날 복건성(福建省)의 별칭이 이다)

다시 민-복건에서 더 남쪽-광동성 일대 부족을 남월(南越)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한동안 중원(中原)-황하 유역 사람들은 남방의 일을 잘 몰랐다.

다만 월() 비슷한 부족들이 여럿 얽혀 사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단일 정권은 아닌 듯 하여 뭉뚱그려 백월(百越)이라고 하였다.

백월(百越) 이라는 말 자체가 월() 비슷한 애들이 무지 많다는 뜻 아닌가

민월, 남월, 백월 등은 다 공자와 자사(子思) 시대로부터 한참 뒤에

붙은 호칭이니, 중용(中庸) 10자로문강(子路問强) 편의

남방이 광동이나 월남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다

남월(南越) 왕국

춘추 전국이 끝나고 진()나라는 (*)오령(五嶺)을 넘어 광동성 일대를

정벌하여, 군현(郡縣)-남해(南海), 계림(桂林), ()3 ()을 설치하고

원정했던 장군들을 현지 수령에 임명한다.

(*)중국 본부에서 광동을 가자면 반드시 오령(五嶺)산맥을 넘어야 한다.

따라서 중국에서는 광동성을 영남(嶺南)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어 진 제국(秦帝國)이 어지럽게 되자, 진의 장군으로 갔다가

남해군 용천현령(龍川縣令)을 지내고 있던 조타 (趙陀)가 독립하는데,

나라 이름을 남월(南越)이라 한다. 그 수도(首都) 번우(番禹)가 오늘 날 광주다.

지도: 南越

남월(南越)의 강역(疆域)에 베트남 북부 일부가 들어가긴 하지만

중심부는 광동성이지 베트남이 아니다.

이 남월 왕국의 왕실은 한족(漢族)이지만, 그 이하는 현지 월인(越人)들이고,

그 시대나 생성이나 멸망에 이르는 과정이, 한국사에서 위만 조선과 똑 닮아

대단히 흥미롭다.

사진은 광동 광주에서 기아 차 본 김에 찍은 것인데,

왼쪽 한자가 잘 못 보던 글자일 것이다.

() 비슷하지만 다른 글자로, ()과 같은-이형동자(異形同字).

현재 중국 광동성의 약칭이 인 것이다.

그렇게 많은 한국 사람들이 광동성을 들락거려도

광동성 차 번호판의 글자가 이라는 데 관심 가진 이는 거의 없는 듯 하다.

남월(南越)왕국은 시조 조타 (趙陀) 이래

내부적으로는 칭제(稱帝), 대 중국 외교상으로는 칭신(稱臣)하며 번영하다가,

BC 111년 한무제-위만 조선을 멸망시키고 한 사군을 설치한 그 한무제

(漢武帝)가 보낸 군대에 의해 92년 만에 멸망한다.

월남사(越南史)인가? 중국사(中國史)인가?

이 남월(南越)의 강역(疆域)은 오늘 날 베트남 북부까지 걸쳐 있었던 바,

그러면 남월의 역사를 중국사로 볼 것이냐? 월남사에 넣을 것이냐?

생각해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지금은 대체로 남월의 역사를 중국사의 일부로 본다.

여기서 우리 고조선의 역사로 돌아 가 보자.

고조선의 중심지가 대동강 유역이 아니라

만주 또는 심지어 북경 일대까지 하여튼 한반도를 벗어난

중국 땅에 가져다 놓고 싶어 안달인 사람들이 많다.

거 뭐 고고학적 증거도 아니고 앞뒤도 좀 안 맞는 거 같다 하면,

이 식민 사관에 찌들은.. 하며, 혼자 가장 민족 내지 애국 사관인 양 한다.

(음 신라가 중국 북부에 있었다는 사람도 있다)

다좋다.

다 좋고, 그런데 고조선이 중국 북부에 있었다 치자.

그럼 그 역사가 중국의 역사로 그만 흡수되지 않았을까?

또 중국인들로서는 당연히 흡수해 마땅하지 않을까?

그 옛날 남월의 구성 분자가 중국의 월인 이던 현 베트남인 이던
그 강역의 중심부가 현재 광동성 인데, 중국인들로서 그 역사를

어찌 자국사에 넣지 않을 수가 있을까?

흥분하기 앞서, 이것 저것 두루두루 살펴 볼 일이다.

형편이야 어때도 고고학적 증거가 그렇다면, 그건 받아 들여야 하고.

() 월남과 남만

삼국지에 나오는 남만(南蠻)을 월남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아니다.

