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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

[정전협정 62주년]6·25영웅 밴 플리트 장군 戰時서신 첫 공개 (동아일보 2015-07-25 03:00:00)

[정전협정 62주년]6·25영웅 밴 플리트 장군 戰時서신 첫 공개

“압도적 화력 필요”… 美 육군규정 5배 초과한 탄약 공급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이 1953년 1월 부산에 임시로 마련된 경무대에서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건국훈장을 받은 뒤 찍은 사진. 이 사진은 국내에 처음으로 공개됐다. 군사편찬연구소 제공

 

 

27일은 6·25전쟁 정전협정 체결 62주년이 되는 날이다. 총성은 멈췄지만 전쟁이 법적으로 마무리되지 않아 여전히 기술적으로 남북은 전쟁 상태에 있는 것이다.

실제로 북한군은 군사분계선(MDL)과 서해 북방한계선(NLL) 주변에서 군사 도발에 나설 징후를 보이고 있다. 한미 군사정보 당국은 9월 또는 10월에 북한이 국지적인 무력도발을 감행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6·25전쟁 당시 미8군 사령관을 지낸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1892∼1992)은 대한민국을 지켜낸 가장 위대한 전쟁영웅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전쟁 후에도 그는 우리 군을 현재의 모습으로 키워내는 데 많은 기여를 했고 폐허가 된 한국을 재건(再建)하기 위해 미국 주요 기업들의 투자를 유치하기도 했다.

동아일보는 당시 밴 플리트 장군이 한국 재건을 위해 박정희 전 대통령과 주고받았던 서신과 6·25전쟁 당시 탄약을 확보하기 위해 힘썼던 그가 미 육군으로부터 받았던 서신 등을 단독 입수했다.



대한민국 근대화 초석을 다지다

24일 최초로 공개되는 밴 플리트 장군의 서신은 미 버지니아군사학교(VMI)의 마셜 도서관에 마련된 ‘밴 플리트 컬렉션’에 보관돼 있던 자료다. 밴 플리트는 1953년 전역한 뒤 1962년 3월 21일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게 편지를 보냈다.

밴 플리트는 편지에서 “한국에 제철소를 짓기위한 미국 내 논의가 진전되고 있다는 소식을 보도한 미 뉴욕타임스 기사스크랩을 동봉하게 돼 매우 기쁘다”는 말로 시작한다. 그는 스틸 밀 외에도 미 전력 업체인 ‘웨스팅하우스 일렉트릭 인터내셔널 컴퍼니’, 펄프 및 종이 생산 업체인 ‘파슨스 앤드 위트모어’, 비료 업체인 ‘아머 앤드 컴퍼니’도 한국에 투자하고 공장을 짓기로 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한국 재건에 관해 당시 박 의장이 밴 플리트에게 보낸 서신도 함께 발굴됐다. 박 의장은 1962년 10월 19일 밴 플리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울산의 정유공장 건설 계약을 10월 17일에 성공리에 마쳤다고 전하고 있다.

이와 함께 박 의장은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을 특사로 미국에 보내니 그가 미국에서 많은 사람과 다양한 의견을 나누길 바란다”고 쓰고 있다. 군사편찬연구소 남보람 소령은 “밴 플리트 장군은 전역 후에도 자신의 영향력을 총동원해 끊임없이 미국 기업의 한국 투자 유치를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했다”며 “한국의 근대화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외국인 중 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밴 플리트는 메모광에 수집광이기도 했다. 이번에 최초로 발굴된 자료 중엔 그가 6·25전쟁 중에 지녔던 수첩도 있었다. 이 수첩은 그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썼던 것이다. 이 수첩엔 당시 썼던 일기도 있다. 1945년 2월 2일 룩셈부르크에서 썼던 일기엔 다른 부대로 전출이 결정돼 옮기기 전에 “미지의 곳으로 향하는 것은 꽤나 슬픈 느낌”이라는 개인적 소회를 담기도 했다. 그가 버지니아군사학교에 기증한 자료에는 당시 주요 한미 부대 지휘관 이름부터 작전계획서, 한국군이 북한군에 뿌렸던 전단(삐라)까지 포함돼 있다.

강원 철원 김화 일대에서 벌어진 삼각고지 전투에서 아군이 쓴 막대한 양의 포탄 탄피를 버리는 모습.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남다른 결단력 보여준 ‘밴 플리트 탄약량’

이번에 공개된 문서에는 밴 플리트가 6·25전쟁 당시 미군의 탄약량을 늘리기 위해 로턴 콜린스 미 육군참모총장과 주고받은 서신도 포함돼 있다. 당시 밴 플리트 장군은 와해된 한국군을 미군과 함께 재편성하면서 미 육군 규정의 기준량을 5배 이상 초과하는 탄약 사용을 승인했다. 이후 미 48포병대대의 경우 하루 동안 1만2000발의 화력을 퍼붓기도 했다. 비용으로 환산하면 하루에 50억 원을 쓴 것이다. 이러한 엄청난 물량 공세는 ‘밴 플리트의 탄약량’이라는 말로 불리고 있다.

