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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의(최배달)이랑 이소룡 (출처 퍼왔어요)

최영의(최배달)이랑 이소룡

이소룡의 실전실력



1958

이소룡 vs. 게리 에름스(당시 3년연속 복싱 챔피언)전 1라운드 승



1958 or 1959

이소룡 vs. 청(홍콩의 유명한 복서)전 2라운드 승



1960 - Seattle:

걷던 중 중국여인을 희롱하던 남자의 코뼈를 부서버리다. 이 격투는 제임스 데밀이 목격했다.



1960 or 1961:

이소룡 vs. 우에치(일본 가라데선수. 씨애틀에서 도장을 운영했다)전 10초에 승



63년 여름 - 홍콩

저녁산책을 하던 중 그에게 시비를 걸던 깡패와 그의 친구를 낮은 무릎차기로 격파.



이소룡은 홍콩의 복싱대회에서 3년 연속으로 우승했던 영국인챔피언 게일을 1라운드에
링아웃 시킨적이 있습니다. 고등학생일 당시 홍콩의 유명한 프로복서 챵을 역시 1라운드에 KO시켰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력보다도 더 살벌한 것은 미국에서 생활할 당시의 무술계 거물들과의 스파링입니다.
공식적인 대회에서의 시합이 아닌 개인적인 스파링이었지만, 이소룡과 스파링을 가졌던 사람들은 정말 무시무시한 사람들입니다.



그중에서도, 척 노리스와의 스파링은 정말 대단한 것으로, 척 노리스는 전미
가라데 대회에서 그랜드 챔피언(그랜드 챔피언이란, 각 체급별로 우승자를 뽑은 다음 다시 이 체급별 우승자들끼리 대전하는 이른바 '체급무제한 최강자선발전'입니다)을 지낸 전설적인 인물입니다만, 이소룡과의 스파링에서는 도무지 상대가 되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바꿔 말하자면, 이소룡은 당시 전미 가라데계의 최강이라는 것이겠지요.



저명한 무술잡지 블랙벨트의 한 기자도, 당시 전미 가라데계를 통털어 이소룡 이상의 강자는 없었다고 합니다.
또한 타류시합으로 많은 권법가들과 겨뤘는데 거의가 10초내에 쓰러뜨렸다고 합니다.(이소룡이 말하길, 실전은 6초안에 끝내야 한다라고
했답니다.)



가라데 선수를 11초만에 KO시켰고, 중국 무술계에서 이소룡을 응징하기위해 보낸 백학권사를 30초만에 결단냈습니다.



이 밑의 것들은 전부 글러브를 착용하고 룰에 따라 겨루는 것이 아닌, 순수한 '실전'입니다. 시합/ 스파링/ 실전을 통털어, 이소룡이 고전했던 적은 없습니다.



전부다 일방적인 승리였지요. 영화 '드래곤'에서는 백학권사와의 대결이 마치 막상막하 극적인
두 번의 승부로 그려졌습니다만, 실제는 간단하게 때려눕혔습니다.
(그래도 이소룡의 격투중 가장 긴 시간-30초-이 소요되었지요. 보통은 일격에 때려눕혔습니다)






극진가라데 창시자 최배달과의일화




최영의는 말할 필요없이 화려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각종 격파술과 ,황소를 쓰러트린일, 100전 100승의 전적.
이소룡이 홍콩에 있을 때 그는 불량소년패거리의 리더였다.
그는 거의 매일을 최영의처럼 싸움과 격투로 보냈다.
고교시절땐 권투챔피언도 했으며 영춘권엔 입문한후엔
각종 쿵푸의 타류시합에 출전하여 모두 이겼다.



그의 수첩을 살펴보면 싸운 상대와 그 당시의 상황이 잘 묘사되어있다.
대개 싸움은 5-10초 사이였고 이소룡의 전승이었다.
이 당시 이소룡은 성격이 상당히 난폭하고 사나웠던 모양이다.
결국 이러한 생활이 화를 불러 홍콩에서 머물다 죽임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그의 부모는 그를 미국으로 용돈 조금을 쥐어주어 쫓아보낸다



이 후 무술인과 영화인으로 성공하는데 그의 주위에는 당시의 세계일류
의 무술가들이 모여있었다.
전미 가라테 7년연속 챔피언인 척노리스, 장법과 곤술의 대가 이노산토,
미국태권도의대부 이준구, 가라테 챔피언 밥 월,
세계 최초의 킥복싱,가라테 이종 격투기 대회 헤비급 챔피언 조 루이스.



그런데 이러한 챔피언들 조차도 스스로 자신이 이소룡보다 한 수 아래라고 인정하였다.
특히 요즘의 UFC나 K-1에 해당하는 킥복싱,카라테 이종대회 챔피언인
조 루이스 조차도 그에게 많은 것을 배웠으며 정말 뛰어난 파이터라고
극찬했다.



또 미국에서 만들어진 다큐멘터리를 보면
세계적인 액션 스타들인 장 끄로드 반담,척 노리스, 스티븐 시걸 등을
이소룡보다 두수는 아래로 평가하고 있다.
자국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미국인들로서는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다.



반담은 보디빌딩과 킥복싱 세계챔피언 출신이고 척 노리스는 설명이
필요없는 강자이고 스티븐 시걸은 세계최강의 고수들만 모였다는
미국 대통령 경호단의 일급 경호원이엇다 그는 일본 아키이도와 각종 동양무술에 능통한 고수이며 특수부대에서도 활약했다.



그는 1964년 미국 LA의 롱비취 가라테 토너멘트에서 절권도의 모범연무를 펼쳤을 뿐이다.
그런데 그 때 가라테인들과 약식으로 대결을 하였다.
그 때 이소룡의 주먹이 워낙 빨라 아무도 그의 주먹을 막아내지 못했고
나중엔 지원자가 없어 그만두었다.

