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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총력전 매소성대첩 1년뒤 唐의 철수 (조선닷컴 2010.01.10 14:11)

신라의 총력전 매소성대첩 1년뒤 唐의 철수 이끌었다

입력 : 2010.01.09 03:15 / 수정 : 2010.01.10 14:11

'계림대도독부(鷄林大都督府) 대도독'이라니! 서기 663년, 당(唐)이 내린 '벼슬'의 이름을 보고 신라 문무왕(文武王)은 참담했을 것이다. 천신만고 백제를 패망시켰는데 신라마저 당나라의 지방행정기관처럼 전락한다고?

수십 년 동안 굴욕을 감수하면서 끈질기게 추진했던 나당(羅唐) 연합의 결과치고는 황당했다. 진덕여왕은 당의 환심을 사려 찬양시 '치당태평송(致唐太平頌)'을 지어 바쳤고 무열왕은 대신들의 복장을 당나라식으로 바꿨다.

백제 멸망 때 당의 역할은 소극적이었다. 소정방(蘇定方)은 서해상에서 눈치만 살피다 황산벌 전투 뒤에야 상륙했다. 그런데도 당은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두고 665년에는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扶餘隆)을 도독으로 삼았다.

■ '계림대도독' 벼슬, 참고 견딘 문무왕

백제를 자기 땅으로 편입하려는 데 이어 신라까지도 손길을 뻗침으로써 당은 한반도 전체를 병탄하겠다는 야욕을 드러냈다. 하지만 신라는 때를 기다려야 했다. 668년 고구려가 멸망했다. 신라마저 온순해진다면 모든 것이 당의 시나리오대로 되는 셈이었다.

그러나 옛 고구려 땅 곳곳에서 부흥군이 일어나면서부터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670년 3월 신라 장군 설오유(薛烏儒)가 고구려 유장 고연무(高延武)와 함께 정예병 1만 명씩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당군을 공격했다. 마침내 나당전쟁의 서곡이 울린 것이다.

신라는 고구려 왕족 안승(安勝)을 고구려왕에 봉하고 고구려 유민 포섭에 나섰다. 그 해 7월부터는 병력을 동원, 옛 백제 지역의 정복에 나서 82개 성을 함락했다. 예상치 못한 반격에 당은 당황했고 이내 협박 작전을 썼다.

671년 7월 당 장수 설인귀(薛仁貴)는 문무왕에게 편지를 보내 "매미 잡는 사마귀가 참새 무서운 줄 모른다더니, 그 작은 땅에서 감히 반역을 도모하려 하는가"라 비난하고 겁을 줬다.

이에 문무왕은 강수(强首)를 불러 '답설인귀서(答薛仁貴書)'를 쓰게 했다. 르포기사를 방불케 하는 이 글은 "양식을 주느라 신라 백성들은 풀뿌리도 부족한데 당나라 군사들은 식량이 남아돈다"며 통일전쟁기 국력을 쏟은 신라의 고난을 절절히 묘사했다. 이어 "우리가 무슨 잘못 때문에 하루아침에 버림을 받아야 하는가"라며 당의 배신에 대해 항변했다. 사실상의 대당(對唐) 선전포고문이었다.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3개월 뒤인 671년 10월 당천(當千)이 이끄는 신라 수군이 당나라 운송선 70여 척을 서해에서 격파했고, 672년 8월에는 신라군이 대동강 하류인 마읍성(馬邑城)에서 당군을 무찔렀으나 추격 도중 석문(石門)에서 패하는 등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 매소성전투 노획한 말만 3만필

이 전투에서 살아남은 김원술(金元述)은 아버지 김유신에 의해 사형에 처해질 위기를 맞기도 했다. 지금의 남한산성인 주장성(晝長城)이 요새로서 건설된 것도 바로 이때였다.

이제 결정적인 전투가 다가오고 있었다. 675년 2월 당 고종(高宗)은 이근행(李謹行)을 안동진무대사(安東鎭撫大使)로 임명해 신라와 전면전을 치르게 했다. 이근행은 20만 대군을 이끌고 남하했고 설인귀의 수군은 서해로 침입했다.이미 전쟁 준비를 갖추고 있던 신라는 9군(軍)을 투입하는 총동원체제로 돌입했다. 이 '9군'에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도 포함된 것으로 보는 시각이 있는데, 그렇다면 당나라와 건곤일척의 승부를 앞둔 상황에서 비로소 '삼국연합'이 이뤄졌던 셈이다.

먼저 장군 문훈(文訓)이 9월에 설인귀군을 맞아 싸워 1400명을 참수하고 전투선 40척과 말 1000필을 빼앗았다. '삼국사기'는 '설인귀가 포위망을 헤치고 (간신히) 달아났다'고 기록했다. 이로써 당군의 해상 보급로가 차단됐다.

9월 29일 이근행의 대군은 임진강을 건너 매소성(買肖城)에 닿았다. 이미 대기하고 있던 신라군이 일제히 당군을 공격했다. 대패한 당군의 사상자 수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신라군이 노획한 말만 3만 필이 넘었다. 아쉽게도 김원술이 참여한 사실만 알 수 있을 뿐 이 역사적인 대첩의 지휘관이 누구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매소성 대첩으로 나당전쟁의 주도권은 신라에 넘어갔고, 한국사의 흐름은 완전히 바뀌었다. 이듬해인 676년
평양의 안동도호부를 요동으로 철수함으로써 당나라의 한반도 지배는 좌절됐다. 매소성은 경기 연천 청산면의 대전리 산성으로 여겨지는데 6·25 때는 인접한 3번 국도가 북한군과 중공군 주력 부대의 남침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