제갈량은 서기 225 3월에 성도(成都)를 떠나 5월에 노수(瀘水)를 건넌다

노수(瀘水)는 지금 금사강(金沙江)으로 곧 살윈강 상류다.

영화 콰이강의 다리의 콰이강은 살윈강의 일부다.

제갈량은 12월에 성도로 돌아 온다.

노수-성도 노정 2달을 빼면 원정에서 노수까지 되돌아 온 것은 10월이고,

5월에 그 강을 건너 갔으니 남만에서 머문 기간은 최대 다섯 달이다.

영화 콰이강의 다리에서 보듯, 살윈강 일대는 빽빽한 밀림지대다.

당시 도로 사정과 그 자연 환경으로 볼 때 사천성에서 월남까지,

그것도 대군을 거느리고 5개월에 왕복한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다.

제갈량의 남만 정벌이란 지금 운남성과 버마 일대에서 좀 놀다(?) 온 것이며

맹획을 일곱 번 놓아주고 일곱 번 다시 잡는 칠종칠금(七縱七擒)은 후대 창작이다.

월남과 한자(漢字) | 월남

구룡초부 2011.11.14 11:04

회사 일로 월남에 왔다.

예정은 한 달 가량이나 더 있어야 할 지도 모르겠다.

지금 머무는 곳은 메콩 델타 한 가운데 있는 작은 공단이다.

해 저물면 닭 울고 개 짖는 소리만 들릴 뿐 사위(四圍)가 괴괴한데,

불 꺼진 들판, 밤하늘엔 손에 잡힐 듯한 별들로 가득하다.

주위에 작은 도시가 있으나 특별히 볼거리는 없다.

환락이 있는 호찌민까지는 차로 세 시간이 걸리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아직 인터넷이 연결되지 않은 숙소 내 방에서

그저 책이나 읽다가 이따금 노트북 자판을 두드릴 뿐이다.

손에 든 책은 월남 역사책인데, 읽을 수록 우리나라 역사와 비슷하나,

닮은 듯 하면서도 다른 면도 많다. 이에 몇 차례에 걸쳐 느낀 점 써 보고자 한다.

한자(漢字)

베트남 어() 표기는 로마자-알파벳으로 한다.

따라서 간판보고 최소한 읽을 수는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지만,

읽더라도 월남 현지 발음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우리 멋대로 인 것이다.

또 읽더라도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는 없다는 문제에 부딪친다.

베트남 말은 성조(聲調)가 여섯 개나 되어 구분이 잘 되지 않고,

(월남 사람에게는 정겹게 들릴 테지만) 내 귀에는 매우 거북하다.

월남 역사를 읽다 보면 가장 헷갈리는 것이 이름이다.

누가 어디에서 뭘 했다는데 다 그 놈이 그 놈 같고

거기가 거기 같아 도무지 머리에 남지를 않는다.

그거 기억해서 뭐 하는데? 고 물으면 할 말은 없지만.

그러나 그 이름들 뒤에 있는 한자(漢字)를 새기면 이야기가 달라 진다.

끄으롱 강

월남인 들은 메콩 강을 끄으롱(Cuu Long) 강이라고 한다.

회사 이름에 끄우롱이 들어간 경우도 많다.

끄으롱 (Cuu Long) 만 들으면 갑갑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구룡(九龍)이라는 것을 알면 기억하기 수월하다.

티베트에서 발원한 메콩 강은 중국, 라오스, 캄보디아를 거쳐 바다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남부 월남 델타 지역을 지나면서 (전장 4,180 km 중 월남 구간 220km)

9개의 지류를 이루기에 구룡(九龍)-끄우롱 강이라 불리는 것이다.

왕 이름

타이또, 타이똥, 타잉똥 등의 왕 이름을 들을 때는,

이거 시방 된장 공장 장 공장장 하자는 것인가?

웬 똥은 그리 많으며, ‘타이또타이똥은 어찌 다르고,

타이똥있으면 되었지, ‘타잉똥은 또 왜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게 태조(太祖), 태종(太宗), 성종(聖宗)이란 걸 아는 순간 웃었다.

월남의 왕조들도 중국식 묘호(廟號)를 붙였던 바,

왕조를 개창하면 태조(太祖) 타이또,

창업을 이어 받아 반석 위에 올려 놓은 인물은 태종(太宗) ‘타이똥이다.

타잉똥-성종(聖宗)은 리(Ly, ) 왕조의 3대 임금으로 2대 타이똥(太宗)의 아들이다.