여기엔 세계대회였기 때문에 동,서양의 가라테고수들이 다 있었다.
당시 그 자리에 있던 챔피언 조차도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또 그는 절권도를 발표한 뒤 각종 무술과 우호적인 시합을 가진적이 있다.
그 중에 하나가 미국과 유럽출신의 권투 챔프와 대결한 것이다 이 이벤트는 당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이소룡이 좋은 결과를 이끌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이상을 보면 이소룡의 전적이 결코 최영의에 뒤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최영의의 전적도 상당수는 뚜렷한 증인이 없는 것들이며 상대들도
대개 무명이 많앗다. 물론 톰 라이스나 복서와의 대결은 유명하지만
이름모를 오지의 무술가들도 많은탓에 그들의 실력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물론 무명이라하여 약한 것은 아니겠으나 어느정도인지 객

관적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




브르스 리와 최배달 그들의 진실.




이소룡과 최배달



이소룡과 최배달의 대결에 관심이 많지만 그들의 대결은
소설 속에서나 가능하다.
최배달은 젊어서부터 강자들을 찾아다니며 유무명의 강자들과 싸워 이겼다.
특히 그의 제자들이 어디서 맞거나 지고 오면 어김없이 그가 나서서
실력행사를 하던 그였다.



소림무술인들이 그의 제자들을 묵사발을 만들어놓자 당장 가서
그들과 대결했고 제자들이 야쿠자와 관련되자 거기에도 나서던 그였다.그런데 제자들이 이소룡에게 당하고 돌아왔을때는 그는 침묵으로 일관했다고
한다.



이 사건은 이렇다.
이소룡이 절권도를 발표하면서
"가라테는 운동장에서 수영배우는 것과 같다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안 그래도 벼르고 있던 가라테맨들이 떼로 이소룡을 찾아가 둘러쌌다



거기엔 모두 전,현직 일본챔피언 또는 세계 피언들이었다. 일본에는
가라테문파가 많지만 주로 시합을 휩쓸었던 것은
전통의 강호인 송도관과 실전파 극진가라테가 가장 유력했다.



60년대 미국에서 동양무술의 마스터로서
명성이 자자했던 자기네 스승인 최영의가 70년대 이소룡의 등장으로
한풀 기세가 꺾이자 불만을 품었던 최영의 제자들도 거기엔 있었는데
그 중 몇 명이 이소룡에게 덤벼들었다.이소룡이 특유의 괴조음을 내며 챔피언 몇 명을 순식간에 제압하자
기세등등하던 가라테맨들이 놀라서 그냥 물러나고 말았다



이 후 이소룡은 무술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때 사건에서
괴조음의 아이디어를 얻어 정무문에서 활용하여 큰 호응을 얻었다고한다.
어쨌든 이소룡의 등장으로 당시 세계무술계를 휩쓸고 주도했던 가라테인들은
매우 심기가 불편하던터에 이소룡의 심한 비난은 가라테인들에게
싸울 명분을 주었던 것이다.



극진가라테의 최영의 직계인 수제자들도 이소룡과 대결하고 올테니 허락해달라고
최관장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그러나 최영의관장이 묵묵부답으로 허락치 않았다.
그래서 전전긍긍하던 터에 가라테인들이 몰려가는 기회에 참가했다가 싸워보지도
못하고 도망왔다.



후에 이일을 알게된 최관장이 불러 물으니
"이소룡의 공격이 너무 날카롭고 위협적이어서 싸워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라고 얘기했고 최관장은 아무 얘기도 없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다 그것이 최배달로서는 현명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최배달은 40세이후 무리한 격투로 인한 심한 후유증에 시달려야만했다.
각종 관절염과 신경통, 특히 무릎에 중상을 입었다.
특히 황소와 겨룬 것이 결정적 원인이었다.



또 젊을때는 단지 최강이 되겠다는 젊은 혈기하나로 밀어부쳤던 배달이지만 나이가 들고 자신의 명성과 명예가 쌓여가자
그 역시 주변의 시선과 평가에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는 이미 충분한 명성을 쌓았고 정점에 다다랐다.그런데 이제 다시 젊고 유능한 파이터와 승부하는 모험을 하지는 않을 것

이다 당연한 일이다.
탑은 쌓아올리는데는 수십년이 걸리지만 무너지는 것은
한 순간이다.



동물의 세계를 보면 힘이센 숫사자들끼리는 상호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
싸워봤자 아무 득이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만약 싸우게 된다면 "어부지리"로 승자도 패자도 없이 서로 상처입어 결국 다른 사자들에게
죽임을 당할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최영의의 이소룡에 대한 평가는
처음에 최영의는 이소룡을 오버액션하는 액션배우로 밖에 보지않았다.
그래서 제자들이 질문했을 때 "영화와 현실은 다르다" 라고 일축햇다.
그러나 한참 세월이 지난 뒤에 다시 질문을 했을 때 최영의는
이소룡을 뛰어난 파이터로 인정하고 "싸워봐야 안다"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이소룡이 가라테를 비롯한 동양무술을 전파시키고 세계적으로
유행시키는데 이소룡이 1등 공신 이라고 평가햇다



최초 이종격투기 챔피언이 혀를 두를 정도 였다. 가라데
챔피언들도 여러 명이서 마구잡이로 덤볐는데 깨졌다. 한마디로 이소룡이 가지고 논다는 겁니다.
가지고 논다는 건 표현일 뿐입니다. 이소룡은 지나가는 3살박이도 정통으로 상대해주니 크로캅 파이터
기록상으로 볼때 이소룡 이긴다는 것은 좀 무리입니다.

체급으로 실력따지는 분들도 여러분 계시는걸로 알고있습니다만
이소룡을 아는사람은 다알듯이 자기보다 체급 높은사람하고 많이 싸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소룡이 대부분 이겼죠.



참고로 말하건데 이소룡식 파이터 방식은 빠르게 급소에 정통파를 갈기는 방식입니다. 현재의
이종 격투기라는 것이 많이 간소화되고 스포츠화 되다 보니 실전용 격투기에서
멀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복싱대회의 경력은 뭐 모두 다아시는 걸테고, 이소룡과 척노리스와의 스파링은 척 노리스 자신도 직접 말했고, 이소룡의 부인 린다 리가 쓴 "BRUCE LEE STORY"에도 수록되어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이소룡의 전설"에도 나와있습니다.



