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양순석 학예연구사가 지난 1월29일 태안보존센터에서 마도 3호 유물을 들어 보이고 있다.(왼쪽) 1265~1268년 여수에서 강화도로 이동하다 침몰된 것으로 추정되는 배에선 노비 출신으로 60년 최씨 무신 정권을 무너뜨리고 고려 시대 최고 권력자에 오른 김준(오른쪽)과 관련된 화물표가 발견됐다. 수백년 전 유물을 품은 바다는 현대인과 740여년 전의 고려인을 이어준다. 사진 강재훈 선임기자,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토요판] 커버스토리
2015년 양순석 대 1268년 김준

서해 뻘속 침몰선 마도3호서 ‘물밑 조우’
두 사람 가로지른 740여년의 ‘시간 탐험’
‘[인터랙티브] 보물선, 비밀을 품은 시간’ 바로가기

▶ 1265~1268년의 어느 날, 노비 출신으로 고려의 실질적 집권자가 된 김준에게 가던 배가 침몰합니다. 이 배가 양순석 해양문화재연구소 조사원 등에게 발굴되기까지 740여년 가운데 닷새를 기록물을 바탕으로 옴니버스 형식으로 구성했습니다. 국내 해양 문화재 발굴 조사원은 오직 8명. 최초로 발견된 고선박 ‘신안선’을 복원하는 데 23년이 걸린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해양유물은 악전고투 끝에 바다에서 길어올린 과거의 잃어버린 시간입니다.

잔잔해 보이는 바다 아래에는 침몰선과 유물들이 잠을 잔다. 양순석 학예연구사가 지난 1월29일 물길이 험해 ‘난행량’(難行梁)으로 불렸던 충남 태안군 마도 해역을 가리키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잠수하다, 740년간 뻘 속에 있던 난파선의 비밀을 찾아

푸르지도, 맑지도 않은 서해 바다에 난파선들이 수백년째 잠을 잔다. 어디로 가던 배였는지, 어디서 왔는지, 언제 침몰했는지, 배에 탄 사람들이 누구인지 바다만이 아는 비밀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배에 오른 과거의 사람은 갑작스러운 사고로 여정이 중단되었고 누군가에게 전해져야 할 물건은 침몰 지점이 마지막 배송지가 되었다. 침몰선과 유물이 갇힌 갯벌은 수백년간 정지된 시간이다. 젓갈과 곡식의 껍질마저 수백년을 견딜 만큼 갯벌은 미생물의 활동과 유물의 부식을 막는 작용을 한다. 육상 유물이 대부분 퇴적과 풍화를 거치며 계속된 시간의 흔적을 담는다면, 난파선은 침몰 당시 시간을 잘라낸 단면을 드러낸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발굴된 고선박은 14척이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해양 문화재를 탐사·발굴하는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14척 가운데 4척을 충남 태안 마도 해역에서 발견했다. 그만큼 마도 해역은 난파선의 공동묘지다. “돌부리 하나가 바다로 들어가 있어서 물과 부딪쳐 파도를 돌려보내는데 놀란 여울물이 들끓어 오르는 것이 천만 가지로 기괴하여 말로 형언할 수 없다.” 중국 송나라 사신 서긍은 1123년 고려 개경에 다녀온 뒤 낸 여행 보고서 <선화봉사고려도경>에서 성난 마도 해역을 이렇게 묘사한다. 조선 태조~세조 60년간 마도에서 선박 200척이 침몰하고 1200여명의 선원이 숨졌다는 기록이 <신증동국여지승람>(조선 중종 25년·1530년)에 나온다.

양순석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수중발굴팀 학예연구사 등 조사원들은 2009년 4월30일 바다에 제사를 지내는 개수제를 시작으로 마도 탐사에 나섰다. 해양문화재연구소는 2009~2014년 마도 해역에서 고려 배 3척과 조선시대로 추정되는 배 1척을 발굴했다. 조사원들은 수취인과 발송자를 기록한, 일종의 화물표인 ‘목간’을 건져 올려 난파선의 침몰 시기와 관련 인물을 추정한다.

2011년 9월8일 양 연구사는 목간 한 점을 건져 올렸다. 고려 후기 60년 최씨 무신 정권을 무너뜨리고 최고 권력자에 오른 노비 출신 김준을 암시하는 이름이 기록된 목간이었다. 목간은 배가 어디서 출항해 어디로 향했는지 비밀을 풀어주는 열쇠다. 이 침몰선이 빛을 보기까지 걸린 시간은 740여년. 기록되지 못한 죽음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내 단절된 시간의 간극을 메우는 일이 양 연구사의 직업이다. 스치듯 지나치는 박물관의 수중 유물과 난파선은 수백년간 다 하지 못한 이야기를 품고 있다. 찬찬히, 그리고 낯설게 들여다보자.

그날 고려의 배는 차갑고 어두운 바다 밑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목선에 차오른 바닷물의 높이는 모래시계처럼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렸다. 발목에서 무릎으로, 무릎에서 허벅지로, 허벅지에서 허리로 물이 스며들었다. 기울어가는 배 안에서 사람들은 살아야 한다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죽음의 공포는 살아 있음이 본능임을 일깨워 주었다. 사람들은 때로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좌절하여 살고 싶은 열망을 잃곤 하는데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의 막다른 골목 앞에선 생이 본능임을 느끼게 되었다. 배에서 뛰어내려 바다 위 뗏목 한 조각에 의지한 사람들은 텅 빈 하늘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나무판자를 붙잡던 팔이 저릿저릿하다 힘이 풀린다. 살고 싶은 의지와 나약한 몸뚱어리가 사투를 벌인다. 나무 한 조각에 기댄 운명들은 바다 밑으로 잠시 사라졌다, 치솟아 오르기를 반복하다 영원히 물속에 가라앉게 되었다. 공기 없는 세상에 들어간 사람들은 숨을 참았다. 30초, 1분, 1분30초…. 참지 못하고 들이마신 물은 폐를 잠식하고 공기 없는 뇌는 의식을 잃는다. 호흡이 정지된다. 바닷속에서 더욱 쿵쾅거리던 심장이 한순간 멈췄다. 그날 바다에 흩뿌려진 나뭇조각들은 수평선 너머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그 배가 어디로 가는지, 어디서 왔는지, 언제 난파되어 침몰했는지, 바다에 빠진 그들이 누군지 바다만 알게 되었다. 어느 곳에 전해져야 할 물건과 누군가를 찾아가야 할 사람들의 여정은 바다 한가운데서 중단되었다. ‘사심김영공주택상(事審金令公主宅上) 담해생사십합오일항현례(生四十合伍一缸玄)’ 그날 발송인과 수취인, 물건의 종류와 수량이 먹으로 쓰인 작은 나무 한 조각이 난파된 배에서 흘러나와 검푸른 바다 밑으로 낙하했다. 나뭇조각 위로 700여년의 파도와 바람이 지나갔다. 헤아릴 수 없는 침몰선을 품은 바다는 비밀을 말하지 않는다.

