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바로알기

이덕일 주류 역사학계를 쏘다 (한겨레 2009.05.20)

이덕일 주류 역사학계를 쏘다

현재진행형 역사 왜곡 뒤엔 ‘쓰다·이병도 짙은 그림자’

① 식민사관과 노론사관

우리 시대의 ‘문제적 역사학자’인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이 주류 역사학계에 도발적인 도전장을 던진다.

이 소장은 현재 역사학계의 주류 사관이 식민사관과 노론사관에 젖줄을 대고 있다고 주장한다. 학계에서 정설이나 통설로 굳어져 있는 기존 이론체계를 뒤집어엎겠다고 한다. 한겨레는 앞으로 10여차례에 걸쳐 수요일치 지면에 이 소장의 글을 실을 예정이다.

한겨레가 이 소장의 주장을 수긍하거나, 동조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소장의 발언이 불씨가 돼, 우리 역사의 진실에 대한 논쟁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기를 기대한다. 아울러 역사 교과서를 덮으면서 잊혀진 독자들의 아스라한 기억들을 끄집어내, 역사가 우리 현실에 살아있음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이 소장의 주장에 대한 반론은 언제든 환영하며, 지면을 내는 데 아끼지 않을 예정이다.


» 중국사회과학원에서 공식 간행한 진, 한시대 역사지도. 만리장성을 한반도 깊숙이 끌어들이고 있다.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쓰다 소우키치 식민사관, 냉전시대 거치며 정설로


노론사관 더해 역사 조작, 항일 무장투쟁사 말살


학문권력 역사해석권 독점…동아시아 평화 막아

중국은 동북공정에서 만주는 물론 한반도 북부까지 중국사의 영토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북한 유사시 군사 개입할 수 있는 역사적 근거를 마련한 것이다. 그 핵심 논거는 한(漢)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했다는 한사군(漢四郡)에 있다. 한사군의 중심지인 낙랑군이 고조선의 수도였던 평양 지역에 있었고 나머지 삼군이 한강 이북에 있었으므로 한강 이북이 고대 중국의 식민지라는 주장이다.

이런 동북공정에 맞서기 위해 설치한 기관이 고구려연구재단과 그를 계승한 동북아역사재단이다. 그런데 동북아역사재단의 현행 누리집은 ‘올바른 역사’라는 항목에서 “기원전 3~2세기 준왕 대의 고조선과 위만조선은 평양을 도읍으로 하고 있었고…”라고 쓰고 있다. 고조선의 왕성인 평양에 낙랑군을 설치했다는 중국 동북공정의 내용과 일치한다. 고구려연구재단도 한때 낙랑군의 위치를 평양이라고 표시한 역사 지도를 올렸다가 네티즌들의 항의를 받고 내린 적이 있었다. 동북공정에 대응하라고 설치한 국가 연구기관들이 오히려 동북공정 논리에 동조하는 이상 현상이 진행중인 것이다.

‘낙랑군=평양 지역설’이 일제 때 경성이 현재의 서울이었던 것처럼 확고부동한 사실이라면 모른다. 그럴 경우 우리는 ‘과거 한강 이북은 중국사의 영토였지만 지금은 아니다’라는 수세적 방어에 나서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미 1963년에 북한의 리지린은 <고조선연구>에서 한사군은 한반도에 없었다는 사실을 논증했다.

남한에서도 문정창 선생이 1969년에 간행한 <고조선사연구>를 통해, 그리고 윤내현 교수도 <한국고대사신론>(1986)을 통해, 필자 등도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2006) 등의 저서를 통해 한사군이 한반도 내에 있지 않았다고 논증했다.

그럼에도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가 연구기관들은 동북공정에 맞서는 이런 이론을 완전히 묵살한 채 한사군이 한반도 내에 있었다는 것이다. 고구려연구재단과 동북아역사재단이 고구려 문제에 대해서는 목청을 높이면서도 고조선 문제에 대해서는 사실상 침묵으로 일관하는 속내도 여기에 있다. 이는 현재의 사학계 주류의 지형에 근본적이고도 구조적인 문제가 있음을 의미한다.

동북공정 외려 동조하는 국가연구기관

» 쓰다 소우키치. 만주철주식회사와 조선사편수회 출신으로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 등의 식민사학 이론을 만들어낸 인물이다.

한국은 대학 내의 강단사학자들과 대학 바깥의 재야사학자들 사이에 역사인식을 두고 집단적 갈등을 겪고 있는 유일한 나라이다. 재야사학자들은 강단사학자들을 일제 식민사학의 후예라고 비판해왔다.

이들의 주장에 무리한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 사학계는 해방 이후 지금까지 조선사편수회가 만든 한국사 인식체계에 대한 종합적 검토와 비판을 하지 않아 이런 비판을 자초했다. 비판은커녕 조선사편수회의 주요 논리가 그대로 한국사의 정설로 행세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재야사학자들은 일제 식민사학의 정점에 국사학계의 태두(泰斗) 이병도 박사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식민사학의 교주는 이병도 박사가 아니다. 진정한 교주는 이병도의 와세다대 유학 시절 스승이자 만철(滿鐵)과 조선사편수회 출신의 쓰다 소우키치(津田左右吉)다.

현재 한국 고대사학계에서 정설로 인정하고 있는 이병도의 이론은 쓰다 등의 이론을 그대로 계승했거나 약간의 수정을 가한 것에 불과하다. 쓰다의 한국 고대사관은 간단하다. 남만주철도회사의 위촉을 받아 쓴 <조선역사지리> 등의 저서에서 쓰다는 한반도 북부에는 낙랑군을 비롯한 한사군이 있었고 한강 남쪽에는 모두 78개의 소국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고 서술했다.

그리고 한반도 남부에 고대판 조선총독부인 임나일본부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쓰다는 이런 주장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다. 이를 사실로 전제하고 다음의 논리를 전개하는 비학문적 태도를 취했던 것이다. 한반도 북부의 막강한 한사군이 왜 78개 소국으로 우글거리는, 비옥한 삼남지역으로 진출하지 않았는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아니 설명할 수 없었다. 그래야 임나일본부가 성립할 수 있었다.

문제는 <삼국사기>가 한강 이남에 일찍부터 신라와 백제라는 강력한 고대국가가 존재했다고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삼국사기> 기록대로라면 임나일본부는 존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쓰다는 <삼국사기> 초기 기록이 조작되었다는 이른바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을 창안해냈다.

혼자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을 주창하면서도 “<삼국사기> 상대(上代) 부분을 역사적 사실의 기재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것은 동아시아의 역사를 연구하는 현대의 학자들 사이에서 이론이 없다”(<삼국사기>의 신라본기에 대하여, 1919)고 마치 여러 학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것처럼 강변했다. 나중에 이병도는 임나일본부설은 부인하면서도 쓰다의 <삼국사기> 불신론은 약간의 수정을 가해 받아들였고 그 제자들에 의해 현재 정설(定說)이 되었다.