실전 격투경력은 미국/ 영국/ 일본등지의 절권도 싸이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위에 적어둔 것은 여러 기사들과 외국 싸이트의 글, 책에 적힌 것들을
비교 분석하여 신빙성 있고 검증된 것만을 적은 것입니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현재의 격투기 경기들은 너무 스포츠화 되어서 실전에선 점점 멀어진다는 것입니다. 그 20~30년전의 이소룡식 맨손격투방식보다 점점
퇴화 된다는게
현재 이종격투기의 현실입니다.

40마리의 소랑 한꺼번에 싸운건 아니고 한 마리씩 사십여번 싸웠다는 말입니다.

단번에 뿔을 부러뜨려서 즉사시킨적도 있고 실패해서 크게 다친적도 서너번있습니다.

그리고 일본에서 시작해서 전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실전 격투를 해서 무술을 연마한걸로 아주 유명합니다.

고수는 강호에 드러나 있는것보다 은둔한체 보이지 않는 고수가 더 많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최배달같은 경우는 거품과 과장으로 덧칠되지 않은 그 시대최강의 고수중 한명이 분명합니다.

최배달 덕분에 전세계에 일본의 가라데가 알려졌고 지금의 종합격투기 대회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고 할수 있습니다.

K-1을 만든 정도관 관장이 극진가라데 최배달의 제자였다가 짤린 사람이 따로 만든뒤 계승한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우선 최배달은 극진가라데의 총수이십니다..

극진가라데는 상대를 파워로 5방 안에 쓰러뜨린다 이런 생각으로 파워를 올려서

몸을 돌로 만들어 빠른시간안에 상대를 제압함으로써 "일격필살"이라는 말을 사용할

정도로 파워가 쎄지는 운동입니다..

극진가라데의 총수인 최배달은 정말 소뿔을 수도치기로 격파하고 주먹으로 수십장의

기왓장을 격파도 할 정도로 파워가 쎕니다..

황소 40마리가 아니고 47마리입니다..

이중 4마리를 즉사시켰으며 나머지는 뿔을 부러뜨렸다는데요...

그리고 일본에서 시작해 전세계를 떠돌아 다니며 싸움 고수들만 찾아 100전이 넘는 대결

을 하였으나 단 한번의 패도 없는 무적의 사나이입니다..

이정도면 강하다는 것을 알겠죠?^^

최배달 이소룡의 일화는 허구입니다.

인터넷에 떠도는 이소룡 실전경력을 읽으신것 같은데 예전에는 그런말이 없었습니다.

이소룡이 비판한것은 극진가라데가 아니라 전통가라데입니다.

그리고 수십명이 둘러싼 애기도 없을뿐만 아니라 일본챔피온,세계챔피온이라고 말하는데 허구입니다.

네이버 지식IN이 생기면서 제일 처음으로 나온말입니다.그리고 그 글 적은분도 이소룡 인터넷 소설같은곳에서 보고 적고 이소룡과 최배달의 일화가 거짓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최배달 제자가 처음으로 미국지부에 간것은 73년입니다.오야마 시게루(조일삼)씨 제일교포

.백학사권 왕걸문을 중국에서 이소룡을 응징하기 위해서 보냈다고 했는데 터무니없는 애기입니다.

왕걸문은 이미 미국에서 있었고 도장이권 다툼때문에 싸우게 됩니다.

이때 싸움 증언자인 이소룡 부인 린다여사가 말합니다.그때가 브랜드리 임신 8개월째였는데 중국권법과와 싸움에서 3분정도 걸렸다고 말합니다.(이소룡 다큐멘터리 전사의 여행)

근데 이소룡 실전경력이라고 나오는 자료는 30초정도 밖에 안걸렸다고 말합니다.

그이외에도 그 자료는 신빙성이 없습니다.

저도 이소룡의 존경하고 무술실력이 뛰어난건 인정하지만 신격화시키는분들은 이해가 안됩니다.

이소룡을 신격화시키지 않더라도 이소룡은 이미 세계적스타고 존경할만한 인물입니다.

최배달이 실제로 그렇게 많이 싸웠나요?

현재 극진회관 소속, 극진가라데 수련자입니다.

위에 답변단놈들 모조리 무시하십시오.

극진가라데나 최배달의 역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주어들은 사실만 가지고 떠들고 있군요.

1. 최배달은 왜 세계를 돌며 싸웠나요?

- 여러이유가 있습니다만 역시

'싸움에 이기고 강함을 증명한다'는 극진의 기본정신이 토대가 된것입니다.

이런 무도철학에 따라 최배달은 링위나 길거리를 안가리고, 규칙, 무규칙을 안가리고 '실전'이라면 닥치는데로 승부를 봤습니다.

2. 세계.. 구체적으로 어떤 어떤 나라를 갔다는 거죠?

- 미국, 유럽, 브라질, 남미, 아시아 등

수많은 나라에서 실전승부를 치뤘습니다.

당시에 비행기타고 들어갈수있는데면 어디든, 그리고 강한무술이나 강한 격투가가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어디든 가서 싸웠습니다.

3. 그곳의 상대들이 강자로 인정할만큼(믿을만큼) 강한가요?

- 프로레슬러, 복싱선수, 프랑스의 전통무술, 브라질의오지무술, 태국의 무에타이 챔피언 등 전세계의 무도인들과 싸웠고 이겼습니다.

그리고 그 상대들도 각분야 최고수들도 있었습니다만, 워낙 다방면에서 결투가 일어났기에 모두가 강자는 아니었씁니다.

당시는 격투계라는 시장자체가 성립이 안됐던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무술의 최고수라고 해도, 그가 얼마나 객관적으로 강한가는 알수 없습니다.

(현재 절권도 최고수나 카주켄보 최고수라고 아무리 외쳐도, 객관적으로 얼마나 강한지 알수가 없는것과같죠)

하지만 그런시대성에서도 모든 유파를 초월하여 '실전'에서 최강이 되고자 싸웠던것이었기때문에,

현재 격투계 어디에서도 최배달이 최강이 아니였단 말을 못하는겁니다. 실제 모든무술과 싸워이겼기에..

