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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선왕과 18명의 고려용사 (미래전략연구원 2010/01/11)

고려남자의 몽골행 ⑤


충선왕과 18명의 고려용사


박원길 (미래연 사회문화전략센터 연구위원 / 칭기스칸연구센터 소장)


마지막으로 소개하고 싶은 부분이 충선왕이 머나먼 티베트의 사까로 유배될 때 함께 따라간 박인간(朴仁幹, ?∼1343)과 대호군(大護軍) 장원지(張元祉) 등 18인의 고려용사에 대한 이야기이다.


충선왕은 1320년 고려출신의 환관인 바얀-터구스(Bayan-Tögüs, 伯顔禿古思)와의 알력으로 티베트로의 유배가 결정되었다. 1321년 유배가 집행되자 그간 충선왕에게 한없는 충성을 맹세했던 인물들은 갖가지 사연을 대며 혹은 말없이 중간에서 사라져 갔다. 고려의 재상이며 충선왕의 명으로 수시력(授時曆)을 고려에 전했던 최성지(崔誠之, 1265∼1330)도 이 위기의 상황에서 동행하는 척 하다가 어느 날 슬그머니 사라졌다.


머나먼 티베트의 길


인간은 어려울 때 그 진면목을 알아본다고 했다. 오죽했으면 후대의 학자인 박지원도 그의『열하일기』에 이 아름다운 18인의 용사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심양왕은 강남의 [유명한 절들에] 강향(降香)할 수 있도록 원나라 영종(英宗)에게 허락
을 청하였다. [충선왕은] 강소(江蘇)ㆍ절강(浙江)을 유람하면서 보타산(寶陀山)에 이르
렀다. 이듬해에 또 강향을 청하여 금산사(金山寺)까지 이르렀다. [이에] 황제는 사신을
보내 ‘군사들은 [충선왕을] 옹위해 북쪽으로 모시고 올 것이며 또 본국까지 호송하라’는
긴급 명령을 전달했다. [그러나] 왕은 어기적거리며 즉시 떠나지 않았다. [그러자 분노
한] 황제는 [그렇게 절이 좋다면 충선왕은] 머리를 깎고 불경을 공부하라고 명하면서 토
번의 살사길(撒思吉) 땅으로 유배시켰다. 박인간(朴仁幹) 등 18명이 그를 따라 갔는데,
이곳은 연경에서 1만 5천리나 떨어진 곳이다.


충선왕이 티베트로 유배된 살사길(撒思吉, 撒思結)은 사까(Saskya)의 음역이며 그 지방은 오늘날 라싸에서 남서쪽으로 약 400킬로 떨어진 사까(Sa'gya, 薩嘎)이다. 사까는 팍빠(Ḥpḥags-pa =Phags-pa, 1235∼1280)로 대표되는 티베트불교 사까빠(Saskya-pa, 薩迦派)의 본거지이다. 그가 티베트로 유배될 때 박인간과 장원지를 비롯한 18명의 고려인들이 파란만장할 길을 동행했다.


위에 등장하는 18명의 고려용사들 중 소위 배웠다는 사람은 박인간뿐이다. 그 나머지 인물들은
도저히 추적이 불가능할 정도로 미천한 신분의 고려인들이다.


티베트와 청해(靑海)에 부는 서역의 바람


박인간과 그의 일행은 1321년 1월 충선왕을 따라 10개월에 걸치는 대장정 끝에 1321년 10월
27일에 사까에 이르렀다. 그리고 1324년 4월 2일 대칸의 명령에 의해 도메(朶思麻, 脫司麻,
mdo-smad: 감숙과 청해지구)의 유배지로 옮기기 전까지 16개월을 그곳에서 보냈다. 그리고 도메의 유배지에서 1323년 10월 28일 사면령이 내리기 전까지 10개월을 또 보냈다. 사면령이 내리자 이들은 충선왕을 모시고 1323년 12월 8일 북경으로 돌아왔다.


이들의 티베트 여정은 오늘 날의 눈으로 보아도 파란만장한 한 편의 소설을 연상시킨다. 또 임금과 신하를 떠나 변함없는 우정의 길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도망친 사람과 따라간 사람들,박인간이 여행기를 남기지 않는 한 자체 기록이 불가능한 이 18인의 고려용사들은 무엇을 느끼며 또 이역의 사람들과 어떤 만남을 가지며 갔을까. 고려 최초의 티베트ㆍ청해 기행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들의 여정은 그야말로 한 편의 흥미진진한 드라마와도 같다.


마지막 충신 고려용사 박인간은 누구였을까


충선왕의 티베트ㆍ청해의 길에서 충선왕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지식인은 박인간뿐이었다.『고려사』나『고려사절요』에 기록된 것을 근거로 박인간의 행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그는 1315년고시관(考試官) 이진(李瑱)이 주관한 과거에서 장원으로 급제했지만 그 해 원나라에서 행해진 과거시험에서는 탈락의 비운을 맛보았다. 이후 그는 직보문각(直寶文閣)으로 상왕(上王)인 충선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다가 유배지까지 동행했다. 이후 1324년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고 진성병의익찬공신(盡誠秉義翊贊功臣)에 봉해졌으며, 이어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가 되었다. 그리고1341년 원나라가 충혜왕의 동생인 강릉대군(江陵大君) 기(祺: 뒤의 공민왕)를 불러 입조하게 하자 정승 채하중(蔡河中), 전첨의평리(前僉議評理) 손기(孫琦) 등 30인과 함께 수종하여 원나라에갔으며 이곳에 있던 원자(元子: 이후의 충목왕)의 사부(師傅)가 되었다가 그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위와 같은 행적만으로는 그가 누구인지 명료하게 알 수 없다. 그의 인간성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기록이 이제현이 남긴 “슬픔에 젖어 박인간을 보내다(烏頭白送朴仁幹)”라는 시이다.


까마귀 생김새 옻칠처럼 검다고
사람이 볼 때마다 모두 미워하지만
가련한 연단(燕丹:진나라에 인질로 잡힌 연나라의 태자)의 서러움 풀어주려고
하룻밤을 애쓰고 나니 머리가 희어졌다네.
나는 일찍이 네가 태양 속에 있다는 것도 괴이하게 생각하고
또 금모(金母: 서왕모(西王母))가 너를 부렸다는 말도 허망하게 여겼더니
지금에야 비로소 재잘거리는 새들 중에
일편단심 너 같은 새 없다는 것 깨달았네.
지저귀면서 날아왔다 또 날아가면서
반포(反哺: 효도)하느라 우거진 숲 속에서 온갖 고생하네.
들어오면 효자요 나가면 충신이니
아아! 너는 새 모양을 한 사람이네.
세상사람 누가 가히 너의 행동 따르겠는가.
차라리 사람의 옷을 네가 입어라.


이 시를 유심히 들여다보면 그는 분명 무언가 사연이 있는 인물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 사연이 무엇이었던 간에 그는 “한번 좋다고 말한 뒤에는 고통을 말하지 않는다!”는 칭기스칸의 군대와 같은 좌우명을 지닌 인물이었음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