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역사 바로알기

[한양순성기] ⓛ남산에서 동대문, 그 많던 성돌은 어디로 갔을까 (조선일보 2015.07.11 20:33)

[한양순성기] ⓛ남산에서 동대문, 그 많던 성돌은 어디로 갔을까

 

서울은 전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도시 중 하나다. 명동과 한남동, 가로수길과 청담동을 중심으로 다양한 인종이 모여 북적대고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다. 그러나 진짜 서울의 장관을 보고 싶으면 서울의 담을 따라 걸어야 한다. 남산, 낙산, 북악산, 인왕산에 걸쳐 이어지는 성곽길 걷기. ‘순성놀이’라고 이름 붙여진 18.6km 둘레길을 걸으며 서울의 맨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편집자 주]

“도성의 둘레는 40리인데, 이틀만에 두루 돌면서 성 안팎의 꽃과 버들 감상하는 것을 좋은 구경 거리로 여겼다. 이른 새벽에 오르기 시작하면 해질 무렵에 다 마치게 되는데 산길이 험하여 포기하고 돌아오는 사람도 있다.”_유득공이 서울의 세시 풍속을 기록한 ‘경도잡지’에서.

2008년 숭례문이 불타서 무너질 때, 나는 폐장을 1 시간 앞둔 서울 시청 앞 광장 스케이트장에서 생애 첫 스케이트를 타고 있었다. 고즈넉한 서울시청 시계탑과 기와 능선이 아름다운 덕수궁을 스케이트 얼음판으로 빙그르르 돌려 보며, 서울 시민이라는 게 너무 행복했다. 곧이어 사이렌 소리와 함께 나무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스케이트를 벗고 달려갔을 때 이미 숭례문은 불길 속에 처참하게 스러지고 있었다.


2013년 복원된 숭례문. 여기서 시작해서 남산으로 올라가면 편마암으로 이어지는 성곽길을 볼 수 있다.
2013년 복원된 숭례문. 여기서 시작해서 남산으로 올라가면 편마암으로 이어지는 성곽길을 볼 수 있다.


성곽길 18.6km, 순례의 시작은 숭례문이었다. 재건된 숭례문을 처음으로 마주했다. 화상의 기억을 잊은 듯 가늘게 쏟아지는 빗속에서도 숭례문의 표정은 담담했다. 태조 때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도성을 방어한다는 목적으로 쌓기 시작한 성곽. 숭례문 양 옆으로 날개를 편 돌담은 검거나 희었고, 그 사이사이 시간의 층위는 다양했다.

성곽길을 걷는 목적은 무엇일까? 조선 후기 문인인 유득공은 “새벽부터 해질 녘까지 꽃과 버들을 감상하는 것을 좋은 구경 거리로 여겼다”고 했다. 2015년 6월, 서울의 성곽길을 걷는다는 것은, 담장 안과 바깥에서 허물어지고 세워지는 건축의 풍경을 목도한다는 것이다.

남산(262m), 낙산(125m), 북악산(342m), 인왕산(338m)의 산세는 낮을만 하면 높아졌고, 높을만하면 낮아진다. 그 산을 타고 끊어질 듯 이어지고 이어질 듯 끊어지는 성곽길을 걷는다. 남산을 넘어 장충동으로 내려가는 성곽길에서 반얀트리 호텔을 만났다. 성곽은 불현듯 끊어졌고, 6성급 호텔 건물이 위용을 자랑했다.

반얀트리 호텔(구 타워 호텔)은 자유센터와 함께 성곽을 끼고 도성 안 쪽에 위치해 있다. 이 곳을 설계한 사람은 김중업과 함께 대한민국 건축가의 양대 산맥이라 불리는 김수근이다. 그는 1963년에 남산 타워호텔과 자유센터를 지었다. 68년에 종로에 세운 상가를 세우면서 강북 도심의 획을 그었다. 김수근은 근대 서울의 그랜드 아키텍터였지만, 그 ‘탄탄대로’의 와중에 한양 성곽을 허물고 그 성돌로 두 건물의 담장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아쉬운 부분이다.


반얀트리 호텔 골프장. 성곽길 언덕에서 내려다본 골프장은 모기장으로 지은 21세기 성전같다.
반얀트리 호텔 골프장. 성곽길 언덕에서 내려다본 골프장은 모기장으로 지은 21세기 성전같다.