4. 패한적이 있나요?(고전한적이나)

- 고전한 적이야 있죠. 모든승부가 쉽사리 결판났던게 아닙니다.

하지만 패한적은 없습니다.

가장 잘못알려진 사실 하나가 홍콩에서 진노인이라는 태극권사에게 졌다는 낭설인데요..

최배달이 홍콩에서 진노인이라는 태극권의 대가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그를 찾아가서 승부를 보려고 했던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막상가보니 70세가 다된 노인이 나오는데 어떻게 그와 실전격투를 할수 있단 말입니까?

대신 그와 각자의 무술을 견줘보면서 교류를했고,

노인의 권유로 1주일간 그의 도장에서 중국무술의 부드러움을 배웠습니다.

한국에선 최배달이 70먹은 노인한테 졌다는 오해가 퍼져있는데요. 명백한 거짓입니다.

위의 답변자들 어디서 근거없는 소문듣고는 지멋데로 지어내기까지 합니다.

울면서 깨우쳤다고 하질않나, 칼을썻다하질 않나... 쯧쯧 한심하죠.

최배달의 역사에 대해선 만화, 소설등 별의별 영향탓에 온갖 허상과 거짓으로 얼룩진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가 100년전 사람도 아니고, 엄연히 20세기에 수많은 사람들앞에서 쇼비지니스까지 이용하면서

최강임을 증명코자 했는데, 부인할수없는 사실까지 부인해선 안되겠죠.

제가 생각할때는 분명히 패배를 많이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딴 소리나 지껄이고 있네요.
이건
제가 생각할때는 이순신도 분명히 패배를 많이 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라고 하는것과 같습니다.
아니! 역사적사실을 따지는데 오로지 '팩트'만 갖고 따져야지, 아무 근거도 없이
'제생각에는..' 이따위 소리나 늘어놓는데 이게 헛소리가 아니고 뭐겠습니까?
아무튼 이렇듯 인터넷엔 과장되거나 왜곡된 정보가 널렸으니까, 믿지 마시고,
극진가라데나 최배달에 대해 궁금하시면, 한국의 극진가라데 까페등에 가서 검색해보시기 바랍니다.

[기획] <바람의 파이터> 최배달은 누구인가?



최배달(본명 최영의), 일본명 오야마 마스다쓰. 그에 관한 수식은 쉽게 압축할 수가 없다. 전설의 파이터, 신의 손( God’s Hand ), 가라테마스터, 소뿔을 꺾은 사나이에서 바람의 파이터라는 제목까지. 한 사람에 붙여지는 수식이라고 하기에는 다분히 많은 숫자지만 그 정도로 최배달은 존경 받는 무도가로서의 생을 살았다. 영화 <바람의 파이터>를 통해 다시 한번 재조명 되고 있는 최배달, 그의 삶은 대체 어떠했길래 아직까지도 우리를 흥분하게 만드는 것일까?

하늘을 나는 파일럿은 되지 못했지만

1923년 전라북도 김제군 용지면 와룡리에서 태어난 최배달은 어렸을 때 겁이 많은 소년이었다. 그래서 곧잘 일본아이들에게 놀림을 받곤 했는데 부농이었던 아버지가 고용한 하인에게서 차력, 혹은 중국무술인 남권을 익혔다고 한다. 1938년 16살이 되던 해 최배달은 어릴 적 꿈이었던 파일럿이 되기 위해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현해탄을 건넌다. 일본 야마나시 소년 항공학교에 입학하게 된 최배달은 이때 처음으로 가라테에 입문하게 된다.

1945년 당시 일본은 패망 후 모든 것이 부족했고, 인심은 극도로 흉흉해져 있었다. 최배달 역시 춥고 배고픈 낭인시절을 보내야만 했는데 어느 날, 도쿄 시부야 공원에서 위험에 처한 야쿠자 보스를 구출하게 되어 6개월간 그의 보디가드로 활동하게 된다. 하지만 야쿠자들의 방탕한 생활에 회의를 느낀 그는 재일교포 단체인 거류민단에 투신하게 된다. 또한 일본에 체류하면서 수많은 폭행 사건의 주범이던 미군들로부터 겁탈의 위험에 처한 일본 여인들을 구해내 ‘구라마덴구(막무시대의 영웅)’ 이라 불리며 처음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다. 그 덕분에 그는 CID(범죄수사국)에 수배를 받게 되었고, 훗날 입산수도의 원인 중 하나가 된다.

미야모토 무사시의 가르침대로

미국범죄수사국의 추격을 받으며 고된 낭인생활을 지속하던 그에게 또 한번 인생의 전환점이 찾아온다. 그것은 에도 시대 검의 달인 미야모토 무사시의 사상이 담긴 오륜서 한 권이었다. 미야모토 무사시의 “힘없는 정의는 무능하고 정의 없는 힘은 폭력이다” 이라는 한 구절은 자신과 세상을 뛰어 넘고자 하는 의지를 만들어냈고 그는 그 길로 지바현 남부에 있는 기요즈미 산으로 뼈를 깎는 수련의 길을 떠나게 된다.

입산수련 과정에서 그는 두 손가락으로 물구나무를 서고 딱히 상대가 없던 산속에서 참나무와 폭포의 얼음덩어리, 돌덩어리들을 부수기 시작했다. 속세가 그리웠지만 그때마다 한쪽 눈썹을 번갈아 밀며 자신을 세상과 격리시키며 의지를 다졌던 최배달은 미친듯이 뛰고 닥치는 대로 격파했다. 그리고 자신을 버리는 것이 진정한 비워 있음(空)이라는 깨달음을 얻는 순간 그는 끝끝내 깨지지 않았던 자연석 격파에 성공하며 고단했던 입산수도를 마치고, 일본무도계 정벌의 첫발자국을 내딛게 된다.