콜린스 참모총장은 1952년 7월 1일 서신에서 “유럽 나토군이 보유하고 있던 탄약 비축량까지 줄여가며 한국에 탄약을 공급했다”고 적고 있다. 콜린스 참모총장은 “지난 4개월간 주한미군이 쓴 탄약량은 54만5000발에 달한다”며 “미 탄약공장의 생산량도 앞으로 1년 안에 매달 10만 발에서 65만 발까지 늘리기로 했다”고 적고 있다.

당시 이러한 결정은 미 육군 수뇌부의 심기를 건드리는 위험한 결정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밴 플리트 장군은 중공군 개입 후 수적 열세를 극복하는 길은 화력을 강화하는 방법뿐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본국에 소환되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자신의 직책을 걸고 군 수뇌부를 끈질기게 설득했다.

남 소령은 “6·25전쟁 당시 아군의 전략은 초기 땅을 내어주고 시간을 버는 전략이었지만 전쟁 중반 이후 밴 플리트 장군에 의해 물량공세로 전환해 아군이 승기를 잡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밴 플리트 장군의 결단력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최선봉 부대장을 맡았던 다양한 전투 경험이 밑거름이 됐다”고 말했다.


미식축구팀 감독 출신의 뛰어난 전략가

밴 플리트 장군의 뛰어난 전술은 소령 시절 미식축구팀 감독 경험이 밑바탕이 됐다는 평가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밴 플리트 장군은 미국으로 돌아간 뒤 학군단(ROTC)을 비롯한 여러 대학의 미식축구팀 감독을 맡았다. 1923년에는 플로리다대 감독으로 남부대학리그에서 2위를 차지했다. 밴 플리트 장군은 미식축구의 경험이 장교로서의 리더십과 전장 지휘에 매우 중요하다고 믿었다고 한다.

네덜란드계 미국인인 밴 플리트 장군은 1892년 3월 19일 뉴저지 주 코이츠빌에서 태어났다. 1893년 플로리다로 이사한 뒤 아버지의 권유로 미국의 육군사관학교인 웨스트포인트에 입학했다.

그는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한 뒤 26세의 나이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보여준 지휘능력으로 그는 단 8개월 만에 부사단장과 사단장을 거쳐 군단장까지 승진했다.

유럽 대륙에서 보여준 그의 탁월한 야전지휘능력을 눈여겨본 조지 마셜 미 국방장관은 맥아더 장군 해임 3일 후인 1951년 4월 14일에 밴 플리트 장군을 미8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6·25전쟁이 한창인 시기였다. 밴 플리트는 1953년 2월까지 22개월간 미8군 사령관 자리를 지켰다. 6·25전쟁 기간에 미8군 사령관을 지낸 인물 중 가장 오래 자리를 지킨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6·25전쟁에서도 탁월한 전투지휘능력을 발휘했다. 밴 플리트 장군이 취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중공군은 대규모 공세를 감행했다. 중공군과 북한군은 51개 사단을 동원해 서울을 공격하는 등 1952년 4월과 5월 두 차례 총공세를 퍼부었다. 그러나 밴 플리트 사령관은 물러서지 않고 전선을 지켜냈다. 이후 밴 플리트 사령관 재임 기간에 더 이상의 대규모 공세는 없었다.

밴 플리트 장군은 6·25전쟁에서 하나뿐인 아들을 잃었다. 그는 1952년 4월 4일 아들이 몰고 출격한 B-26 폭격기가 그날 북한 해주 부근에서 북한군의 대공포에 맞아 실종됐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아들의 실종 소식을 들은 밴 플리트 장군은 얼마 후 아들을 찾기 위한 수색작전을 중단했다. 더 이상의 희생을 막기 위한 조치이자 공과 사를 철저히 구분한 냉철한 지휘관의 모습이었다.


1962년 10월 19일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퇴역한 밴 플리트 장군에게 보낸 서신과 친필 사인.