2009년 4월30일

“유세차 2009년 기축년 오늘 태안군 근흥면 마도 해역에서 고하나이다. 아무 사고자도 없이 안전하게 하여주시는 자애로우신 보살핌을 어찌 감히 말로 표현할 수 있으리요. 그러므로 저희가 오늘 이곳에서 감사의 마음으로 모든 이의 안전을 위한 개수제를 올리나이다. 바라옵건대 안전하도록 보살펴주시고, 굽어살펴 주시옵소서. 거듭 비옵건대 서로 간의 화합과 사랑이 넘치게 하옵시고 무사히 진행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길 엎드려 고합니다. 저희들이 준비한 조촐한 술과 음식을 기쁘게 여기시고 우리들의 여정을 굽어살펴 주시기를 간절히 비옵나이다.”

배 위에 조촐한 상이 차려졌다. 시루떡과 사과, 배, 참외, 바나나, 돼지머리가 놓인 상을 앞에 두고 조사원들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인다. 바다에 올려진 막걸리 한 잔이 뿌려진다. 술은 바다가 되어 흘러갔다. 침몰선을 찾아 나서는 시작은 언제나 경건하게 치러진다. 2009년 4월30일 오전 11시. 양순석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수중발굴과 조사팀장과 조사원들은 충남 태안 마도 해역에서 안전을 기원하며 개수제를 지냈다.

침몰선을 찾는 건 예고 없이 죽은 과거의 비운과 맞닥뜨리는 일이다. 양순석은 난파선에 깔려 죽은 사람의 뼈를 본 적이 있다. 2007~2008년 태안 마도에서 고려의 청자 운반선인 태안선을 발굴할 때였다. 팔과 손을 이루는 뼈, 척추뼈 등을 미뤄보건대 160㎝ 키의 30대 남자는 얼굴 방향이 좌측으로 틀어져 있었다. 침몰 직후 윗몸을 틀어 빠져나오려다 숨진 남자는 살기 위해 몸부림치다 사망한 그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런 현장에선 바다 안에서도 저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양순석도 수차례 바다에서 위험한 순간을 통과했다. 공기 없는 세상에서 1분은 육지의 시간과 다르다. 몇 분 사이에 숨이 끊어진다. 그도 산소를 공급하는 호스에서 갑자기 공기가 나오지 않거나 잠수복이 바닷속 밧줄에 걸려 장비를 모두 해체하고 지상으로 급상승할 뻔한 경험을 겪었다. 압력이 낮은 수면으로 급상승하면 질소가 부풀어 올라 핏줄을 막고 마비를 일으키는 잠수병이 생긴다. 밧줄에 꼬인 잠수장비를 풀고 수면 위로 나오기까지 1분, 어쩌면 수십초는 슬로모션처럼 길다. 탁한 서해 바다의 악조건은 푸른 빛깔의 다른 바다와 다르다. 바다에서 손을 뻗어도 때로 내 손이 보이지 않는다. 발로 해저를 잘못 디디면 뻘(개흙)이 뿌옇게 위로 튀어오르면서 눈앞이 캄캄해진다. 2인1조로 바다에 들어가도 동료가 보이지 않는다. 자기 생명을 지키는 책임은 오롯이 자신의 것이다.

양순석은 자신이 ‘뱃놈’이 될지 알지 못했다. 양순석의 아버지는 섬과 섬 사이를 돌며 여객선을 모는 항해사였다. 섬에서 나고 자라 바다가 익숙하긴 했지만 대학의 환경공학과에 입학해 남들처럼 평범하게 공부했다. 1994년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에 입사해선 유물 보존 처리를 담당했다. 바다에서 건진 목선의 염분을 빼고 약품 처리를 통해 단단하게 만드는 경화 작업이 양순석의 일이었다. 그가 연구복을 벗고 해양유물 탐사·발굴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건 입사 8년이 지나서다. 해양유물 발견 신고가 급증하면서 연구소는 2002년 수중발굴팀을 꾸렸다. 그 전까지 해군이 해양유물을 인양했다. 대학에 수중고고학과가 따로 없는 현실에서 연구소의 다양한 전공자들이 팀에 합류했다. 팀원들은 뒤늦게 잠수를 배우고 현장에서 수중고고학을 개척했다. 그러나 대부분 오래가진 못했다. 수중고고학을 하겠다고 들어왔다 나간 후배가 열다섯명쯤 되려나. 대부분 두 손 들고 가버렸다. 일년의 절반 이상 섬이나 바다에서 보내는 생활에 지치거나, 의욕은 넘치는데 체질적으로 바다에 맞지 않았다. 생명보험에서도 잠수를 하는 해양유물 조사원은 받아주지 않았다.

개수제인 오늘 조사원 양순석, 홍광희, 노경정은 바다를 보며 생각에 잠긴다. 얼마나 찾아낼 수 있을까. 망망대해에서 해양유물을 찾는 데는 운도 따라야 한다. 최신 장비도 사실 드넓은 바다에서 소용이 없다. 해저유물 탐사선 씨뮤즈호의 음파탐지기는 해저지형을 3차원으로 영상화해 바닷속 이상체를 확인한다. 튀어나온 선체나 선체의 파편을 찾아내는 작업이다. 하지만 외국에 비해 규모가 작은데다 뻘 안에 있는 고려나 조선, 어쩌면 더 과거의 배들이 음파탐지기에 잡힐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 어부 등 민간인들이 해양유물을 발견하면, 수중발굴과의 조사원들과 민간 잠수사가 신고 해역에 나가 ‘그리드’(격자무늬)를 짠다. 쇠기둥을 해저에 박고 줄을 묶어 대형 사각형을 만들고 이 사각형 안에 작은 사각형을 계속 만들어 탐사의 세부 구획을 나누는 일이다. 조사원이나 민간 잠수사가 그리드를 옮겨 다니며 손이나 탐침으로 난파선과 유물을 찾는 일이 지겹도록 반복된다.