무도여행

최배달이 기요즈미산에서 하산한 1947년 봄, 쿄도 마루야마 공화당에서는 패전의 울분을 씻고, 전국민의 사기를 진작시킨다는 명분 아래 전후 최초로 전일본 공수도 대회가 개최된다. 공수도 전유파가 참여한 가운데 격파와 대련으로 이루어진 전일본 공수도 대회에서서 우승을 차지하며 무도계에 파란을 예고했다. 그리고 전일본 공수도대회를 통해 상대방 앞에서 가격을 멈춰야 하는 기존 공수도에 다시 한번 염증을 느끼고, 진정한 실전 공수도의 길을 가기 위해 일본 각지에 숨어있는 고수들을 찾아 무도 여행을 떠나게 된다.

그는 공수도의 원류라는 교토 니조도장의 니조 십걸을 비롯하여 수많은 고수들을 격파해 나가며 최배달식 실정공수를 알리며 전진하기 시작했다. 최배달에게는 민족주의 성향의 과격파들로부터 엄청난 협박이 날아들었다. 패전 후 겨우겨우 자존심을 세워나가던 일본인들에게 최배달이라는 조선인의 존재는 눈엣가시 같이 일본의 자존심을 짓밟는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매일밤 숙소에 돌이 날아들었고, 습격에 대비해 하루에도 몇 번씩 숙소를 옮겨야만 했다. 최배달은 온통 적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폭풍 같은 대결들을 멈추지 않았다. 고베의 가미소리(면도날)라 불리던 모리, 나고야의 닌자 미와, 검귀 료마를 비롯하여 자신의 공개처형을 선언한 일본내 고수들과의 30:1의 무사시노 혈전, 심지어 싸움소와의 대결까지 그는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증명해 보였다.

세계를 제패한 사나이

무사시노 대혈전을 통해 일본 무도계를 평정한 최배달에게 더 이상의 적은 없어 보였다. 그러나 무도의 본질에 대한 의문과 세상에 존재하는 무수한 종류의 무도에의 호기심은 그의 눈을 세계로 돌리게 만들었다. 무도 여행은 일본뿐만 아니라 아시아, 유럽, 미국으로 이어졌고 그의 불패의 기록들은 불패의 무신으로 신화의 사나이로 그의 이야기를 다룬 만화와 책이 쏟아져 나왔으며 일본 청소년이 선정한 [위대한 인물 10걸] 중에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선정되었다.

1961년 극진회를 창립한 최배달은 1959년과 1962년에 시카고, 뉴욕, 캘리포니아 등지에 분관을 설립, 30개의 기왓장을 격파하는 등 격파술 시범이 전파를 타면서 미국 대중의 지대한 관심을 끌어낸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집필 활동에 전념하기 시작해 ‘가라데 바이블’ 등의 저서를 남겼으며, 1994년 폐암으로 생을 마감했다.

대산 배달

그러나 그는 유독 조국인 한국에서는 잊혀진 이름이었다. 숀 코너리에게 무술고문을 하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으며 방한 했을 때에도 조국은 그를 일본에서 활동하는 태권도의 고수로 소개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조국은 평생 그리움이었다고 한다. 재일 동포 아주머니를 찾아 눈물을 흘리고 극진 공수도의 정착을 위해 귀화를 하면서도 자신의 이름을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대산 배달’이라는 뜻의 오야마 마쓰다츠로 개명했고 끝내 한국 국적을 소멸시키지 않았다.

방학기의 만화 <바람의 파이터>(1989.8.11~1993.7.20 스포츠 조선 연재)를 통해 국내에 알려지기 시작한 지상 최강의 승부사 최배달. 그는 자신의 집을 방문한 제자들에게 손수 차를 끓여줄 만큼 자상한 사람이었고 항상 “밥은 먹고 다니냐”라는 얘기로 인사를 대신했다. 꽃 모양 뒤에 사자의 모양을 그려 넣은 싸인을 가지고 있던 그는 생전 강함과 약함 아름답고 용맹한 것은 같은 것이라 얘기했고 만화를 그린 방학기의 부인에게는 속옷을 선물할 만큼 섬세한 사람이었다.

타고난 능력보다는 스스로의 의지의 중요함과 남자답게 큰 배포를 가질 것을 권유했던 스승의 가르침을 회상하는 현 극진 공수도 총재 마쓰이(문장규)관장은 영화 <바람의 파이터>가 강해지는 것 보다 강해진 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관한 영화가 되었으면 하는 소망을 인터뷰에서 피력했다. <바람의 파이터> 양윤호 감독은 강하기 전에 약한 최배달이 있었고 약해서 부서지지 않기 위해 온 인생을 내던져 자신을 단련시켜 나간 최배달이 있었기에 영화화가 가능했다고 고백했다. 아마도 우리는 <바람의 파이터>를 통해 전설의 파이터이기 전 인간 최배달의 모습을 만나볼 수 있을 것이다.

자료제공: 아이비전 엔터테인먼트

만화 속 최영의(최배달)의 모습

파워 whitehol
2005.03.04 14:19

극진(極眞) 가라데를 창시한 한국 출신의 세계적인 무술가 최영의(崔永宜, 1923-1994)의 이름이 알려지는 데는 만화가 많은 기여를 했다. 여기서는 만화에서 그의 모습을 어떻게 묘사하는가 보기로 한다. 만화의 영향으로 원래 성과 일본 이름 오오야마 마스타츠(大山倍達)를 합친 최배달(崔倍達)이라는 이름이 본명보다 더 잘 알려져 있지만, 편의상 호칭을 최영의로 통일하고 존칭은 생략한다.

한국에서 최영의, 또는 최배달이라는 이름을 널리 각인시킨 것이라면 단연 방학기의 <바람의 파이터>이다. ≪스포츠서울≫에 1989년 8월부터 1993년 7월까지 연재되어 한때 최장기 신문 연재 만화라는 기록을 지녔던(주 1) 이 만화는 2004년 양윤호 감독·각본, 양동근 주연으로 영화화되었고, 현재 ≪스포츠서울≫에 재연재되고 있다. 단행본으로는 일일판이라 부르는 얇은 대본소용 단행본으로 2번 발행된 적 있고, 도서출판 길찾기에서 전 10권으로 복간 예정이며 2005년 2월 현재 7권까지 나와 있다. 작가가 키요즈미산 입산 수행(길찾기 복간 단행본 기준 2권) 이후를 소설로 옮긴 책(전 3권, 열림원, 1995)은 한때 절판되었다가 2004년 8월 영화 개봉에 맞춰 재발행되었다.
※주 1: 현재 최장기 신문 연재 만화는 1999년 3월부터 2004년 10월까지 ≪스포츠투데이≫에 연재된 김진태의 <시민 쾌걸>이다.

