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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량과 실시

현량과 실시

요·순·우 삼대의 왕도정치를 시행하기 위한 조광조의 개혁정치 추진은 향촌사회에 소학 소재의 여씨향약 보급을 통해 성리학의 질서 체계를 정착시켜 광범위한 지지 기반을 구축하고, 그 기반을 토대로 하여 정치권내에서 일련의 개혁을 추진함으로써 왕도정치를 구체화시키려는 것이었다.

조광조는 성리학의 윤리질서를 향촌사회에 정착시키기 위한 향약과 더불어, 향거이선의 정신으로 새로운 인재등용법인 현량과의 실시를 건의하였다.

중종은 반정 후에 새로 개편된 정치기구에 임용될 인적자원의 부족을 느꼈다. 이 같은 부족한 인재를 과거제도만으로는 충당하기 어렵겠다는 중종의 생각과, 이에 맞추어 중종 13년에 조광조는 현량과의 설치를 건의하였다. 그는 인재를 선발함에는 사장이나 문벌의 여하에 따라서 등용함은 불가하다면서 과거제의 폐단을 비판하고 현량과 설치가 불가피함을 논하였다. 중종13년 조광조가 발의한 현량과는 한의 현량과·방정과를 본뜬 것으로 외방은 감사·수령이, 경중은 홍문관·육경·대간이 재행이 있고 임용할 만한 사람을 천거하면 임금이 對策으로 취재한다는 인재등용법이다.

현량과의 실시 목적은 경학을 위주로 하는 조광조 등의 신진세력이 추구하는 개혁 정하다 뜻을 같이하는 지지세력들을 중앙 정계에 지출시켜 정치 세력을 강화하려는데에 있었다.

현량과를 시행하기 위해 내세운 명분을 보면, 과거는 시부로 인재를 뽑기 때문에 사장만을 일삼고 성리의 학문을 소홀히 할뿐만 아니라, 벼슬을 얻지 못하면 어떻게 하면 얻을까 궁리하고, 얻고 나면 놓치게 될까 봐 근심하는 폐습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옛사람을 높여 벗삼으며, 조행이 청렴하고 고매한 사람이 있더라도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되어, 경학에 능한 선비를 등용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장을 위주로 하는 과거로는 경학에 능한 신진세력들을 등용하기 어렵다는 것으로, 덕행을 보고 천거하는 현량과를 시행하면 분경하는 폐습이 사라질뿐더러 대현인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명분으로 조광조가 발의하고 신진세력들에 의해 주장된 현량과에 대해, 사장을 위주로 하는 기존의 과거를 통해 정계에 진출한 조정 대신들은 현량과 실시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즉 경학을 위주로 하는 신진 세력들이 천거제인 현량과를 통해 정계에 진출하여 그 세력이 강화되면, 사장을 위주로 하는 기존 세력들은 상대적으로 약화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조정의 대신들은 과거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현량과의 실시를 반대하였다. 남곤은 근래에 과거에 쓰이는 글은 퇴폐한 학문이라 하여 정학을 해친다고 하지만 과거의 학문은 삼대이래로 폐지할 수 없었던 것이라면서, 과거를 시행하더라도 삼대의 왕도정치를 행할 수 있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비록 과거로 취재하더라도 훌륭한 사람은 스스로 도리를 다할 것이라고 하였다. 정광필 또한 덕행이 있는 사람을 취재하는데는 과거가 적합하다고 강조하면서, 과거 출신이 아닌 사람으로서 덕행이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재지까지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니므로 현량과를 따로 설치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조정 대신들은 과거만으로도 덕행이 있는 인재를 취재할 수 있다면서 현량과의 실시를 반대하자, 현량과 시행 여부에 대해 신구세력간에 격렬한 논의가 있었다.