» 이병도 박사.한국 사학계의 태두로 인정받고 있으나, 그의 이론의 일정 부분은 일제 식민사학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도 함께 제기되고 있다.

필자는 이병도 박사뿐만 아니라 그 제자들이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병도가 쓰다의 고대사 인식체계에 가문 당색(黨色)이었던 노론사관을 가미해 만든 한국사 인식체계를 제자들이 한국사의 주류 학설이자 정설로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조선사편수회 전력 때문에 해방 공간에서 진단학회의 제명 대상이 되기도 했던 이병도는 냉전체제가 수립되면서 백남운 같은 사회경제사학 계열의 사학자들이 월북하고 정인보 같은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한국전쟁 와중에 납북되면서 한국 역사학계의 태두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해방 후 일제 식민사학에 대한 종합적 검토와 비판 과정을 거쳐 새로운 한국사 인식체계를 수립하는 것은 좌우를 넘는 시대적 과제였으나 이병도와 그 제자들은 이른바 실증사학이란 미명 아래 조선사편수회에서 만든 한국사 인식체계의 기본은 그대로 둔 채 약간의 수정을 거쳐 역사학계의 정설로 만들었다.

다른 이론 제기하면 재야사학자로 몰아

여기에 노론사관을 가미해 율곡 이이의 십만양병설을 조작해내고, 서인(노론)이 남인을 쫓아내고 정권을 잡은 것을 소인이 쫓겨나고 군자가 진출했다는 뜻의 대출척(大黜陟)으로 표현하고, ‘영·정조 시대’란 명칭으로 노론과 대립했던 정조를 영조의 부속 인물처럼 만들었다. 그리고 “역사학자는 현대사를 연구하면 안 된다”는 기상천외한 논리로 독립군의 항일 무장투쟁사를 말살시켰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인식체계를 하나뿐인 정설(定說)로 만든 데 있다. 사실 일본인들 밑에서 역사를 연구한 이병도의 인식체계는 한계가 뚜렷할 수밖에 없었다. 후학들은 이런 한계를 인식하고 식민사관과 이병도 사관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통해 계승할 것과 단절할 것을 구분해야 했음에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정설로 만들었다.

모든 이론은 상대적 진실에 불과하다는 점을 외면한 채 이를 종교적 도그마처럼 만들었다. 이론(異論)을 제기하는 학자는 재야에 있든 강단에 있든 재야사학자로 몰아 추방하고, 이론의 전체 논리 중 한두 가지 문제를 확대해 전체를 부정하는 방식으로 유일무이한 학문권력을 구축하고 역사해석권을 독점했다.

필자는 21세기 세계화시대를 사는 우리 2세들이 더 이상 식민사관과 노론사관으로 점철된 역사관으로 교육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살아 있는 일제 식민사관은 현재 동북아의 화해와 평화 체제 구축에 큰 장애가 되고 있다. 식민사관에 대한 동아시아의 진정한 반성이 화해와 평화 체제 구축의 토대가 될 것이다. 이런 목적을 둔 본 연재는 크게 네 부분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① 한사군은 한반도 내에 존재했는가? ②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은 타당한가? ③ 노론사관은 어떻게 조선 후기사를 왜곡시켰는가? ④ 독립군의 항일 무장투쟁은 존재하지 않았는가?’ 물론 모든 주제에 대한 반론을 환영한다.

» 이덕일 한가람 역사문화연구소장.
이덕일 숭실대 사학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고 ‘동북항일군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7년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를 필두로 한국사의 쟁점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대중역사서를 집필해왔다.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 1~3>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조선 왕 독살사건>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등이 대표작이다.

중국이 밑돌 깔고 일제가 못박은 ‘평양’의 한사군

② 한사군의 미스터리

현재 주류 사학계는 일제 식민사학의 구도에 따라 평양 일대를 한사군 낙랑군 지역이라고 비정하지만 일제도 처음부터 그렇게 주장했던 것은 아니다. 조선통감부가 도쿄대 공대의 세키노 다다시(關野貞)에게 평양의 석암동을 비롯한 전축분(벽돌무덤) 조사를 의뢰할 때만 해도 ‘고구려 고적조사 사업’의 일환이었다. 이런 ‘고구려 유적’이 ‘한(漢) 낙랑군 유적’으로 바뀌게 된 데는 도쿄대 도리이 류조(鳥居龍藏)의 역할이 컸다.

일제, 식민지성 강조하려
한사군을 조선사 시작점으로 조작

중국 기록 미심쩍은데도
실증사학 미명아래
한국사 정설로


도리이 류조는 만철(滿鐵)의 의뢰로 남만주 일대에서 ‘한(漢) 낙랑시대 고적조사 사업’을 수행했던 인물이다. 남만주 유적조사를 마친 그는 대동강변에서 중국식 기와를 발견했다면서 이 일대를 낙랑군 지역이라고 주장했으나 별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 유적들이 고구려 유적이라는 것은 일종의 상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감부가 조선총독부로 바뀐 후 도리이 류조가 ‘고구려 고적조사 사업’을 ‘한 낙랑시대의 고적조사 사업’으로 개칭하자고 제안하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훗날 조선사편수회를 주도하는 이마니시 류(今西龍)도 처음에는 평양 일대의 유적을 고구려 유적으로 보았으나 총독부의 방침을 알고는 태도가 달라졌다.

이후 이마니시 류는 가는 곳마다 2000년 전 한나라 시대의 와당과 봉니(封泥)를 발견하고 2000년 전에 세웠으나 그간 아무도 보지 못했던 ‘점제현 신사비’를 최초로 발견하는 ‘신의 손’이 되었고 평양 일대는 낙랑군 유적이 되어갔다.

» 평양에 있는 기자의 묘. 조선의 유학자들은 기자가 조선까지 왔다고 믿고 이를 근거로 조선인과 중국인을 같은 민족이라고 생각했다. 일제는 한국과 중국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한국인을 일본인과 동족으로 만들기 위해 기자를 부인했다.

일제, 평양 일대 낙랑군 유적지 규정

그런데 평양지역을 낙랑군의 치소라고 규정해놓고 보니 기자(箕子) 문제가 발생했다. <상서대전(尙書大典)> <사기> 등에 따르면 기자는 은(殷)나라 주왕의 그릇된 정사를 간쟁하다가 투옥된 인물이다. 주(周) 무왕이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석방시켜주었으나 기자는 주나라를 인정할 수 없다면서 동쪽으로 망명했다.

