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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그 누구도 믿지 못하겠다 (whtjsdlfqh 2009.06.08)

연산군, 그 누구도 믿지 못하겠다

연산군 : 외향(E)-직관(N)-감정(F)-인식(P)형 ‘어린아이’(ENFP)


연산군은 언어표현이 풍부하고 감정기복이 심한 외향감정형이어서 잔치판이 벌어지면 스스로 북을 치고 노래하고 춤을 추었으며, 외부세계에 관심 많아 사냥을 즐겼다. 예술적인 직관감정형으로 130편에 달하는 시를 지었고 글씨를 잘 썼으며 처용무, 그림, 공예, 음악 등에 관심이 많고 조예가 깊었다. 그는 즉흥적이고 충동적인 인식형으로 관례, 규칙, 규율을 무시하면서 충동적으로 행동하려는 경향이 강했고, 주관성이 강하고 반성능력이 부재하여 신하들의 비판에 변명으로 일관하거나 화를 잘 내고, 객관성과 공정성을 상실한 채 모든 것을 자기 편할 대로 생각하면서 처벌을 남발했다. 천방지축이라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스타일이어서 관례나 전통 등 자신을 속박하는 건 아예 무시하고, 엄격한 규칙도 가벼운 마음으로 위반했으며, 신하들과의 소통도 부재했다. ‘어린아이’(ENFP) 연산군은 생애 초기에 안정된 양육을 받지 못했고, 왕이 되기까지 생존위협에 시달렸기 때문에 세상에 대한 불신감, 정서불안, 애정결핍, 자신감 결여, 방어적 태도, 의존심, 심한 분노감정 등을 갖게 되었다. 이는 연산군이 어머니의 비통한 죽음을 알게 된 후 극단적인 광기와 잔인성으로 폭발하게 되었고 결국 연산군은 폭군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채 역사무대에서 쓸쓸하게 퇴장하고 말았다.

어제 열린 법적인 어머니 정현왕후의 잔치를 떠올리며 연산군은 즐거운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무오사화와 갑자사화 등을 통해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만한 위험인물들을 모두 제거해버린 뒤인 1506년(연산군 12), 연산군은 모처럼 편안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다. 이때였다. 궁 밖에서 군중의 떠들썩한 소리가 들려왔고 그들이 들고 있는 횃불이 뿜어내는 빛이 어른거렸다. 뭔가 이상하다는 불안한 느낌으로 얼굴빛이 변해갈 무렵 승지인 윤장 등이 급히 달려와 연산군에게 반란군이 왕궁을 포위했다고 보고했다.


승지 윤장 등이 변을 듣고 급히 편전에 들어가 왕에게 아뢰니, 왕이 놀라 뛰쳐나와 승지의 손을 잡고 턱이 떨려 말을 하지 못하였다. 윤장 등은 바깥 동정을 살핀다고 핑계하고 차차 흩어져 모두 수챗구멍으로 달아났다.(『연산군일기』 12년 9월 2일)


전혀 예상치 못한 사태에 너무나 놀란 연산군은 겁에 질려 떨고 있었다. 그러나 측근들은 그런 왕을 홀로 내버려둔 채 넘어지고 엎어지면서 부리나케 도망쳐버렸다. 반란군이 들이닥쳐 대보를 내놓으라고 하자, 연산군은 “내 죄가 중한 줄 본시 알고 있다. 잘 보아달라” 하며 대보를 순순히 내놓았다.(『조선왕조실록 14』 71쪽) 이렇게 연산군은 손 한번 써보지 못하고 왕위에서 쫓겨났는데, 이를 역사에서는 ‘중종반정'이라고 한다. 이 과정에서 그 누구도 연산군을 위해 목숨을 바치려 하지 않았다. 단종 폐위에 반대하여 많은 신하들이 세조에게 저항한 것과는 달리 연산군을 왕으로 모신 신하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모두 자연스럽게 새 왕인 중종을 모셨다. 또한 그가 쫓겨난 후에도 백성들과 역사는 연산군을 동정하지 않았다. 그는 세상인심을 잃고 홀로 고립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중종이 궁으로 들어갈 때에는 길거리에 백성들이 모여들어 만세를 부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왜 그는 온 세상에서 버림받게 되었을까? 연산군은 훌륭한 어머니의 아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어머니의 체취를 제대로 맡아보지도 못한 채 자랐다. 마마보이인 아버지가 할머니들의 사주를 받아 죄 없는 어머니를 죽였기 때문이다. 생애 초기에 안정된 양육을 받지 못했고, 왕이 되기까지 생존위협에 시달린 불우한 경험은 연산군의 마음 깊숙한 곳에 ‘불신감'을 심어놓았고 그의 심리를 병적으로 왜곡시켰다. 그 결과 연산군은 불신감 외에도 정서불안, 애정결핍, 자신감 결여, 방어적 태도, 의존심, 심한 분노감정 등을 갖게 되었는데 여기에 ‘어린아이'(ENFP : 외향, 직관, 감정, 인식)*라는 성격의 단점까지 결합되었다.
대비들과 지배층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연산군을 이용함으로써 그의 병을 한층 더 악화시켰다. 처음에 연산군은 불안감을 잠재우고 생존을 도모하기 위해 대비들과 기득권층에 의존했다. 그러나 가장 크게 의존한 할머니가 사망하고 심리적 병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자 그는 마침내 고장 난 기관차처럼 질주하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폭군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채 역사무대에서 쓸쓸하게 퇴장하고 말았다.