양순석은 조사원들 가운데 가장 오래 해양유물을 찾아다녔다. 연구소가 진행한 유물 탐사·발굴에 그가 참여하지 않은 현장이 거의 없다. 문화재청 산하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수중 문화재를 탐사·발굴하는 기관이다. 이 기관에서 바다에서 직접 유물을 탐사·발굴하는 조사원은 8명. 8명의 손에 해양유물과 수중고고학의 미래가 달렸다. 개수제가 진행된 오늘, 일이 순조롭게 풀린다. 마도 남서쪽 지역, 그리드 A1 구역에서 청자 대접 등 13점이 발견됐다. 최종 목표는 침몰선이다. 어깨가 무겁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수중발굴과
양순석 팀장은 바다를 향해 절했다
2009년 4월30일 태안 마도 해역
700년전 침몰선 찾아나서는 시작
2015년에도 그는 바다로 갈 것이다

마도 해역은 난파선의 공동묘지
조선 태조~세조 60년간 이곳에서
선박 200척 침몰, 1200명 숨져
그럼에도 마도는 전국 세곡 실은
조운선·무역선·사신들의 물길

2011년 5월7일

하늘이 흐릿하고 바다 위로 안개가 자욱하다. 개수제를 지낸 지 737일이 지났다. 양순석은 여전히 마도에 있다. 지난 2년의 탐사와 발굴은 성공적이었다. 2009년 한 해에 세 척의 난파선을 찾았다. 마도 북쪽에 위치한 수중 암초를 기준으로 서쪽의 1지구에서 한 척, 동쪽의 2지구에서는 두 척을 발견했다. 배의 이름은 지명을 따라 각각 마도 1, 2, 3호라 불렀다. 마도 3호선 유물을 인양하기 위해 2011년 5월7일 씨뮤즈호가 출항한다.

“2011년 5월7일 토요일. 흐림. 오전 8시에 관공선 부두에서 소장 외 연구소 직원들의 배웅을 받고 출항했다. 해무가 짙어 조심스러운 항해를 했다. 바지선에 도착해 금일 작업에 대한 계획을 토의했다. 8시50분부터 약 40분간 강대흔 잠수사가 선체 확인을 위한 트렌치(시굴 조사를 위해 파놓는 구덩이) 구획 작업을 했다. 340° 방향으로 20m의 기준선을 설치하고, 그 선에 수직으로 20m의 라인을 설치했다. 설치 후 수중촬영을 실시했으나 조류가 약하고 부유물이 많아 촬영에 어려움이 있었다. 두 명의 잠수사가 남쪽과 북쪽 방향의 라인을 따라 제토(뻘 제거)를 실시했다. 중심에서 남쪽 8.5m 지점에 선체로 추정되는 목재가 노출됐다. 동쪽 2.5m에서도 선체로 보이는 3단의 목재편이 확인됐다. 하지만 오후에 시야가 탁해 구덩이를 파는 시굴 작업이 어려워 작업을 일시 중지했다.”(마도 3호선 발굴 일보)

바다에 들어가기 전 잠수복을 입고 대기하고 있는 민간 잠수사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2년간 조사원들에게도 변화가 있었다. 2008년 입사한 조사원 노경정은 체질적으로 맞지 않은 바다 생활을 견뎌냈다. 바다가 육지처럼 일렁이지 않는 고요한 날씨에도 노경정은 배 위에서 하늘이 노래져 게워내기만 했었다. 여전히 멀미약을 달고 살지만 포기는 하지 않았다. 스킨스쿠버 강사 출신의 홍광희는 2009년 연구소에 입사한 뒤 공부에 욕심을 냈다. 뒤늦게 고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10년 넘게 잠수를 했던 홍광희도 2009년 마도 탐사 현장에서의 첫 잠수는 공포스러웠다. 서해는 홍광희가 이제껏 헤엄쳤던 맑은 바다와 달리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컴컴했다. 홍광희는 자신만만함을 버리고 양순석에게 유물 탐사를 배워나갔다. 새로운 조사원도 합류했다.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등 육지에서 유물 발굴을 하던 신종국이 2011년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로 자리를 옮겼다. 신종국은 마도 3호선 발굴 현장에서 팀장을 맡았다. 사실 2년은 해양유물을 찾는 사람들에게 긴 시간이 아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수중발굴 선박인 신안선은 1976년 발견부터 선체 인양, 복원까지 23년이 걸렸다. 720여개의 선체 조각은 18년간 염분과 이물질을 빼고 보존 처리를 했다.

양순석 마도 탐사·발굴 일지
바다에는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신비가 있다. 갯벌 안에 숨은 수백년 전 과거를 세상에서 가장 처음 보는 일은 가슴 설레는 일이다. 남들은 바다에서 보물을 캐낸다고 하지만 매일 보면 보물이나 화폐의 가치로 보이지 않는다. 바다는 위험하고 자유롭다. 공기 없는 세상에는 경쟁과 배제, 억압이 없다. 양순석은 2007~2008년 태안선 발굴 당시 청자가 수놓은 바다 위를 떠다닌 기억을 잊지 못한다. 고려시대 옥빛 청자는 영롱한 빛을 내며 갯벌 속에 8m 줄을 지어 누워 있었다. 유물이 다칠까봐 발로 밟지 않고 청자 위를 떠다니며 일렬로 줄지은 푸른 빛깔을 바라보았다. 그 시간과 공간은 누구도 끼어들 수 없는 혼자만의 것이다. 당시 양순석을 포함한 조사원 6명은 우리나라 수중고고학 최고의 성과를 냈다. 보물급 청자 등 2만5000점이 인양됐다.