<한서> ‘지리지’는 “은나라의 도가 쇠하자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고 그의 망명 전에 조선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이는 물론 단군조선일 것이다. 현재 요령성 대릉하 상류 객좌현(喀左縣)에서 기후(箕侯)라는 명문이 발견된 것을 계기로 기자가 이 지역까지 왔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런데 조선의 상당수 유학자들은 기자가 한반도까지 왔다고 믿고 조선과 중국을 같은 민족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이 때문에 조선총독부는 평양 지역에서 출토된 중국계 유물들이 조선과 중국이 같은 민족이라는 관념이 강해지는 계기가 될 것을 염려해야 했다.

조선총독부는 1916년 <조선반도사 편성 요지 및 순서>에서 “조선반도사의 주안점은… 첫째 일선인(日鮮人: 일본인과 조선인)이 동족(同族)인 사실을 분명히 할 것…”이라고 규정했는데 이 목적에 장애가 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이마니시 류는 1922년 ‘기자조선 전설고(考)’에서 기자는 낙랑의 한(韓)씨가 가문을 빛내기 위해 기자의 후예라고 가탁했을 뿐 조선인들의 조상이 아니라고 부인했다. 현재 한국 사학계 주류가 단군을 ‘만들어진 전설’이라고 부인하고 기자도 부인하는 것은 이마니시 류가 만든 이런 이론을 무비판적으로 따른 것뿐이다.

‘한사군→임나일본부→조선총독부’

이마니시 류는 1935년 출간한 <조선사의 길잡이>에서 한국사(조선사)의 시작을 한사군부터라고 서술했다. 한국사의 주요 흐름을 ‘한사군→임나일본부→조선총독부’로 연결시켜 일제의 한국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렇게 평양지역은 낙랑군이 설치되었다는 서기전 108년보다 무려 2100여년 후에 일제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한사군의 중심지인 낙랑군 지역으로 재탄생되었다.

한국사의 식민지성을 강조해 일제의 식민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서였다. 해방 후 신생 대한민국은 일제가 만든 이런 역사상에 대한 종합적 검토를 통해 일제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새로운 한국사 체계를 만들어야 했다. 그러나 해방 후 수립된 냉전 구도 속에서 일제 식민사학은 실증주의란 미명 아래 한국사 주류 학설로 계속 살아남았다. 그리고 한사군이 한반도 내에 존재했고 낙랑군이 평양 일대에 존재했는지에 대해 이견을 제시하면 재야로 몰아 학계에서 추방하는 것으로 하나뿐인 정설로 만들었다.

» 사마천(왼쪽) · 기자(오른쪽)

그러나 이를 정설로 받아들이기에는 의문점이 너무 많다.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20세기에 만든 후대의 시각이 아니라 한사군이 설치되었다는 서기전 2세기의 당대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의문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먼저 <사기>의 저자 사마천(司馬遷)이 여러 의문점을 제공한다.

<사기>에 따르면 한 무제는 고조선을 정벌하기 위해 좌장군 순체와 누선장군 양복에게 5만7000명의 대군을 주었다. 두 장군은 1년이 넘는 전쟁 기간 동안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고조선 왕실을 무너뜨리고 귀국했다. 그러자 한 무제는 좌장군 순체는 사형시킨 후 시신을 조리돌리는 기시(棄市)형을 내렸고, 누선장군 양복도 사형선고를 내렸다가 막대한 속전(贖錢)을 바치자 목숨은 살려주되 귀족에서 서인(庶人)으로 강등시켰다. 위산(衛山)은 고조선과 강화협상에 실패했다는 이유로 이미 사형 당했으며, 제남(濟南)태수 공손수(公孫遂)도 마음대로 군사형태를 바꾸었다는 이유로 사형 당했다.

그래서 사마천은 “태사공(太史公)은 말한다”라는 사평(史評)에서 “양군(兩軍)이 함께 욕을 당하고, 장수로서 열후(列侯)가 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라고 혹평하고 있다. 게다가 기시형을 당한 좌장군 순체는 “본시 시중(侍中)으로 천자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는 인물이어서 무제가 이 전쟁 결과에 얼마나 분개했는가를 말해주고 있다. 전쟁에 나갔던 장수가 승전하고 돌아오면 제후(諸侯)로 봉하는 것이 관례였지만 고조선과 전쟁에 나섰던 장수들은 제후는커녕 모두 사형 당했다. 숱한 고생 끝에 적국의 수도를 점령하고 그 지역에 식민통치기구를 설치하고 개선한 장수들을 사형시키는 왕조가 존속할 수 있을 것인가?

사마천이 제공하는 의문은 이뿐이 아니다. 사마천(서기전 135년~서기전 90년)은 이 전쟁의 목격자였음에도 “이로써 드디어 조선을 정벌하고 사군(四郡)으로 삼았다”라고만 적고 사군의 개별적 이름도 적지 않았다. 먼 옛날의 전쟁도 현지답사를 통해 꼼꼼하게 확인했던 이 역사가는 왜 한사군의 이름도 적어 놓지 않은 것일까?

한사군의 이름은 조한전쟁이 끝난 200여년 후에 반고(班固)가 편찬한 <한서(漢書)> ‘무제(武帝) 본기’에 처음 등장한다. 낙랑·임둔·현도·진번이란 명칭이 이때 나타나는 것이다. 전쟁의 목격자 사마천이 적지 않았던 이름을 200여년 후의 반고는 어떻게 적을 수 있었을까? 반고는 흉노 정벌에 나섰던 두헌(竇憲)을 따라 종군했던 데서 알 수 있듯이 중화(中華)사관이 강한 인물이었다. 그런데 <한서>도 의문투성이다. 한사군에 대한 기술들이 서로 모순되는 것이다.

<한서> ‘무제본기’는 4군으로 적었으나 ‘지리지’는 “현도·낙랑은 무제 때 설치했다”고 2군으로 적었으며, ‘오행지’(五行志)는 “두 장군이 조선을 정벌하고 삼군을 열었다”고 3군으로 적었다. 같은 <한서>지만 ‘사군’(무제 본기), ‘이군’(지리지), ‘삼군’(오행지)으로 제각기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사기> <한서>같은 고대 역사서가 의문투성이로 기록하고 있는 한사군을 한반도 내에 있었다고 확고하게 각인시킨 세력은 물론 일제 식민사학이었다. 한국사의 시작을 식민지로 만들려는 의도였다. 이를 한국 주류 사학계가 현재까지 정설로 떠받들자 중국은 ‘이게 웬 떡이냐’하고 동북공정에 그대로 차용해 ‘한강 이북은 중국사의 영토였다’고 주장하고 있는 상황이다.

중국과 일본은 예부터 역사를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한 전통이 깊은 나라들이다.

