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평 일색이지만 “청빈”만은 평가
조선시대 후기사를 주전공으로 하는 단국대 사학과 김문식 교수는 조선 제22대 군주 정조가 우의정 심환지(沈煥之.1730-1802)에게 보낸 비밀 편지 299통이 발굴됨으로써 “역사 연구에 새로운 장이 열림과 동시에 여러 사람이 곤혹스러워지게 됐다”고 말했다.요즘 들어 한창 ’개혁군주’로 주가를 높여온 정조가 이 편지에서는 적어도 본능에 충실한 모습으로 나타났으며, 더구나 그 모습은 온화하고 사려깊은 성군(聖君)이라기보다는 격정을 참지 못하는 ’다혈질의 막후 정치가’에 가깝기 때문이다.
9일 정조어찰 발굴을 공개한 기자회견장에서 언론의 관심은 정조 독살설에 쏠렸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심환지는 정조와는 정치적 대립관계에 있던 노론 벽파(僻派)의 거두이며, 심지어는 멀쩡하던 정조가 갑작스레 죽은 것은 독살됐기 때문이며, 그 주범으로 바로 심환지가 꼽혔기 때문이었다.
주로 소설과 드라마를 통해 퍼지게 된 이런 정조 독살설에 대한 질문이 쏟아지자, 이번 자료 발굴과 분석에 깊이 관여한 김 교수와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는 “적어도 이번 어찰에서 나타난 정조의 병세를 볼 때 독살설은 사실이 아님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이는 그만큼 이번 어찰 중에 정조의 병세가 심상치 않았음을 증언하는 정조 자신의 언급이 많기 때문이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이번 비밀 편지는 정조만이 아니라 심환지라는 인물도 전혀 새롭게 보게 하는 계기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즉, 심환지를 괴롭힌 정조 독살설의 주범이라는 오래된 혐의도 벗게 된 것이다.
일반의 통념이건 학계의 분석이건 가릴 것 없이 그동안 심환지에 대한 평가는 결코 호의적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는 ’개혁군주’ 정조의 앞길을 가로막는 수구보수파의 거두일 뿐이며, 정조가 사망한 직후인 1801년에는 대리청정을 하던 정순왕후를 등에 업고 이른바 신유박해를 일으켜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거나 유배에 처하게 하는 주동자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신유박해의 주된 피해자가 벽파와는 정치적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시파(時派) 인물들이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정약용 또한 이 신유박해로 인해 18년에 이르는 유배생활을 가게 됐으며 천주교도들이 대거 처형됐다.
하지만 이렇게 기세등등했던 노론 벽파도 1802년 심환지가 사망하고, 1805년에 정순왕후까지 타계하자 집권세력에서 밀려났다. 이후 조선 정국은 농암 김창협에서 뿌리를 찾는 안동김씨 중심의 시파가 호령하는 시대로 들어갔다.
철종시대에 편찬된 순조실록은 당연히 이들 시파가 편찬을 주도했다. 그러니 심환지에 대한 평가가 호의적일 리 만무하다.
실제 순조실록 2년 임술년(1802) 10월18일 대목에는 이날 “영의정 심환지가 졸(卒)했다”는 기록 뒤에 그의 생애와 행적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내린다. “본관이 청송(靑松)으로 국구(國舅.왕비의 아버지) 심강(沈鋼)의 후손이다. 젊어서 김귀주(金龜柱)와 더불어 매우 절친한 벗이 되어 홍국영(洪國榮)을 공격하는 논의를 극력 주장하다가 김귀주가 실패하자 심환지는 하급 관리로 계속 있었다. 그러다가 정묘(正廟.정조) 시대 중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발탁되어 정동준(鄭東浚)이 죄를 얻은 이후에 병조판서에 오르고 드디어 재상이 되어 한쪽 편의 영수(領袖)가 되어 세도(世道)의 책임을 맡은 사람으로 자임했다”
그러면서 순조실록은 심환지가 정조 사망 이후 정순왕후 수렴청정 시대 초기에는 영의정이 되어 나라 정치를 오롯이 했으나 “본래 아둔하고 재능이 없어 공적은 보잘 것 없었고, 오직 당동벌이(黨同伐異.같은 무리는 끌어주고 다른 무리는 배척함)만 일삼아 김관주(金觀柱)나 정일환(鄭日煥)과 같은 무리만을 관직에 진출시켰을 뿐이다”고 덧붙인다.
하지만 이런 평가 말미에 순조실록은 “권위(權位.자리)가 높았음에도 자못 검소하다는 말을 들었다”는 말을 덧붙였다.
이것이 심환지에 대한 거의 유일한 호의적인 평가다.
나아가 이런 평가는 심환지가 과연 역사에 기록된 것처럼 정말로 악인의 화신인지를 의심케 한다.
심환지가 이끌던 노론 벽파는 어떤 특징을 지닐까?
조선사상사 전공인 권오영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송시열과 권상하, 그리고 한원진으로 이어지는 노론 정통파로 주자성리학적 명분론과 의리론을 사상적 기반으로 삼는다”고 평가한다.
이런 특성은 왜 이들이 서학(西學)이라고 일컬어지던 기독교 사상을 용납할 수 없었는지를 설명할 수 있다.
심환지는 한때 그에게서 핍박받던 시파가 정권을 다시 잡으면서 당쟁만 일삼고 무고한 사람들을 죽인 인물로 폄훼됐으며 그런 인식이 지금까지도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인식이 더욱 광범위하게 퍼진 데는 개혁군주로서의 정조, 개혁가로서의 정약용, 천주교와 개신교계의 시각 등이 종합적으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정조와 다산이 개혁가로서 거듭 날수록 심환지는 그만큼 그들을 견제하고 억압한 존재로 더욱 커져 갔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정조와 정약용, 신유박해에 대한 논저는 쏟아지고 있음에 반해, 심환지에 대한 연구성과는 적어도 학계에서는 “전무”라고 해도 틀리지 않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김문식 교수는 “조선후기사도 이제는 정조나 다산 중심 시각에서 벗어나 다양하게 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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