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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해적

노략질의 바다로 나간 어부들 (부산일보 2011-07-04 [15:48:00]

[SEA&뉴스] 노략질의 바다로 나간 어부들
바다의 유목민들 해적으로 변신하다
[SEA&뉴스] 노략질의 바다로 나간 어부들
[SEA&뉴스] 노략질의 바다로 나간 어부들

부산지법 형사합의5부는 삼호주얼리호를 납치했다가 우리 군에 생포된 소말리아 해적들에 대해 지난달 무기징역에서 13년 형까지 중형을 선고했다. 이 가운데 아라이는 자기는 어부라고 강변하고 있다. 소말리아의 해적활동은 주로 어부와 군인 출신이 연합해 자행한다는 점에서 아라이는 비록 군인 출신은 아니지만 어부에서 전문 해적으로 전환한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해적들의 출몰은 대부분 좁은 해협이나 군도부근에서 이루어졌다.
해적들은 무장을 한 채 만 옆에 숨어서 기회를 노려 무역선들을 쫓았다.
이들을 품어준 바다가 바로 내해다.

소말리아의 어부들이 해적이 되기 시작한 것은 1991년 쿠데타 이후 무정부 상태에 빠진 이후. 내정혼란 속에 소말리아 정부의 감시가 사라진 틈을 타 외국의 대형 어선들은 소말리아 어부들의 삶의 터전까지 진출해 어장을 걷어가고 어구를 망가뜨리고 어족 자원을 싹쓸이하였다. 외국인들이 소말리아의 바다에 방사능 폐기물까지 투기하는 바람에 결국 먹고살 길이 막힌 어부들은 총을 들고 바다로 나서게 됐다. 당시만 해도 소말리아 해적은 그 나름의 명분이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소말리아 해적은 손쉽게 큰돈을 버는 그 나라의 특권층이 됐다. 처음엔 주로 어부 등이 해적질에 나섰지만 이제는 거침없이 폭력을 행사하는 조직 폭력배나 마찬가지다.


어부가 해적이 됐다고?

어부가 해적이 된 역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북유럽에서 활동했으며 지중해까지 들어와 나라까지 세운 바이킹, 남중국해를 호령한 해적들, 카리브해를 공포의 바다로 몰아넣은 해적들도 근본은 대부분 어부였다.


북유럽의 바이킹, 바다를 항해하다 육지가 나오면 배를 들고 다시 진군 할 정도로 용맹을 자랑한 그들은 사실 호전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대부분 농사꾼이요 어부. 그들이 주로 재배한 것은 보리, 귀리, 호밀, 과일, 채소 농사였고 이들 농민은 소, 염소, 돼지, 양도 사육했고 나머지는 낚시, 금속 가공, 조선, 목공예에 종사했다.


바이킹의 뒤를 이어 북해에 진출, 해적의 대열에 서게 된 사람들은 대서양 해안의 포르투갈, 프랑스, 영국, 노르웨이의 대구잡이 어부들이었다. 이들 어부들은 유럽 근해에서 트롤어업을 하거나, 낚시로 조업하는 것을 허가받았던 동안에는 멀리 대서양으로 가는 것보다 상대적으로 안전하고 이윤을 더 많이 올릴 수 있는 북해의 잉글랜드와 노르웨이 근해에서 조업하고자 하는 단순한 어민들이었다.


한편 남중국해의 해적들 역시 대부분은 원래 주장(珠江) 삼각주를 중심한 농사와 어업을 병행하던 어부집단 혹은 수상민들이었다. 이 지역은 면적 1만 1300㎢. 광둥성 중부를 흐르는 주장 어귀에 펼쳐진 충적평야로, 지형이 매우 낮고 평평하며, 수많은 지류와 그들 지류를 연결하는 수로가 종횡으로 얽혀 광둥성에서 농업생산력이 가장 높은 곳. 농민들은 해안을 따라 삼각주와 작은 토지들을 경작하였고 하천을 따라서 거주했기에 마을과 마을 잇는 하천은 농로를 대신하고 있었다. 자연스레 돛을 단 배는 마을과 도시를 연결하는 이동수단으로 기능했고 부족한 식량을 대신할 어업의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내해는 해적의 요람?

역사 이래 해적들의 출몰은 대부분 좁은 해협이나 군도부근에서 이루어졌다. 해적들은 무장을 한 채 만 옆에 숨어서 기회를 노려 무역선들을 습격하고 쫓았다. 이들을 품어준 바다가 바로 내해다.