<바람의 파이터>보다 인지도는 떨어지지만 최배달이라는 이름을 더 먼저 알린 만화는 고우영의 <대야망>이다. 1975년부터 1977년까지 어린이 잡지 ≪새소년≫에 연재된 것으로 여기서는 최영의가 구사하는 무술을 시종일관 태권도라고 부르고 있다. <바람의 파이터>에서 주인공 이름을 최배달로 한 것도 <대야망>에서 영향 받은 것이다. 1977년 ≪새소년≫ 발행사인 어문각에서 전 5권으로 단행본이 나왔고, 1999년 최영의 서거 5주년을 맞아 학산문화사에서 전 6권으로 복간했으나 지금은 절판되었다.

일본 만화 중에는 학산문화사에서 발행되는 <무한의 파이터>(전 17권, 설은미 옮김)가 있다. 1971년부터 1977년까지 코단샤 ≪주간 소년 매거진≫에 연재된 카지와라 잇키(梶原一騎) 원작, 츠노다 지로(つのだじろう, 1-7권)/카게마루 죠야(影丸讓也, 8-17권) 그림 <가라데 외곬 일생>(空手バカ一代, 코믹스판 전 28권, 애장판 전 17권, 講談社)(주 2)을 번역한 것으로, 만화를 원작으로 TV판 애니메이션 영화(주 3)와 영화 3편이 만들어졌다. 1936년에 태어나 1987년에 타계한 원작자 카지와라 잇키는 1960-70년대 인기 만화 스토리 작가로, 야구 만화 <거인의 별>(巨人の星, 카와사키 노보루(川崎のぼる) 그림), 유도 만화 <유도 일직선>(柔道一直線, 나가시마 신지(永島愼二) 그림), 한국에는 <허리케인 조>(전 20권, 서울문화사)로 알려진 권투 만화 <내일의 조>(あしたのジョ―, 치바 테츠야(ちばてつや) 그림)(주 4) 같은 스포츠 만화가 대표작이다.
※주 2: 한국어판은 애장판을 원본으로 한다.
※주 3: 전 47화, 1973년 10월-1974년 9월 방영. 여기서는 주인공이 실명 대신 히쵸켄(飛鳥拳)이라는 가명으로 나온다.
※주 4: <내일의 조>에서는 타카모리 아사오(高森朝雄)라는 필명을 썼다.

사건 자체는 비슷하나 세 편 모두 관련 인물의 이름, 시간 순서가 제각각이다. 예를 들어 <바람의 파이터>에서는 키요즈미산 입산 수행이 전일본 가라데선수권대회 전이나 <무한의 파이터>에서는 대회 뒤로 나오고, <대야망>의 최영의는 곰과도 싸워 이기나 <무한의 파이터>에서는 곰과 결투하는 이벤트를 행하다 경찰의 제지로 중지되고 <바람의 파이터>에서는 곰과 싸우는 사건은 안 나온다.(주 5) 또한 <무한의 파이터>에서는 일본 여성과 결혼한 것으로 나오나 <바람의 파이터>, <대야망>은 이런 사실을 전혀 언급하지 않아 최영의가 결혼도 하지 않고 수행에 전념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같은 인물을 만화로 그린 게 맞나' 하는 의구심마저 느낄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일단 최영의 공식 홈페이지(
http://www.mas-oyama.com)나 극진회 공식 홈페이지(http://www.kyokushin.co.jp) 등에서 공식적으로 전해지는 연대기에는 <무한의 파이터>가 가장 잘 맞는다.(주 6) 그러나 세 만화 모두 무술 수행과 무관한 여러 부분을 생략하고 있다.
※주 5: 대산사업회 홈페이지에는 곰과 싸우려다 무산된 것이 1969년이라고 나온다. 이것이 맞다면 1960년대 후반을 다루지 않은 <바람의 파이터>에서 이 사건이 안 나오는 것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격투가로서 기력이 떨어져갈 때인 40대 후반에, 나아가 1969년은 가라데 역사에 큰 전환점이 되는, 최초의 풀 컨택트(full contact: 보호장비 없이 직접 타격) 방식 대회인 제1회 오픈 토너먼트 전일본 가라데선수권대회가 열린 해인데 이런 중대한 사업을 제쳐두고 그런 이벤트를 계획했다는 것은 신빙성이 의심스럽다. 이렇게 본다면 <바람의 파이터>에서는 곰을 이기지 못했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으려고 일부러 이 사건을 빼놓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주 6: http://www.mas-oyama.com은 잡지 ≪월간 오오야마 마스타츠≫를 내며 최영의를 알리는 데 주력하는 일본의 최영의 기념사업 단체가 만든 홈페이지로, 전북 김제에서 태어난 최영의를 토쿄 출신으로 쓰는 등 최영의의 행적을 왜곡하고 있다. 일본 만화 <무한의 파이터>가 공식 홈페이지의 약력과 잘 맞는 것도 이 때문인데, 이런 정보가 공식화해 있다는 것은 한국에서 최영의라는 인물을 발굴하는 노력이 잘 행해지지 않았다는 반증으로 앞으로 개선해야 할 점이다. 작년 최영의의 세 아들들이 주축이 되어 발족한 대산사업회의 활동을 기대해 본다.

한 인물을 기술하는 데는 여러 수식어가 붙을 수 있다. 최영의도 마찬가지로 한국인 최영의, 무술가 최영의, 구도자 최영의, 극진회 총재 최영의 등 여러 면모가 있는데 세 만화에서 눈에 띄게 차이를 드러내는 부분은 바로 한국인 최영의이다.

