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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에만 여왕이 있는 이유.

신라에만 여왕이 있는 이유.

신라 24대 진흥왕은 아들 두 명이 있었습니다. 큰 아들은 동륜(銅輪)이며, 둘째가 금륜(金輪) 혹은 사륜(舍輪)인데, 동륜이 일찍 죽어 금륜이 등극하여 진지왕이 됩니다. 그런데 아직 논란이 끊이지 않는 「화랑세기(花郞世記)」 필사본에 따르면 동륜은 어느 날 밤, 궁궐 바깥에 살고 있는 진흥왕의 색공녀인 보명을 만나러 궁궐 담장을 넘다가 그만 커다란 사냥개한테 물려서, 다시 말해 광견병으로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찌 됐건 형이 죽는 바람에 왕이 된 금륜, 즉 진지왕은 불과 4년 만에 음란한 짓을 일삼는다 하여 쫓겨나고 죽은 동륜의 아들이 진평왕이 됩니다.


진평왕은 신라 왕 중에서도 가장 오랜 53년 동안이나 왕으로 있다가 서기 632년 숨을 거두고 맙니다. 그런데 문제는 진평왕에게는 아들도 형제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가리켜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는 '성골 남자가다하였다(聖骨男盡)'고 표현했으며, 성골로는 진평왕 딸인 덕만(德曼)공주가 남아 있었습니다. 진평왕에게는 덕만 말고도 덕만의 언니인 천명(天明)이라는 공주가 한 명이 더 있었으나 일찌감치 진지왕의 큰 아들인 김용수에게 시집을 가면서 왕궁을 떠났기 때문에 골품(品)이 성골보다 한 단계 낮은 진골(眞骨)로 떨어져 왕위를 이어받을 자격이 없었습니다.


남자건 여자건 성골이 씨가 마르지 않는 한 성골만이 왕이 될 수 있었으므로 덕만이 서기 632년 선덕(善德)여왕이 됩니다.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여왕이 등장하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학계 어느 누구도 지금까지 신라에 여왕이 탄생한 배경을 명쾌하게 설명해 주지는 못했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왕족으로 진평왕의 맏사위이자 진지왕의 장자인 김용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폐왕의 자식이기에 신하와 백성들의 지지를 받지는 못했지만 엄연히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이런 난제는 당시 신라사회를 지탱하는 신분제였던 골품제를 이해하면 간단히 풀립니다.


신라는 진골인 김춘추가 태종무열왕으로 등극하기 전까지 왕을 포함한 지배층과 일반 백성 및 노비에 이르기까지 모든 국민을 골품이라 해서 엄격한 신분구별을 했습니다. 왕을 비롯한 최고 지배층이 성골이며, 중앙 고위관직을 차지한 다음 지배층이 진골이었고, 그 밑이 6두품, 5두품, 4두품이라 해서 세분했습니다. 그리고 대다수의 최고 지배층이 주로 왕의 형제들이었으므로성골은 왕을 중심으로 그 형제 및 가족들로 구성되며, 새로운 왕이 등장할 때마다새로운 성골집단이 생겼습니다. 또한 성골신분을 유지하려면 왕궁에 살고 있어야 하며, 왕궁을 떠나면 진골로 신분이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아들이 없던 진평왕의 같은 딸이었지만 장녀인 천명이 왕이 되지 못했던 까닭은 진평왕이 죽기 전 진지왕의 아들이면서 김춘추의 아버지가 되는 김용수에게 시집가면서 왕궁을 나갔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김용수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진평왕이 죽었을 때 궁궐 안에 남아있던 성골은 남자는 다 없어지고 오직 덕만이 남은 것입니다. 더불어 신라 골품제, 특히 성골이 가진 결함도 여왕 탄생의 배경이 됐습니다. 왜냐하면 성골이 될 수 있는 자격이 너무 엄격하다 보니 언제든 성골이 씨가 마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진평왕이 아들과 형제 없이 죽었을 때에 나타난 것입니다.


어떻든 성골 남자가 없는 가운데 왕이 된 선덕여왕은 재위 15년 만인 서기 647년 비담과 염종이라는 자가 일으킨 난의 와중에 숨을 거둡니다. 다시 여기서 왕위를 놓고 같은 문제가 반복됩니다. 성골 남자는 없고, 선덕이 세상을 떠났으니 다른 성골을 찾아야만 했습니다. 만약 없으면 진골이 왕이 되는 지경에 이릅니다. 그런데 선덕이 세상을 떠났을 때 신라 왕궁에는 또 다른 성골 여성이 있었습니다. 진평왕의 모제(母弟)인 갈문왕국반의 딸 승만(勝曼)인데, 그녀는 등극하여 진덕(眞德)여왕이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은 아무리 성골이라 해도 여성이 어떻게 왕이 될 수 있었을까하는 점입니다.


신라는아버지와 아들을 통해 모든 권리가 계승되는 부계사회는 맞지만 여성 또한 1대에 한하여 아버지가 갖는 권리, 예컨대 왕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갖게 되며,그 신분이 왕이 될 수 있는 성골인 경우는 더욱 강화됩니다. 이렇게 해서 선덕과 진덕여왕이 탄생한 것입니다. 그러나 진덕여왕까지 세상을 떠난 다음부터는 남녀를 불문하고 성골은 정말로 씨가 말라 버렸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진골 중에서 왕을 찾게 되었는데 할아버지인 진지왕이 축출되면서 신분 또한 성골에서 진골로 떨어진 김춘추가 김유신의 무력을 등에 업고 왕이 되니 이로써 신라는 진골왕 시대로 접어들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