남산에서 장충동으로 이어지는 이곳 성곽길 언덕에서 가장 압도적인 풍경은 골프장이다. 19층 호텔 건물을 래핑하듯 사각의 홀로그램으로 우뚝 솟은 골프장은, 마치 모기장으로 지은 성전 같다. 모기장 안에 던져진 흰 골프공을 바라보면 문득 임진 왜란 당시, 전투 한 장면이 떠오른다. 행주 산성에서 흰 행주 치마로 돌을 날라 온 몸으로 성벽을 지켜낸 여자들이, 지금은 흰 유니폼을 입고 공을 좇아다니며 21세기의 성전을 지키고 있다.

걷다 보면 자주 예측불허의 건축 풍경과 마주친다. 장충동은 웅장한 고급 주택가와 구들장에 엉덩이 디밀듯 붙어 앉은 다세대 주택이 공존한다. 고급 저택의 주차장 문이 열리면 다세대 주택 한 채 값의 외제차가 나온다. 특히 장충동 성곽길의 명소인 고이병철 회장 저택(대지 2,760,3m2, 약 836평)은 성벽을 연상시키는 듯한 오래된 담장, 담장 위에 박힌 뾰족한 철침, 거대한 회색 철문으로 위압적이다.

크거나 작거나 새 집은 들어설 때마다 성곽을 깔고 앉았다. 성곽은 흔적없이 사라졌다. 이어지는 좁은 골목에서 낡은 집 한 채를 떠받치고 있는 600년 전의 때묻은 성돌을 다시 만났다. 이산가족 만난듯 눈물나게 반갑다.


낡은 블럭(일명 보루꾸) 담장을 떠받치고 있는 성돌. 끊어진 성곽의 흔적이 보인다.
낡은 블럭(일명 보루꾸) 담장을 떠받치고 있는 성돌. 끊어진 성곽의 흔적이 보인다.


광희문에서 동대문으로 가는 길목에는 놓치기 쉬운 건축물 하나와 놓칠 수 없는 건축물 하나가 있다. 전자는 프랑스 모더니즘의 거장 르코르뷔지에의 제자였던 건축가 김중업이 1965년 설계한 구 서산부인과 건물이고 후자는 이라크 태생의 세계적인 여성 건축가 자하 하디드가 2014년 설계한 동대문 DDP다.

50년의 시차, 시멘트와 알류미늄이라는 재료가 지닌 물성, 규모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구 서산부인과 건물과 DDP는 묘하게 닮았다. 두 개의 건축물은 당대의 시선으로 볼 때, 한참 앞으로 나간 미래적인 조형물이며, 둘 다 곡선과 원형의 기하학적 디자인을 역동적으로 표현해냈다.

광희문에서 동대문으로 가다가 마주친 구 서산부인과의원. 1965년 건축가 김중업이 설계한 건물로, 둥근 모태를 연상시키는 파격적인 디자인이다.
광희문에서 동대문으로 가다가 마주친 구 서산부인과의원. 1965년 건축가 김중업이 설계한 건물로, 둥근 모태를 연상시키는 파격적인 디자인이다.


지금은 상업공간으로 변형됐지만, 건축가 김중업이 서산부인과를 완성했을 1965년에, 이 건물이 안겨 준 파격은 DDP 못지 않아서 임산부들은 둥근 모태를 연상시키는 이 아름다운 건물에서 출산하기 위해 줄을 섰다고 한다(지금보아도 저런 시적인 건물에서라면 마음 편히 순산할 수 있을 것만 같다).

DDP도 마찬가지다. 마치 액체의 풍경을 연상시키는 이 비정형 건축물은 DDP를 가로지르는 한양 도성 성곽과 남산에서 흐르는 물을 청계천까지 보내기 위한 이간수문까지 그대로 복원했다. 칼 라거펠트를 비롯한 해외의 패션 피들들이 한국에서의 첫 쇼를 DDP에서 열고 싶어하는 이유를 알겠다.

성경에는 구약 시대 바벨탑 이야기가 나온다. 신과 같아지기 위해 인간은 하늘로 하늘로 돌탑을 쌓으며 진격한다. 신의 권위에 대항한 인간들은 다른 언어로 제각각 흩어지는 벌을 받는다. 더이상 협력하여 오만해 질 수 없도록. 그만큼 건축을 향한 인간의 열망은 강하다.

