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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상 도발… 무리한 세습 그리고 그들은 멸망했다 (조선일보 2010.10.09 22:53)

해상 도발… 무리한 세습 그리고 그들은 멸망했다

그것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해상 도발이었다. "급보입니다…. 아군 전함이 침몰당했습니다!" 서기 932년 9월 고려 태조 왕건(王建)은 경악했을 것이다. "적의 해군이 아직 건재했단 말인가?"

후백제의 전함이 완산주(전주) 근해를 떠나 200㎞가 넘는 바닷길로 북상해 예성강 하구에 닿을 때까지 고려군은 그들을 전혀 예의주시하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예성강이라니? 고려의 수도 개경(개성)의 코앞이자 고려 수군 본부가 있던 그곳으로 후백제 왕 견훤(甄萱)의 부하 장수 상귀(相貴)가 기습해 왔던 것이다.

그들은 3일 동안 염주(황해도 연안)와 백주(황해도 배천), 정주(개성 풍덕) 세 지역을 공격해서 초토화했다. 사실상 무방비 상태였던 고려군은 선박 100척이 불타 가라앉는 것을 넋 놓은 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저산도라는 섬에서 키우던 말 300필도 모두 탈취당했다.

903년 궁예의 장수였던 왕건이 나주를 공격한 뒤로 후백제의 해군력은 한때 위축됐었다. 적 해군의 위협이 사라졌다고 오판했던 고려는 예성강 기습 직후 부랴부랴 수도 인근의 해상 방어체계를 정비했을 것이다.

그런데 바로 다음 달인 10월, 또다시 예상치 못한 곳에서 제2의 해상 도발이 발생했다. 예성강에서 다시금 300㎞ 넘게 올라가야 하는 먼 북쪽, 지금의 평북 용천 남쪽인 대우도를 후백제 해군장(海軍將) 상애(尙哀)의 함대가 공격했다. 왕건이 파견한 장수 만세(萬歲)의 수군도 격파됐다.

견훤은 상귀와 상애의 해군을 동시에 출동시켜 두 곳에서 '시간차 공격'을 펼치도록 작전을 짰던 것이다. '고려사'는 이때 섬으로 귀양가 있던 장수 유금필이 '여기서 전함을 수리해 침략에 대비하고 있다'는 편지를 보내자 패전 이후 근심하고 있던 왕건이 울어버렸다고 기록했다.

견훤은 왜 이런 도발을 했던 것일까? 그는 다급했다. '삼국유사'에 '후백제 군사가 고려의 두 배'라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후백제는 고려와의 관계에서 줄곧 군사적인 우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930년 고창(안동) 전투에서 대패한 이후 형세는 급격히 불리해졌다.

932년에 견훤의 나이는 어느덧 66세였다. 후계자를 확정해야 할 때가 지났지만, 그는 좀처럼 이 문제를 표면에 들고 나서지 않았다. 학계에선 이미 고창 패전 때부터 바로 이 같은 왕위 계승문제가 잠복해 있었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이 갈등은 후백제 군사력의 핵심이었던 호족세력을 갈라놓을 정도로 파괴력이 컸다. 견훤의 심복이었던 장군 공직(�Y直)이 돌연 고려에 귀순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한마디로 내우외환이었다.

견훤은 이 문제를 빨리 매듭지어야 했지만, 절치부심하던 일 하나를 먼저 해결해야 했다. 고려의 허를 찌르는 보복작전을 감행함으로써 분위기를 일신해야 했던 것이다.

'예성강·대우도 기습작전'은 이런 상황 속에서 신속히 이뤄졌다. 고려의 앞마당을 뒤흔들어 놓은 견훤은 그 직후 후계구도 정립에 나섰다. 10여 명의 아들 중에서 그가 낙점한 인물은 40줄에 접어든 큰아들 신검(神劍)이 아니라 별다른 경험이 없는 후처 소생의 4남 금강(金剛)이었다.

훗날 신검의 교서에서 금강을 '유자(幼子·어린아이)'나 '완동(頑童·어리석은 아이)'이라고 지칭한 것으로 보아 당시 그는 많이 잡아도 30세를 넘지 않는 청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는 '금강이 키가 크고 지략이 많기 때문에 견훤이 특별히 사랑했다'고 기록했다. 상주지방에서 독자적 세력을 형성했던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阿玆蓋)로부터 따지면 3대째였다.

그러나 위기 상황에서 이뤄진 이 뜻밖의 세습 기획은 순탄하게 전개되기는커녕 오히려 돌이킬 수 없는 분열을 가져왔다. 장남 신검의 쿠데타에 의해 견훤 정권이 몰락한 것은 해상 도발이 일어난 지 3년 뒤인 935년이었다. 후백제 자체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은 바로 다음 해인 936년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