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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역사}}

{{베트남의 역사}}


이 문서는 [[구석기 시대]]부터 현재까지 이어온 '''[[베트남]]의 역사'''에 대해 서술한다.

건국설화에 따르면, [[기원전 2919년]] 베트남 최초의 국가인 [[홍방 왕조]]가 세워졌으며, [[기원전 257년]] [[툭판 왕조]]로의 교체가 일어났으나, 이어 중국 세력이 밀려 들어와 [[기원전 111년]]에는 [[한나라]]에게 복속되었다. 이로부터 10세기까지 간헐적인 독립 운동을 제외하고는 중국 세력의 통치가 지속되었다.

[[응오 꾸옌]]이 [[응오 왕조|응오(Ngô) 왕조]](吳朝)를 세워, 베트남의 독립을 쟁취한 [[939년]] 이후, 베트남 왕조의 통치가 이어져 15세기의 [[레 왕조]]에서 그 절정에 달한다. [[1802년]], [[프랑스]]의 세력에 힘입어 [[응우옌 왕조]]가 건국되었으나 이내 프랑스의 식민정책에 의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일부가 되었다.

프랑스는 [[제2차 세계 대전]] 때까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한 국가로 베트남을 식민지로서 통치하였다. 그러나 프랑스는 종전 후에 다시 군대를 파견하였고 이는 [[호찌민]]이 지도하는 민족 세력인 [[비엣민]]과 남북으로 대립하게 된다. 베트남은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으로 분단되었고 [[1964년]]부터 [[1975년]]까지 베트남은 [[미국]]과 [[베트남 전쟁]]을 치려야만 했다. 이후 친 중국 노선을 표방하는 [[캄보디아]]의 침공으로 [[중화인민공화국]] 등과 [[중월전쟁|중국-베트남 전쟁]]을 치렀으며, 1980년대 이후 개방 정책을 펼쳐 서방 세계에 문호를 개방하였다.

== 신화 및 선사 시대 ==


신화에 의하면 베트남이 건국된 때는 약 4,000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명한 베트남 신화에서는 많은 베트남 부족들이 락롱꾸언({{vie|v=Lạc Long Quân|hn=貉龍君|ex=용(龍)의 우두머리}})과 어우꺼({{llang|vi|Âu Cơ}})가 결혼하고 그 자궁 외에서 태어난 것으로 말하고 있다.

최근의 고고학적 발견에 따르면 현재의 북부 베트남 지역에는 [[구석기 시대]](약 50만년전)부터 인류가 거주하여 왔다. 1만년 전 북부 베트남에는 중석기 및 신석기 문화가 존재했고, 기원전 7000년 경부터 원시 농경 문화가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타인호아 성]](省)에서 발견된 고고학적 장소는 몇 천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일컬어진다. 고고학자들은 베트남 문명의 시작을 신석기시대 후반 또는 청동기시대 초반의 풍응우옌(Phung-Nguyễn) 문명으로 보고 있다. 이 문명은 기원전 2000년부터 기원전 1400년까지 현재의 [[빈프억 성]]에 중심을 둔 것이었다.

== 청동기 시대 및 중국의 지배 ==
[[파일:BronzeFigurineDongsonCulture500BCE-300CEThailand.jpg|thumb|left|250px|[[동손 문화]]의 청동상]]
대부분의 베트남 역사학자들은 동남아시아 여러 지역에서 발생하여 이 지역을 지배했던 [[기원전 300년]] 경의 청동기 문명인 [[동손 문화]]를 베트남 역사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ref name="론리"/>{{Rp|11}} [[마 강]]({{lang|vi|Sông Mã}})과 [[홍 강]] 유역에서 발견된 기원전 1200년경까지의 습식 벼농사와 청동 주물에서 이 지역에 [[동손 문명]]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동손 문명]]은 정교한 청동 북이 특이한 점이다. 동손 문명 유적지의 청동 무기, 도구, 북은 청동 주물 기술에 대해 독자적인 기원을 가진 동남아시아의 영향을 보여준다. 북부 베트남에서 고대의 수많은 구리 광산터가 발견되었다. 동손 유적과 다른 동남아시아 유적과의 유사점으로는 배 모양의 관(棺), 매장용 항아리(burial jars), 각주(角柱) 위에 세워진 집(stilt dwellings), 구장 열매를 씹고 치아가 검게 물드는 관습 등이다. 많은 베트남 사람들은 훙 브엉({{vie|v=Hùng Vương|hn=雄王}}) 황제의 전설적인 [[홍방 왕조]]가 베트남 최초의 국가라고 여긴다.