중국은 고대부터 춘추필법이란 미명 아래 사방의 다른 민족들에 대해 의도적으로 비하하는 서술을 해왔다. <한서> ‘위현(韋賢)열전’은 “동쪽 조선을 정벌함으로써 흉노(匈奴)의 왼쪽 팔을 끊었다”라고 적고 있는데 조선과 흉노의 연관성은 차치하고라도 다른 민족의 이름을 ‘오랑캐(匈) 종(奴)’이라고 적는 데서 중국인들의 비뚤어진 시각을 알 수 있다. 서기 720년에 편찬된 <일본서기(日本書紀)> 역시 19세기에 나가미 지요(那珂通世)가 시조 신무(神武)의 즉위년이 조작되었다는 참위설(讖緯說)을 주장한 것처럼 역사왜곡에 있어서는 뒤지지 않는 나라였다. 중화 패권주의 사관의 발로인 중국 동북공정은 20세기 일제 황국(皇國)사관의 21세기 판에 불과한 것이다.

해방 6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의 눈이 아니라 타자의 눈으로 그린 것을 한국사의 시작이라고 가르친다면 후세에게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③ 낙랑군은 어디 있었나


2천년전 한서 “베이징 일대에 위치”


후한서 “낙랑=옛 조선, 요동에 있다”


사기 “만리장성 시작되는 곳에 자리”

» 낙랑군에 있었다는 갈석산. 현재 하북성 창려현에 있는데 진시황과 조조가 올랐던 유명한 산이다.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한사군의 낙랑군이 평안남도와 황해도 북부에 걸쳐 있었고 그 치소(治所:낙랑태수부)는 대동강변의 토성동이라고 주장했다. 현재 중국은 이 논리에 따라 한강 이북을 중국사의 강역이었다고 주장한다.
한국의 동북아역사재단의 누리집은 “위만조선의 도읍 부근에 설치된 낙랑군 조선현의 치소가 지금의 평양시 대동강 남안의 토성동 토성”이라고 이들의 논리에 동조하고 있다.
일제 식민사학과 중국 동북공정, 그리고 한국 주류 사학계는 낙랑군의 위치에 관해서는 삼위일체 한 몸인 것이다. 그러나 대동강변의 토성동은 낙랑군이 설치된 지 2천여년 후에 조선총독부에 의해 낙랑군의 치소인 조선현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이 역시 일제 식민사관이 아니라 낙랑군 설치 당시의 시각으로 그 위치를 찾아야 한다.

먼저 서기 1세기 말경 반고가 편찬한 <한서>의 ‘설선(薛宣)열전’은 “낙랑은 유주(幽州)에 속해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한나라 유주는 지금의 베이징 일대였다. <후한서> ‘광무제 본기’는 “낙랑군은 옛 조선국인데, 요동에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현재는 만주를 가로지르는 요하(遼河)를 기점으로 요동과 요서(遼西)로 나누지만 과거의 요하는 현재보다 훨씬 서쪽이었다. 현재의 요하를 기준으로 삼더라도 만주 요동이 평안남도나 황해도가 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후한서(後漢書)> ‘최인 열전’도 “장잠현은 낙랑군에 속해 있는데 요동에 있다”고 쓰고 있다. 고대의 어떤 사료도 낙랑군을 한반도 내륙이라고 쓰지 않았다. 낙랑군의 위치에 대해 가장 많은 정보를 주는 사료는 <사기> ‘하(夏) 본기 태강지리지’이다. “낙랑군 수성현(遂城縣)에는 갈석산(碣石山)이 있는데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지점이다”라는 기술이다. 이 사료는 낙랑군에 대해 수성현, 갈석산, 만리장성이라는 세 개의 정보를 준다. 이 세 조건을 만족시키는 곳이 낙랑군 지역이 되는 것이다.

한국의 주류 사학계는 이 수성현을 황해도 수안(遂安)으로 비정하고 있다. 이병도가 그렇게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병도 역시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의 이나바 이와기치(稻葉岩吉)가 일제시대 <사학잡지>에 쓴 ‘진장성동단고(秦長城東端考:진 만리장성의 동쪽 끝에 대한 논고)’에서 황해도 수안을 만리장성의 동쪽 끝으로 본 것을 비판없이 따른 것에 불과하다. 이병도의 황해도 수안설은 현재 한국 사학계가 낙랑군을 한반도 내륙으로 비정하는 핵심 이론이기 때문에 그 논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 대동강변의 낙랑 토성. 일제에 의해 낙랑군의 치소로 만들어졌으나 당시에도 수도 자리가 아니라는 반론이 일었다.

군색함 자인한 이병도 ‘황해도설’


한국 주류사학계 무작정 받아들여

“수성현(遂城縣)…자세하지 아니하나, 지금 황해도 북단에 있는 수안(遂安)에 비정하고 싶다. 수안에는 승람 산천조에 요동산(遼東山)이란 산명이 보이고 관방조(關防條)에 후대 소축(所築)의 성이지만 방원진(防垣鎭)의 동서행성의 석성(石城)이 있고, 또 진지(晋志)의 이 수성현조에는 -맹랑한 설이지만- ‘진대장성지소기(秦代長城之所起)’라는 기재도 있다. 이 진장성설은 터무니 없는 말이지만 아마 당시에도 요동산이란 명칭과 어떠한 장성지(長城址)가 있어서 그러한 부회가 생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릇된 기사에도 어떠한 꼬투리가 있는 까닭이다. (이병도, ‘낙랑군고’, <한국고대사연구>)”

승람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뜻하는데 이 책의 황해도 수안조에 ‘요동산’이 나오는데 이것이 갈석산이고, 방원진의 석성이 만리장성이라는 뜻이다. 요동산이 왜 갈석산으로 둔갑했는지 또 벽돌성인 만리장성과 전혀 다른 방원진 석성이 어떻게 만리장성이 되는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논리가 군색하기 때문에 ‘자세하지 아니하나’라는 수식어를 넣은 것이다.

진지(晋志)는 당 태종이 편찬한 <진서(晋書)> ‘지리지’를 뜻한다. 황해도 수안을 설명하다가 느닷없이 중국의 <진서>를 끌어들인 것은 그가 ‘수(遂)’자가 같다는 것 외에는 수안을 수성이라고 비정할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고백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맹랑한 설이지만’이라는 비학문적 수사를 쓴 것이다. 현재 중국사회과학원에서 편찬한 <중국역사지도집(전8권)>은 이나바와 이병도의 주장대로 만리장성을 한반도 내륙까지 연결시키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북한은 만리장성 관광단을 모집해서 외화 획득에 나서야 할 일이지만 지난 2천년 동안 평안도나 황해도에서 만리장성을 보았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중국도 딱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낙랑군 수성현을 수안 근처로 표시했으면 갈석산도 그 부근에 그려놔야 하는데 갈석산은 중국에서 한국의 설악산이나 금강산처럼 유명한 산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만리장성은 한반도 깊숙이 그려놓고도 갈석산은 본래 위치대로 하북성 창려현 부근에 표기해놓았다. 중국측 동북공정 논리의 파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당연히 갈석산이 있는 하북성 창려(昌黎)현을 주목해야 한다.