정광필이 반대한 이유는 천거시 재행이 특출한 사람이 빠질 수 있고, 대책할 때 특출한 사람이 불합격되거나 특출하지 못한 사람이 윗 반열에 있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일을 만들 때는 뒷 폐단을 염려해야 하는데, 현량과를 실시하면 끝에 가서는 어떻게 될는지 안 수 없는 것이고, 현량과로 취재하는 것이 조종의 법을 무너뜨리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신용개는 처음 천거할 때에 세밀히 살피지 않고 평상시 과거의 경우와 같이 한다면 사람마다 다투어 나오고자 할 것이니 그렇게 된다면 시행하지 않는 것만 못하게 된다는 것이고, 또 성균관에 있는 유생중 어떤 사람은 뽑고 어떤 사람은 뽑지 않으면 선발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은 원한을 품게 된다면서, 현량과의 실시를 반대하였다. 이와 같은 조정대신들의 반대에 대해 신진세력들은 다음과 같은 논의로 현량과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이청은 처음에 천거로 하면 덕행이 있는 사람이 빠지지 않을 것이고, 또 대책으로 시험하면 그 재행을 볼 수 있는 것이라고 하면서, 천거한 다음 시험으로 뽑으면 선비들은 모두 착해지려고 애쓰게 될 것이므로 현량과는 지극히 좋은 방법이라는 것이다. 신광한은 현량과는 자주 할 수는 없지만 지금이 시행할 만한 기회라고 하면서, 혹시 뒷 폐단이 있게 되거나 공평하게 되지 못할까 염려되기는 하지만 대체적으로 좋은 일이니 비록 한 두 사람이 천거에 빠지게 되더라도 주저하지 말고 시행해야 된다고 하였다. 또한 이희민은 천거로 인재를 뽑자는 것은 한 두 사람의 의견이 아닌데 폐단이 있다는 말로 원대한 일을 막아 버리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면서, 여러 어진이를 얻어 조정에 두면 국가가 반드시 힘입을 것이라는 것이다.

한편 조광조는 근래에 재상들의 의논이 이를 어렵게 여기는 것은 근래에 없었던 일이라 하여 어렵게 여기는 것이라고 하면서, 오늘날 시행하면 내일은 고사가 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정암을 중심으로 한 신진사류들이 현량과가 과거제도보다 더 우수한 제도라는 것을 아래와 같이 요약해 보면 첫째, 현량과는 재행을 겸비한 인재를 중앙과 지방에서 추천케 한 다음 전정에서 친히 책문하여 뽑기 때문에 과거제도에서 처럼 요행으로 뽑힐 수 없으며, 둘째, 명망과 실덕이 어긋나는 경우를 방지하기 위하여 거주(천거한 사람)의 성명도 함께 기록하여 후일의 증빙으로 삼기 때문에 천거를 소홀히 할 수 없다는 것과, 셋째, 과거제도에서는 문사만 숭상하기 때문에 정치적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인재가 나지 않고 나라가 옛날처럼 잘 다스려지지 않는 이유였다. 이와 같이 현량과 시행에 대한 찬반 논의가 분분했으나, 중종은 옛적에는 향거이선으로 인재를 뽑고 과거에 의존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사람들의 덕행이 모두 당시 사람들의 추앙받는 바가 되었는데, 지금은 중외의 과거한 사람들은 그의 재주는 알 수 있어도 마음과 행실은 잘 알 수 없다고 하면서, 대신들은 힘써 찾아내어 천거해야 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현량과의 천거책취에 관한 절목을 마련하라고 의정부에 전교 하였다.