성곽의 돌담. 과거와 현재의 돌이 제각각 옹골차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성곽의 돌담. 과거와 현재의 돌이 제각각 옹골차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숭례문에서 동대문까지, 성곽길에서 만난 건축물은 제 각자의 존재감으로 아름답고, 쓸쓸했으며, 허풍스럽고, 고귀해보였다. 가끔 돌에 손을 대보면 어떤 것은 차갑고 어떤 것은 따스했다. 돌마다 지나온 삶을 시위하듯 표정도 체온도 달랐다.


 

[한양순성기] ②공구리를 쳐도 한양도성

(조선일보 2015.07.11 07:00)

 

숭례문에서 SK남산빌딩을 지나 서울힐튼호텔 앞 남산공원 입구에 이르면 2011년에 복원이 끝난 한양도성 회현자락의 유려한 곡선이 눈에 들어온다. 성곽과 함께 잘 다듬어 놓은 산책로를 잠깐만 걸어도 서울은 오랜 역사를 가진 아름다운 도시라는 감동이 차오른다. 곧 나타나는 김구 선생과 안중근 의사의 동상 옆을 지날 때면 일제의 식민지 지배도 이겨낸 이 도시와 그 시민들이 참 대단하다 싶다.

만만치 않은 남산의 경사에 숨이 가빠질 즈음이면 지금까지 보던 성곽과 다른 재질, 다른 공법으로 만들어진 조악한 성벽이 눈에 들어온다. 이 성벽은 남산타워, 남산 미군부대 앞까지 이어진다. 일제가 1925년 조선신궁을 만들면서 남산 서북쪽 자락 성벽을 헐어버렸기에 조선시대 만들어진 성곽일 리는 없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여장(성벽 윗부분의 담장) 소재로 쓰인 돌들이 공원 입구 성벽의 돌보다 작고 검은 편마암이다. 남산 3호터널 공사장에서 나온 것들이다.


한양도성 성곽의 구조 / 자료 = 한양도성박물관
한양도성 성곽의 구조 / 자료 = 한양도성박물관


허연 시멘트가 여장을 쌓아올린 돌과 돌 사이를 채웠다. 여장 맨 위도 시멘트 마감이다. 여장 위에 발라놓은 시멘트들은 40년의 세월을 못 이기고 금이 갔다. 일부는 떨어져 나갔고 남은 것들도 부스러져 흘러내린다. 성벽 뒤채움에는 콘크리트가 쓰였고 배수를 위해 PVC 파이프가 곳곳에 설치됐다. 전통적 뒤채움 방식은 잡석과 진흙을 섞어 써서 자연배수가 가능했다. 서울시 한양도성도감은 공식 홈페이지에서 "과거에는 단절된 구간을 연결하는 데에만 치중하여 오히려 주변 지형과 원 석재를 훼손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고 평가하고 있다.


1970년대 복원한 한양도성 남산지구 성곽 여장 위에 발라놓은 시멘트들은 40년의 세월을 못 이기고 금이 갔다. 일부는 떨어져 나갔고 남은 것들도 부스러져 흘러내린다./ 사진=박정엽
1970년대 복원한 한양도성 남산지구 성곽 여장 위에 발라놓은 시멘트들은 40년의 세월을 못 이기고 금이 갔다. 일부는 떨어져 나갔고 남은 것들도 부스러져 흘러내린다./ 사진=박정엽


이 시멘트 성벽은 1974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시작된 '서울성곽 정화사업'의 남산지구와 장충지구 공사의 결과다. 대한종합건설(주)이 당시 돈 4억5천만원을 들여 1977년 10월초부터 1978년 12월말까지 15개월만에 끝냈다. 1977년 8월 22일자 <동아일보>에서 이태기 서울대 교수는 "문화재의 비중은 그 역사성에 있으므로 새로운 조형은 문화재가 아니라고 전제하고 보수를 하기 전 상태를 상세히 기록, 원형 유지에 힘써야 하고 콘크리트는 전도체이므로 문화재에 해를 끼칠 우려가 많은 만큼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문제를 제기했지만 묵살됐다.

