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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바로알기

신라 삼국통일의 또다른 `힘` (한국일보 2009.06.03)

신라 삼국통일의 또다른 '힘' 보는 듯

1600년전 기마장수 갑옷·마구류 출토

경제력과 중장기병 군사력도 큰 몫 입증

완벽한 장비 일체 고구려 고분보다 생생

철제 갑옷을 입고 중무장한 말에 올라타 군대를 호령하는 용맹한 삼국시대 장군의 모습. 누구나 고구려 장수를 떠올릴 것이다. 기마 문화가 발달한 고구려와 달리 신라의 경우 군사력보다는 금 생산에서 비롯된 막강한 경제력으로 삼국통일을 이뤘다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었다.

그럴만도 한 것이 그간 중장기병(重裝騎兵), 즉 중무장을 하고 말을 탄 채 싸우는 무사의 모습이 유적으로 나타난 곳은 안악3호분, 쌍영총, 삼실총, 개마총 등 고구려 고분벽화밖에 없었다.

한데 삼국시대 중장기병의 유물 일체가 처음으로 출토된 곳은 뜻밖에도 신라의 고도 경주였다. 2일 경주시 황오동 361번지 일대 쪽샘지구 고분에서 모습을 드러낸 '비늘식 갑옷'인 찰갑(札甲)과 말이 착용하는 마갑(馬甲) 등 신라 중장기병 유물은 신라가 발빠르게 북방의 중장기병 제도를 도입해 군사력을 키웠음을 입증한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룬 것이 단순히 경제력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증거이다.

물론 예전에도 부분적으로 관련 유물이 출토된 적은 있었다. 1992년 경남 함안군 마갑총(馬甲塚)에서는 말이 착용하는 마갑이 나왔다. 사람이 착용한 갑옷의 경우, 큰 철판으로 만든 판갑(板甲)이 종종 출토되기도 했다.

그러나 비늘처럼 작은 쇳조각을 붙여 만든 찰갑은 일부 부속구 형태로만 출토됐으며, 그 원형을 짐작할 수 있는 자료는 고구려 고분벽화뿐이었다.

이건무 문화재청장은 "고구려의 경우 죽은 사람이 쓰던 물건을 함께 묻지 않고 무덤 바깥에 둬 가져가도록 하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에 당시 중장기병의 유물이 제대로 남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이번 발굴을 이끈 지병목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소장은 "쪽샘지구 고분에서 출토된 마갑은 마갑총의 것보다 상태가 훨씬 양호하고 더욱 완전한 모습"이라며 "이렇게 마갑과 찰갑을 비롯해 부속구 일체까지 완전한 형태로 출토된 것은 국내는 물론 동아시아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했다.

2007년부터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조사를 벌이고 있는 쪽샘지구는 4~6
세기 신라 왕족과 귀족들의 집단 묘역이다. 이번에 유물이 나온 목곽묘인 '쪽샘지구 C10호묘'의 경우 오래 전에 봉분은 사라져 버리고 시신 등을 매장하기 위해 판 구덩이인 묘광(墓壙)만 남아있는 상태다.

동서 방향으로 주곽(主槨ㆍ440x220㎝)을
파고 그 안에 380x160㎝ 크기의 목곽을 안치했으며, 그 서쪽에는 부곽(副槨ㆍ260x220㎝) 구덩이를 마련해 그 안에 다시 목곽(210x160㎝)을 둔 것으로 밝혀졌다. 아직 정확한 연대 측정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함께 나온 토기의 형식을 볼 때 5세기 전반으로 추정된다.

주곽에서는 찰갑과 마갑 외에 자루에 둥근
고리가 달린 긴 칼인 찰갑환두대도(環頭大刀)와 사슴뿔 모양의 자루를 가진 작은 칼인 녹각병도자(鹿角柄刀子)도 발견됐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환두대도의 자루 부분이 동쪽으로 향한 것으로 보아 이곳에 묻힌 사람은
머리를 동쪽에 둔 채 갑옷 위에 안치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주곽의 시신 머리 쪽에서는 고배(高杯ㆍ굽다리접시)와 장경호(長頸壺ㆍ목긴 항아리) 등의 토기와 창, 도끼 등의 철기류가 나왔고, 부곽에서는
대호(大壺ㆍ큰항아리)와 유개사이부호(有蓋四耳附壺ㆍ덮개를 갖추고 네 귀가 달린 항아리) 등의 토기류도 수습됐다.

1개월여 전 처음 발견된 이번 유물은 아직 수습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다. 유물의 보존 처리가 끝나면 그간 평면으로만 존재했던 삼국시대 기마 장수의 모습이 입체적으로 되살아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