기원전 257년 [[홍방 왕조]]의 마지막 왕 훙뚜엔브엉({{lang|vi|Hùng Tuyên Vương}})은 [[툭판 왕조]]에게 패배한다. 툭판은 그의 부족 아우비엣({{vie|v=Âu Việt|hn=甌越}})에 락비엣({{vie|v=Lạc Việt|hn=雒越}}) 부족을 통합시켜 아우락({{vie|v=Âu Lạc|hn=甌雒}}) 부족이라 하였으며 그 스스로를 안드엉브엉({{vie|v=An Dương Vương |hn=安陽王}})이라 칭하였다. 기원전 208년 [[찌에우 다]]({{vie|v=Triệu Đà |hn=趙佗}})라는 [[진나라]] 장수가 [[남비엣]]([[남월국]])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기원전 207년]] 찌에우 다는 안드엉브엉을 물리치고 아우락 부족을 남비엣에 통합시켰다.

남비엣은 수도를 번우<ref>현재의 [[광저우 시]]</ref>에 두고, 중국 남부<ref>최전성기에는 현재의 [[광둥성]] 및 [[광시 좡족 자치구]]의 대부분과 [[푸젠성]], [[후난성]], [[구이저우 성]], [[윈난 성]] 일부</ref>와 [[홍 강]] 삼각주 지역을 통치하였다. 이와 같이 홍 강 삼각주를 정복한 중국인들은 화전 농업, 사냥, 낚시를 주업으로 하면서 봉건적인 생활을 영위하던 사람들을 발견했다. 이 초기 베트남인들은 이 지역의 다른 민족들과도 교역하고 있었다. <ref name="론리"/>{{Rp|11}} 남비엣의 기원을 말해주는 역사적 유물들이 논쟁 거리로서 남아 있는데, 이는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것이 중국의 통치였다고 보는 반면, 일부는 이것이 독립적인 시기였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기원전 111년 중국의 [[한나라]]의 [[한무제|무제]]는 [[남비엣]]을 정복하였다. [[후한]](23년~220년) 초기, 베트남에서 독립을 위한 투쟁을 했는데, 이것이 [[쯩 자매]]의 운동이다. [[한나라]]를 재건한 [[후한 광무제|광무제]]는 41년 복파장군 [[마원]](馬援)을 보내었다. 마원은 42년에 쯩 자매를 처형하고 베트남 내의 중국의 통치권을 확립하려 하였고 잔당 토벌 중 쯩 자매의 무리를 토벌하려던 41년의 전쟁 때 걸린 열병으로 49년 진영 내에서 사망했다.

[[1세기]]~[[6세기]]에 지금의 베트남 남부 지역은 매우 세련된 예술 및 건축 양식을 특징으로 하는 인도계 [[푸난]] 왕국에 속해 있었다. 푸난인들은 정교한 운하 체계를 갖추어 운송 및 관개용수 공급에 사용했다. <ref name="론리"/>{{Rp|11}}

[[기원전 111년]]부터 [[10세기]] 초까지 대부분의 시기 동안 중국 왕조를 계승한 통치자들이 지배한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ref>[http://asia.msu.edu/seasia/Vietnam/History/chinesecolonization.html Chinese Colonization (200BC - 938AD)]</ref> 쯩({{vie|v=Trưng|hn=徵}}) 자매와 바 찌에우(Bà Triệu)에 의한 산발적인 초기의 독립운동은 짧은 성공에 불과하였고 중국의 무력으로 곧 진압되었다. 544년과 602년 사이에 전기 리 왕조 하에 방쑤언({{vie|v=Vạn Xuân|hn=萬春}})에 의한 독립 시기가 있었다. 10세기 초반 무렵 베트남은 쿡({{vie|v=Khúc|hn=曲}}) 가문에 의하여 자치권을 얻었으나 독립은 아니었다.