» 갈석산과 갈석산 각자

갈석(碣石)은 ‘돌(石)로 새긴 비석(碣)’이 있다는 뜻인데 비석을 세운 인물은 진시황(秦始皇)이다. 서기전 1세기에 편찬한 <사기> ‘진시황 본기’ 32년(서기전 215)조는 “진시황이 갈석산에 가서…석문(石門)에 비를 새기게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기> ‘몽염(蒙恬)열전’은 ‘시황이 장성을 쌓게 했는데 임조에서 시작해 요동까지 이르렀다’고 썼고, 고대 역사지리서인 <수경주(水經注)>는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게 했는데 임조에서 시작해 갈석까지 이르렀다”라고 적고 있다. 고대 중국인들은 갈석산을 요동지역으로 보았던 것이다. 갈석산 부근의 산해관(山海關)이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라는 사실은 일종의 상식이다.

그럼 지금의 창려현이 옛날에는 수성현이었는지를 알아보자. 고대 지명은 왕조 교체에 따라 자주 바뀌기 때문에 여러 사서(史書)를 추적해야 한다. <수서(隋書)> ‘지리지’는 수성현은 11개 속현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신창(新昌)현이라고 적고 있다. 신창현은 후제(後齊) 때 조선현을 편입한 곳이다. 신창현은 수나라 문제 18년(598) 때 노룡현으로 개칭되는데 <신당서> 지리지 하북도(河北道)조는 창려현이 노룡현에 속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즉 수성현의 속현이었던 신창현이 당나라 때 창려현이 되었다가 현재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현재의 창려현이 과거 수성현의 일부였다는 의미이다. 이처럼 ‘수성현·갈석산·만리장성’이라는 세 조건에 부합하는 지역은 황해도 수안이 아니라 중국 하북성 창려현이다. 창려현에 갈석산이 있고 만리장성이 있다.

그런데 이병도가 낙랑군 수성현을 황해도 수안군으로 비정하기 위해서 인용한 <신증 동국여지승람>의 ‘수안군 건치연혁’에는 “고려 초기에 지금 이름(今名:수안)으로 고쳤다”고 적고 있다. 고려 초에 수안이란 이름이 생겼다는 뜻이다. 고산자 김정호(金正浩)는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 “고려 태조 23년(940)에 수안으로 고쳤다”고 쓰고 있다. 이병도가 낙랑군 수성현을 황해도 수안으로 비정한 유일한 근거가 수(遂)자인데 그마저 고려 초기에 생긴 이름으로서 아무리 빨라도 10세기 이전에는 ‘수(遂)’자를 사용하지 않았다. 이병도는 이 사실을 알면서도 못 본체하고 황해도 수안현을 낙랑군 수성현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대동강변의 토성동은 1913년 세키노(關野貞) 같은 식민사학자들에 의해 낙랑군의 치소, 곧 옛 조선현으로 만들어졌지만 식민사학자들 사이에서도 반론이 일었다. 고대 수도는 관방(關防), 즉 방어시설이 가장 중요한데 대동강변 토성은 사방이 탁 트인 낮은 구릉지로서 적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는 지형이 아니라는 반론이었다.

<사기> ‘조선 열전’은 고조선의 우거왕이 “험준한 곳에서 저항했다”고 적고 있지만 대동강변 토성 주위에는 험준한 곳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사기>는 또 “우거왕이 굳세게 성을 지켜 수개월이 지나도 함락시키지 못했다”고 적고 있는데, 대동강변 토성은 반나절도 지키기도 어려운 곳이다. 그러나 이런 의문들은 의도적으로 무시되었다.

조선총독부의 의도는 낙랑군의 실제 치소를 찾자는 게 아니라 한국사의 시작을 중국의 식민지로 만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선총독부는 1915년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를 발간하면서 이 지역을 낙랑군 태수가 근무하던 치소로 확정지었다. 그런 대동강변 토성은 동북아역사재단의 누리집에서 보듯이 한국 주류 사학계에 의해 오늘도 ‘올바른 역사’로 주장되고 있다.



기획연재 : 이덕일 주류 역사학계를 쏘다

“둔유=동어, 열구=율구” 멋대로 해석 “황해도에 대방군”

④ 대방군이 황해도에 있었다


* 둔유 : 屯有, 동어 : 冬於, 열구 : 列口, 율구 : 栗口

한겨레
» 중국 삼국시대 유주(왼쪽 점선 안)와 대방군(오른쪽 점선 안) 지도. ‘중국 역사지도집 제3집(삼국, 서진시대)’에 실린 것으로, 위나라가 평안남북도는 물론 황해도의 대방군까지 지배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중원에서 촉, 오와 싸우기에도 전력이 부족하던 위나라가 고구려 남부에 대방군을 운영했다는 것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한사군 중에는 진번·임둔군처럼 설치 25년(서기전 82) 만에 낙랑·현도군에 편입된 군이 있는가 하면 대방군처럼 낙랑군의 남부 지역에 다시 설치된 군도 있다. 대방군은 요동의 토호였던 공손강(公孫康)이 3세기 초반에 낙랑군 남부에 세운 것인데, 현재 주류 사학계는 황해도와 한강 이북 지역으로 비정하면서 과거에는 한사군 진번군의 고지(故地)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낙랑군의 위치를 평남 일대라고 규정한 주류 사학계로서는 대방군은 황해도쯤에 있어야 하겠지만 실제로도 그랬는지는 고대 사서가 말해줄 것이다.

삼국지 “대방군, 둔유에 설치” 기록


한자음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이병도 “둔유는 황해도 동어라 믿어”


군국지에선 “대방군, 요동에 속해”

대방군이 황해도와 경기도에 있었다는 주류 학설은 이병도의 주장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그의 와세다대 스승이자 조선사편수회의 중심인물이었던 쓰다 소우키치(津田左右吉)가 남만주철도주식회사의 용역을 받아 쓴 <조선역사지리>(朝鮮歷史地理: 1913)에서 “낙랑군의 남부에는 후한(後漢) 말에 이르러 대방군(지금의 경기, 황해도 지방)이 분치되었다”라고 쓴 것이 시초이다.

이병도는 또 1911년 일본인 학자들이 황해도 봉산군에서 발굴한 ‘대방태수 장무이(張撫夷)의 무덤’을 근거로 대방군의 치소인 대방현이 봉산군이라고 비정했다. 중국계 무덤이나 유물은 덮어놓고 한사군 유물로 보는 주류 사학계의 고질적 병폐에 대해서는 차후 살펴보겠지만 우선 장무이의 무덤에서 나온 ‘무신’(戊申)년이 새겨진 명문 벽돌만 제대로 해석해도 봉산군은 대방현이 될 수 없다.