‘제2의 조국’ 대한민국에 헌신

밴 플리트 장군은 한국군 발전의 기틀을 다지는 데도 기여했다. 미8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후 밴 플리트는 6·25전쟁을 계기로 와해된 한국 군사학교 체제를 다시 정비하자고 이승만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그의 노력으로 1951년 10월 30일 경남 진해에 육군사관학교가 설립됐다. 그는 국군 20개 사단을 증설하고 한국군 장교들의 미국 유학을 추진하기도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를 “대한민국 육군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밴 플리트 장군은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1953년 1월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2월 미 제8군사령관 이·취임식에서는 태극무공훈장을 받았다.

생전 대한민국을 ‘제2의 조국’이라 불렀던 밴 플리트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해 꾸준히 노력했다. 제주도에 대규모 축산목장을 만드는 데 적극 지원하는 한편 1957년에는 ‘코리아소사이어티’ 결성을 주도했다. 코리아소사이어티는 대표적인 한미 친선협회다.

한미 간 협력을 강화하기 위한 밴 플리트의 노력은 밴플리트상(賞)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한미관계 증진에 기여한 인물에게 코리아소사이어티가 1992년부터 매년 수여하고 있다. 조지 부시 전 미국 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등이 역대 수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밴 플리트는 1992년 9월 23일 100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뉴욕타임스는 다음 날 실은 부고기사에서 6·25전쟁 당시 그의 부하 장교였던 사람의 입을 빌려 이렇게 전했다. “밴 플리트 대장은 그야말로 발로 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진창에서 장병들과 함께 뒹굴었고, 참호 속에서 지휘했습니다."



 

[단독] 6·25 영웅 밴 플리트 美8군 사령관의 전시 자필 메모 첫 공개

(동아일보  2015-06-25 08:48:23)

“백마고지 전투 승리로 전세 전환… 적군 앞으로 두달밖에 못버틸 것”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왼쪽)이 1953년 1월 부산에 임시로 마련된 경무대에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건국훈장을 받은 뒤 악수하고 있다. 이 사진은 국내에 처음 공개됐다.

 

미8군 사령관으로서 6·25전쟁을 이끈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1892∼1992)이 한국 정부에 당시 전황을 알린 것으로 추정되는 자필 메모가 24일 처음으로 공개됐다. 메모 작성 시기로 추정되는 1953년 초 밴 플리트 장군은 전쟁이 두 달이면 끝날 것으로 분석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등에 따르면 동아일보가 입수한 2장의 메모는 밴 플리트 장군이 사령관으로서 전체적인 전쟁 판세를 파악한 메모의 일부로 보인다. 연필로 쓴 것으로 보이는 이 메모의 맨 윗부분에는 ‘육군 사령관 메모(Army Commander Memo)’라는 표시가 인쇄돼 있다. 메모 한 장의 좌측 상단에는 ‘외부용(ON)’, 다른 메모지의 좌측 상단에는 ‘내부용(OFF)’이라는 표시가 있다. ‘ON’이라고 표시된 메모에는 밴 플리트 장군이 한국 정부에 알리고자 하려던 것으로 보이는 내용들이 포함돼 있다.

전쟁 중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이 자필로 쓴 메모에는 적군이 두 달밖에 버틸 수 없을 것이라고 분석한 이유가 적혀 있다. 군사편찬연구소 제공

외부용으로 보이는 메모는 미8군을 뜻하는 단어인 ‘EUSAK(Eighth U.S Army in KOREA)’로 시작된다. 밴 플리트 장군은 이어 “또 한 달 (성과가) 아주 좋은 타격이었다. 적군 상황은 훨씬 더 나쁘다(Reds in a much worse condition). 현 전황이 유엔군에 가장 좋다”라고 썼다. 메모 아래에는 한국군 이름 2명과 ‘훈장(medal)’이라고 적었다. 그중 한 사람은 6·25전쟁 당시 초대 12사단장을 맡았던 윤춘근 장군이다. 이 같은 내용을 종합해 볼 때 당시 한국 정부 관계자에게 알리기 위한 메모일 가능성이 높다는 게 군사편찬연구소 측의 설명이다.

내부용으로 보이는 문건에서 밴 플리트 장군은 6가지 이유에서 적군이 앞으로 버틸 수 있는 기간을 60일로 분석했다.

6가지 이유를 다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정치적인(Political) 변수와 △점령한 고지(Hills) △포병(artillery)과 보병(infantry)의 합동 작전(Try Art. Inf. team) 등을 꼽았다. 이어서 강원도 철원 지역에서 벌어진 대표적 전투였던 켈리(Kelly)고지 전투와 백마(Whitehorse)고지 전투를 표시한 뒤 ‘전환(Diversions)’이라고 적었다. 이들 고지전으로 국면 전환을 이뤘다는 뜻으로 보인다. 백마고지 전투가 1952년 10월이었던 만큼 이 메모를 쓴 시기는 1953년 초로 추정된다.