<대야망>은 이 부분을 가장 강하게 내세우고 있다. 다른 두 만화에서 나오는,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패망 전까지는 항공학교에 다녔다거나, 패망 이후 한때 야쿠자 밑에서 일했다는 부분을 생략하고 심지어 단무지도 먹지 않는 한국인으로 묘사함으로써 민족주의적인 의도를 강하게 비친다. 각 무술 간의 우열을 비교할 수 있음을 전제로 태권도가 최강임을 강조하고 공수가들을 타도 대상으로 삼는 것도 이런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반면 최영의의 제자가 되는 일본인들은 민족의식과는 무관하게 태권도의 강함에 매료되는 것으로 묘사된다.

<바람의 파이터>에서도 한국인 신분 때문에 가해지는 차별에 분노하고, 같은 한국인 출신인 프로레슬러 역도산에게 동질감을 느끼는 등 정체성이나 민족의식 때문에 고뇌하는 장면이 자주 나오나, 무술 수련 과정은 어디까지나 구도 과정일 뿐 일본이나 일본인을 타도해야 할 대상으로 삼지도 않고 민족적 정체성을 무술 세계에 적극적으로 반영하려 하지도 않는다. 작중에서 최영의가 소설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藏)의 작가 요시카와 에이지(吉川英治, 1892-1962)를 만나 "미야모토 무사시의 삶에서 눈물겨운 자기완성의 고투를 배우고 싶다."고 했듯 그는 일본 것이라도 무조건 배울 것이 없다고 배격하지 않는다.

<무한의 파이터>는 그가 한국 출신임을 철저히 감추고 있다. 한국인에게 온갖 차별이 가해진 것은 부인할 수 없고, 최영의도 기존 무술가들과 다른 길을 걷는 데 더해 한국인이라는 것 때문에 더 심한 비난과 차별을 받아야 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한국인 최영의를 이야기하기 힘들어서 일본인 오오야마 마스타츠를 그려야 했을지도 모르나, 작가는 한 발 더 나아가 그를 충직한 일본인으로 그리고 있다. 1권에서 카미카제 특공대원으로 희생된 동료들을 기리며 '나라를 위해 목숨을 못 바치고 비굴하게 살아 있다'며 안타까워하고, 일본이 전후 피해를 복구하는 과정을 보며 감탄한다. 결혼(단행본 5권) 이후에는 기모노 차림으로 집안을 활보하는 장면도 나온다. 4권에서는 프로레슬러 역도산이 나오는데 그 역시 철저히 일본인으로 묘사된다. 이 때문에 대산사업회가 <무한의 파이터> 한국어판을 발행하는 학산문화사를 고인에 대한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려 한 일도 있었다.

목숨을 건 대결에 임해서는 누구라도 고독한 법이고, 일생을 자기완성을 위한 대결로 삼았던 사람이라면 삶 자체도 보통 사람들과 다르게 고독으로 점철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대야망>이나 <바람의 파이터>에서는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그러한 고독을 배가하는 장치로 쓰이나(실제로 차별이 공공연히 행해졌기에 이를 극적 요소로 쓰는 것이 그렇게 부당한 것은 아니다) <무한의 파이터>는 그 사실을 배제함으로써 사실을 왜곡한 데 더해 내면의 고독감도 그만큼 약화된다. 반면 <대야망>에서는 한국인 최영의가 다른 최영의를 지나치게 누르고 있고 이것이 줄거리를 평면적으로 만드는 요인이 된다. 이런 문제점은 영화판 <바람의 파이터>도 마찬가지다.

세 만화의 무술관도 제각기 다르다. <바람의 파이터>는 가라데를 배웠으나 홀로 수행하는 동안 어릴 적 머슴 범수에게서 배운 권법과 혼합된 형태, 기존 가라데의 형에 얽매이지 않는 독창적인 면을 강조한다. 작중에서도 전일본 가라데선수권대회 해설자를 비롯한 다른 무술가들이 "어떤 가라데 유파와도 닮아 있지 않고, 굳이 말하면 조선의 택견이 연상된다"고 평하고 있다. 나아가 유도, 쿵후, 무에타이, 카포엘라 같은 다른 무술의 요소를 받아들이며 발전할 뿐 아니라 성(性), 과학, 예술 등 여러 원리를 포괄하는 철학의 한 표현으로까지 승화한다. 그런데 최영의 자서전 ≪최배달, 세계격투기행≫에서는 이런 것을 만화에서처럼 강조하고 있지는 않다. 직접적인 원인은 소위 최영의 자서전이 실제로는 대필 작가의 손으로 쓰여졌다는 것이나, 한편으로는 요시카와 에이지의 소설 ≪미야모토 무사시≫에서 형상화된, 다도, 조각, 그림 같은 다른 기예까지 수행의 방편으로 삼은 '검을 든 구도자' 미야모토 무사시의 모습을 방학기가 최영의 일대기에 투영해서 얼마간 과장이 섞인 탓도 있다.(주 7) 참고로 방학기는 <바람의 파이터> 외에 자유당 집권기 정치폭력배들의 이야기인 <감격시대>, 시라소니 일대기 <바람의 아들>과 같은 다른 만화에서도 일본 무사들의 예화를 자주 인용한다.
※주 7: 작품 전체에 영향을 주지는 않으나, 이 과정에서 작가는 한 가지 시대착오를 범하고 있다. 1950년대 초·중반 타 유파 격투가들과 싸우고 외국에서 가라데 시범을 보이면서 최영의가 철사장(鐵砂掌)과 같은 기(氣)의 작용을 레이저 광선, 홀로그램에 비유해서 설명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레이저는 1960년 처음 개발된 것으로 철사장을 레이저 광선에 비유하는 설명은 실제로는 나올 수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앞서도 기술했듯 <대야망>에서는 최영의가 하는 무술이 태권도로 나온다. 특히 다른 두 만화의 최영의는 극진 가라데를 만들어 나가는 반면 <대야망>의 최영의는 이미 체계가 완성되어 있는 태권도를 수련하고 전파한다는 것이 결정적인 차이점이다. 또한 태권도가 가라데보다 우월한 최강의 무술이며 현재 한국에서 수련하는 태권도도 최영의와 관련이 있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최영의가 미국으로 건너가 프로레슬러들과 대결하기 시작한 1952년까지도 태권도라는 이름은 아직 없었고,(주 8) '최강의 태권도'라는 수사를 씀으로써 마치 무술 자체의 우열이나 강약을 비교할 수 있는 것처럼 오해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은 짚고 넘어가야 한다. 한국인 최영의를 어떻게 묘사하는가 설명하면서 <대야망>의 줄거리가 평면적이라고 했는데, 특정한 무술 체계 자체가 우월함을 강조하는 것 또한 주인공을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무엇이 강함인가'를 고민할 필요가 없는 존재로 만든다는 점에서 이에 일조를 한다. 또한 <대야망>은 다른 두 만화에 비해 그림체가 '잘다' 보니 액션 묘사에서도 한계를 보인다.
※주 8: 오픈백과사전
태권도의 역사 항목에 따르면 태권도라는 이름은 1955년 4월 11일에 생겼다 한다. 현대 태권도를 구축한 인물 중 1명인 최홍희가 지은 이름을 이승만 대통령이 승인한 것이다.