1970년대는 콘크리트와 시멘트에 대한 애정이 하늘을 찌르던 시대였다. 1970년 7월 경부고속도로가 준공되고 1973년 삼환기업의 사우디아라비아 고속도로 공사 수주를 시작으로 중동건설 붐이 일었다. 1970년대 후반 외화수입액의 80% 이상이 중동건설 현장의 오일달러였다. 콘크리트와 시멘트가 곧 밥이었다. 토목건설사업에 대한 신뢰는 그후 수십년간 이어지고 있다. 2007년에는 현대건설 경영자 출신의 이명박 대통령이 4대강 사업을 핵심공약으로 내걸고 당선되기도 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남산지구 성벽에 이같은 시대상이 반영된 셈이다. 이 성벽이 다른 성벽과 다른 이유를 아는 사람은 이 땅의 근현대사를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으리라. 박정희 대통령의 1974년 지시를 기준으로 하면 '서울성곽 정화사업'이 시작된지 40년을 넘겼으니 웬만한 근대문화유산 만큼 오래되기도 했다. 자세히 보면 짙푸른 이끼가 내려앉은 시멘트 성벽이 정겹기도 하다. 시멘트 성벽은 18.6km에 이르는 한양도성에서 2.7km에 불과하다. 나머지 구간에는 또 어떤 역사가 숨어있을까. 새삼 한양도성의 600년 역사가 묵직하게 다가온다.


한양도성 남산지구. 자세히 보면 짙푸른 이끼가 내려앉은 시멘트 성벽이 정겹기도 하다. / 사진=박정엽
한양도성 남산지구. 자세히 보면 짙푸른 이끼가 내려앉은 시멘트 성벽이 정겹기도 하다. / 사진=박정엽


 

[한양순성기] ③30년 전 골목 속으로, 낙산 성곽길

(조선일보 2015.07.11 07:16)

 

흥인지문 사거리에서 북쪽을 보고 1시 방향을 바라보면 회색 아스팔트 위로 푸른 언덕이 손짓한다. 2014년 동대문교회가 철거되고 조성된 동대문성곽공원 동쪽에는 흥인지문에서 끊긴 한양 도성 일부가 고개를 내민다.

성곽을 따라 한양도성박물관(옛 이화여대병원)을 지나쳐 5분여를 걸었을까. 매끈한 아스팔트 대신 우둘투둘 시멘트 바닥이 발바닥에 와닿는다. 길 바닥에는 회색과 짙은 회색, 갈색때를 머금은 회색 등 투박한 시멘트들이 퍼즐맞추기를 하고 누워있다. 그 너머로 성인 어깨높이의 성곽이 보인다. 600년 넘게 자리를 지킨 때묻은 돌담은 이곳이 4대문 안에 위치한 마을이라는 것을 일깨운다.

이화마을이란 이름은 조선시대에 살구나무가 많이 자라 붙여진 것으로 알려져있다. 도성 한양의 외곽 마을이었던 이화마을. 서울이 강남 등으로 커지면서 4대문 안은 서울의 중심부로 거듭났고 땅값은 치솟았다.

조선시대 도성 한양의 좌청룡 낙산 서쪽 꼭대기, 이화마을 꼭대기의 집들은 한양도성의 성곽을 마주보고 자리잡고 있다.
조선시대 도성 한양의 좌청룡 낙산 서쪽 꼭대기, 이화마을 꼭대기의 집들은 한양도성의 성곽을 마주보고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해발 125m, 600년 역사를 지닌 한양 도성의 좌청룡 낙산 서쪽 이화마을, 그 중에서도 꼭대기 마을은 성곽 안쪽에 있지만 여전히 서민의 점유지대다. 1950년대 후반 판자촌이 세워진 이화마을의 시간은 더디게 흘러간다. 얼기설기 얽혀있는 전기줄은 경사면을 따라 북에서 남으로, 동에서 서로 오간다. 경사를 따라 빽빽하게 들어선 집들은 2층을 넘지 않는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1970년대식 2층 벽돌 건물은 2015년 서울 도심을 먼 미래의 일마냥 내려다보고 있다. 지척으로 내려다보이는 쇼핑의 메카 동대문도, 아파트 단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가는 성벽 넘어 창신동도 먼나라 이야기다.

