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시원·씁쓸한 빙수의 사회학
ㆍ‘여름 대표 간식’의 역사와 숨은 이야기
▲ 왕의 간식: 왕이 하사해야 맛볼 수 있던 고급 식재료… 대중화로 서민들 “왕이 된 기분” 느껴
▲ 불량식품: 생선보관용 얼음으로 만들어 배탈 나는 일 잦아… 조선총독부, 얼음관리법 발표
▲ 본전의식: “얼음만 넣은 음식, 돈 주고 사먹기 아까워”… 각종 먹거리 올리기 시작해
▲ 프랜차이즈: 외식산업 폭발적 성장으로 ‘브랜드’ 붙어… 유행 따라 1, 2차 세대교체
▲ 한식세계화: 떡·놋그릇 등 전통적 이미지 강조… 한국형 팥빙수 세계 시장으로
▲ FTA: 값싸게 들여온 망고·체리 등 외국 과일로 토핑… 소비자 입맛까지 바꿔
뜨거운 여름이 시작됐다. 디저트시장의 ‘빙수대전’도 막이 올랐다. 빙수전문점은 물론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 제과점, 패스트푸드점, 동네 카페들이 일제히 빙수 현수막을 내걸고 더위에 지친 손님을 유혹한다. 빙수 종류도 다양해졌다. 빙수계 맏형 ‘팥빙수’의 입지가 흔들릴 정도다. 올해는 망고빙수가 대세다. 거리마다 샛노란 망고를 얹은 빙수 사진이 넘쳐난다.‘빙수냉전(冷戰)’ 뒤에는 달콤·시원·씁쓸한 이야기들이 숨어 있다. 빙수는 보통 3층으로 구성돼 있다. 그릇 맨바닥부터 포슬포슬한 우윳빛 얼음이 수북이 담긴다. 그 위에 단팥과 떡, 혹은 망고·치즈·블루베리 등이 올려진다. 맨 위에는 인절미 가루나 초콜릿시럽, 아이스크림 등을 얹는다. 한 입 베어 물면 ‘찬맛’보다 ‘단맛’이 혀를 감싼다. 열량은 800~1000㎉. 한 끼 권장 열량과 맞먹는다. 가격은 보통 6000~1만원 수준이다. 이렇게 양이 많고, 열량이 높고, 비쌀 이유가 있을까. ‘여름 대표 간식’ 빙수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았다.
■ 모던 경성의 간식, 한국형 팥빙수가 되다
가게에서 파는 빙수는 약 100년 전쯤 처음 나왔다. 당시 빙수는 신기술이 집약된 혁명적 간식이었다. 조선시대 얼음은 원래 왕이 하사해야 맛볼 수 있던 ‘고급 식재료’였다. 고위 관료나 노인·환자 등만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얼음의 대량생산을 가능케 한 냉동기술을 세계 최초로 개발한 나라는 독일이다. 1870년대의 일이다. 이 기술을 이용해 빙수를 식품으로 만들어 처음 판매한 나라는 일본이다. 일본에선 이미 7세기에 얼음을 갈아 칡즙 등과 섞어 마시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1869년엔 요코하마에 얼음을 대패로 갈아 파는 가게가 등장했다. 1895년 청일전쟁 승리로 대만을 식민지화하면서 일본은 망고·바나나 등 열대과일과 설탕을 대량 들여왔다. 이때부터 잘게 간 얼음 위에 열대과일과 설탕으로 만든 시럽을 얹은 일본식 빙수 ‘가키고오리’가 대중적인 간식으로 자리 잡았다.
1913년 경성(서울)에도 제빙업체인 경성천연빙회사와 조선천연빙회사가 설립됐다. 이 무렵부터 식당, 포장마차 등에서 여름 한정상품으로 ‘빙수’를 내놓았다. 1921년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경성에 일본인이 운영하는 빙수집이 187곳, 조선인이 운영하는 빙수집이 230곳으로 도합 417곳’에 달했다. 부유한 집들은 빙수기계를 들여놓고 직접 만들어 먹기도 했다. 독립운동가 손병희 선생의 딸이자 소파 방정환 선생의 부인 손용화 여사는 1981년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방정환 선생은) 생전에 빙수를 좋아해 하루 7~8그릇씩 집에서 먹곤 했다”고 말했다. 한때 왕의 간식이었던 빙수가 대중화되면서 돈만 있으면 누구나 맛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주영하 한국학종합대학원 교수는 “빙수는 당시 서민들에게 아주 잠깐이지만 ‘왕이 된 기분’을 느끼게 해 준 간식이었다”고 말했다.
