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바로알기

`중국 낙양의 의자왕 묘에서 `석관` 나왔다` 현지 주민 증언 (조선일보 2010.11.01 11

"중국 낙양의 의자왕 묘에서 '석관' 나왔다" 현지 주민 증언
입력 : 2010.11.01 11:14

"중국낙양의 의자왕 묘에서 석관 나왔다" 현지 주민 증언

묘터는 이미 훼손돼 보리밭으로 변해

고유민 중국여행전문가

지난 19일 오후 4시 20분 중국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을 출발한 고속열차 화해호(和諧號)는 1시간 40분만에 370㎞ 떨어진 하남성(河南省) 낙양(洛陽)에 도착했다. 서안과 정주(鄭州)간 505㎞를 2시간만에 주파하는 이 열차의 순간 최고속도는 350㎞. 깨끗한 기차 안에서 담배를 피우고 꽁초를 버리거나 해바라기씨를 까먹고 쓰레기를 좌석 아래로 쓸어내리는 사람은 없었다. 중국은 중서부 내륙까지 더이상 ‘옛날의 중국’이 아니었다. 한국에서 직항편이 없는 낙양까지 가려면 서안이나 정주를 거쳐야 하지만, 거대한 대륙을 반나절권으로 연결하는 고속철도 덕분에 큰 불편함은 없다.

의자왕묘터였다는밭.JPG

<보리밭으로 변한 의자왕의 묘터/낙양=지해범 중국전문기자>

하남성은 황하(黃河) 남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황하 유역은 옛부터 중국인들의 정신적인 고향이자 정치·군사·문화의 중심지였다. 지금은 상해 천진 등 연해지역에 경제주도권을 빼앗겼지만, 인구 1억 명의 시장을 바탕으로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낙양은 황하의 중심, 즉 중원에 위치하여 9개 왕조의 수도가 되었다. 이곳을 중심으로 번성한 왕조는 동주(東周), 후한(後漢), 조위(曹魏·삼국시대 조조가 세운 위), 서진(西晉), 무주(武周·중국 유일의 여황제인 무측천이 세운 왕조), 후량(後梁), 후당(後唐) 등이다. 낙양이란 이름은 낙수(洛水·지금의 洛河)에서 유래했는데, 이 이름과 관련한 에피소드가 있다. ‘낙양’의 발음은 ‘떨어지는 태양’을 뜻하는 ‘낙양(落陽)과 같다고 해서, 은근히 미신을 쫓는 모택동(毛澤東)은 한번도 이곳을 방문한 적이 없다고 한다. 그는 백성들로부터 ’태양‘으로 추앙받고 있었던 것이다.


관중(장안과 그 주변지역)에 도읍을 정했던 왕조들은 낙양을 부도(副都), 즉 제2의 수도로 여겼다. 수도가 서쪽으로 치우친 지리적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연유로 수당시대의 낙양에는 동쪽의 화북평원과 강남 지역 등지에서 거둔 곡물을 저장하는 함가창(含嘉倉)이라는 대형 창고가 있었고, 낙양 동쪽의 운하 주변에도 여러 개의 곡물창고가 있었다. 수나라와 당나라 전기의 황제들은 관중 지역에 가뭄이 들어 식량이 부족해지면 신하와 백성들을 이끌고 낙양으로 가서 저장한 식량을 풀어 굶주림을 해결했다. 우리말에 책이 잘 팔리는 것을 뜻하는 ‘낙양의 지가를 올렸다’는 표현이 곧 중국 낙양에서 유래한 말이다.

낙양과 인연이 깊은 한국사의 인물은 의자왕(義慈王)이다. 한때 ‘해동증자’로 칭송받던 의자왕은 재위 16년째부터 사치와 방종에 빠져 충신을 박해하고 국정을 게을리하다 660년 나당연합군에 패하여 당으로 끌려간 비운의 국왕이다. ‘삼국사기’ 등에 따르면, 그는 태자 효, 왕자 융, 그리고 백성 1만2000여명과 함께 당으로 압송된 뒤 곧 병사했다고 한다. 그가 묻힌 곳은 낙양 북쪽 망산(邙山)에 있다는 손호(孫皓)와 진숙보(陳叔寶) 무덤 옆으로 기록돼 있다. 손호는 손권(孫權)의 손자로서 오(吳)의 마지막 왕이고, 진숙보는 남조 진(陳)의 마지막 왕으로, 둘 다 주색과 폭정으로 나라를 잃은 공통점이 있다. 당(唐)이 의자왕을 이들 옆에 묻은 것은 백제왕을 격하하면서 동시에 후세에 경계를 삼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진숙보의묘로알려진분묘.JPG

<진숙보의 묘로 추정되는 분묘. 도굴된 흔적이 여러곳에서 발견됐다./낙양=지해범 중국전문기자>

망산, 즉 북망산은 ‘낙양성 십리허에 높고 낮은 저 무덤은’으로 시작하는 ‘성주풀이’의 노랫가사가 가리키는 곳이다. 죽는다는 의미의 ‘북망산천 간다’고 할 때의 그 북망산이다. 행정구역으로는 망산진(邙山鎭)으로 되어있다. 낙양 시 중심에서 4㎞쯤 떨어져 있고 그 범위도 매우 넓다. ‘산’이라고 하지만 실제 가보면 얕은 구릉에 채소밭이나 과수원이 대부분이며, 능(陵) 주변에 주택도 있다. 이곳은 한(漢)대 이후 여러 왕조의 무수한 제후와 귀족들이 묻혀, ‘사는 곳은 소주·항주요(生在蘇杭), 묻히는 곳은 망산(葬在邙山)’이란 말도 생겨났다.

