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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物 임금` 경덕왕은 왜 왕비를 쫓아냈을까 (조선닷컴 2010.04.18 02:50)

大物 임금' 경덕왕은 왜 왕비를 쫓아냈을까

입력 : 2010.04.17 07:44 / 수정 : 2010.04.18 02:50

"이게 도대체 뭐예요? 목간(木簡) 같기도 한데…."

1975년 봄, 경주 안압지(雁鴨池) 바닥을 발굴하던 여성 조사원이 개흙층에서 이상한 유물 한 점을 수습했다. 길이 17.5㎝의 원통형 나무막대였다. 그게 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던 조사원은 조사팀장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팀장의 표정이 굳어졌다. "알았으니 자네는 돌아가 보게…." 그것은 완전한 형태로 보존된 통일신라시대의 소나무 남근상(男根像)이었다. 귀두(龜頭)와 돌기까지 복제라도 한 듯 대단히 사실적으로 표현된 작품이었다.

무엇에 쓰던 물건이었을까? 안압지가 신라 태자의 거처로 시녀들이 많이 살았고 이 유물이 손때를 많이 탄 듯 반질반질하다는 점에서 짐작 가지 않는 바는 아니나 신라인들의 성(性) 문화가 꽤 개방적이었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최근
경주 쪽샘지구에서 성기가 강조된 남성과 출산 중인 여성을 묘사한 토우(土偶)들이 출토돼 이목을 끌었지만 사실 지금까지 나온 토우와 비교하면 상당히 '점잖은' 수준이다.

예를 들어 국보 195호 '목 긴 항아리'의 장식에는 후배위(後背位)의 적나라한 포즈와 희열에 찬 여성의 표정이 드러난다. 그런데 17.5㎝로 만든 건 아무래도 과장이 아닐까? 기록에 따르면 그렇지도 않다.

'삼국유사'에는 어린이용 각색판에 절대 수록되지 않는 부분이 좀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신라 22대 지증왕(智證王)의 음경 길이가 1척5촌이었다는 기록이다(王陰長一尺五寸). 약 45㎝다.

지증왕은 전국을 뒤져 배필을 얻었지만 200여년 뒤에 나온 '은메달'은 심각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35대 경덕왕(景德王·재위 742~765)의 음경 길이는 8촌(약 24㎝)이었는데 아들이 없어 조강지처 삼모부인(三毛夫人)을 왕비 자리에서 폐해야 했다.

새로 맞은 왕비는 이름부터 의미심장한 만월부인(滿月夫人)이었다. 해는 남성의 양기(陽氣), 달은 여성의 음기(陰氣)를 상징하는 것인데 음기가 꽉 찬 보름달인 '만월'이라니? 경덕왕은 마침내 새 왕비에게서 아들을 얻게 된다.

학자들은 이 '왕비 교체 사건'의 배후에는 정치적인 의미가 있다고 해석한다. 754년에 삼모부인의 시주에 의해 황룡사종이 만들어졌는데 그 무게가 자그마치 49만7581근(약 300t)으로 에밀레종의 4배였다.

현존한다면 그야말로 '세계 최대 규모의 종'이었을 것이다. 이미 국력이 기울던 통일신라에서 이 종의 주조는 경제적인 재앙이었다. 그런데 삼모부인의 배후에는 정치와 외교의 실권을 장악한 장인 김순정(金順貞)이 있었다.

경덕왕은 지방 군현(757)과 중앙 관직명(759)을 중국식으로 바꾸는 한화(漢化) 정책을 썼는데 귀족 세력에 맞서기 위한 왕권강화책이었다. 삼모부인이 쫓겨난 것은 이 무렵이었다.

황룡사종으로 국고를 파탄 낸 책임을 지운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토록 바라던 아들을 얻게 된 신라 왕실의 앞날은 순탄하지 못했다. 늦둥이로 태어난 경덕왕의 맏아들 건운(乾運)은 경덕왕이 죽었을 때 불과 여덟 살이었다.

그가 36대 혜공왕(惠恭王)인데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천재지변과 반란 사건에 시달린 끝에 780년 23세의 나이로 시해되고 만다. 그런데 혜공왕의 탄생과 관련해서 좀 기이한 설화가 등장한다.

경덕왕이 그를 낳기 전 의상대사의 제자 표훈(表訓)에게 이런 부탁을 했다. "아들 좀 낳을 수 있게 상제(上帝)께 말씀드려 주시오." 표훈이 하늘에 다녀와 "딸을 낳을 것"이라고 말하니 경덕왕은 "아들로 바꿔 달라"고 부탁했다.

표훈이 다시 올라가니 상제는 "바꿀 순 있지만 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이라 말하고는 돌아서려는 표훈에게 "잠깐… 당신은 여기가 이웃 마을인 줄 아나? 왜 왔다갔다하면서 천기를 누설하는데? 앞으론 다니지 마!"라고 야단쳤다.

그러고 나서 혜공왕이 태어났는데 '삼국유사'는 이렇게 기록한다. "어린 임금은 이미 여자로서 남자가 됐으므로(小帝旣女爲男故) 돌날부터 왕위에 오를 때까지 언제나 여자들이 하는 장난을 하고 비단주머니 차기를 좋아했으며 도사들과 어울려 희롱했다."

'삼국유사'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지나친 상상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여자로 태어났는데 정치적 목적에 의해 억지로 남자인 척했다는 이야기는 아닐까? 혜공왕에게는 왕비가 둘 있었지만 자식을 낳았다는 기록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