(*)(Ly, )왕조, 1010-1225; 왕조가 망할 때 왕자 중 하나가 바다로 도망했는데,

우리나라까지 표류해 들어 와 화산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나 월남 사서(史書)에는 나오지 않고, 화산 이씨 집안 전승(傳乘)이다.

다른 왕들의 묘호도 다 중국 식 시법(諡法)에 따라 좋은 글자 골라 지었으니

한자로 적으면 우리에게 대단히 익숙한 이름들이다.

년똥, 턴똥, 까오똥, 밍똥, 히엔똥, 아잉똥, 주에똥, 뚝똥 을 들으면 머리 아프지만,

仁宗, 神宗, 高宗, 明宗, 憲宗, 英宗, 睿宗, 肅宗 이라면 많이 들어 보지 않았겠는가?

우리 역사에서 인조(仁祖)가 실은 별로 인자하지 않았듯이,

월남의 년똥(仁宗) 들도 그다지 어질지는 않았다.

(*) 우리 조선조의 인조가 죽고 나서 묘호 정할 때,

처음에 매울 열()자를 써서 烈祖로 하자는 의론이 있었다.

월남 역사에는 왕조가 꽤 여럿인데, 년똥(仁宗)이 있는 왕조는 셋이나 된다.

그러고 보니 조선조에는 인종이 있고 또 인조가 있다.

우리 역사에서 역대 왕들이 조()니 종()이니 하는

묘호(廟號) 붙인 것을 놓고, 대 중국 사대(事大)는 했지만

그건 힘이 약해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안으로는 자존(自尊)했다!

뭐 이런 이야기들 하면서 은근히 과시 내지 자위 하려는 경향이 있는바

월남도 그 사정은 비슷한 듯 하다. 그 부분 따로 장을 잡기로 한다.

월남 성씨(姓氏)

월남에는 Nguyen 씨가 전 인구의 38.4 %, Tran 씨가 11 %, Le 씨가 9.5 % 라고 한다.

1960년대 월남전이 한참일 때 월남 정치인들 이름이 한국 신문에 자주 나왔는데

그 때는 미국 식 발음대로 Nguyen 은 구엔, Tran 은 트란 이라고 적곤 했다.

그러나 현지 발음은 Nguyen 응우옌, 한자는 (), 월남 최후의 왕조였다.

Tran 은 트란이 아니라 , 한자는 진()이고 월남 5번째 왕조다.

(Le) 는 한자 ()인데, 전후(前後) 두 번의 Le() 왕조가 있다.

월남 초대 대통령 고 딘 디엠의 성은 가 아니라 응오’(Ngo), 한자로 오()

월남 역사에서 첫 왕조 첫 임금 이름이 응오 꾸옌(Ngo Quyen-吳權; AD 939-944)이다.

아! 이제는 만날 수 없다니...[2]|베트남 산책
전체공개2006.03.03 16:29

나는 평소 신문의 작은 기사까지도 샅샅이 훑어 읽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생 행로가 축약되어 있는 곳이 신문 지면이요, 그 지면의 행간 사이에 숨어있는 의미 하나 하나가 인생의 나침반이라는 생각을 가끔 하기도 한다.

신문을 받아 읽을 때 마다 또 다른 기쁨을 선사하던 조선일보 논설고문 이규태 선생이 며칠 전 유명을 달리 하셨다. 갈등과 혼란이 뒤 섞여 있던 시절이나 힘들고 어려운 시절에도 그는 짧지만 냉철하고 맑은 글로 영혼의 울림을 전해주곤 했었다.

이 논설고문은 우리로부터 멀어져 있던 먼지로 뒤 덮여 있던 우리의 것에서 아름다움을 끄집어 내고 새로운 지혜로 눈뜨게 하는 분이셨다. 정감이 넘치면서도 때로는 냉철하게 교차하는 비유와 은유가 조화를 이루는 그의 글에서는 바로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과 한국인의 정체성에 대한 메시지를 읽을 수 있었다.

이 논설고문의 별세 소식을 접하면서 평소 그가 썼던 베트남과 관련한 글을 찾아 정리해 보았다.

[이규태코너]

7백년만의 상봉

3백여년전 숙종연간에 있었던 일이다. 제주도 사람 24명이 탄 배가 폭풍으로 표류 12일만에 안남- 지금의 월남땅에 표착하여 그곳 고관으로부터 신문을 받았다. 조선 사람들임을 확인하자 대뜸 언성을 높여 말하기를 우리 왕자가 조선땅에 표류했을때 살해당했으니 너희들도 살아돌아갈 생각을 말라고 공갈치는 것이었다. 이에 서로 붙들고 방성통곡을 했다는 기록이 정동유의 주영편 에 나온다.

