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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민구제책 (조선일보 2009.02.13)

세종은 재위 4년(1422) 흉년이 들자 시신(侍臣)들에게 "매일 계사(啓事)에서 황정(荒政)에 관한 일을 최우선으로 삼도록 하라"고 말했다. '황정'은 백성들의 곤궁함을 구하는 구황정책(救荒政策)을 뜻한다. 세종은 승지들이 매일 황정에 관한 사항을 가장 먼저 보고하라고 명한 것이다.

정조 재위 7년(1783) 여러 지방에 기근(饑饉)이 든 상황에서 국왕 탄신일이 다가오자 지방관과 장수들이 전문(箋文)을 올려 축하했다. 정조는 "내가 한결같이 근심하는 것은 우리 백성일 뿐이다. 백성이 신음하는데 무슨 축하를 한단 말인가"라고 물리쳤다. 정조는 재위 18년(1794) 11월 화성(華城)의 성역(城役)까지 중지시키면서 "지금은 황정 한 가지 일에만 정신을 쏟는 것이 가장 좋다"고 말했다. '국조보감(國朝寶鑑)'에 나오는 사례들인데 두 임금이 왜 조선 전·후기를 대표하는 성공한 임금이 되었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백성들의 고통을 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삼았던 것이다.

세조 3년(1457) 가뭄이 들자 우사간 서거정(徐居正)은 상소를 올려, "황정에서 가장 우선적인 것은 경비입니다. 지금 '육전(六典)' 등의 편찬 사업은 당장 급한 일이 아니니 모두 정지하소서"라고 청했다. 재난으로 고통에 빠진 백성들을 '학철지부'라고 한다. '장자(莊子)' 외물(外物)편에 나오는데 수레바퀴 자국에 생긴 아주 작은 웅덩이에서 신음하는 물고기를 뜻한다.

가난한 장주(莊周)가 감하후(監河侯)에게 곡식을 빌려달라고 청하자 세금을 거두면 주겠다고 답했다. 장주는 수레바퀴 자국에서 신음하는 붕어가 "물 조금만 있으면 살 수 있다"고 하소연했으나 "남쪽 오월(吳越)의 왕에게 가서 촉강(蜀江)의 물을 보내주겠다"고 하자 "차라리 건어물 가게에서 나를 찾으라"고 화내더라고 대꾸했다. 빈민에게는 당장 지금이 급하다는 교훈이다.

정약용(丁若鏞)은 황해도 곡산 부사 시절 관내 모든 백성들의 상황을 체계적으로 적은 '호적의(戶籍議)'를 만들었다. 호적의만 펼치면 누가 구휼에서 소외되고 누가 부당하게 수령했는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대통령에게 따로 편지를 보내 혹시 읽히지 않을까 노심초사하지 않아도 되었으니 지금도 필요한 호적의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