이번엔 마도다. 태안선이 발굴된 지점에서 북서쪽으로 4㎞ 떨어진 충남 태안군 근흥면 마도 해역은 난파선의 공동묘지다. 달리는 말처럼 생긴 0.25㎢ 면적의 작은 섬과 육지 사이 해협은 물살이 세고 안개가 자주 일어 옛 선원들이 목숨을 걸고 항해했다. 조선 태조~세조 60년간 마도 해역에서 선박 200척이 침몰하고, 선원 1200명이 숨졌다는 기록이 <신증동국여지승람>(조선 중종 25년·1530년)에 기록돼 있다. 마도는 전국 각지에서 조세로 바치던 곡식을 운반하는 조운선과 중국의 무역선, 사신 행렬이 반드시 지나야 하는 길목이었다.

“돌부리 하나가 바다로 들어가 있어서 물과 부딪쳐 파도를 돌려보내는데, 놀란 여울물이 들끓어 오르는 것이 천만 가지로 기괴하여 말로 형언할 수 없다. 그래서 배가 그 아래를 지나갈 때는 대부분 감히 근접하지 못하는데….” 중국 송나라 사신 서긍이 1123년 고려 개경에 한 달간 다녀온 뒤 낸 여행보고서 <선화봉사고려도경>에서 묘사한 마도의 모습이다.

“안흥정 아래 바다로 통하는 곳은 각처에서 모이는 여러 물줄기가 서로 부딪치는 곳이요, 또 험한 돌무더기가 있어 가끔 배가 뒤집혔다. 운하를 파면 조운의 길을 통할 수 있다고 건의하는 이가 있어 내시 정습명을 보내어 그 인접한 군의 군졸 수천명을 징발하여 운하를 팠으나 결국 성취하지 못했다.” 조선 전기에 편찬한 고려시대 역사서인 <고려사절요>는 마도를 이렇게 기록한다. 마도는 물길이 험해 ‘난행량’(難行梁)으로 불렸으나 이후에는 편안한 길목이 되길 바란다는 뜻에서 ‘안흥량’(安興梁)으로 바뀌었다.

제3차 제토(개흙 제거) 당시의 마도 3호선 노출면 평·단면도. 목선에서 개흙이 제거될 때마다 노출면이 달라진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2011년 9월8일

매일이 갯벌과의 전쟁이다. 2011년 5월7일 항해를 시작한 지 두 달이 넘도록 흙만 퍼내고 있다. 좌현과 선수 쪽으로 약간 기울어진 마도 3호선은 갯벌 속에 묻혀 있다. 길이 12.5m, 폭 8.5m, 높이 2.8m의 목선에서 사슴뿔 같은 유물 몇 점 나오긴 했지만 그뿐이다. 마도 3호는 텅 빈 배인 걸까. 흙을 제거하는 작업은 그제가 어제 같고, 어제가 오늘 같다. 조사원들은 기다리다 지쳐갔다. 목포 사무실에 있는 문환석 수중발굴과장에게 똑같은 전화 보고만 반복했다.

“2011년 7월26일 화요일 상황입니다. 선체 내의 목재를 실측했습니다. J10 그리드에서 생선뼈가 지속적으로 확인되며, I12 구간에서 곡물의 껍질로 보이는 유기물을 인양했습니다. L8, M8 구간으로 갯벌을 제거하는 제토 호스 이동하여 작업했습니다.”

“유물이 발굴되면 좋긴 할 텐데….”

사무실에서 보고를 받는 문 과장에게도 답답함이 밀려온다. 그렇다고 후배들을 재촉할 순 없다. 해양유물이란 게 열심히 한다고 발굴되지 않는다는 걸 안다. 문 과장은 유물이 발견되길 바라는 마음만 내비쳤다.

마도 3호선 발굴 조사가 시작된 지 125일째인 2011년 9월8일. 하늘이 흐리고 비가 오락가락한다.

“목간이 발견됐습니다!”

수취인과 발송인, 물품 종류와 수량을 나무 막대기에 기록한 목간은 침몰선의 연대를 풀어주는 열쇠다. 잠수사들이 마도 3호선 목간이 발견됐다는 소식을 전한다. 목간이 발견되면 조사원과 잠수사들은 모든 작업을 일시 정지한다. 수백년간 바닷물이 배어들었을 목간은 잘못 만지면 글자가 지워진다. 잠수사들이 쇠기둥과 밧줄로 발굴 구역을 나누거나 개흙을 제거하는 작업을 한다면, 학예연구사인 조사원은 고선박과 유물을 실측·촬영하고 유물 인양 계획을 세운다. 오랜 시간 수중에 있던 유물이 햇빛을 보고 훼손되지 않게 현장 보존하는 것도 조사원의 몫이다.

2009년에 찾아낸 세 척의 난파선
그중 하나 마도 3호선 덮고 있던
뻘 제거 125일만에 목간 발견
목간은 수취인·물품수량 등 기록
침몰선의 연대 알려줄 열쇠다

마도 3호선의 목간들을 풀었더니
고려 1265~1268년 곡물운반선
여수에서 강화로 향하다 침몰
김영공댁에 홍합 젓갈 등 전달
주인공은 노비 출신 권력자 김준

양순석이 바다로 뛰어들었다. 오래된 목선이 보인다. 마도 1, 2호와 달리 3호선은 훼손된 부분 없이 거의 온전히 남아 있다. 선체 북반부에서 개흙 묻은 목간을 플라스틱 상자에 담았다. 목간 표면에 먹물로 쓰인 문자를 보존하기 위해 흙을 제거하지 않고 그대로 가져와야 한다. 갯벌은 장시간 유물의 부식을 막는 타임캡슐이다. 유물의 종류에 따라 인양하는 방법도 달라진다. 곡물, 볏짚, 생선뼈 등 유실되기 쉬운 작은 유물은 뚜껑 있는 병이나 플라스틱 용기 또는 비닐 지퍼백에 담는다. 도자기류 유물은 포장된 상태로 다발째 보이면 바구니에 순서대로 담아야 인양 이후 화물의 적재 상태를 파악할 수 있다. 도자기가 넓은 범위로 흩어져 있으면 도자기를 채집망에 담아서 인양하되 유물의 출토 지점을 정확히 기록해야 한다. 목간이 양순석의 손에 의해 배 위에 올라온다. 목간이 수조통에 담긴다. 염분을 빼는 작업이다. 중요 유물은 인양 즉시 태안군 신진도에 있는 태안보존센터로 보낸다. 하나의 목간이 육지로 오기까지 조사원들의 수많은 실패와 좌절, 기다림과 인내가 바다에 뿌려진다.