이 기록은 7백년전 안남 왕자가 고려땅에 표류해 왔다는 사실을 월남 사람들이 널리 알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고려에서 극진히 우대받은 사실이 왜곡되어 살해당한 것으로 와전되고 있었음을 알게해 준다. 그 곡절을 이해하는데 월남 역사를 잠시 되뇌볼 필요가 있다. 우리 역사에 이씨조선이 있듯이 월남에도 이씨월남이 있었다. 그 이씨월남의 8대왕인 혜종이 반란으로 피난갔다가 미모인 어부의 딸 진씨에게 반해 후궁으로 들인 것이 외척세도의 씨앗을 뿌렸고, 그 후궁의 오빠들이 결탁, 이씨를 몰아내고 진씨왕조를 세운 것이다.

삼공중 한분으로 그 혜종을 보필하고 있던 숙부인 왕자 이용상은 진씨의 이씨사냥을 피해 조상에게 제사지낼 제기를 들고 배를 띄워 보트피플이 된 것이다. 그렇게 표착한 곳이 지금 휴전선 바로 위쪽인 옹진현이었다. 이에 고려 고종은 이 안남 왕자를 반겨 화산군에 봉하고 인근 일대를 식읍으로 내려 정착케 한것이다. 몽고군이 내습했을 때는 완강히 싸워 이겨 적장을 무릎꿇려 항복을 받는 공훈을 세우고도 있다. 광복후까지도 그 공적을 기리는 수강문이 현지에 남아 있었으며, 백마장군이라는 토속신앙의 신명이 되어 액을 물리치고 복을 불러오는 수호신으로 숭앙받기도 했다.

이 안남 왕자는 궤화성인 화산이씨의 시조가 되어 고려때에는 후손중에 정승 판서가 났으나 조선조가 들어서면서 두문동에 들어 불사를 하는 지조를 보였었다. 지금은 전국에 2백여 가구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이씨 월남의 이태조도 왕자가 여섯이나 되어 후손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보도된 바로 안남 왕자인 화산군의 후손 대표인 35세손 이창근씨가 베트남 북부 하바크주에 살고 있는 이씨 왕족의 대표와 만나 족보를 교환한다고 한다.

안남 왕자가 보트피플이 된지 7백년만의 상봉이니 감개무량하다.

한-월 7백년

인도지나 반도의 적화로 단교되었던 월남과의 수교가 다시 맺어지고 보니 역사적 인물 한사람이 떠오른다. 조완벽이라는 진주의 서민이다. 임진왜란 때 붙잡혀가 일본 수도인 교토(경도)에서 노예살이를 하는데,너무 고달프고 고향 생각이 간절하여 뱃사람이 된다. 빠져 나갈 기회를 엿보기 위해서다. 이리저리 전전하다가 지금의 월남국인 안남무역선을 타게 되어 4만리 뱃길을 세번이나 내왕한 것이다. 아마도 월남에 발을 디딘 최초의 한국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는 안남에서 당시 세도를 부리고 있던 환관 정소의 고대광실에 초대받아 예의지국에서 온 귀빈이라 하여 후대를 받고 있다.

이 대접받는 자리에서 조완벽은 책 한 권을 펼쳐 보이는데 다름 아닌 선조때 문신 지봉 이수광의 시집이었다.

당시 안남 지식사회에서 이 조선 학자의 시가 필사되어 두루 읽히고 있는데 놀라고 있다. 이수광은 선조 30년(1598) 명나라에 사신길 갔다가 마침 안남사신인 풍극관과 한 숙소인 옥하관에 한달남짓 머물면서 주고 받았던 필담 시집인 것이다. 운을 넣어 문답을 하고 있는데,그 한 대목을 들어 보면 이렇다. 귀국은 겨울도 봄처럼 따뜻하고/얼음과 눈을 못본다던데- 하면 남국은 겨울이 적고 봄이 하많아- 라고 대꾸한다. 귀국에는 두번 익는 벼와/여덟번치는 누에가 있다던데-"하면 두번 익는 보리와/여덟번 치는 삼도 있다- 고 운을 짚어 대꾸하고 있다. 옛 선비들은 말이 통하지 않고도 이렇게 멋지게 필담을 나누었으니,얼마나 낭만적이었던가 부럽기만 하다. 조완벽은 그 밖에도 많은 견문을 남기고 있는데,안남 여자들은 신발이 없어 맨발로 생활하면서도 1백살을 넘겨사는 장수국이며 코끼리마저 무릎 꿇고 절을 하는 것을 보니 가히 예의를 숭상함을 알 수 있다 했다.

