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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의 거점, 진도 용장산성 (전남일보 2010. 06.07. 00:00)

삼별초의 거점, 진도 용장산성
입력시간 : 2010. 06.07. 00:00


● 또 하나의 고려 정부, 진도 오랑국

1231년 몽골군이 고려를 침략했다. 강화도로 천도하면서까지 40년간 항전한 고려 왕조는 1270년 원나라와 굴욕적인 강화를 맺고 개경으로 환도했다. 그리고 삼별초에게 해산을 명령하고 삼별초군의 명부(名簿)를 압수했다. 삼별초의 명부가 몽골군의 손에 들어가면 몽골군의 보복이 있음 것임은 자명한 일이었다. 이에 배중손을 중심으로 한 삼별초는 1000여 척의 배에 나눠 타고 진도로 향했다.

삼별초가 진도를 항전의 근거지로 택한 것은 대몽 항쟁의 전략상 유리한 지역이었고, 물산이 풍부하였으며, 육지와 가까웠고, 전라도ㆍ경상도 남해안의 조운로를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진도는 몽골이 꺼렸던 일본, 중국의 남송과 통교하는데 유리한 곳이기도 했다.

8월 19일, 두 달여 만에 도착한 삼별초군은 용장산성을 쌓아 방어시설을 구축하고 궁궐과 관청을 지어 항전 기지로 만들었다. 그리고 왕족인 승화후 왕온(王溫)을 국왕으로 옹립하고 관부를 설치, 관리를 임명하는 등 또 하나의 고려 정부를 세웠다. 국왕을 황제라 칭하고 '오랑(五狼)'이라는 새로운 국호를 사용했다. 왕온을 왕이 아닌 황제라 칭한 것은 고려 국왕인 원종보다 그 지위를 높이려는 의도였으며, 몽골과 대등하다는 의식을 대내외에 과시하기 위해서였다.



● 좌절된 삼별초의 꿈

초기 삼별초 정부의 활동은 왕성했다.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30여개 도서를 지배했다. 합포(마산), 금주(김해), 동래, 거제, 장흥, 나주 등 전라도와 경상도 연안 일대를 휘하에 두었으며,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여 대몽연합전선을 구축하고자 했다.

승승장구하던 삼별초에 위기가 찾아든 것은 용장산성에 거점을 마련한지 1년이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1271년 5월, 김방경과 홍다구가 이끄는 1만여 명을 태운 400여 척의 전함이 진도를 향해 공격해왔다. 여ㆍ몽 연합군과 삼별초군은 현재의 벽파진 나루(울돌목) 부근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초기에는 삼별초군이 승리했지만 오래 버티지는 못했다. 여ㆍ몽 연합군의 총 공격에 용장산성이 함락되고 남도 석성으로 향하던 배중손이 전사하였으며, 삼별초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었던 왕온은 금갑포로 향하던 도중에 홍다구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었다. 그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묘소가 현재 진도군 의신면 사천리의 속칭 '왕무덤 재'에 남아 있다. 진도를 점령한 몽골의 홍다구 군졸들은 양곡 4000석과 재물을 약탈했고, 미처 피난하지 못한 남녀 1만여 명을 포로로 삼아 개경으로 압송했다.

삼별초 장군 김통정은 남도포 나루에서 피맺힌 한을 가슴에 품고 제주의 항파두리로 떠나야만 했다.



● 오키나와에서 부활된 삼별초

'고려사' 등의 사서는 배중손이 이끄는 진도의 삼별초군이 1년여 뒤인 1271년 쳐들어 온 고려 정부군과 몽골 연합군에 의해 진압되었고, 제주도로 옮겨간 김통정의 잔여 세력도 2년 뒤 소탕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정말 기록대로 삼별초는 그 뒤 완전히 사라진 것일까?

1994년 오키나와를 지배한 옛 류큐(琉球)왕국의 수도 슈리성과 우라소에(浦添)시의 우라소에 요도레(성의 암벽을 파서 만든 왕실 무덤)에서 다량의 기와가 발굴되었다. 그 중 눈길을 끈 것은 '癸酉年高麗瓦匠造(계유년고려와장조)'라고 새겨진 암기와였다. '계유년에 고려 기와 장인이 만들었다'는 암기와가 이역만리 오키나와에서 출토된 것이다. 또 다량 출토된 연꽃무늬 수막새는 놀랍게도 제작 기법과 형태가 진도 용장산성에서 출토된 13세기 수막새와 동일했다.

진도 용장산성 출토 수막새와 꼭 닮은 '계유년고려와장조' 암기와의 출토는, 오키나와가 삼별초와 긴밀한 관계였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고려 장인이 언제 오키나와에 진출했는지를 알려주는 암기와에 새겨진 '계유년'의 구체적인 시점이었다. 고려 시기 계유년에 해당하는 연대로는 1153년, 1273년, 1333년, 1393년이 있다. 최근 일본 고고학계는 기와와 함께 출토된 유물들에 대한 탄소연대측정을 실시한 결과 계유년은 1273년일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이들 기와는 삼별초를 중심으로 한 고려인들이 오키나와 류큐 왕국(15~19세기) 건국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음을 보여주는 자료"로 평가했다. 1273년은 제주도에 쌓은 삼별초의 항파두리성이 여ㆍ몽 연합군에게 함락된 해다.

삼별초가 오키나와에서 출토된 기왓장을 통해 오늘 다시 부활하여 우리 앞에 서 있다.

용장산성 고려 왕궁지 확인

목포대 박물관 3차 시ㆍ발굴조사 건물배치 개성 만월대와 일치
입력시간 : 2010. 11.29. 00:00



목포대박물관이 시ㆍ발굴한 진도용장산성 내 고려 왕궁지. 목포대박물관 제공

고려시대 대표적인 대몽항쟁의 유적지인 진도 용장산성내의 고려 왕궁지 전체 윤곽이 드러났다.

목포대학교박물관(관장 이헌종)은 진도 용장산성내 고려 왕궁지에 대한 3차 시ㆍ발굴조사 지도위원회를 27일 진도 용장산성에서 개최했다고 28일 밝혔다.

진도 용장산성은 고려시대 대표적인 대몽항쟁 유적으로 1964년 사적 제126호로 지정됐으며, 왕궁지와 산성으로 이뤄져 있다.

이번 시ㆍ발굴조사는 산성 내부 왕궁지가 단기간에 걸쳐 사용됐음에도 불구하고 각 지구별로 여러 동의 건물지와 유구들이 온전한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이 확인됐다. 특히 각 지구별로 남아 있는 건물지는 고려시대 건축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건물지 중 B지구는 중정(中庭)을 두고 주위로 회랑을 둘린 형태가 확인됐다.

또 이 건물지의 전체적인 배치형태를 고려해 볼 때 2차 발굴시(2008년 11월) 조사된 건물지와 연결된 구조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배치 형태는 고려 도성인 개성 만월대의 건물지군과 일치하고 있어 상호 관련이 깊은 것으로 박물관측은 추정하고 있다.

목포대박물관 관계자는 "전반적인 건물지의 배치상태와 구조적인 특징, 건물지의 중심축과 차이를 보이는 유구의 존재 등을 볼 때 삼별초가 들어오기 이전 존재하던 사찰을 개조해 일부 공간을 확장, 왕궁지를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며 "출토유물은 12~13세기대의 고려자기나 평기와가 대부분"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