주류 사학계는 고구려 미천왕이 재위 14년(313) 낙랑군을 공격해 2천여 명을 사로잡아옴으로써 낙랑군과 한사군이 모두 멸망했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 무신년은 동진(東晋) 영화(永和) 4년(348)이다. 한사군이 망한 지 35년이 지났지만 황해도 지역은 여전히 대방군이 지배하고 있었다는 것은 논리의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장무이 무덤은 포로이거나 망명객이었다가 황해도에서 죽은 전직 대방태수 무덤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 “둔유=동어, 열구=율구” 멋대로 해석 “황해도에 대방군”

중국 고대 사서는 대방군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삼국지> ‘위서’(魏書) 한전(韓傳)은 “후한(後漢) 헌제(獻帝) 건안 연간(196~220)에 공손강(?~209)이 둔유(屯有)현 남쪽 황무지를 대방(帶方)군으로 삼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대방의 위치에 대한 최초의 기사는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조의 “후한 질제·환제 연간(서기 146~167)에 (고구려가) 다시 요동(遼東) 서안평(西安平)을 공격해 대방 현령을 죽이고 낙랑태수의 처자를 사로잡았다”는 구절이다. 고구려가 ‘요동 서안평을 공격하여→대방 현령을 죽이고→낙랑태수 처자를 사로잡았다’는 전과를 고려하면 대방은 황해도에 있을 수가 없다. 낙랑이 평안도이고 대방이 황해도라면 요동의 서안평을 공격하던 고구려군은 유령처럼 황해도에 나타나 대방 현령을 죽이고 다시 평안도의 낙랑태수 처자를 사로잡아온 것이 된다.

공수특전단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 구절에 대해 ‘군국지’(郡國志)는 “서안평현과 대방현은 모두 요동군에 속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고구려가 공격한 서안평, 대방, 낙랑이 모두 고대의 요동에 있었던 것이다. 대방현이 요동에 있다는 ‘군국지’의 기사 하나로도 황해도로 비정한 주류 사학계의 정설은 설 곳을 잃는다. 그러나 이병도는 둔유현을 황해도 황주로 비정했는데 그 논리를 보자.

산해경에는 “열구, 요동에 있어”

“고려사 지리지 황주목(黃州牧)조를 보면 ‘황주목, 본 고구려 동홀(冬忽)’이라고 하고 그 밑의 분주(分註)에 ‘일운(一云) 우동어홀(于冬於忽)’이라고 하였다. 여기 ‘우동어홀’의 동어(冬於)와 둔유(屯有)의 음이 서로 근사한데 우리의 주의를 끈다. 속히 말하면 ‘둔유’와 ‘동어’는 즉 같은 말의 이사(異寫: 달리 적음)가 아닌가 생각된다. 우(于)는 고구려 지명 위에 흔히 붙는 것으로서 방위의 상(上: 웃)을 표시하는 의미의 말이 아닌가 추찰된다. 하여튼 둔유현이 지금의 황주(黃州)에 해당하리라고 생각되는 점은 비단 지명상으로뿐만 아니라 또한 실제 지리상으로 보더라도 적중(的中)하다고 믿는 바이다.”(이병도, ‘진번군고’, <한국고대사연구>)

장황한 설명 후 ‘적중하다고 믿는 바이다’라고 단정했지만 이병도가 황주를 둔유라고 본 근거는 동어(冬於)와 둔유(屯有)의 음이 비슷하다는 것 하나뿐이다. 뜻글자인 한자를 발음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같다고 단정하는 것은 언어학적으로도 문제가 많다. 둔유(屯有)는 ‘군대가 진 치고 있다’는 뜻으로서 주요 군사기지임을 나타내는 말이다. 게다가 ‘우동어홀’ 중에서 우(于)자와 홀(忽)자는 마음대로 빼 버리고 가운데 동어(冬於)만을 취해서 ‘동어가 둔유와 같은 말을 달리 쓴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대목에 이르면 할 말을 잃게 된다.

<진서>에는 대방군에 소속된 7개 현의 이름이 나온다. ‘대방·열구(列口)·남신(南新)·장잠(長岑)·제해(提奚)·함자(含資)·해명(海冥)’현이 그것이다. 이 중 중국 고대 사서로 위치를 추적할 수 있는 현이 몇 개 있다. 그중 하나가 열구현인데 이병도는 이를 황해도 은율(恩栗)로 비정했다. 다시 그 논리를 보자.


» 황해도 봉산군 문정면 무덤군과 장무이 무덤.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사진. 이 부근에서 대방태수 장무이 무덤이 나왔다고 대방군 지역으로 확정한 것이지만 낙랑군이 망한 지 35년 후에도 이 지역은 한사군이 지배했다는 것이어서 논리적으로 모순이다.
“은율군은 고구려 시대의 ‘율구(栗口)’ 혹은 ‘율천(栗川)’이니 율구(栗口)는 열구(列口)와 음이 거의 같고 율천(栗川)도 열수(列水)의 이사(異寫)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열구현이 오늘의 은율 부근이라 함에는 이론(異論)이 없을 것이다.”(이병도, ‘진번군고’, <한국고대사연구>)

주류 사학계는 대방군 열구현을 황해도 은율군으로 보는 데 이론이 없을지 모르지만 <후한서> 주석자는 “곽박(郭璞)이 <산해경>에서 ‘열(列)은 강의 이름인데 열수(列水)는 요동에 있다’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열구가 요동에 있었다는 뜻이다. 장잠현에 대해서 이병도는 황해도 풍천군으로 비정하면서 그 근거로 <후한서>(後漢書) ‘최인 열전’을 들었다. ‘최인이 장잠현령으로 나가게 되었으나 멀어서 부임하지 않았다’는 구절이다. 그러나 <후한서>는 이 구절에 “장잠현은 낙랑군에 소속되어 있는데 요동에 있다”는 주석을 달아놓았다. 이병도가 이 주석을 못 보았을 리 없지만 자신의 생각과 다르므로 못 본 체하고 황해도 풍천에 비정한 것이다. 중국 고대 사서는 대방·열구·장잠현을 모두 황해도가 아니라 요동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대방군 설치자 주무대도 요동

또한 주류 사학계는 진번군과 대방군을 같은 지역으로 보고 있지만 그런 해석을 뒷받침하는 고대 사료는 전무하다. 진번군에 대한 사료 자체가 희소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많은 논란이 있어왔다. 크게 정리하면 진번군이 요동이나 고구려 지역에 있었다는 북방설과 황해도 등지에 있었다는 남방설이 있다. 이병도는 북방설에 대해 “일소(一笑)에 붙이고도 남음이 있다”고 일축하면서 ‘진번군=대방군=황해·경기도’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그가 이런 근거로 든 것은 고대 사료가 아니라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중국학자 양수경(楊守敬: 1839~1915)이 <회명헌고>(晦明軒稿)에서 대방군의 7개 현을 옛 진번군의 잔현(殘縣)이라고 주장한 것을 그대로 차용한 것이다. 아무런 사료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 양수경의 주장에 대해 이병도는 “어떻든 대방 7현을 고(故) 진번의 잔현(殘縣)으로 추단(推斷: 추측해서 단정함)한 것은 틀림없는 탁견으로 진번 문제 해결에 한 서광을 비추어주었다”(<한국고대사연구> 114쪽)라고 극찬했다.