조선조 숙종 때는 제주도 이민 24명이 탄 배가 표류,안남땅 페이푸에 표착하고 있다. 잡힌 몸이 된 일행은 예전에 고려땅에 표류한 안남 왕자를 고려 사람들이 살해 했으니 보복을 받아야 한다고 곤욕을 당하고 있다.

13세기에 안남의 이씨 왕조가 진씨의 쿠데타로 멸망했을 때 왕자 한 분이 고려땅에 망명,황해도 화산땅을 식읍으로 하사받고 화산 이씨의 시조로 귀화해 살아 왔는데,아마도 이 사실이 와전되어 안남 왕자를 살해한 것으로 구전돼 내렸던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광해군 4년 제주도에 표류해온 안남 상선을 약탈,인명을 살해하고 배를 태워버린 사건이 있었는데,그 중에 왕족이 하나 끼여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베트남과의 재수교를 보고 평탄치만은 않았던 한-월 7백년사를 더듬어 본 것이다.


미니한월 관계사

휴전선에 잘린 옹진땅에 화산이라는 마을이 있다. 화산이씨의 본관 땅이요, 이 화산이씨 시조가 안남왕자 이용상이다. 고려 고종때 지금 베트남인 안남의 이씨왕조에서 쿠데타가 일어나자 배를 타고 망명,바람부는 대로 와닿은 곳이 바로 옹진 화산땅이었던 것이다. 그 화산 인근에는 이 안남 왕자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는데,그가 고려를 침범하는 몽골병과 싸우고자 쌓았다는 안남토성이 있고 그가 조국을 향해 통곡을 했다던 월성암이 있고 또 안남이씨 왕조의 시조이름을 딴 남평리,그리고 당시 월남의 국명인 교지리가 지금도 지명으로 남아있다.

한국과 월남의 관계사는 이렇게 해서 13세기까지 소급이 된다. 임진왜란 후 명나라에 사신길 따라갔던 실학자 이수광이 북경의 사신들 숙소인 옥하관에서 안남사신 풍극관과 만나 필담을 하고 많은 시를 주고 받으며 친분을 두텁게 하고 있다. 이때 나눈 필담과 시가 지봉집 에 수록돼 있는데 이 글이야 말로 한국에 소개된 최초의 안남 사정이요 안남 풍물이었다. 그 가운데 안남에는 1년에 두번씩 익는 벼가 있고 여덟번 치는 누에가 있다는 대목은 당시 식자들로 하여금 월남땅을 부럽게 여기게 했던 것이다.

같은 무렵인 갑진년(1604)부터 3년간 월남을 이웃집 드나들듯 내왕하며 장사를 했던 조완벽이라는 조선사람이 있었다. 진주사람으로 임진왜란 때 납치돼가 일본사람들의 상선을 타게되어 안남을 내왕하게 된 것이다. 조완벽이 말년에 고향인 진주에 돌아와 살았는데 그의 안남에서의 견문이 역시 지봉집 에 수록되어 있다.

그후 숙종 정묘년간에 제주사람 24명이 탄 배가 추자도에서 바람을 만나 표류,17일만에 안남 다낭해안에 표착하고 있다. 그곳 관헌에 의해 보호받고 있던 중 조선에 표류한 안남국사람들이 조선사람에 의해 살해당했다 하여 보복하겠다고 겁을 주었으나 끝내 중국상선편에 안전하게 송환되고 있다. 조선왕조 실록 광해군 4년기록에 보면 제주도에 표류해온 안남 상인의 배가 있었는데 제주목사 등이 그배에 실린 보화를 욕심내어 안남상인들을 죽이고 약탈하고서 왜구의 배를 무찌른 것처럼 보고한 일이 있었다.

그러고는 한말에 안남미를 도입하여 흉년에 대처한 일-,30만의 월남파병으로,한월관계는 이어지고 있다.

공산화로 17년간 단절됐던 베트남과의 국교가 다시 이어져 오는 7월에는 대사급 대표부가 양국에 세워지고 연말까지는 정식 수교가 이루어질 것이라 한다. 7백70여년 된 한월관계사에 새 장이 열린 것이다. 한국 혼혈아가 1만명 이상이 살고 있는 나라요 또 인도적이어야 했을 보트피플에 냉담했던 마음의 부채도 없지 않은 나라라는 감안이 있어야 할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