朝廷大臣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현량과로 취재하는 것에 대한 중종의 적극적인 관심 표명은, 중종 8년이후 경학에 능한 신진세력을 등용하여 반정이래 누습되어온 폐정을 개선하고 士習을 바르게 하려는 중종의 개혁 의지와 조광조등이 주력하였던 소학 소재의 여씨향약 보급으로 인해 성리학적 질서 체계가 어느 정도 확립되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중종 14년 4월 현량과가 처음 시행되어 김식, 안처근, 안호지, 이연경, 권? 등 28명이 급제하였다. 이들 급제자의 선정기준은 첫째 성리학적 소양, 둘째 성리학적 가치관, 셋째 새로운 향촌 질서 수립의 공적, 넷째 현실 개혁 의지가 갖추어져 있는지의 여부가 우선적인 기준이었다. 따라서 조광조 등 신진세력들은 현량과를 통해 자신들이 추구하고 있던 성리학적 질서 체계의 확립과 개혁 정하다 적극적으로 동조할 세력을 보강하여 자신들의 정치 세력 확장을 꾀하였던 것이다. 반면에 조정대신들의 정치 세력은 상대적으로 약화되어 점차 정치적 기반이 무너지게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정대신들은 현량과 실시 이후의 폐해를 지적하면서, 자구책을 강구하기에 이르렀다.

즉, 신용개는 근래에 유생들이 제술에 힘을 쓰지 않는다고 하면서, 언어와 거동하는 것만 아름답게 여기고 학문을 하지 않으면 실상이 없게 된다고 하고, 이장곤은 지금 젊은 유생들은 경학은 근본이니 배워야 한다고 하고 사장은 비루하다 하여 제술에 힘쓰지 않기 때문에 경술에도 미치지 못하고 사장에도 능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당시 사신은 논평을 통하여 현량과를 통해 천인한 인물은 친근한 사람 아니면 사삿사람이라서 명성과 실지가 어긋나고, 바탕은 아름답지 못하면서 겉만 번지르르한 사람이 대각에 퍼져 난정의 폐단이 되었다면서, 서로 번갈아 가며 추천하고 찬양하여 부정하게 끌어주어 붕당을 만드는 것이 풍습이 되었으며, 관작을 사사로운 물건으로 여겨 삼대의 향거리선하는 유의가 아니고 시정의 좀도둑이 명예와 이익을 다투는 추태라고 하였다. 또 사신은 조광조의 무리들이 조정의 정사를 변란 시키고 국론을 어지럽히며 자기에게 붙는 자는 좋아하고 자기와 의견이 다른 자는 배척하였으나, 사람들이 모두 그 기세를 두려워해서 감히 입을 열지 못하여 나라가 위망할 지경이 되었다고 하였다.

조광조 등 신진세력들이 단행하였던 중종 14년 11월의 대규모적인 정국공신 위훈삭제후 기묘사화가 일어나 조광조 등이 추진하였던 개혁 정하다 실패한 후 현량과 혁파 논의 과정에서 조정대신들의 입장은 분명하게 밝혀진다. 즉, 현량과는 조종의 법을 변란한 것 중에서 대표적인 것으로, 뽑아 쓰고 싶은 사람만 골라서 천거하였을 뿐만 아니라, 어질지 못하고 행실이 변변치 못한 자들은 경제가 유여하다느니 학문에 연원이 있다느니 하면서 임금을 속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량과를 혁파해야만 조종의 법이 회복되고 사습도 일정한 향방이 있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중종은 현량과는 조종의 제도가 아니며, 천거할 때 폐단이 많았고 책시할 때도 편사가 많아 국가에서 시행하고자 하는 뜻과 크게 어긋나므로 혁파하지 않을 수 없다고 전교하여, 현량과는 중종 14년 12월에 혁파되었다.

결국 현량과는 소학 소재의 여씨향약 보급을 통해 향촌 사회에 성리학적 질서 체계가 어느 정도 성숙된 상태에서 조광조가 추진하는 개혁 정책은 뜻을 같이하는 경학에 능한 새로운 인물을 조정에 진출시키려는 제도적인 장치였다. 이를 통해 신진세력의 정치 세력을 강화하고, 사장을 위주로 하는 조정대신들을 견제하려고 하였으나 기묘사화로 조광조의 몰락과 함께 현량과는 혁파되었다.

출처 : [기타] http://eunminim.nahome.org/joreform222.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