== 독립 왕조 시대 ==
[[파일:Dia trang tri rong thoi Le So.png|thumb|250px|베트남의 접시(15세기, 레 왕조)]]


938년 전쟁 끝에 [[송나라|중국]]에서 독립한 이래, 재복속을 노리는 [[몽골 제국]], [[명나라]]와 계속 전쟁을 벌여왔다. [[939년]] 베트남의 [[응오꾸옌]]이 [[바익당 강]]({{vie|v=Bạch Đằng}} {{lang|en|River}}) 에서 [[남한 (십국)|남한]](南漢)을 물리치고 10세기 이후에는 중국의 지배로부터 독립을 쟁취하였다. 또한 한 세기 후에는 완전한 자치권도 얻어냈다. 나라 이름은 [[다이비엣]]이라 하였고, [[리 왕조]]와 [[쩐 왕조]] 시기에 황금기를 맞이하였다. [[쩐 왕조]] 통치 동안 [[쩐흥다오]]는 [[원나라]]에 의한 몽골인의 침입을 무려 세 번([[1285년]]과 [[1288년]])씩이나 물리쳤다.<ref>

[http://countrystudies.us/vietnam/9.htm The Tran Dynasty and the Defeat of the Mongols]</ref>

쩐 왕조 시기에는 [[불교]]가 번성하여 국가 종교가 되었다. 이후 [[호 왕조]]를 거치면서 중국의 [[명나라]]의 [[영락제]]의 침략에 의해 한동안 정복당해 탄압받았으나, [[레 왕조]]를 세운 [[레로이]](Lê Lợi)가 이를 회복하였다. 베트남은 [[15세기]] [[레 왕조]] 시기에는 절정에 달하였는데, 특히 [[레탄똥]] 황제의 통치(1460년–1497년) 때 그러하였다. 레 왕조가 끝날 무렵, 민중 봉기가 베트남을 뒤덮었다. 먼저, 중국의 힘을 업고 [[막 왕조]](Mạc, 莫)가 레 왕조의 힘에 도전하였다. 막 왕조를 패퇴시킨 뒤 레 왕조는 다시 일어났으나 실질적인 힘이 없었다. 이때 권력은 북부의 [[찐 왕조]](Trịnh, 鄭) 남부의 [[응우옌 왕조]]로 분할되었다. [[응우옌]]은 40년 넘게 민중 전쟁에 개입한 인물이었다.

[[11세기]]부터 [[18세기]] 사이에 베트남인은 [[남띠엔]]({{vie|v=nam tiến|ex="남으로의 확장"}}) 이라 부르는 과정을 통해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였는데, 바로 응우옌 왕조가 이 시기에 [[메콩 강]] 삼각주까지 진출하여 중부 고원 지대의 [[참파 왕국]]과 [[메콩 강]] 유역의 [[크메르 제국]]의 일부를 정복하였다. <ref>[http://www.ancientworlds.net/aw/Article/549713 The Kingdom of Champa]</ref><ref>[http://countrystudies.us/vietnam/11.htm The Le Dynasty and Southward Expansion]</ref> 민중 전쟁은 떠이선 운동에 의하여 [[찐 왕조]]와 [[응우옌 왕조]]가 멸망하고 1802년 새 왕조가 일어나면서 마무리되었고 이로써 현재의 베트남의 영역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떠이선 왕조]]는 오래 가지 못했고, [[프랑스]]의 도움으로 [[응우옌 아인]]이 이끄는 응우옌 왕조의 잔존 세력에 의하여 패퇴한다. [[응우옌 아인]]은 베트남을 통일하여 응우옌(Nguyễn) 왕조를 열고, [[자롱]] 황제가 되었다.