남중국해는 중국 남쪽과 필리핀 및 인도차이나반도와 보르네오섬으로 둘러싸인 바다다. 중국역사서에는 내해(內海) 혹은 내양(內洋)으로 기록되어 있다. 내해의 가장 두드러진 지리적 특징은 해안을 따라 무수히 널려 있는 섬들이다. 광둥에만 700개 이상의 섬들이 있다. 해적들에게 이들 섬은 항해를 하는데 중요한 표지 역할을 했고 어떤 섬들은 해적들의 쉼터가 되기도 했다. 남중국해의 연안은 단순히 육지가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는 곳이 아닌 새로운 삶의 양식이 펼쳐지는 공간이었다. 특히 중국과 베트남의 국경에 위치한 장핑은 중국인들이 고기를 잡으러 들어갔다가 해적이 되어 나오는 곳으로 유명했다.


그리고 지중해 역시 크고 작은 섬들로 이루어져서 해적들의 은신처로는 그저 그만이었다. 크레타 섬은 해적들의 오랜 기지였다. 금은보화를 실은 페니키아의 상선에서 로마의 무역선이 해적들의 밥이었다. 지중해의 수많은 섬을 기반으로 신출귀몰하면서 지나가는 배를 괴롭혔던 것.


말라카 해협과 신대륙의 카리브해 역시 크고 작은 섬이 밀집해있는 내해여서 해적들의 은신처로 각광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내해가 해적활동에 좋은 조건을 제공하는 요인이 또 하나 있다. 내해에서는 무역이 활발했다는 점이다. 유럽의 내해 지중해는 북아프리카와 유럽, 동방과 서방을 잇는 고속도로였다. 지중해는 북아프리카산 곡물과 그리스의 올리브 기름, 동서방 간에 견직물·양탄자·염료·귀금속·금은세공품·방향·의약품·설탕·향료·과일과 목재·수지·금속이 이동하는 물류의 중심지였다.


또한 신대륙의 내해 카리브해는 신대륙의 상품과 막대한 금은보화가 이동하는 벨트였다. 멕시코의 황금이 유럽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바다를 지나야 했던 것.


마찬가지로 남중국해도 목재와 항아리, 기와, 석탄이 중국에서 베트남으로 이동하는 물류의 바다였다. 상품이 바닷길을 통해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사람들도 항구를 드나들었다. 무역은 내해 남중국해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활력소와 같은 구실을 하였다. 배를 가지고 항구를 드나들면서 장사를 하는 사람들, 항구에서 상품을 구하는 사람들, 일하는 사람들로 내해는 항상 북적거렸다. 내해의 바닷길은 시장과 사람들의 거리를 좁혀주었다. 이곳에서 범선의 무역상들은 일본 필리핀 동남아 각국들과 교역을 하면서 내해의 무역을 이끌어갔다. 해상 재화의 소통이 있는 곳엔 해적이 꼬이기 마련이었다.

생존의 벼랑에 내몰린 사람들

북해의 어부와 농사꾼이었던 바이킹을 노략질의 바다로 내몬 중요한 요인은 다름 아닌 무섭도록 냉혹한 기후다. 북구의 비가 많고 추운 혹한의 자연 앞에서 바이킹은 매순간 살아남기 위해 투쟁을 벌여야 했다. 눈비를 맞으면서 근근이 보리 수프로 연명하고 농사라도 짓다가 작은 실수에도, 혹은 기후가 조금만 이상해져도 종족집단 전체의 생존이 위협을 받았다. 빵은 기본이 아닌 사치품이었고 생선과 곡물, 죽이 주 양식이었다. 그나마 생선을 먹고자 해도 목숨을 걸고 뼛속을 에이는 차가운 물과 북풍을 헤쳐 나가야 했다. 더군다나 여름에는 고기가 안 잡히니 생존을 위해서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눈을 남쪽으로 돌려 탈취의 바다를 건너야 했다. 최초 바이킹의 노략질 기록으로 남은 사건은 서기 793년 잉글랜드 북부의 린디스판 수도원 습격으로 무방비 상태의 안온한 사람들을 대상, 무자비한 약탈과 살인을 감행했다. 이판사판인 바이킹의 눈에 보이는 것이 없었을 것이 분명하다.


한편 바이킹 이후 북해에 진출한 대서양 연안국 어부들은 곧 한자 동맹으로 알려진 강력한 도시들 간의 동맹체에 의해서 북해에서 쫓겨난다. 그들 앞에 나타난 바다는 비바람이 북해보다 거센 북대서양. 이곳에서 대구 조업을 위해 그들은 두 개의 마스트를 세우고 홀수가 깊은 Dogger 선을 고안해낸다. Dogger는 순수한 어업을 위해 디자인되었고 각각의 선박 단위로 선제공격을 할 수 있도록 건조된다. 어부들은 Dogger 선으로 대구를 쫓아가기 위해 대서양 멀리까지 나가는 것이 가능해졌다.