김준의 생애 (※클릭하면 확대됩니다.)
태안보존센터 연구실로 옮겨진 목간은 햇빛이 차단된 어둠상자에 담겼다. ‘사심김영공주택상(事審金令公主宅上). 담해생사십합오일항현례(生四十合伍一缸玄)’. 현례라는 고려인이 사심 김영공 댁에 홍합 젓갈과 날것 40개의 항아리 등 51개 항아리를 올린다는 내용이다. 이 목간에 적힌 영공(令公)은 고려시대 왕실의 제왕에게만 붙이던 극존칭이다. 마도 3호선에서 총 35개의 목간이 발견됐다. 목간에 나오는 수취인들의 활동 시기를 보면, 마도 3호선은 고려시대 1265~1268년 선박으로 여수에서 강화도로 향하다 마도 해역에서 침몰했다.

1265~1268년 일반 관료로서 영공의 칭호를 받을 수 있는 인물은 김준이다. 노비로 태어나 최고 권력에 오른 김준은 칼과 피로 운명을 바꾼 인물이다. 1265~1268년 어느 하루, 여수 사람 현례가 보낸 홍합 젓갈 등 51개의 항아리는 김준에게 전달되지 않고 가라앉았다. 항아리 51개는, 격동의 삶을 살다 죽은 김준에게 기억조차 못할 사소한 일이었을지 모른다. 항아리와 함께 묻힌 고려 선원들의 죽음도 사서에 기록되지 않았다. 침몰선처럼 김준의 권력도 1268년 12월 끝을 다해갔다.

김효윤(왼쪽), 양순석 학예연구사가 충남 태안군 근흥면 신진도리에 있는 태안보존센터 연구실에서 자기 그릇에 묻은 이물질을 일일이 제거하고 있다. 해양문화재는 종류에 따라 보존 처리 방법과 기간이 다르다. 고선박과 유물을 인양한 순간부터 해양유물전시관에 공개되기까지 지난한 시간이 걸린다.

1258년 3월26일

“최의는 굶주린 백성을 돌보지 않고 보고만 있었으니 의거를 일으켜 그를 베었사옵니다. 청하건대 우선 곡식을 풀어 굶주린 백성들에게 나눠주어 민심을 위로하여 주시옵소서.”

1258년 3월26일, 노비 김준은 60년 최씨 무신정권의 마지막 집권자인 최의를 죽이고 쿠데타에 성공했다. 김준과 그의 조력자, 유경은 날이 밝자 왕이 계신 편전을 향했다. 원나라의 침략과 최씨 무신정권의 득세로 ‘종이 왕’일 뿐인 고종은 김준 등의 노고를 치하하며 눈물을 보였다. 최의를 죽이고 쿠데타를 일으킨 것에 대한 일종의 사후승인이 떨어진 것이다. 고려시대 무신정권 60년이 하루아침에 끝났다.

김준은 최충헌의 아들 최이의 눈에 들어 호위무사로 발탁됐다. 노비 김준은 최이에 의해 정9품 벼슬인 전전승지를 받는다. 최이-최항-최의로 권력이 세습되는 동안 김준의 야망은 멈추지 않았다. 최씨 정권에 사람을 추천하고 자리에 앉히는 방식으로 문고리 권력의 외연을 확대했다. 가까운 인물의 잘못을 감싸는 방법으로 자기 사람을 만들며 정치를 시작했다.

1258년 1월, 김준의 측근 송길유가 백성을 착취한 사실이 고려시대 국방 회의기구인 도병마사에 보고될 위기에 놓이자 김준이 이를 막아섰다. 김준이 인사 담당 기구인 정방에 속한 유경에게 부탁해 탄핵안이 보고되지 않았다. <고려사> 열전을 보면, 야별초 지휘관 송길유의 잔학한 행동이 드러난다. 야별초는 몽골과 항쟁한 삼별초의 전신으로 고려의 치안 유지, 최씨 무신정권의 권력 강화 등 두 가지 역할을 담당했다. 대몽 항쟁은 원나라에 대항한, 자주적 성격의 전쟁임과 동시에 최씨 무신정권 유지를 위한 전쟁이었다. 왕은 힘이 없었다.

“송길유는 병졸 출신으로 최항을 아첨으로 섬겨 야별초(夜別抄)의 지유(지휘관)가 되었다…. 야별초를 거느리고 각 고을을 돌면서 백성을 몰아 바다 섬으로 들어가게 했고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때려죽이곤 했다. 혹은 긴 밧줄로 사람들의 목을 엮은 다음 별초를 시켜 끌어다가 물속에 던지고는 거의 죽게 되면 다시 끌어내고 약간 정신이 들면 다시 물속에 던졌다.”(<고려사> 열전)

최의가 나중에 이 일을 알게 되어 김준과 유경에게 호통을 쳤다. 최의는 송길유를 추자도로 유배 보냈다. 김준과 유경은 권력에서 제외될 위기에 놓였다. 두 사람은 고려에 침입한 몽골군에 포로가 되었다가 탈주한 자들로 조직된 신의군과 야별초의 지휘관들에게 최의를 죽이자고 설득했다. 한때 암살계획이 새나가 수포가 될 뻔한 쿠데타는 거사 날짜를 급히 당겨 성공했다. 김준의 역모를 알고 느긋하게 대응하려던 최의는 1258년 3월26일 자신의 집에서 죽임을 당한다.

계속되는 원나라와의 전쟁과 극심한 흉년으로 굶어죽는 시체가 저잣거리에 널렸으나 최의는 곡식 창고를 열지 않았다. 김준은 백성을 구휼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김준은 쿠데타가 성공한 날 정4품 장군으로 승진했다. 쿠데타 성공 후 닷새 뒤에 이뤄진 공신 정책으로 서열 2위로 올라섰다. 그의 측근과 동생이 공신 8인에 다수 포함됐다. 천민이라는 신분 때문에 명문가 집안인 유경이 서열 1위로 올라섰지만 실질적인 장악력은 김준이 앞섰다.