[[1789년]]에 [[하노이]]까지 진격해 온 [[청나라]] 군대를 섬멸한 것은 베트남 역사상 가장 유명한 조국수호의 일화이다.

== 프랑스의 식민 지배 ==
[[파일:InaugSG.JPG|thumb|250px|철도개통식(사이공-촐롱)]]


산업혁명을 경험한 유럽에서는 통상무역의 확대를 요구하며 아시아 시장으로 진출하였다. 베트남도 구미 열강의 제국주의의 손길을 피해갈 수 없었다. 17세기 초기에 베트남에 통상을 요구하는 사자가 방문했다. 왕조 성립 직후인 1804년, 영국사절 로버츠가 통상관계의 개선을 요구하면서 다낭을 내항하고 있었다. 그리고 1832년에는 미국으로부터의 사절도 유사한 목적으로 내항을 했지만, 거절되었다.베트남의 독립은 아시아 식민지 사업의 첫 발을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내딛었던 프랑스에 의하여 서서히 잠식되었다. 베트남이 프랑스의 통상 교섭 요구를 거절하고, 카톨릭 교도를 박해하자, 프랑스는 이를 구실로 전쟁을 일으켜 1862년 베트남의 항복을 받아내고 남부 베트남 3개주(코친차이나)를 할양받은데 이어, 타이와 미얀마를 제외한 인도차이나 반도(즉, 현재의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를 식민지화하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1885년)를 세웠다. 이로서 베트남 전역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포함되었다. 프랑스는 베트남 사회에 뚜렷한 정치적 및 문화적 변화를 가져온다. 근대 교육의 서구적인 체계가 도입되고 베트남 사회에 기독교가 전파되었다.(→[[응우옌 왕조#프랑스와의 항쟁|프랑스에 대한 응우옌 왕조의 항쟁]])

[[담배]], 인디고, [[차 (음료)|차]], [[커피]]의 수출을 촉진할 목적의 플랜테이션 경제를 발전시키면서 프랑스는 자치와 시민권의 요구를 대개는 무시하였다. 이에 대해 프랑스로부터 독립하려는 베트남인의 독립투쟁은 끊이질 않았다. 1919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기대를 한 베트남 청년 [[호찌민]]은 종전회담이 열리던 [[베르사유 조약]]에 베트남 대표로 참석하려 했으나 참석을 거절당했고, 그는 식민지를 고수하는 자본주의 열강보다는 제국주의를 반대하며 새롭게 탄생한 [[소련]]과 [[코민테른]]에 기대를 걸게 되었다.

독립 국가를 수립하려는 정치적 운동은 곧 [[판보이짜우]]({{vie|v=Phan Boi Chau|hn=潘佩珠}}), [[판쭈찐]]({{vie|v=Phan Chu Trinh|hn=潘周楨}}), [[판딘풍]]({{vie|v=Phan Dinh Phung|hn=潘廷逢}}), [[함응이]]({{vie|v=Ham Nghi|hn=咸宜}}) 황제, [[호찌민]] 등의 정치 지도자들에 의하여 통합되었다. [[1927년]] 베트남의 민족주의자들을 중심으로 《[[베트남 국민당]]》(VINQDD)가 창당되고 같은 해에 《[[인도차이나 공산당]]》이 창당되었지만 프랑스 식민정부의 감시와 탄압의 대상이었다. 프랑스는 [[제2차 세계 대전]] 때까지 베트남에 대한 식민 통치를 지속하였다.

