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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칭의 서릿발 복수극…"중앙문혁의 명을 집행한다" (중앙일보 2015.05.23 12:42)

장칭의 서릿발 복수극…"중앙문혁의 명을 집행한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427>
기녀 역할 놓고 왕잉·란빈 각축
밀려난 란빈이 30년 뒤의 江靑
문혁 때 홍위병 시켜 왕잉 체포

 

장칭과 왕잉(왼쪽). 연도미상. [사진 김명호]


1868년 봄, 수저우(蘇州)의 상인 집안 아들 훙쥔(洪鈞·홍균)이 장원급제했다. 서태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할 무렵이었다. 4년 후 안후이(安徽)성 셔셴의 자오(趙)씨 집안에 여자아이가 태어났다. 사주가 심상치 않았다. “장차 화류계에 진출하면 큰일을 하겠다.”

자오씨는 운명론자였다. 차이윈(彩云·꽃구름)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구름처럼 창공을 떠돌아라. 잠시 산봉우리에 쉴지언정, 머물지는 마라. 타고난 팔자는 어쩔 수 없다.”

훙쥔은 국제정세에 밝았다. 학자로도 손색이 없었다. 글씨도 명필 소리를 들었다. 여자를 너무 밝힌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흉이 될 정도는 아니었다. 서태후는 훙쥔을 총애했다. 무슨 일이건, 맡기면 안심이 됐다.

차이윈은 어릴 때부터 이름에 걸맞게 놀았다. 화장대 앞을 떠나지 않고 사교성도 뛰어났다. 열 세살때 화선(花船·기녀들을 태운 놀잇배)에 올라 술을 따랐다. 화선 생활 몇 개월 후, 모친상으로 휴가 중이던 훙쥔을 만났다.

훙쥔은 마작을 좋아했다. 친구들과 판을 벌일 때마다 차이윈을 불렀다. 한번 부르면 놔주지 않았다. 친구들이 “번거롭게 굴지 말고 데리고 살라”고 권하자 차이윈의 부친을 찾아갔다. 담판과 흥정을 병행했다. 훙쥔에게는 부인과 첩이 한 명씩 있었다. 조강지처는 평범한 집안 출신이었지만, 첩은 장원(장원급제한 사람)의 딸이었다.

차이윈의 할머니가 “첩은 절대 안된다”며 고집을 부렸다. 그게 그거였지만, 두 번째 부인으로 삼겠다고 둘러대자 돈을 요구했다. 훙쥔이 응하자 자오씨도 동의했다. 훙쥔 50세, 차이윈 열네살때였다.

서태후는 평소 남녀문제에 관대하기도 했지만 상대가 훙쥔이다 보니 “국가의 녹을 먹는 고관이, 그것도 나이깨나 먹은 놈이, 상중에 어린 기녀와 어울렸다”는 말을 듣고도 모른 체했다.

1887년, 서태후는 훙쥔을 러시아·프랑스·오스트리아·네델란드 등 4개국 전권대사에 임명했다. 장원 출신으로는 중국 최초의 외교관이었다. 훙쥔의 부인은 중국을 떠나기 싫어했다. “오랑캐들이 우글거리는 땅에 가기 싫다. 천하디 천한 차이윈인지 뭔지, 저거나 데리고 가라.” 부인의 허락을 받은 훙쥔은 차이윈을 수행원 명단에 올렸다.

훙쥔은 타고난 역사가였다. 해외에 체류하는 동안 서구에 흩어진 중국 관련 자료를 닥치는 대로 수집해 섭렵했다. 불모지였던 원사(元史) 연구에 거대하다고 해도 좋을 업적을 남겼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세상은 요지경이기 마련, 훙쥔이 연구에 바쁜 틈을 이용해 차이윈은 유럽생활을 만끽했다. 서구의 외교관·장군들과 인연을 맺었다. 특히 독일인들에게 호감을 샀다. 베를린에서 아들을 출산했다.

1 문혁시절 샤엔은 죽다 살아났다. 1990년 여름 베이징 뤄구상의 자택에서 `싸이진화` 창작시절을 회상하는 샤엔(오른쪽). 2 1935년. 항저우에서 변호사 션쥔루(줄 앞줄 왼쪽 두번째)의 주례로 영화 평론가(맨 뒷줄)와 합동결혼식을 올린 장칭(뒷줄 세번째). [사진 김명호]


3년 간 외교관 생활을 한 훙쥔은 귀국 직후 사망했다. 이어서 아들마저 사망하자 차이윈은 무일푼으로 집을 나왔다. 쫓겨난 거나 마찬가지였다. 제 발로 기문(妓門)을 찾아갔다. 싸이진화(새금화)라는 기명(妓名)으로 베이징·톈진·상하이를 오가며 남북의 한량들을 희롱하다 1936년 10월 베이징에서 병사했다.

싸이진화 사망 4개월 전, 상하이의 한 문학잡지에 '세금화' 즉, '싸이진화'라는 극본이 실렸다. 작자는 샤옌(夏衍·하연), 낯선 이름이었다. 샤옌은 무명인이 아니었다. '싸이진화'에서 샤옌이라는 필명을 처음 사용하다 보니 영화계 인사들조차 몰랐을 뿐,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1985년 샤옌은 회고록에서 '싸이진화' 창작 동기를 밝혔다. “우연이었다. 당시 나는 백계 러시아인이 운영하는 작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신문 보는 것 외에는 딱히 할 일이 없었다. 톈진에서 발행하던 대공보(大公報)에 싸이진화의 사연이 실린 것을 보고 묘한 느낌이 들었다. 일세를 풍미하던 대인물들보다 사연 많은 기녀의 일생에 더 흥미를 느꼈다. 무대에 올리고 싶다는 충동을 주체할 방법이 없었다.”

작가가 누군지 알려지자 주역을 놓고 경쟁이 치열했다. '인형의 집'에서 노라 역으로 명성을 얻은 란빈(남빈)은 대본을 접하자 손이 떨렸다. 친자매처럼 붙어 다니던 왕잉(王瑩·왕형)도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란빈은 샤엔의 집과 사무실을 수없이 노크했다. 진땀 흘리며 만나기를 애걸했지만 끝내 거절당했다.

사이진화가 죽자 주역 경쟁은 점입가경, “란빈과 왕잉은 사이진화 역을 소화할 사람은 나 밖에 없다”며 양보할 기색이 없었다. 온갖 뒷말이 꼬리를 이었다. 입장이 난처해진 샤옌은 공개 심사를 결정했다. 심사위원들은 왕잉의 손을 들어줬다. 란빈과 왕잉이 철전지 원수로 변했다는 소문이 상하이에 파다했다.” 사실은 소문보다 더 심각했다.

'싸이진화'는 연속 20차례 무대에 올랐다. 관객 3만 여명이 왕잉의 연기에 박수를 보냈다. 패배자가 된 란빈은 이를 악물었다. 무대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30년이 흘렀다. 1967년 2월, 붉은 완장을 찬 홍위병들이 베이징 교외에 있는 왕잉의 집을 덮쳤다. “중앙 문혁의 명령을 집행한다.” 중앙문혁은 장칭(江靑·강청)의 대명사나 다름없었다. 왕잉은 죽음을 직감했다. 이제는 장칭이 된 란빈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