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바로알기

홍순언과 강남녀 역사편지 / 지인들에게 보내는 편지(2013.06.19. 22:59 양승국변호사의 세상이야기)

홍순언과 강남녀 역사편지 / 지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요즈음 토크 갤러리 강의를 듣느라고 매주 월요일마다 갤러리 두에 갑니다. 갤러리 두는 청담동 성당 옆에 있기에 강의가 있는 날이면 제 사무실에서 걸어가지요. 그런데 성당 뒤쪽으로 청담 근린공원이라고 조그마한 동산이 있습니다. 건물에 가려 큰 길에서는 뒤에 그런 공원이 있는지도 잘 모르지요.

매번 공부하러 갤러리 두에 가는데, 그래도 한번쯤은 뒤편 공원에도 들러주는 것이 예의일 것 같아, 지난번에 사무실에서 좀 일찍 출발하여 공원에 들렀습니다. 이 조그만 공원에 뭐 볼 것 있겠느냐 생각하며 공원 안으로 들어갔는데, 그래도 제법 숲이 있고, 놀라운 것은 그 조그만 공원에 시냇물도 흐르고 약수터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조선조에서 직산현감을 지낸 권대균과 사헌부 감찰을 지낸 권옹의 묘도 있습니다.

 그래서 감탄하면서 숲속 길을 걷는데, 한쪽에 비석이 있습니다. 비석에는 큰 글씨로 ‘홍순언과 강남녀의 전설’이라고 쓰여 있네요. “응? 이게 뭘까?” 내용을 보니 역관중에는 드물게 광국공신(光國功臣)에 책훈되고 당릉군(唐陵君)에까지 봉해진 역관 홍순언(1530~1598)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제 봤더니 홍순언이 청담동 출신이었네요. 그런데 강남녀 이야기는 뭘까요?

 이 이야기가 재미있습니다. 한 번 얘기해보지요. 역관이니까 북경에는 자주 가지 않겠습니까? 한 번은 홍순언이 일을 마치고 청루에 놀러갔습니다. 물론 윤창중 대변인처럼 임무가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술 마시러 간 것은 아니겠지요. 그런데 들어오는 여인이 소복 차림입니다. 여인의 아버지는 북경의 관리인데 부모가 염병에 걸려 죽었습니다. 그래서 여인은 부모님의 영구를 모시고 고향으로 가려고 하는데, 돈이 없어 자기 몸을 팔아서라도 이장 비용을 마련하려고 청루에 나온 것입니다.

 홍순언은 여인의 사연을 듣고 여인에게 이장 비용에 쓰라고 300금을 줍니다. 뿐만 아니라 여인의 효성에 감복하여 여인과 잠자리를 같이 하지도 않지요. 여인으로서는 당연히 은인의 이름이라도 알고자 했겠지요? 홍순언은 됐다고 그냥 가려다가, 여인의 재촉에 성만 알려주고 떠납니다. 그런데 이 돈이 다 자기 개인돈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결국 조선으로 돌아와 홍순언은 공금 횡령죄로 투옥됩니다. 그런데 이 무렵 종계변무(宗系辨誣)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선조가 이는 역관이 통역을 제대로 못한 때문이라고 이번에도 해결을 못하면 수석 통역관의 목을 베겠다고 했답니다.

 참! 종계변무가 무엇인지부터 설명해야겠군요. 명나라 대명회전에 이성계가 이인임의 아들이라고 잘못 기록되어 있고, 또 이성계가 네 왕씨 임금을 시해하고 나라를 차지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조선 초부터 이 기록을 바로 잡으려고 여러 차례 사신을 파견했는데, 이때까지도 이를 바로 잡지 못하여 선조가 단단히 화가 난 것이지요. 그런데 그 동안 해결 못한 것이 어느 역관이 간다고 해결되겠습니까? 그러자 홍순언의 동료 역관들은 홍순언이 공금을 갚지 못하는 한 어차피 살아서 감옥에서 나오지 못할 형편이니, 홍순언 대신 이를 갚아주고 홍순언을 보내자고 합니다. 홍순언은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에 승낙하구요.