처음 1세기 이상이 되도록 영국, 네덜란드, 그리고 프랑스 정부는 이들 어부들에 대해 거의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모피 무역, 그리고 바다의 불한당 해적들의 규모가 커지면서 대서양 연안국 정부는 무장한 상태의 견고한 Dogger 선을 사실상의 해군으로 조직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고 대서양 어민들에게 매우 큰 관심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정부는 어부들을 입대시키기 위해 인센티브를 제공했다. 가장 쉽고 값 싼 인센티브는 선원들로 하여금 사실상 해적과 같은 일에 종사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때때로, 정부는 어부들에게 나포 면허장으로 알려진 문서를 손에 쥐어주었고 이로써 어부들은 공식적인 사략선 해적으로 변신한다. 대구 배를 타던 어부들이 공공 해적으로 배를 갈아탄 것이다.


남중국해와 맞닿은 기름진 땅을 가진 주장 삼각주 지역은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이기도 하다.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부를 축적할 기회가 많았지만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기회가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이 몰려드는 지역일수록 고도의 상업화가 진행되고 따라서 지주들의 세력이 강화되면서 토지를 잃게 된 농민들은 점차 소작농으로 전락하게 된다. 농토를 뺏기고 내몰린 사람들은 육지에서 양식을 구할 수 없게 되자 마지막 남은 배에 의존해 물 위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생존투쟁에서 패배한 사람들은 연안을 따라서 수상집단을 이루기 시작했다. 이들은 땅 한 번 밟지 않고 일생을 살아가는 바다의 유목민으로 전락한 것이다.


이들 바다의 유목민들은 장소에 대해 별로 집착을 보이지 않았다. 큰 규모의 종족을 형성하지도 않았고 사당이나 공동경작지도 없었다. 육지와 단절된 사람들은 계절풍에 몸을 맡기며 정기적으로 이주해갔다.


육지로부터 멸시당하는 버림받은 계층인 이들은 오랫동안 ‘단자’로 불리면서 천민으로 분류되었고 관직으로 나가는 길도 봉쇄되었다. 과거의 길이 막힌 그들, 공직사회에도 진출할 희망이 전혀 없었던 수상민들은 일종의 이질적인 문화집단으로 변모했다.


결국 생존의 벼랑에 내몰린 어부들은 해적행위에 마음을 빼앗겨 버린다. 부업으로 남는 시간만 이용하면 좋은 벌이가 되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연간 120일-150일 정도밖에 안 되는 어획기도 긴밀한 관계가 있었다. 여름철은 고기잡이가 잘 안되고 위험스런 시기였다. 어부들은 경제적으로 곤란을 겪었다. 남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북쪽으로 올라가 해안지역을 약탈하는 무리로 변신한다. 가을이 오고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 임시해적들은 살던 곳으로 돌아와서 고기잡이를 계속하였다.


살아남기 어려워진 어부들이 생존의 수단으로 선택한 해적행위는 지금도 형태만 달리할 뿐 다양한 모습으로 재현되고 있다.

TIP/ 중국 해적 기원은

중국의 진나라시대와 한나라 때에는 산둥 ·장쑤(江蘇)의 연안에서 이미 해적이 활동하였다. 후한서는 109년에 해적 장백로 등 3,000여 명이 붉은 두건에 홍의를 입고 장군이라 자칭하면서 해변을 휩쓸었다고 전하고 있으며, 삼국지 ‘오지(吳志)’에는 “해적이 해염(海鹽:浙江)을 격파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당 ·송 ·원 ·명나라로 내려오면서 그 근거지는 남중국해가 중심이 되었다. 당 시대엔 풍약방, 송나라 땐 장선, 원나라 통치기엔 방국진, 명나라가 들어서자 왕직 ·서해 ·장련 ·임봉 ·증일본 ·정지룡이 이름을 알렸고 청나라 땐 채견 등이 유명하다.


해적들은 해상의 약탈에 그치지 않고 연안의 도시를 습격하는 일도 있었으며, 하구 등을 거슬러 올라가 오지에까지 침입하기도 하였다. 이에 당나라에서는 초토해적사(招討海賊使)를 두었는가 하면, 원사(元史)에는 해적 하문달이 세조 쿠빌라이 재위시에 노략질한 부녀자 130여 명을 그들의 집으로 돌려보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로 미루어 해적의 약탈 대상은 사람과 가축 재물을 가리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남중국해 해적, 평범한 어부였던 사람들이 어떻게 노략질의 바다로 나아갔는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저 흉포한 해적질과 해적의 우두머리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이다. 남중국해 해적의 발생과 관련, 대중운동이나 반란의 폭발적 생태적 요인과 연결해서 해석을 하기도 하고 자원이 부족해서 살기 힘든 환경에서 나타난 생존전략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남중국해 연안을 공포에 떨게 한 대다수의 해적들은 알고 보면 역시 어선을 타고 고기를 잡던 어부나 선원이었다. 본업이 해적이 아닌 어부였고 부업이 해적이 대부분이었다가 약탈적인 생존전략을 하나의 거대한 조직으로 발전시켜 나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