== 베트남의 독립과 분단 ==


[[파일:HD-SN-99-02042.JPEG|thumb|250px|프랑스군과 간첩 혐의자(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중일전쟁]](1937년~1945년)이 격화되면서, [[일본 제국 육군]]은 베트남으로부터 [[중국 국민당|국민당]] 정부로의 물자수송로를 차단하기 위하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북부에 진주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한편, [[제2차 세계 대전]]의 유럽 전선에서는 1940년 [[프랑스]]가 [[독일]]에 무릎을 꿇었고, [[나치 독일]] 점령하의 프랑스, 즉 [[비시 정권]]이 임명한 장 드꾸(Jean Decoux) 장군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정부는 나치 독일의 동맹인 일본과 협력하여 - [[태평양 전쟁]]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대한 일본군의 침입을 촉진하였다- [[일본군]]의 베트남 주둔을 허용하는 조약에 서명하여 <ref name="론리"/>{{Rp|19}} 1940년에 일본군은 베트남 북부에 진출하고, 1941년는 베트남 남부에도 진주하였다. 일본제국으로서는 버마, 말레이 반도, 인도에 있던 [[영국령 인도차이나]]에 대한 군사 행동을 위하여 베트남의 천연 자원이 꼭 필요하였다. 이러한 이 지역의 전략적 입지와 천연 자원을 이용하고자 했던 일본은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프랑스 정부에게 일상적인 국정 운영을 맡겼다. 일본 점령에 항거하는 활동을 펼친 유일한 단체는 [[베트남 독립 동맹]]([[비엣민]])이었다. 1941년 [[비엣민]]이 호찌민의 지도 아래 통합되었다. 호찌민은 프랑스 및 일본의 지배로부터 독립을 추구하였다.

일본군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정부와 공존은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5년 3월까지만 지속되었다. [[비엣민]]의 공격이 계속되고 드쿠 정부가 - 과거 4년반 동안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일인 - 일본에 맞설 계획을 세우던 1945년 3월, 프랑스의 비시 정권이 몰락하자, 일본은 프랑스와의 공동통치 체제를 전복시키기 위해 반프랑스 쿠데타를 일으켜 프랑스의 군대 및 관리 모두를 감금했던 것이다. 즉, 일본군이 명호작전(明号作戰)을 실행하여 프랑스군을 제압하여 프랑스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일본은 [[대동아공영권]]의 기치를 내세우고, 아예 드쿠 정부로부터 베트남을 독립시켜 자신의 꼭두각시 정부로 만들려고 했고, [[바오다이]] 황제는 프랑스와 적대하는 일본군에 협력했다. 이에 따라 1945년 3월 일본의 지원을 받는 일본의 영향력하에 있고 명목상에 불과한 꼭두각시 정부인 [[베트남 제국]]이 수립되고, [[바오다이]]가 황제의 자리에 앉았다. 당시의 일본 군인 중에는 일본에 망명 중인 기외후(畿外侯)를 베트남 제국 황제를 세우려고 했지만, 남방군(南方軍)이나 제38군은 베트남의 새로운 정권에게 불간섭의 방침으로 군정의 실시나, 친일 정권 건설을 배제하는 걸로 결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오다이는 독립한 베트남의 최초의 원수의 지위를 손에 넣게 된 것이었다. 그는 안남과 통킹을 프랑스 보호구역으로 내준 1883년 조약을 폐지했다. 이 시기 일본에 의한 미곡수탈과 산업용 작물 생산을 강요한 정책, 홍수, 제방 파손으로 인해 심각한 기근이 발생했고, 그 결과 북부 베트남 1천만 인구 중 2백만 명이 기아로 사망했다. <ref name="론리"/>{{Rp|20}}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고, 베트남 제국도 1945년 8월 무너졌다. [[비엣민]]은 베트남 8월 혁명으로 빠르게 권력을 탈취하고 임시 베트남 민주공화국 정부를 설립하였다. 일본은 베트남의 행정권을 [[비엣민]]에게 넘겼다. 비엣민은 [[하노이]]를 점령하고 임시정부를 선언하였다. 8월 30일에 [[후에]]의 궁전에서 베트남 제국의 꼭두각시 황제 [[바오다이]]는 퇴위하였다.<ref> 이로서 143년간 베트남을 통치했던 이르는 [[응우옌 왕조]]는 명목상으로도 멸망하게 된다.</ref> 9월 2일, 일본이 도쿄 만의 정박중이던 미주리 호 선상에서 항복문서에 조인하여 전쟁이 종결됨과 함께, [[비엣민]]은 [[하노이]]에서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했다. <ref>http://coombs.anu.edu.au/%7Evern/van_kien/declar.html Declaration of Independence, Democratic Republic of Vietnam] – Vietnam Documents</ref> 그러나, [[포츠담 회담]]의 결과와 연합군 일반명령 제1호에 따라 베트남은 중국과 영국에 의해 다시 분할점령의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같은 시기 베트남에 있는 프랑스인과 일본군의 포로가 된 프랑스 군인들이 주축이 되어 사이공에서 식민군을 재결성하여 비엣민 세력과 충돌이 일어났다. 1945년 프랑스임시정부(the Provisional French Republic)는 원래 일본의 점령에 대항하기 위하여 조직된 프랑스 극동 원정군(the French Far East Expeditionary Corps)을 베트남에 보냈다. 이는 베트남의 독립 운동을 진압하고 프랑스의 지배를 재건하기 위함이었다. (→[[비엣민]]·[[베트남 제국]]·[[베트남-프랑스 관계]])