 그리하여 홍순언이 북경으로 갑니다. 북경에 들어갈 때에 홍순언은 이번에 돌아가면 자신은 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 생각했겠지요. 그런데 여기서 기막힌 반전이 일어납니다. 명나라의 실권자인 예부의 시랑 석성이 부인과 함께 홍순언을 찾아오더니, 부인이 홍순언에게 큰 절을 합니다. 홍순언은 당연히 깜짝 놀랐겠지요. 알고 봤더니 그 부인은 예전에 홍순언이 조건 없이 이장 비용을 주었던 그 여인이었습니다. 그 여인이 석성 시랑의 재취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사실 그 동안 이 여인이 석성의 부인이 된 후, 조선에서 사신 일행이 오면 홍씨 성을 가진 역관을 계속 찾았습니다. 그러나 투옥된 홍순언이 북경에 올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여인은 단념하지 않고 계속 찾다가, 마침내 은인을 만나 홍순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큰 절을 올린 것입니다.

이러니 석성 부부는 홍순언의 일이라면 발을 벗고 나서지 않겠습니까? 그리하여 오랫동안 풀지 못하던 종계변무 문제가 홍순언에 의해 풀린 것이지요. 이뿐만이 아닙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조선은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지만, 명나라는 이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이때에도 석성이 앞장서서 조선을 도와주어야 한다고 하여 명의 구원병이 조선으로 왔던 것입니다. 이런 공으로 일개 역관이었던 홍순언은 광국공신에 당릉군까지 된 것이지요. 사실 명나라로서도 만주에서 신흥세력 후금이 일어나고 지방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등으로 조선을 도울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가뜩이나 약해진 명나라는 조선 출병으로 국력이 더욱 약해져 멸망에 이르게 되는데, 조선 출병을 주장하였던 석성도 이 때문에 처형을 당하지요.

 이쯤에서 소설가 최인호씨의 소설 ‘상도’를 읽은 분이라면, 이 이야기가 ‘상도’의 주인공 임상옥의 이야기와 비슷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최인호씨가 의주 상인 임상옥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면서 홍순언의 이야기를 임상옥의 이야기로 소설 속에 집어넣은 것이지요. 햐~아~~ 이런 조그만 공원에 이런 역사적인 인물이 숨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그건 그렇고 강남녀는 또 무엇입니까? 석성의 부인의 고향이 중국 양자강 이남인 절강성이기에 강남녀라고 한 것입니다. 청담동이 강남이라 특히 ‘홍순언과 강남녀의 전설’이라고 제목을 붙인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신라 시대 최치원의 시에도 ‘강남녀’라는 시가 있다는 것입니다. 홍순언의 강남녀는 효녀요 은혜를 잊지 않는 훌륭한 여인인데, 최치원의 시에 나오는 강남녀는 음탕하고 사치스러운 여인입니다. 한 번 최치원의 시를 볼까요?

  

강남의 풍속은 예의범절이 없어서 / 江南蕩風俗

딸을 기를 때도 오냐오냐 귀엽게만 / 養女嬌且憐

허영심이 많아서 바느질은 수치로 / 性冶恥針線

화장하고는 둥둥 퉁기는 가야금 줄 / 粧成調管絃

배우는 노래도 고상한 가곡이 아니요 / 所學非雅音

남녀의 사랑을 읊은 유행가가 대부분 / 多被春心牽

자기 생각에는 활짝 꽃 핀 이 안색 / 自謂芳華色

길이길이 청춘 시절 누릴 줄로만 / 長占艶陽年

그러고는 하루 종일 베틀과 씨름하는 / 却笑隣舍女

이웃집 여인을 비웃으면서 하는 말 / 終朝弄機杼

베를 짜느라고 죽을 고생한다마는 / 機杼縱勞身

정작 비단옷은 너에게 가지 않는다고 / 羅衣不到汝

- 이상현 번역

 

 하하! 재미있지 않습니까? 최치원 당시에 중국 강남의 여자들이 이랬군요. 혹시 요즈음 우리나라의 강남녀와 비슷한 점은 없나요? 저는 처음에 최치원의 이 시를 보면서 중국 강남은 생각하지 못하고, 최치원이 어떻게 강남녀라는 시를 지었을까 생각하기도 했었지요. 하여튼 뭐~ 특별한 것이 있겠냐며 들어간 청담근린공원에서 홍순언을 알게 되고, 또 강남녀까지 알게 되니, 토크 갤러리 덕분에 더욱 행복한 하루였습니다.