권력은 오래가지 않았다. 김준이 최의를 죽이고 쿠데타를 일으킨 지 10년이 지난 1268년 12월. 김준과 함께 최의를 죽이는 쿠데타에 앞장섰던 임연이 이번에는 김준을 죽이는 쿠데타를 일으킨다. 김준을 아비라 부르며 따르던 측근 임연은 재산과 권력 다툼으로 김준을 배신한다. 과거 말단 장교 시절 남의 아내와 간통했던 임연은 김준의 도움으로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고 이를 계기로 김준을 아비라 불렀다. 그러나 오늘의 야망은 어제의 의리를 걷어찬다. 임연은 김준을 죽이기로 마음먹고 환관을 통해 왕의 의중을 물었다. 환관은 권력 기반이 약한 왕이 유일하게 기댈 곳이다. 원종은 임연의 쿠데타를 승인했다. 김준이 뿌린 권력의 씨앗들이 화마처럼 자신을 덮친 것이다.

1268년 12월, 원종 9년. 교정별감 김준은 대궐 문을 넘어 편전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전날 원종은 원의 사신 탈타아를 전송하려 대궐 밖으로 행차를 나왔다. 어가를 나온 왕을 따라가는 것이 신하의 예의지만 김준은 이를 거부했다. 김준과 원종의 관계는 되돌릴 수 없을 만큼 뒤틀어졌다. 한 달 전 남도의 군현에서 왕에게 진상하는 공물이 수도 강화도에 도착하자 김준의 아들이 야별초 군사들과 함께 약탈한 게 화근이었다. 원나라와의 30년 전쟁으로 왕실 또한 공납을 징수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원종은 김준을 대궐로 불러 대로했다.

김준이 편전으로 오던 그 시간 환관들과 임연에게 긴장감이 밀려왔다. 박달나무 몽둥이를 편전에 들여놓고, 환관들도 단검을 소지했다. 편전 뒤에 활을 든 저격조를 배치했다. 성공하면 김준의 세상이 끝날 것이고, 실패하면 목이 달아날 것이다. 전날 원종이 어가 행차까지 준비하며 유인했지만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김준이 오늘 왕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편전으로 향했다. 편전 바깥에서 김준의 기척이 들렸다. 환관 최은은 흔들리는 동공을 감추고 편전 앞에서 김준을 맞았다. “정당에서 기다려 주시지요.”

김준은 편전에 딸린 정당으로 들어갔다. 그때 몽둥이가 머리를 내리쳐 김준이 쓰러졌다. 왕실의 하인 김상이 칼을 휘둘러 쓰러진 김준의 목을 베었다. 왕이 거처하는 편전 옆방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고려 60년을 지배한 최씨 정권의 노비였던 김준은 자신이 최의를 죽인 것처럼 측근에 의해 죽음을 맞았다.

2011년 10월24일 맑은 날. 양순석 등 조사원들은 김준에게 항아리를 전달하려던 마도 3호선 유물 발굴을 마치고 육지로 떠났다. 유물만 인양하고 배는 나중에 인양하기 위해 뻘 속에 묻어 두었다. 그 배는 지금도 마도 해역에 있다.

1258년 김준은 최의를 죽이고
쿠데타 성공했으나 ‘10년 천하’
자신을 아비라 부르며 따르던
임연이 이번엔 김준을 죽였다
야망은 어제의 의리를 걷어찼다

선체 분해돼 인양된 마도 1·2호
염분 빼고 단단히 하는 경화 작업
마도 3호는 발굴된 고려 선박 중
가장 상태 양호해 선체 분해 않고
통째 인양 위해 뻘에 그대로 뒀다

2015년 1월7일

“(홍)광희 외에 내가 안심이 안 돼. 위험하잖아. 바다는 한순간이야. 차라리 내가 물에 들어가고 말자, 그냥 내가 하자 하는 건 … 불안하니까. 그런데 나도 이제 나이가 마흔넷이 돼불잖어. 나도 내가 ‘뱃놈’ 될지 몰랐어.”

2015년 1월7일 저녁. 목포의 한 식당에서 양순석, 신종국, 노경정 등 수중발굴팀 조사원들이 술잔을 기울였다. 테이블 위에는 칼로 잘게 잘린 낙지가 참기름 위에서 고물거렸다. 양순석은 스킨스쿠버 강사 출신의 홍광희를 제외한 다른 조사원이 물에 들어갈 때마다 긴장감을 늦출 수 없다고 말했다. 고고학, 사학 등을 전공한 학예연구사들은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수중발굴과에 합류한 뒤에 잠수를 배운다. 해양유물 발굴에는 잠수, 고고학, 유물 보존과학 등 다양한 분야의 지식이 필요하다. 한잔씩 소주를 입에 털어 넣은 조사원들은 지난번 탐사 때 배가 가라앉을 뻔했던 일이나 섬에서 만났던 사람들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일년에 절반 이상 합숙하며 바다에서 생활하는 조사원들은 아내보다 동료와 있는 시간이 많다. “동료끼리 서로 이해를 못하면 살아가질 못해요. 이빨 갈고 코 고는 모습도 다 보고. (2006년 도입된 해저유물 탐사선) 씨뮤즈호는 좁아서 개인 공간이 없어요. (2012년 도입된 수중발굴 전용 인양선) 누리안호는 그보단 나아졌지만. 누리안호 없이 씨뮤즈호만 나가갈 땐 서너명이 같이 방을 써요.”

남자들은 술 한잔에 진심을 담는다. 홍광희가 양순석과의 예전 기억을 더듬는다. “2009년, 서른넷에 연구소에 들어와 마도 해역 탐사를 처음 나갔어요. 건방졌죠. 광주방송이랑 자연 다큐멘터리도 찍어봤고, 수중촬영은 꽤 많이 해봤거든. 탐사 나간 지 며칠 안 돼서 마도 1호선 영상을 찍으라는데 수심이 17, 18m쯤 돼요. 그런데 물에 들어가니 하나도 안 보여. 까매. 10년 이상 잠수한 내가 무섭더라고. 배가 빠진다는 건 최악의 조건이거든. 거기서 발굴을 한다고 생각해 봐요. 더듬더듬 양(순석) 선생님이랑 같이 촬영을 했는데. 내가 암말도 안 하고 나중에 술 먹을 때 한마디 했어요. ‘경험은 어쩔 수 없더라.’ 이 아저씨는 (안 무서운지) 아무 느낌이 없어. 그때부터 순석이 형이랑 신 연구관님한테 많이 배웠어요. 이 양반 장점이 뭐냐면, 다른 사람한테 싫은 소리를 안 해요.”