경성팥집 옥루몽의 팥빙수
빙수의 대중화는 ‘대표적인 불량식품’이라는 불명예도 안겨주었다. 식용 얼음 대신 치료용·생선 보관용 얼음으로 만든 빙수가 문제였다. 빙수를 사 먹고 배탈 나는 일이 잦았다. 급기야 조선총독부는 1921년 얼음관리에 관한 법률을 공포했다. ‘불량식품’ 딱지는 빙수가 프랜차이즈화되기 전인 1980년대까지 붙어 다녔다. 동네 문구점 등에서 불량한 위생상태로 파는 빙수 탓이 컸다.
빙수는 여러모로 일본의 근대성을 상징하는 음식이었지만 한국, 일본, 대만 등 각 나라의 음식문화에 따라 다르게 진화했다. 재료 맛을 중시하는 나라답게 일본은 얼음 제조법과 가는 방식을 다양화하는 등 ‘얼음의 질감’에 신경을 썼다. 시럽 이외의 다른 요소를 최소화했다. 열대과일이 많이 나는 대만에선 망고 등을 얹어 먹었다. 한국은 팥·떡 등 곡물로 된 고명(토핑)을 듬뿍 올리는 것이 특징이었다. 1970년대 대상·롯데·크라운제과 등 식품기업이 출현하면서 과자·젤리가 추가됐다.
황교익 맛 칼럼니스트는 “한국인은 음식을 즐길 때 씹을 거리에 집착하고 곡류를 먹어야 잘 먹었다는 생각을 한다. 일종의 허기 트라우마일 수 있다”고 말했다. 비빔밥 문화에서 연유했다는 해석도 있다. ‘본전의식’도 빙수의 진화에 영향을 미쳤다.
김영하 베버리지 연구소 원장은 “우리는 그동안 얼음을 값싸게 대량으로 생산하는 데만 신경을 썼지 얼음 맛 개발에는 소홀했다. 단순히 얼음뿐인 음식을 비싼 돈 주고 사 먹는 데 대해 소비자들이 차츰 아깝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판매업자들은 이를 외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빙수에 각종 먹거리를 올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1970년대에 흔히 볼 수 있었던 길거리 빙수. | 경향신문 자료사진
■ 더 화려해지고 덜 차가워진 프랜차이즈 빙수
집에서 만들어 먹거나 제과점에서 제각각 팔던 빙수에 ‘브랜드’가 붙기 시작했다. 1990년대 이후 외식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빙수 역시 프랜차이즈 품목으로 부상했다.
롯데리아는 1995년부터 빙수를 메뉴로 선보였다. 아이스베리·레드망고 등이 잇따라 나왔다. 기존 방식대로 얼음 위에 단팥, 떡, 젤리, 과자, 과일, 소프트아이스크림까지 한꺼번에 내오는 형태였다. 프랜차이즈화 초기 메뉴는 크게 팥빙수와 과일빙수로 나뉘었다. 과일빙수는 팥을 싫어하는 청소년 고객들의 입맛을 노렸다.
하지만 프랜차이즈 흐름이 커피 등 다른 음료시장으로 옮겨가자 1세대 빙수 프랜차이즈 업체들이 맥없이 사라졌다. 군산 이성당 등 전통 있는 제과점이나 압구정 현대백화점 밀탑 등 개성 있는 빙수가 고유 브랜드로 살아남았다. 이것저것 섞지 않고 ‘팥맛’으로 승부하는 가게들이었다. 이런 생존비법은 ‘2차 빙수 프랜차이즈’에 영향을 주었다.
한동안 열풍이 사그라졌던 빙수는 약 10년 만에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설빙’이 사계절 빙수 전문카페를 표방하며 2013년 부산에 1호점을 내면서부터다. 설빙은 2년 만에 전국 490여개 점포를 가진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로 성장했다. 스타벅스와 카페베네가 출혈 경쟁을 벌이고, 파리바게뜨와 뚜레쥬르가 가세하는 등 ‘카페 시장’이 포화상태에 이른 시점에 벌어진 일이었다. 설빙을 벤치마킹한 경성팥집 옥루몽·설리안·눈꽃마녀 등 4계절 빙수집들이 속속 생겨났다. 여기에 대만업체 호미빙 등이 가세했다. 엔제리너스, 카페베네 등 기존 프랜차이즈 업체도 빙수 경쟁에 뛰어들었다. 카페베네 빙수 종류는 15종으로 설빙(9종)보다 많다.