낙산 성곽의 동쪽 외곽에 자리잡은 창신동에는 15층 높이의 아파트가 줄을 지어 서있다. 낙산 성곽 바깥으로 딱 붙어 지어진 빌라의 높이는 최소 5층이다. 게다가 창신동 아파트와 빌라는 지어지지 얼마되지 않은 듯 말끔하게 정돈돼 있다. 낙산 성곽 붙어서서 좀 더 시선을 멀리두면 왕십리 재개발 지역에 새 아파트를 짓기 위해 서있는 크레인이 보인다. 이 모두는 과거에 머물러있는 이화마을 꼭대기 마을을 더욱 선명하게 보여준다.

보증금 100만원에 월세 18만원.  이화마을 꼭대기에는 손글씨로 서울 4대문에서 찾아보기 힘든 가격의 월세방이 있다는 것을 손으로 써서 알리는 종이가 곳곳에 붙어있다.
보증금 100만원에 월세 18만원. 이화마을 꼭대기에는 손글씨로 서울 4대문에서 찾아보기 힘든 가격의 월세방이 있다는 것을 손으로 써서 알리는 종이가 곳곳에 붙어있다.

이화마을 꼭대기에는 아이보리색으로 변한 흰색 페인트가 벗겨진 벽면에는 빈 방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종이가 붙어있다. 집에서 뒹구는 종이에 손으로 적었을 법한 종이 한 장은 비와 바람에 씻겨 누렇게 변한 나무판에서도 찾을 수 있다. ‘월세방 100-18만원’, ‘월세 큰방 1개, 부엌, 욕실, 200-25만원’. 서울 4대문 안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가격은 일시적으로 현실감각을 잊게 한다.

옆동네 창신동 원룸 월세 가격은 보증금 3000만원에 월세 40만원이다. 창신동보다 북쪽에 있는 보문동 원룸도 시세가 비슷하다. 비교적 저렴한 방이 보증금 3000만원에 월세 30만원 수준이다. 이화마을 아랫동네로만 내려가도 집값은 뛴다. 원룸 전세가 7500만원선에 거래되고 있다. 이곳은 목돈이 없는 이, 하루벌어 하루살아가는 힘겨운 이들의 일상을 보듬을 수 있다는 것을 종이 한 장이 보여주는 셈이다.

집 현관 앞에 놓아둔 화분과 꽃들은 동네에 다채로움을 더한다.
집 현관 앞에 놓아둔 화분과 꽃들은 동네에 다채로움을 더한다.


적갈색 벽돌로 쌓아올린 뒤 1층과 2층 사이, 옥상 부분에 공을 들여 칠했을 새하얀 페인트는 지난 세월만큼의 검은 얼룩을 머금었다. 집 벽을 타고 올라가는 갈색 가스배관이 이 동네가 누군가의 보금자리임을 짐작하게 한다.

성곽을 따라 30도 경사를 따라올라가다보면 마치 하늘에 닿을 듯한 착각이 든다. 비교적 보존 상태가 양호한 낙산 구간의 성곽은 세월의 때를 머금어 멋을 더한다. 성곽을 마주보고 자리잡은 마을의 집도 나이를 먹기는 마찬가지다. 벽에 칠한 페인트는 이미 빛을 바랜지 오래다. 벽에 덧칠한 시멘트마저 부스러져 이곳저곳 회색 이빨을 드려내고 있다.

새로움을 더하는 것은 한 집 걸러 놓여있는 현관문 앞의 화분. 갈림길에 심어져있는 나무의 푸른 잎, 현관 앞에 놓여있는 무릎 높이의 꽃 화분은 무채색의 마을에 유채색 물감을 칠한 효과를 준다. 특이하게도 이화마을 윗동네 마을의 집들은 현관문을 열고 나서면 바로 길에 닿는 구조로 지어져 있다. 이 마을의 집 앞마당은 현관문과 성곽 사이, 5m 남짓한 거리 자체다.

그렇게 2Km 남짓을 걸었을까. 2006년 화가 한젬마씨 등 68명의 예술가들이 참여한 ‘낙산 공공 프로젝트’ 이후 동네 곳곳이 벽화로 채워진 이화동벽화마을로 내려가는 알림판이 눈에 들어온다. 이화동 아랫마을로 향하는 알림판은 이화마을 꼭대기 동네의 적막감과 고요함과의 작별을 말한다.