군사편찬연구소 남보람 소령은 “연합군을 지휘했던 밴 플리트 장군이 직접 전황을 분석한 기록은 역사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사료”라며 “메모광으로 알려진 그가 6·25전쟁 관련 기록을 더 많이 남겼을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적극적인 사료 발굴이 필요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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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육군 군사파견대 6.25전쟁 기록 원본. 사진=군사편찬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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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육군 군사파견대 6.25전쟁 기록 원본. 사진=군사편찬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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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육군 군사파견대 6.25전쟁 기록 원본. 사진=군사편찬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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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고지 전투 당시 미군 참호 지도. 사진=군사편찬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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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고지 전투 당시 미군 참호 지도. 사진=군사편찬연구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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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없는 장병' 켈로부대 기록 첫 공개 중공군 복장으로 北침투 국가기록원은 2013년 6월 24∼30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6·25전쟁 관련 희귀 기록물 전시회를 열었다. 사진은 북한으로 침투하기 직전의 미군 산하 8240부대(일명 켈로부대) 모습으로 이 전시회에서 처음 공개됐다. 사진=국가기록원 제공



 [정전협정 62주년]밴 플리트 장군이 극찬한 ‘백마고지 전투’는?

(동아일보 2015-07-25 03:00:00)

10일간 24번 뺏고 빼앗겨… “화력 넘은 정신력의 승리”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은 6·25전쟁에서 치른 전투 중 ‘백마고지(395m) 전투’를 가장 높게 평가했다. 그는 6·25전쟁 중에 이 전투에 대한 연구를 미 육군에 지시하고 미 제9군단 작전처는 사후검토보고서(AAR)를 작성해 전 미군 부대에 배포했다. 미군이 치른 전투가 아닌 한국군이 승리한 백마고지 전투를 밴 플리트 장군이 눈여겨봤던 것은 승리는 화력이 아닌 정신력이 이끈다는 교훈을 백마고지 전투가 일깨워줬기 때문이다.

밴 플리트 장군의 지시로 미 육군이 작성한 백마고지 전투 사후검토보고서 표지. 군사편찬연구소 제공

백마고지 전투는 국군 9사단과 중공군 3개 사단이 강원 철원군 북쪽의 요충지를 놓고 1952년 10월 6일부터 10일간 치른 전투다. 휴전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지고 판문점에서 열린 포로회담이 해결되지 않자 중공군의 공세로 시작된 대표적인 고지 쟁탈전이었다. 고지의 주인이 무려 24번이나 바뀔 정도로 치열한 전투였지만 결국 우리 군이 방어에 성공한다.

중공군은 6·25전쟁을 기록한 ‘항미원조(抗美援朝·미국에 저항해 북한을 지원했다는 뜻) 전쟁 경험 총결’에서 유일하게 패배를 인정하고 있다.

백마고지 전투가 벌어졌던 지역은 철원평야 지대를 끼고 있을 뿐 아니라 서울 및 후방에서 이어지는 국군의 주요 보급로가 통과하는 곳이었다. 아군과 적군 모두에 중요한 요충지였다.

중공군은 10월 6일 저녁 이곳에서 기습 공격을 개시했다. 기습 공격과 동시에 아군의 후방 쪽에 있던 봉래호의 둑을 파괴해 역곡천을 범람시켰다. 국군의 증원과 군수 지원을 차단한 것으로 압도적인 병력으로 고지를 지키고 있던 국군을 몰살시키겠다는 전략이었다.

전쟁 막바지에 철원평야 일대는 적에게 절대 뺏겨서는 안 되는 곳임을 알고 있었기에 9사단 장병들은 총알이 떨어지면 적을 물어뜯어서라도 물리쳤다. 적 기관총에 전우들이 쓰러지면 자신의 몸에 폭약을 두르고 적 기관총 진지에 뛰어들었다. 이 전투에서 한국군은 3416명의 사상자를 냈다. 중공군은 무려 1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해 한동안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였다고 한다.

전쟁이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자 밴 플리트 장군은 미군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불굴의 정신’이라고 판단했다. 그랬던 그에게 백마고지 전투는 더없는 모범사례였다. 미 육군의 사후검토보고서는 백마고지 전투에서 한국군이 보여줬던 ‘사전불퇴(死戰不退)’, 즉 죽을 때까지 물러서지 않았던 정신이 승리의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당시 백마고지 전투는 외신에 소개되기도 했다.

혁혁한 전과를 인정받은 국군 제9사단은 1966년 5월 맹호부대에 이어 베트남전 파병부대로 선정되었으며 그해 8월 베트남으로 이동해 닌호아 뚜이호아 깜라인 지역에서 임무를 수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