쓰다 소우키치는 <조선역사지리>에서 진번군을 압록강 상류 부근이라고 비정했는데 이병도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쓰다가 아니라 양수경을 스승으로 삼은 셈이다. 조선사편수회의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진번군을 충청·전라북도 지역으로 비정하고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가 충청도 지역으로 비정한 것보다는 조금 나은지도 모르겠지만 조선 후기 안정복(安鼎福)은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서 <사기>와 <한서>(漢書)를 근거로 “진번은 요동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대방군을 설치한 공손강 가문은 그 부친 공손도(公孫度)가 후한 말의 혼란기에 요동왕을 자칭했던 가문이다.

이 가문은 서진(西進)하는 고구려와 요동에서 여러 차례 충돌했다. <삼국지> ‘위서’ 공손도(公孫度) 열전은 공손도와 아들 공손강 일가에 대해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이들의 무대는 시종일관 요동이었고 중국 중앙정부로부터 요동의 지배권을 인정받는 것이 목표였다. 고구려의 저지선을 뚫고 황해도와 경기 북부까지 진출하는 것은 이 가문의 관심사도 아니었을뿐더러 가능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위에는 고구려, 아래는 백제가 압박하는 황해·경기도에 대방군이 존속한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했던 것이다.

‘한사군 한반도설’ 근거 목곽묘, 한사군 앞서 이미 축조
⑤ 유적·유물로 보는 한사군
한겨레
» ↑ 황해도 안악 3호분의 무덤 벽화. 연나라에서 망명한 동수라는 인물의 묵서명이 실려 있다. 이 묵서명이 없었으면 한사군 유물로 둔갑했을 것이다.

주류 사학계는 북한 지역에 있는 중국계 유적·유물들을 ‘한사군 한반도설’의 결정적 근거로 삼고 있다. 그런 중국계 유적·유물로는 토성, 분묘, 석비(石碑·점제현 신사비), 봉니(封泥) 등 다양하다. 조선총독부에서 1915년 <조선고적도보>를 간행하면서 낙랑·대방군 유적으로 못 박은 후 현재까지 정설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전에는 누구나 고구려 유적으로 인식했었다. 일제뿐만 아니라 북한도 이 유적들을 대대적으로 발굴 조사했다. 남한 주류 사학계는 일제의 발굴 결과는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면서도 북한의 발굴 결과는 무조건 부인하는 모순된 행태를 보이고 있다.

북한 리진순 ‘평양일대 락랑무덤 연구’


“낙랑군 설치 200년전에 벌써 존재”


주류사학계, 북한 연구 무조건 부인


시멘트 쓴 의혹 일제 발굴 비석은 맹신

북한학자 안병찬은 ‘평양일대 락랑유적의 발굴정형에 대하여’(<조선고고연구>·1995)에서 ‘평양시 락랑구역 안에서만도 2600여기에 달하는 무덤과 수백 평방미터의 건축지가 발굴되었으며 1만5000여점에 달하는 유물들을 찾아냈다’면서 “이것은 일제가 ‘락랑군 재평양설’을 조작하기 위해 조선 강점 기간에 도굴한 무덤수보다 무려 26배에 달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연구 결과에 대해 남한의 한 사학자가 ‘새로 발견된 낙랑목간’이란 논문에서 “(북한에서) 근래 연구서 형태의 몇몇 자료가 나왔지만 자료로서의 가치를 인정하기 어렵다. 특히 문자 유물의 보고는 더욱 부실하여 설명한 내용조차 신뢰하기 어려운 측면이 많다”고 쓴 것처럼 무조건 부정하고 있다.

북한 정치체제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해당 유적을 직접 발굴한 역사학자의 연구에 대해 ‘자료로서의 가치를 인정하기 어렵다’고 단정 짓는 것은 학문적 소통의 거부 선언에 다름 아니다. 남한 학자들이 북한의 연구 결과에 대해 ‘안 믿겠다’고 부정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들이 정설로 떠받들고 있는 ‘한사군 한반도설’과 다르기 때문이다.

북한은 남한 학계에서 한사군 무덤이라고 주장하는 목곽묘(木槨墓)를 ‘나무곽무덤’이라고 부르는데 850여기나 발굴했다. 북한의 리진순은 ‘평양일대 락랑무덤에 관한 연구’에서 “지금까지 발굴된 자료에 의하더라도 기원전 3세기 이전부터 기원전 1세기 말까지 존재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썼다. 낙랑군이 설치되었다는 서기전 108년보다 훨씬 앞선 시기부터 축조되기 시작해 한사군이 설치된 지 오래지 않아 사라진 목곽묘는 한사군 유적이 아니라는 뜻이다.


» 중국 랴오닝성 금서시에서 1997년 발견된 임둔태수장 봉니. 중국 요서 지역이 한사군 지역임을 알게 해주는 유력한 물증이지만 주류 사학계는 외면하고 있다.

일본의 식민사학자 이마니시 류가 1913년 평남 용강군 해운면 운평동(현재 평남 온천군 성현리 어을동)에서 발견했다는 점제현 신사비를 살펴보자.

<한서>(漢書) ‘지리지’에 따르면 점제현은 낙랑군의 25개 속현 중의 하나이므로 주류 사학계는 이 신사비를 용강군이 낙랑군 지역이라는 결정적 증거로 보고 있다. 그런데 비가 발견된 지역은 현재 온천군인 데서 알 수 있듯이 유명한 휴양지이고 비가 서 있던 곳도 사방이 탁 트인 평야 지대였다. 이런 곳에 2천년 동안 서 있던 비를 아무도 못 보았으나 이마니시 류가 단번에 발견했다는 자체가 의문이다.

조선총독부 고분 조사위원이었던 후지타 료사쿠(1892~1960)는 <조선고고학연구>(1948)에서 이마니시 류는 용강군 해운면의 어을동 고분에서 단 한 개의 와당도 발견하지 못했으나 면장으로부터 ‘비문을 읽을 수 있으면 그 아래의 황금을 얻을 수 있다는 고비(古碑)’가 있다는 말을 듣고 발견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그런 중요한 증언을 한 면장은 누락시키고 동네 아이와 찍은 사진을 발표했다.