연산군은 항상 충신이 없다고 불평했다. 그러나 만일 그가 백성의 이익을 옹호하는 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완강히 노력했다면, 대비들을 비롯한 친인척과 지배층을 일방적으로 싸고돌지 않았다면, 왕으로서 또 한 개인으로서 인격적 모범을 보였다면 그의 주위에 충신이 모여들었을 것이다. 세종과 정조 주위에 충신과 인재가 모여든 것은 그들이 운 좋게 시대를 잘 타고 나서가 아니라 1퍼센트 특권층이 아니라 절대다수 백성의 이익을 대변하는 올바른 정치를 했기 때문이다.
아무도 믿지 못하는 불치병에 걸린 연산군은 세상에서 완전히 버림받았기에 반정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가 총애해 마지않던 박원종이나 성희안 같은 인격미달자들이 왕의 등에 칼을 꽂는 사변이 일어났지만 뜻있는 사람들과 백성들은 슬퍼하지 않았다. 역사 또한 그를 위해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생애 초기가 완전히 망가져 심한 마음의 병을 갖게 된 연산군에게는 치료적 기회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그러나 대비들과 지배층은 자신들의 탐욕을 위해 그의 병든 마음을 악용함으로써 증상을 더 악화시켰다. 세상에 대한 불신감과 거대한 분노감정 그리고 ‘어린아이'(ENFP)라는 성격의 단점이 한데 뒤엉키자 마침내 연산군은 제어할 수 없는 괴물이 되어갔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심리적 병을 치료하는 데 실패하고, 사회적으로는 올바른 정치의식을 소유하지 못해 연산군은 사회와 역사에서 완전히 버림받은 외톨이가 되어 쓸쓸하게 한 생을 마쳤다. 그는 죽기 직전에 왕비인 “신씨가 보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혹시 그녀만은 세상에서 버림받은 연산군을 진심으로 사랑해주었을까? 그래서 최후의 순간 애정결핍으로 갈기갈기 찢어진 연산군의 마음은 그녀를 그리워한 것일까?


사실 심리학적으로 들여다보면 사회적 우환거리로 이름이 높은 악인들이나 정신병자들의 어린 시절은 목이 콱 메일 만큼 불우하고 기구한 경우가 허다하다. 연산군의 어린 시절 또한 그러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 때문에 어른이 된 후에 세상을 병들게 하는 이들을 마냥 용서하고 봐줄 수는 없지 않은가.


정의로운 역사가 이어지면 아름다운 세상이 열리고, 불의한 역사가 이어지면 지옥 같은 세상이 도래한다. 지옥 같은 세상은 심리적으로 병든 부모와 환경을 양산함으로써 아이들의 미래를 끔찍하게 파괴한다. 연산군 같은 인물의 배후에는 반드시 왜곡된 역사와 병든 부모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 한국사회는 어떠한가? 그리 멀리까지 갈 필요도 없다. 일제강점기에 겪은 배반의 역사를 청산했는가, 군부독재의 폭압통치로 얼룩진 불의와 부정부패의 역사는 정화되었는가, 돈의 가치가 인간의 존엄성을 농락하는 신자유주의의 독소는 빠지고 있는가. 1퍼센트 특권층이 아니라 백성을 위한 정치, 올바른 개혁을 하루빨리 이루어내지 못한다면 한국사회에서는 무수히 많은 연산군이 태어나고 자라날 것이다.


광기에 휩싸여 날뛰면서 연산군은 어머니인 폐비 윤씨에 대해 이렇게 절규했다.
“왕비가 칠거지악을 지었으면 버리면 그만이지 왜 꼭 죽여야 했는가?”
어쩌면 그의 소박하고 상식적인 외침이 우리의 출발점인지도 모른다. 바로 그런 상식을 실현하는 데서부터 올바른 역사가 다시 시작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