<무한의 파이터>의 최영의는 문자 그대로 가라데를 하고, 공식 홈페이지에 실린 약력대로 항공학교 시절 가라데에 입문하는 것으로 나온다. 다른 두 만화가 독창성이나 고유성이라는 덕목으로써 기존 가라데와 극진 가라데를 뚜렷이 차별화하는 반면 <무한의 파이터>에서는 차별성이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이때는 최영의를 일본인으로 그린 것처럼 사실 왜곡이라고만 보기는 어려운 것이, 기본 동작이나 형(型, 카타: 수련을 위한 연속동작. 태권도의 품새에 해당)과 같은 면에서 극진 가라데의 모습은 최영의가 수련했던 전통 가라데 유파 강유류(剛柔流)와 유사하다. 전통 가라데에서 소멸되어 가던 실전성, 극한의 강함이라는 사상을 추구했으나 그 사상을 담은 기본 틀은 기존 가라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나 극진 가라데가 실전성을 추구하며 변하는 과정이 구체적이지 못한 것은 사실이고, 실전성 추구를 사무라이 정신의 연장으로 보는 것도 한국인 최영의를 왜곡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아울러 <무한의 파이터>에서 최영의에게 세계에 가라데를 널리 알리는 홍보 사절이라는 지위를 부여하는(주 9) 것은 <대야망>의 최영의가 가라데를 굴복시키러 일본에 건너갔다는 것만큼 결과론에 치우친 것이다. 그럼에도 강(剛)과 유(柔)가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거나, 신체뿐 아니라 정신을 단련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등 여러 가지를 깨달으며 자신을 단련해 가는 모습이 잘 나오는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다.
※주 9: 이 과정에서 '극진 가라데'가 아닌 '가라데 일반'으로 홍보 대상이 일반화돼 버린다는 것도 지적해야 한다.

사범 최영의, 극진회 총재 최영의와 같은 모습은 <무한의 파이터>에서 가장 잘(정확성 문제를 제쳐두고 분량만으로 평가한다면) 다루어지고 있다. 제목 그대로 가라데 외곬이던 그가 '싸움 가라데' 같은 비난을 받아가며 일개 문파를 키워나가고 세계로 보급하는 과정과 더불어, 최영의가 키워낸 제자들의 면면도 볼 수 있다(10권 이후로 넘어가면 오히려 제자들 이야기가 더 자주 나온다). 한국 만화 2편, 특히 <바람의 파이터>는 무술가로서 한창 때인 1950-60년대의 최영의에 큰 비중이 주어져 있고, 최영의의 1970년대 이후 활동상이나 저술 활동과 같은(몸으로 보여주는 것 이외의) 부분은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세 만화에서 최영의의 어떤 점을 강조하고, 어떤 점에서 한계를 드러내는가를 보았다. 한 인물의 행적을 '정답 그대로' 기록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고, 작품이 나온 시대, 지역적 여건에 따라 한계를 띠는 법이지만, 독자들에게 어떤 사상을 주입할 것인가 하는 의도가 너무 강하게 개입되어 역효과를 주는가는 알고 볼 필요가 있다. 소년 잡지에 연재된 <무한의 파이터>나 <대야망>보다는 스포츠신문에 연재된 <바람의 파이터>가 이런 한계에서 조금 더 자유롭다고 보이고, 실제로 지금까지는 <바람의 파이터>가 최영의라는 인물을 논할 때 기본이 되고 있으나, 모두가 각자 한계를 띠고 있고 최영의라는 인물이 (적어도 한국에서는) 그렇게 깊이 탐구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운 만큼 앞으로 다양한 해석이 나올 가능성이나 필요성은 여전히 크다.


【참고 자료】
1. http://news.joins.com/et/200407/14/200407141817427401a000a600a610.html (중앙일보 2004년 7월 14일자 기사: <무한의 파이터> 비판)
2. http://www.mas-oyama.com (최영의 공식 홈페이지: 일본어)
3. http://www.kyokushin.co.jp (국제가라데연맹 극진회 공식 홈페이지: 일본어)
4. http://www.great-mountain.org (대산사업회 공식 홈페이지)
5. 최영의, 이정환 옮김, ≪최배달, 세계격투기행≫, 자음과모음, 2004.
6. KBS 수요기획 <전설의 승부사, 최배달>, 2003년 9월 3일 방영.
7. http://homepage3.nifty.com/BONKURA/media/karate.html (<무한의 파이터> 애니메이션, 영화 정보: 일본어)
8. http://www.tkdbible.com/korea/history/matter.html (태권도의 가라데 유입설 토론 자료: 하이텔 무예동 글 모음)
9. http://wsp-cgi1.netian.com/cgi-bin/Janus-myweb.cgi?cmd=read&index=bmr&owner=mudonews.com&arg=65 (가라데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