북한의 <조선고고연구>(1995년 제4호)는 “발굴 과정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기초에는 시멘트를 썼다”고 의문을 제기하면서 그 화학 성분도 근처의 마영 화강석·온천 오석산 화강석·룡강 화강석과는 다르다고 분석했다. 은(Ag)은 주위 3개 지역의 화강석보다 2~4배, 납(Pb)은 3배, 아연(Zn), 텅스텐(W), 니켈(Ni), 인(P)은 각각 2배가 많은 반면 바륨(Ba)은 주위 화강석의 6분의 1 이하로서 다른 지역(요동)에서 가져온 비석이란 분석이다.

삼국사기 “낙랑군 등 포로 2만명”

봉니(封泥)란 대나무 죽간(竹簡) 등의 공문서를 상자에 넣어 묶은 끈을 봉하고 도장을 찍은 진흙 덩이를 뜻한다. 봉니는 진흙이란 성격상 위조설이 끊이지 않았으나 조선총독부 박물관은 당시로서는 거금인 100~150원을 주고 매입했다.

일제강점기 평양 일대에서만 200여기에 달하는 봉니가 수습되었는데, 북한의 박진욱은 <락랑유적에서 드러난 글자있는 유물에 대하여>(조선고고연구·1995년 제4호)에서 “1969년에 낙랑토성에서 해방 전에 봉니가 가장 많이 나왔다고 하는 곳을 300㎡나 발굴하여 보았는데 단 1개의 봉니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운성리 토성·소라리 토성·청해 토성 발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일제가 100원에 구입한 ‘낙랑대윤장’(樂浪大尹章) 봉니는 위조품이라는 결정적 증거다. 전한(前漢)을 멸망시키고 신(新)나라를 개국한 왕망은 ‘낙랑군’을 ‘낙선군’으로 개칭하고 ‘태수’라는 관직명을 ‘대윤’으로 고쳤다. 왕망 때 만들어진 봉니라면 ‘낙선대윤장’이어야 하는데 ‘낙랑대윤장’인 것은 위조품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신의 손’을 거친 모든 유적·유물은 의문투성이다.


» 점제현 신사비. 평남 용강군(현 온천군)에서 이마니시 류가 발견했다는 점제현 신사비. 북한에서는 다른 지역의 암석 재질이라고 분석했다.

이런 중국계 유적·유물들을 해석할 때 중국계 포로의 존재가 중요하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 고구려’조는 고구려 태조 대왕이 “요동 서안평(西安平)을 침범하여 대방령(帶方令)을 죽이고 낙랑 태수 처자(妻子)를 사로잡았다”고 전한다.

낙랑 태수 처자뿐 아니라 다른 많은 포로와 여러 문서를 비롯한 노획물도 있었을 것이다. 낙랑군의 호구 수가 기록된 낙랑 목간도 이런 경로로 획득한 문서일 것이다.

<삼국사기>는 미천왕이 재위 3년(302) 현도군 사람 8천여명을 사로잡아 평양으로 옮겼다고 전하고 있고, 재위 14년(313)에는 낙랑군 남녀 2천여명을 사로잡아 왔으며, 재위 16년(315)에도 “현도성을 쳐부수어 죽이고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미천왕이 잡아온 포로만 최소한 ‘1만명+α’이다

<삼국사기> 고국양왕 2년(385) 조는 “요동과 현도를 함락시켜 남녀 1만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고”고 기록하고 있다. 명문 기록상으로만 최소 ‘2만 명+α’의 포로들이 잡혀왔다. 이런 포로들은 탈출을 방지하기 위해 중국에서 가장 먼 평안남도나 황해도에 집단 거주시켰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구려에는 많은 망명객도 있었다. <삼국사기>고국천왕 19년(197년) 조는 “중국에 대란(大亂)이 일어나서 한인(漢人)들이 난을 피해 내투(來投)하는 자가 심히 많았다”고 전하고 있다. 또한 산상왕 21년(217)조에는 “한나라 평주(平州) 사람 하요(夏瑤)가 백성 1천여 가(家)를 이끌고 와서 의지하므로 그들을 받아들여 책성(柵城)에 살게 했다”는 기록도 있다.

황해도 안악군 오국리 안악 3호분의 고분 벽화에는 동수(冬壽)라는 인물에 대한 묵서명(墨書銘)이 나온다. <자치통감>(資治通鑑) ‘진기’(晉記)에 따르면 동수는 연(燕)나라의 왕위 계승 전쟁에 가담했다가 패배하자 곽충(郭充)과 고구려로 망명한 인물이다. 이 명문 기사가 없었다면 안악 3호분도 한사군 유적으로 둔갑했을 것이다.

평남 강서군 덕흥리(현 남포직할시 강서구역 덕흥리) 무덤에서는 요동·현도태수를 지낸 동리( 冬利)라는 인물의 기록도 있다. 장수왕 24년(436)에는 북연(北燕) 왕 풍홍(馮弘) 등이 망명했는데 그 행렬이 전후 80리나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세계 제국의 성격을 갖고 있던 고구려에는 많은 중국인 지배층들이 망명했다. 고구려 강역에서 중국계 유물이 나온다고 무조건 한사군 유물이라고 해석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

중국계 유적, 포로들 것일 가능성 커

1997년 중국 랴오닝성 금서시(錦西市) 연산구(連山區) 옛 성터에서 발견된 ‘임둔태수장’(臨屯太守章) 봉니는 조작 시비가 일지 않는 유일한 봉니다.

길림대 고고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복기대 박사는 <백산학보 61집>(2002)에 ‘임둔태수장 봉니를 통해 본 한사군의 위치’를 발표했다. 봉니 출토지는 물론 근처의 대니(大泥) 유적과 패묘(貝墓) 유적의 출토 유물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논문이다.

그는 전국시대(서기전 475~221)에는 금서시 유적에서 고조선 계통의 유물들이 주로 발굴되다가 전한 중기부터 후한 시기에 이르면 고조선의 특징은 약해지고 중국 특징의 유물이 주류를 이룬다고 말하고 있다. 뒤의 시기는 한사군 설치 시기와 일치한다. 그러나 이 논문은 주류 사학계로부터 외면당했다. 임둔군은 함경남도쪽에 있어야지 랴오닝성 금서시에 있어서는 정설이 위협받기 때문이다.

최근 일본의 구석기 시대 유적·유물을 조작해 큰 파문을 일으켰던 고고학자 후지무라 신이치는 조작이라는, 조선사편수회의 전통을 이었다고 볼 수 있는 인물이다. 아직도 조선사편수회의 해석을 정설로 떠받드는 대한민국 주류 사학계는 과연 조선사편수회와 단절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