==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
{{본문|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이후 영국과 중국은 이전의 지배자였던 프랑스의 설득에 따라 군대를 철수시켰지만, 프랑스는 식민지에서 호락호락하게 물러서지 않았다. 프랑스는 바오 다이를 내세워 [[사이공]]에 괴뢰정권인 [[베트남국]]을 수립하였다. 이에 맞서 비엣민은 북부의 [[하노이]]에 동남아시아 최초의 공산주의 나라인 [[북베트남|베트남민주공화국]](월맹, 북베트남)을 수립하였다. 이로서 [[1945년]]에 이 성립하고 북부는 [[비엣민]]이 장악하고 남부는 [[프랑스]]가 장악했다. 곧 비엣민과 프랑스군은 치열한 전투를 개시하였다. [[1946년]] [[11월 20일]] 하이퐁 사건으로 촉발된 베트남의 프랑스에 대한 독립 전쟁인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비엣민]]과 프랑스 군 사이에 발발하여 [[1954년]] [[7월 20일]]까지 지속되었다.

그 와중인 [[1950년]] [[소비에트 연방]]과 [[중화인민공화국]]은 북베트남을 국가 승인하였다. 미국을 배후로 하는 프랑스 극동 원정군과 베트남 국군(Quân đội Quốc gia Việt Nam)은 전쟁으로 인한 피해가 덜하였으나 - 프랑스 극동 원정군 측 사상자는 중국과 소련을 배후로 한 비엣민 측 사상자의 1/3에 불과하였다 - [[디엔비엔푸 전투]]에서의 결정적 패배를 하게 되고, 이로 인하여 1954년 [[제네바 협정]]에서 호찌민은 유리한 조건에서 휴전 협상을 하게 된다. 프랑스의 식민 정책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해체로 끝맺었고, 제네바 협정에 따라 베트남은 17도선에서 남북이 분단하고, 이로서 북위 17 도선 (군사분계선, DMZ) 이북은 호찌민의 [[북베트남]]이, 이남은 바오 다이 황제의 [[베트남국]](Quốc gia Việt Nam)이 통치했다.

이러한 남북 분단은 임시 조치였고, [[1956년]]에 선거가 예정되어 있었으나 열리지 않았다. 1954년 10월, 베트남에 있던 프랑스군이 철수했다. [[1955년]] 베트남국의 총리 [[응오 딘 지엠]](Ngo Dinh Diem)은 그의 형인 [[응오 딘 누]](Ngo Dinh Nhu)가 주도한 부정한 국민투표를 통해 황제 [[바오 다이]]를 축출하고 스스로 [[베트남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선언하였다. 이로서 공산주의의 [[베트남민주공화국]](북베트남)과 미국이 지원하는 [[베트남공화국]](월남, [[남베트남]])이 대치하는 양상을 띠게 된다.