그러나 정작 의자왕이 묻힌 곳은 이곳이 아니다. 중국측 조사에 의해 진숙보 등이 묻힌 곳은 망산에서 동북쪽으로 15㎞ 쯤 떨어진 맹진현(孟津縣) 송장진(送莊鎭) 봉황대촌(鳳凰臺村)으로 확인되었다. 이를 근거로 90년대 중반 이후 한국과 중국의 조사팀은 봉황대촌에서 여러 차례 조사작업을 벌였다. 특히 중국 정부는 항공촬영을 통해 무덤으로 추정되는 지역을 찾아 고고학적 조사를 벌였다. 하지만 왕자 부여융의 묘지석만 발견했을 뿐, 의자왕의 무덤은 끝내 찾지 못했다. 낙양과 자매결연을 맺은 부여시는 지난 2000년 4월 의자왕 무덤을 찾는 것을 포기하고, 현지에서 정갈한 토양을 채취하여 한국으로 가져온 뒤 이를 능산리 고분군에 의자왕과 부여융의 묘지를 조성할 때 넣고 제사를 올렸다. 수천년간 이국땅을 떠돌던 백제의 마지막 국왕 부자의 원혼을 달랜 것이다.

지난 20일 오전 시골길을 물어 물어 맹진현 봉황대촌에 도착했을 때, 현지 노인들은 마을 뒤쪽의 넓은 밭을 가리키며 “이 부근이 한국의 국왕이 묻혔던 곳”이라고 했다. 그곳은 평평한 토지로 파란 보리싹만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고, 몇년 전에 닦았다는 1차선 시멘트 도로가 나 있었다. 한 노인은 “50년대 어느 해 비가 많이 내린 날, 멀쩡하던 밭이 원 모양으로 4~5m 땅 밑으로 내려앉았는데, 꺼진 땅의 지름은 10m 정도였다. 그때 전문가들이 와서 발굴을 했는데, 높이 1m 정도의 석관이 나왔다고 들었다. 조사결과 한국의 한 국왕의 묘라는 얘기가 있었는데, 그 뒤로 묘지는 덮였고 밭으로 변했다”고 했다. 우리 정부가 중국의 협조를 받아 석관의 존재를 확인하고 주변지역에 대한 정밀 발굴작업을 벌인다면, 의자왕 묘의 실체도 드러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짐작컨대, 50년대는 중국 정부가 외국 국왕의 묘를 유지 보수할 돈이 없어 그냥 덮어버린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이라도 한국 정부가 섬서성 서안시정부와 접촉하여 비용을 우리가 댄다면, 의자왕의 유적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국 역사학계의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

진숙보묘의도굴흔적.jpg

<진숙보 묘의 도굴흔적. 한 사람이 들어갈 만한 크기의 동굴이 2개나 뚫려있다. /낙양=지해범 중국전문기자>

노인들은 이곳으로부터 1㎞쯤 떨어진 곳에 있는 한 분묘도 소개했다. ‘진숙보’의 묘로 알려진 이 분묘<사진>는 높이가 15m, 지름이 30m 정도여서, 의자왕 묘의 형태와 크기를 짐작케 했다. 그러나 표지석이나 안내판 하나 없어 누구의 묘인지 알 수가 없다. 묘 꼭대기에 올라가자 봉분은 이미 평평하게 다듬어져 고구마밭으로 변해 있었고, 밭 한가운데는 묘 아래쪽으로 뚫은 2개의 구멍이 5~10m 깊이로 나있어 여러 차례 도굴된 것이 틀림없었다. 묘지 옆은 밭으로 개간하느라 봉분을 많이 훼손했고, 사람이 거주한 것 같은 작은 동굴도 2개나 있었다.

소중한 유적을 왜 이렇게 방치하는지 묻자, 마을 주민은 “이런 묘지가 워낙 많아 일일이 관리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봉황대촌이 생긴 것이 청(淸)대라고 하니, 그 이전에는 인가도 없는 허허발판이었을 것이다. 의자왕의 묘도 1300여년의 긴 세월 동안 이런 식으로 방치되고 훼손되다가 끝내 멸실되었을 것을 생각하면, 중국을 탓하기 전에 우리 자신의 무관심과 나약함을 탓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중국속의 한국사 기행(1)]/조선일보 2010년 10월29일자 중국특집섹션/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