양순석은 술이 들어가지 않으면 말을 길게 하지 않는다. 위험한 이 일을 왜 하는 거냐, 물어도 양순석의 대답은 거의 같다. “직업이니까 하죠.” “가장이잖아요.” 뱃사람 기질인 건지 그는 꾸미는 말을 할 줄 모른다.

목포 남농로에 있는 해양유물전시관은 양순석과 조사원들이 길어 올린 유물들이 보관돼 있다. 1월9일 오전, 한 부부가 해양유물전시관 2층 ‘제1전시실-고려선실’을 둘러보고 있었다. 관람객이 둘러보는 보물급 문화재들은 양순석의 과거이자 추억이다. 한국이 발굴한 고선박 14척 가운데 양순석은 10척의 배를 발견하는 데 참여했다(14척 가운데 마도 3, 4호와 대부도선은 발견 후 다시 갯벌에 묻어두었다). 대다수 고려 선박이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2002년 발굴을 시작하기 전까지 해군이 해양유물을 수습했다. 어민이 우연히 유물을 발견해 신고하면 해군이나 민간 잠수사가 건져 올리는 방식이었다.

1전시실 입구에 보물 1782호로 지정된 ‘청자 퇴화무늬 두꺼비 모양 벼루’가 있다. 2007~2008년 태안선 발굴 당시 건져 올린 유물로 두꺼비 모양 벼루는 처음 발견됐다. “청자 파편인 줄 알고 한꺼번에 바구니에 걷어 올렸는데 조각들 사이에 이 벼루가 있었어요. 운이 좋았던 거죠. 하나도 깨지지 않고 올라왔어요.” 2010년 마도 2호선에서 발굴돼 보물로 지정된 ‘청자 연꽃무늬 매병’ 두 점도 보인다. “처음에는 매병인 줄 몰랐어요. 뻘 속에서 일부만 보였거든요. 이 유물은 매병의 새로운 용도를 알 수 있게 해 줘서 보물로 지정됐어요. 예전에는 매병이 장식용으로 사용됐을 거라 추측했는데 이 두 유물은 꿀과 참기름을 담는 데 사용됐거든요. 목간에 이렇게 쓰여 있었죠. ‘꿀을 준(매병)에 담아 중방 도장교 오문부 댁에 올린다.’ 발견 당시 참기름, 꿀은 남아 있지 않았어요.”

여러 가지 도기들이 한데 모인 전시관을 보며 양순석이 잠깐 생각에 잠긴다. 자세히 보니 균열이 간 도기들이다. “이건 마도 1호선, 십이동파도선 도기들인데요. 깨져서 나온 걸 몇 년에 걸쳐 복원한 겁니다. 대형 도기들은 다 깨져서 나와요. 여러 도기들이 다 깨져 있으니 나중에 복원할 때는 완전 퍼즐 맞추기죠.”

한눈에 보아도 귀하게 보이는 ‘청자 사자 모양 향로’는 사연이 있는 문화재다. 2007~2008년 태안선 발굴에 참여했던 잠수사가 향로를 빼돌렸다 뒤늦게 되돌아왔다. “이게 물속에서 진짜 예뻤어요. 민간 잠수사 한 명이 짝을 이뤄 들어가는 다른 잠수사와 시간 차를 두고 잠수를 했어요. 그리고 갯벌 속에 이걸 묻어두고 나온 거죠. 연구소 발굴이 다 끝나고 숨겨둔 유물을 꺼내서 인사동에 거래하려다가 못 팔았어요. 국정원 직원이 첩보를 입수해서 민간 잠수사한테 사겠다고 거짓으로 접근을 했고 결국 잡혔죠. 민간 잠수사가 10억인가, 몇억인가 요구를 했대요. 1년 넘게 생과 사를 오가며 같이 작업했는데. 배신감, 아, 진짜 믿었던 사람인데. 동료로 술도 많이 먹었는데 배신감 느끼고 허탈했죠. 가슴이 벌렁벌렁하고. 경찰서 가서 왜 그랬느냐고 물으니 저희한테 미안하단 말은 해요.” 청자 사자 모양 향로는 2009년 해양문화재연구소로 돌아왔다. 2013년 진도 발굴 현장에서도 잠수사와 선박직 직원이 유물을 빼돌렸다 검거됐다.

도굴꾼 덕분에 해양문화재 발굴이 이뤄진 곳도 있다. 한국 수중문화재의 효시가 된 신안선 역시 어부의 신고로 발굴 조사가 시작됐지만 조사 이전 도굴꾼에 의해 밀반출이 이뤄졌다. 발굴이 시작되고서도 유물의 집중 매장 지역을 찾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는데 수감된 도굴범이 위치를 알려주고서야 조사가 활기를 띠었다. 2006년 전북 군산시 야미도 수중발굴 역시 도굴범 검거를 계기로 이뤄졌다.

“야미도 도굴범이 어떻게 잡혔는지 아세요? 도자기를 엄청 건져서 술을 먹으려고 룸살롱 갔는데 아가씨한테 도자기를 팁으로 줬대요. 아가씨가 신고를 한 거죠. 도굴범이 잡히고 유물이 국가 귀속이 되면 관련 정보가 문화재청, 해양문화재연구소로 들어옵니다. 현장조사를 하잖아요. 너 어디서 훔쳤느냐, 현장검증할 때 저희가 물에 들어갔어요. 정말 유물이 있는 거예요. 도굴범이 위치를 알려준 거죠.”

현재는 도굴을 막기 위해 수중에 들어갈 때 카메라가 설치된 헤드셋을 반드시 착용하게 돼 있다. “그런 일 발생하면 심장이 벌렁벌렁해요. 뒤통수 맞는 아픔이죠. 저 사람들 어떻게 될까, 그 생각도 하고. 민간 잠수사들 상대로 한 달에 한 번 교육해요. 돈으로 생각하지 말라고. 아름다운 걸 보면 한순간에 눈이 휙, 되나 봐요. 사람들이 문화재를 금전으로 생각해요. 그런 인식이 자꾸 생기니까 문화재청이 한국방송(KBS)에 <진품명품> 방영하지 말라고 몇 번 요구한 거예요.”