* [[1959년]] 베트남인민공화국은 민족해방전선 이라는 새로운 군사조직을 만들었다.(베트콩)
* [[1963년]] [[6월 11일]] 베트남공화국에서 틱쾅둑 승려의 분신 (독재 시위)

== 베트남 전쟁 ==


{{본문|베트남 전쟁}}

[[파일:Bombing in Vietnam.jpg|thumb|폭격을 당하고 있는 베트남. (베트남 전쟁)]]


[[베트남 전쟁]]은 [[1964년]] [[통킹만 사건]]을 구실로 [[미국]]이 [[북 베트남]]에 폭격하면서 시작된 전쟁으로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라고도 한다. 학자에 따라서는 미국이 베트남에 개입하기 시작한 [[1959년]]을 기점으로 잡기도 한다. [[1975년]]까지 계속된 이 전쟁은 민족적인 공산주의자들인 베트남민주공화국(북베트남)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콩)이 베트남공화국(남베트남)과 싸운 내전의 성격이 있는 반면, 미국과 한국을 비롯한 미국의 동맹국들이 남베트남을 지원하기 위해 개입하고, 이에 맞서 중국과 북한도 비공식적으로 각각 전투원을 파견하여 북베트남을 지원함으로써 국제전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이 전쟁은 [[한국전쟁]]과 더불어 [[냉전]] 기간의 대표적인 전쟁이다.

결국 반전 여론과 불투명한 전세에 미국은 휴전 협정을 맺고 베트남 전역에서 퇴각하지만, 남베트남과 북베트남, 베트남 해방전선은 전쟁을 재개하여 [[사이공]]을 북베트남군이 점령하고 남베트남 정부 대신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가 세워지면서 끝이났다. [[대한민국]]에서는 한자를 한국어식으로 음차한 월남 전쟁이라고도 부른다.

이 전쟁으로 인해 민간인을 포함한 베트남인 150만 명이 사망했고, 미군은 사망자 6만여 명, 대한민국에서 참전한 군인도 5천여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전쟁 이후에도 미군이 사용한 무기와 화학약품으로 인해 피해자 본인과 그 자녀들이 장애를 갖게 되는 사례가 속속 집계되고 있고,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사건이 보도되기도 하였다.

== 베트남 전쟁 이후의 역사 ==
* 전쟁의 종결을 향한 움직임이 시작된 1969년의 9 월 2일 상오 9시47분, [[호찌민]]이 갑작스런 심장 발작으로 79세의 생애를 마지막으로 사망하였다. <ref>{{뉴스 인용|제목=胡志明사망 |url=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9090400329201006&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9-09-04&officeId=00032&pageNo=1&printNo=7358&publishType=00020|출판사=경향신문|쪽=1|작성일자=1969-9-4|확인일자=2010-5-1}}</ref>
* [[1973년]] [[1월]] 미국과 베트남인민공화국에서 파리협정이 조인.
* [[1975년]] [[4월 30일]] [[사이공]] 함락으로 [[베트남 전쟁]] 종결.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에 괴뢰 정권인 [[남베트남 공화국]]을 수립시켰고, [[1976년]] 이를 흡수하여 남북통일하고,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이 성립되었다.
* [[1979년]] [[중국-베트남 전쟁]]
* [[1986년]] [[도이모이]](đổi mới, 쇄신)정책의 개시
* [[1995년]] 30년 통상금지를 해제하고, 외교를 정상화 하여 같은 해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에 가입했다.

== 주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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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 name="론리"> {{서적 인용 |저자= 메이슨 플로랜스, 버지니아 젤러스 |편집자= |기타= 책임감수 최하나|제목=론리플래닛:베트남 |꺾쇠표= 예 |초판발행일자= 2003-11-17|판= 초판|출판사= 인그라픽스 |출판위치= 서울}}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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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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