설빙의 생딸기빙수
2세대 빙수 프랜차이즈는 사계절 빙수카페라는 점 외에도 그 양상이 이전과 크게 달랐다. 우유얼음을 갈아 만든 눈꽃빙수가 대세가 되었다. 얼음이 종전보다 덜 차갑고 더 부드러워졌다. 팔빙수, 과일빙수, 요거트 아이스크림 빙수 수준에 머물던 메뉴는 더욱 세분화됐다. 팥빙수는 ‘옛날빙수’라는 이름으로 놋그릇에 담아내는 등 이국적인 요소를 철저히 버렸다. 반면 과일빙수는 더 이국적인 분위기를 지향했다. 망고빙수, 베리빙수, 딸기빙수 등 고명으로 얹는 과일의 종류도 다양해지고 코코넛 야자유·치즈 등도 가미됐다. 6000~1만원대의 비싼 가격 때문에 ‘거품논란’이 일었지만 성공을 거뒀다. 업계는 올해 빙수 매출액이 1500억원을 돌파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김동한 설빙 홍보마케팅팀장은 “설빙은 빙수와 다른 음식으로 봐 달라”고 주문했다. 사계절 음식을 염두에 두고 차가움보다는 부드러운 맛을 전달하고, 계절 과일을 소비자가 즐길 수 있도록 메뉴를 개발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과거의 빙수나 화채가 더위를 쫓기 위한 간식이었다면 요즘 빙수는 얼음 위에 얹혀진 다양한 먹거리에 중점을 두는 식품으로 진화하고 있는 것이다.
호미빙의 대만식 망고빙수
■ 풍성한 빙수, 식문화도 함께 풍성해졌을까
최근 빙수의 폭발적 인기는 프랜차이즈 산업에 기반을 둔다. 맛 전문가들은 프랜차이즈 구조의 명암을 들여다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황교익 칼럼니스트는 “프랜차이즈는 이미지를 판다. 현재 빙수는 대만식 망고빙수처럼 이국적이거나, ‘옛날 팥빙수’처럼 전통적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전략을 취하는데, 이렇게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이미지에서 가격 거품이 나온다”고 말했다.
빙수 열풍은 ‘한식세계화’ 전략에 힘입은 바도 크다. 이명박 정부의 정책은 한식을 외국인이 먹기 편하도록 프랜차이즈화하는 것을 권장하는 형태로 진행됐다. 떡·놋그릇 등 전통적 이미지를 유독 강조하는 것도 그런 영향이 크다. 실제로 설빙의 모태는 떡카페였다. 설빙은 올해 중국에, 밀탑은 지난해 미국에 진출해 ‘한국의 맛’을 홍보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들여온 가키고오리가 한국형 팥빙수가 돼 다시 세계시장으로 나가는 것이다.
설빙의 인절미 빙수
반면 프랜차이즈 빙수가 수입농산물의 소비 통로로 기능하고 미래세대 소비자의 입맛을 완전히 바꿔놓을 것이란 우려도 적지 않다. 과일농가 판도는 빙수가 바꾼다는 목소리가 나올 정도다. 단적으로 망고는 2005년 762t이 수입된 이래, 2007년 1616t, 2011년 1892t 등 해마다 늘었다. 최근 2년간 수입량 변화 폭은 더욱 크다. 2013년 6154t이던 것이 지난해 1만599t으로 껑충 뛰었다. ‘2세대 빙수전쟁’이 시작된 시점과 맞물린다. 농업·농촌 사회학자인 정은정씨는 “몇년 전 프랜차이즈 제과점에서 우리밀 열풍이 불면서 농가에 밀 재배가 확산됐으나 유행이 바뀌면서 농가에 타격이 왔다. 팥은 거의 수입에 의존하고, 과일은 같은 계절에 나오는 과일끼리 경쟁한다. 망고가 수박, 참외, 복숭아, 포도에 타격을 줄 수 있는 것이다. 빙수 토핑 재료는 국내에서 재배하기 힘든 게 많아 식품산업이 지역농업을 밀어내는 구조로 기능할 수 있다”고 말했다.
‘빙수한류’ 자부심과 달리 프랜차이즈 과일빙수의 성공 요인을 자유무역협정(FTA) 영향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10여년 전부터 값싸게 들여온 각종 열대과일 맛에 우리 입맛이 길들여진 결과라는 해석이 그것이다.
빙수는 근본적으로 여름이 성수기인 상품이기 때문에 급작스럽게 팽창한 가맹점들의 리스크도 문제다. 설빙의 경우 지난해 10월 이후 더 이상 가맹점을 받지 않고 있지만 다른 빙수 체인점들이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기존의 손님 빼앗기 경쟁이 될 공산이 크다. 빙수는 갈수록 화려하고 풍성해지고 있지만 빙수점들은 오히려 가난해질 위험요인을 안고 있는 셈이다.정은정씨는 “가맹점주들은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지 못하고 있다”며 “이는 단기적 유행에 의존하는 프랜차이즈형 외식산업이 지니는 위험성”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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