말을 할 때 수식어가 별로 없는 양순석의 덤덤한 성격은 수년, 수십년에 걸쳐 같은 일을 해야 하는 해양문화재 발굴에 적합한 성품인지 모른다. 도굴꾼으로 변한 옛 동료를 떠올릴 때도 크게 흥분하지 않았다. 해양문화재 조사원들은 겨울철 바다에 나가지 않고 올해의 탐사 계획을 준비한다. 2009년 시작된 마도 프로젝트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선체가 분해돼 육지로 인양된 마도 1, 2호선은 염분을 빼고 단단하게 만드는 경화 작업을 하고 있다. 수백년 바다에 잠긴 목선은 인양 뒤 약 10년간 염분을 빼야 부식되지 않는다. 한국이 1976년 최초 발굴한 고선박, 신안선은 1981년 인양을 시작해 1999년 복원을 마쳤다.

마도 3호선은 지금 갯벌에 있다. 바다 벌레의 공격을 받는 고선박은 대다수 상부 구조가 사라지고 저판(밑널)과 닻돌 등만 남는다. 반면 마도 3호는 선수와 선미가 남아 있어 이제껏 발굴된 고려 선박 가운데 가장 상태가 양호하다. 해양문화재연구소는 선체를 분해하지 않고 통째 인양하는 방법을 고심하고 있다. 1628년 전쟁 중에 침몰한 스웨던 전함 바사호도 분해하지 않고 선체 인양에 성공했다. 선체를 분해하지 않으면 인양 비용이 증가하는데 10억~40억원 정도다. 목선으로부터 염분을 빼낼 대형 수조관도 경우에 따라 필요하다.

“혹시 김도형 박사님 아세요? 젊은 시절 해군과 함께 신안선 발굴한 분인데 지금은 백발이세요. 지금도 연구소에 회의가 열리면 자문위원으로 오시죠. 제가 발굴했고, 발굴할 선박도 나중에 복원돼 전시될 거예요. 저도 백발이 돼 있겠죠. 언젠가 마도 3호도 전시관에 놓일 거예요. 개고생해서 건져 올린 유물이 전시되면 뿌듯해요. 일반인들이 이렇게 볼 수 있잖아요.”

마도 3호선에서 발견된 사슴뿔. 박유리 기자

바다, 역사의 길

곡물 운반선인 마도 3호선에는 고려인의 실생활을 엿볼 수 있는 유물이 실렸다. 약재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사슴뿔과 조개류, 젓갈, 곡물, 홍합 족사(홍합 껍질에 하얀 실처럼 붙어 있는 섬유질) 등이 항아리에 실렸다. 발견 당시 곡물과 젓갈 껍질 등은 남아 있었다. 홍합 족사는 1814년 정약용의 형인 정약전이 흑산도 연해의 수자원을 정리한, 가장 오래된 해양 생물학 서적 <자산어보>에 ‘지혈제’로 소개되는 약이다. 말린 개고기로 추정되는 견포, 말린 상어 등도 마도 3호에 선적됐다. 청동 방울과 선원들이 가지고 놀던 장기돌 47점도 원형 그대로 발견됐다.

마도 3호선에서 발견된 청동방울. 박유리 기자
양순석과 조사원들이 탐사를 다니는 바다는 역사의 길이다. 사람, 물류, 문화 교류가 이어진 흔적의 길이다. 바닷길은 항구에서 하천으로 연결되어 내륙 문화에 영향을 미쳤으며 지역과 지역 사이를 연결한 소통의 통로였다. 지금껏 한국 연안에서 수중 문화재 발굴이 20여차례 실시됐고 10만여점의 난파선 문화재가 빛을 보았다. 수중 유물은 갯벌이 발달하고 중국 교역로인 서해에 집중됐다. 목포 해양유물전시관 제1전시실 벽면엔 배가 난파했다는 역사서의 기록이 있다.

“김원충이 중국 송나라에 사신으로 갔으나 옹진 지역에서 배가 난파되어 돌아왔다.”(<고려사> 권 6, 정종 2년, 1036년)

“안흥정 아래의 바다로 통하는 곳은 각처에서 모이는 여러 물줄기가 서로 부딪치는 곳이요, 또 험한 돌무더기가 있어 가끔 배가 뒤집혔다.”(<고려사절요> 제10권, 인종 공효대왕 2년, 1134년)

“조운 뱃길을 열기 위해 내시 정습명이 군졸 수천명을 징발하여 소대현(태안)부터 운하를 팠으나 결국 성취하지 못했다.”(<고려사절요> 제10권, 인종 2년, 1134년)

“서해도의 병선 20척이 가야소도(임자도)에 이르렀을 때 큰 바람을 만나 침몰하였다.”(<고려사> 권 27, 원종 14년, 1273년)

“남경판관 임순, 인주부사 이석, 녹사 배숙, 뱃사람 등 115명이 물에 빠져 죽었다.”(<고려사> 권 27, 원종 14년, 1273년)

“경상도 병선 27척이 파선되어 침몰하였다.”(<고려사> 권 27, 원종 14년, 1273년)

“우인렬을 파견하여 제주말을 진상하게 하였는데 불의의 사고로 해상에서 풍랑을 만나 배가 깨졌다.”(<고려사> 권 44, 공민왕 23년, 1374년)

사서에 기록되지 않은 난파와 침몰, 잃어버린 시간은 원형 그대로 바다에 잠들어 있다. 유물은 부식을 막는 갯벌이란 타임캡슐 안에서 수백년을 견딘다. 지구의 70%를 이루는 바다의 비밀이다. 양순석은 사서에도 기록되지 않은 바다의 비밀을 캐내어 뒤늦게 기록으로 남긴다. 740여년 전 죽은 고려의 배에 마도 3호라 이름 붙였다. 죽을 뻔한 위기를 넘기며 ‘다시는 이 일 하나 봐라’, 한숨 쉬다가도 양순석이 어둡고 탁한 서해 바다에 뛰어드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