 

 

강남녀 (강남의 여자) - 최치원

 

江南女 (강남녀)

 

- 崔致遠 (최치원)


 江南蕩風俗 (강남탕풍속) 강남의 방탕한 풍속은

養女嬌且憐 (양녀교차련) 여자애를 곱고 어여쁘게 키우니

性冶恥針線 (성야치침선) 성품을 닦아봐야 바느질 싫어하고

粧成調管絃 (장성조관현) 꾸미고 악기를 다루는데

所學非雅音 (소학비아음) 배우는 바는 우아하지 않고

多被春心牽 (다피춘심견) 대개 사랑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라.

自謂芳華色 (자위방화색) 스스로 얼굴색이 꽃답다 하고

長占豔陽年 (장점염양년) 오랫동안 청춘을 유지하면서

却笑隣舍女 (각소린사녀) 오히려 이웃집 여자를 비웃는다.

終朝弄機杼 (종조롱기저) "아침이 다하도록 베틀과 북을 갖고 노누나.

機杼縱勞身 (기저종노신) 비록 몸이 힘들 정도로 길쌈을 해도

羅衣不到汝 (라의부도여) 비단옷은 네 차지가 아닐세."

 


(참고) 蕩=쓰러버릴 탕, 흐리다; =아리따울 교; =또 차; =불쌍히 여길 련, 어여삐 여기다, 사랑하다; =불릴 야, 꾸미다; =단정할 단; =우아할 아, 바르다; =이불 피; =끌 견, 잡아당기다; 芳華=꽃답고 환함; ==고울 염; 艶陽=화창한 봄날의 기후; =물리칠 각, 도리어; =이웃 린; =집 사; =틀 기; =북 저; 機杼=베틀의 북; =비록 종; 羅衣=비단옷


(감상) 본격적으로 한시를 읽어보려고 하다가 고른 책이 청구풍아(靑丘風雅)라는 책이다. 이 책은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년 6월 ~ 1492년 8월 19일)이 고른 한시를 엮은 것이다. 첫 작품부터 읽어나갈 생각인데, 첫 번째 작품이 최치원의 강남녀다.


여기서 강남은 요즈음 우리가 말하는 서울의 강남은 당연히 아닐 것이다. 통일신라 시대 수도는 경주이고, 경주의 젖줄은 형산강이었으니 형산강의 남쪽을 말하는 것일까? 경주에서 형산강 남북의 경제적 차이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으니 아마 그것은 아닐 것이다. 보통 강남이라 하면 중국의 남부지방을 말하는데 양자강 중하류 지역의 강소성, 절강성, 안휘성 일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재미있는 것은 과거 중국 강남은 현대 한국의 강남과 비슷한 점이 많다. 강남은 경제적으로 발달한 지역이었지만 정치는 강북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성공을 위해 과거를 보려는 사람들이 많있고 과거를 위한 자습서 등 많은 책들이 출판되었다. 서울의 강남도 경제력을 기반으로 한 사교육의 중심지가 되어 있다.


돈이 많다 보니 아이들 키우는 것도 오냐오냐 하게 되니 버릇이 없고, 여유로운 탓에 악기도 많이 다루고, 화장도 하고, 놀기도 잘한다. 몸관리도 잘 하니 외모는 젊어보이고 늘 청춘같은 건강을 유지한다. 그러다보니 열심히 일을 하는 것에 의미를 두지 않게 되어 버렸다. 열심히 일하는 이웃집 아가씨를 보면서 그렇게 열심히 살아봐야 그게 네것이 될 줄 아냐고 놀리기까지 한다.


현재 강남이 이 시 속에 나오는 강남과 같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강남북의 양극화 현상을 꼬집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통일신라 시대나 현재나 부자와 보통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양극화 현상는 비단 경제적인 부분이 아니고 삶의 여러 가치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강남이라 풍속은 제멋대로라

/ 딸을 키워도 아리땁고 예쁘구나

/ 키운 성질이 바느질일랑 싫어하고

/ 단장하고 거문고 피리만 갖고 노네(중략)

 

/ 가련하다 이웃집 딸은

/ 아침 내내 베틀에서 북만 쥐고 있다니

/ 그 비단옷 네게는 가지도 않을건데”

 

 최치원의 <강남녀>는, 베짜는 아가씨의 슬픈 현실을 묘사하면서, 민중의 고통스러운 삶을 폭로하고 있다.

 당나라에 가서 빈공과에 급제하고 문명을 떨치다가 돌아온 문인 중에서 대표적인 인물이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