이화마을 꼭대기에 가면 600년 한양 도성의 흔적은 물론 30여전 마을이 때를 묻어 보존돼있는 모습을 덤으로 볼 수 있다.

 

 

[한양순성기] ④광화문부터 홍제동까지…인왕산에서 본 서울

(조선일보 2015.07.11 07:00)

 

대학교 근처에서 하숙을 하던 윤동주는 매일 아침 인왕산(仁王山)을 산책했다. 같은 집 하숙생인 평론가 정병욱과 아침 식사 전에 산 중턱까지 올라갔다가 내려 오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고 한다.

문학이라는 공통 관심사는 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대화 주제가 됐을 것이다. 인왕산은 시인 윤동주에게 많은 영감을 불어 넣어 줬다.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에 재학하던 그 시기에 별 헤는 밤, 자화상, 쉽게 씨워진 시 등 대표작을 완성했다.

서울 중심부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인왕산에서 두 청년은 갑갑한 조국의 현실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지 않을까. 윤동주가 대학에 입학한 1938년, 일본은 경제적 약탈을 넘어 민족 말살 정책을 폈다. 한국어 사용을 금지한 뒤 일본어를 쓰게 하고 창씨개명을 강요했다. 윤동주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옥살이를 했고 29세의 나이에 세상을 떴다.


인왕산 중턱에서 내려다 본 서울
인왕산 중턱에서 내려다 본 서울


윤동주가 내려본 당시 서울이 암울했다면, 지금은 그저 고요하고 평화롭다. 인왕산 순성길의 가장 큰 매력은 광화문, 여의도, 남산 등 서울 중심부를 한 눈에 담을 수 있다는 점이다. 날씨가 맑으면 주요 건물도 손쉽게 찾을 수 있을 정도다.

초행이라면, 인왕산에 오를 준비를 단단히 하는 것이 좋다. 인왕산 입구에 선 사람들은 대개 숨을 고르고 운동화 끈을 고쳐 멘다. 해발 338m로 높은 편은 아니지만 경사가 급한 구간이 자주 나타난다. 정상에 가까워 질수록 경사가 험해진다. 11시간 성곽 길을 걷는 내내 목을 축여줬던 가방 속 물이 무겁게 느껴질 수도 있다.

동행한 이들과 속도를 맞춰 급하게 산을 오르다 보면 풍경을 죄다 놓치고 땅만 보고 걷기 십상이다. 이 때 한번씩 뒤를 돌아보면 색다른 풍경이 나타난다. 인왕산 바로 직전에 올랐던 북악산이 넓게 펼쳐진다. 왼쪽으로는 매일 출·퇴근하던 서울 중심부가 보인다. 내일 다시 돌아갈 일상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여유롭게 관망하는 제3자의 심정이 된다. 오른쪽으로는 부암동, 평창동의 멋진 개인주택이 자리하고 있다.


인왕산 정상에 있는 바위에 앉아 찍은 서울
인왕산 정상에 있는 바위에 앉아 찍은 서울


정상에 오르면 시야가 더 넓어진다. 전망대 역할을 하는 바위에 올라앉아 360도를 한번 돌아보면 산 중턱에서 볼 때보다 서울 시내가 더 넓게 펼쳐진다. 안산, 낙산은 물론이고 북쪽으로 홍제동 아파트 단지도 보인다. 시야가 확 트인다는 것이 이런 느낌인가 싶다.

정상에서 내려오는 길에는 성곽 바깥 부분이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해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다. 시간의 흐름을 가늠해볼 수 있어서다. 정상에서 치마바위를 지나 갈림길이 나오는 구간에서 볼 수 있다. 성곽을 구성하는 성돌의 색깔이 위와 아래가 다르다. 윗 성돌은 쌓인지 얼마 안돼 하얀색인데, 아래로 갈수록 누렇다 못해 까만 색을 띈다.


딜쿠샤 / 사진=박정엽 기자 parkjeongyeop@chosunbiz.com
딜쿠샤 / 사진=박정엽 기자 parkjeongyeop@chosunbiz.com


산행을 마쳤다고 끝이 아니다. 시내로 나가는 길, 독립문 근처에 있는 테일러 가옥(딜쿠샤)은 놓치면 아쉬운 볼 거리다. 늘 봐왔던 비슷비슷한 모양의 주택들 사이에서 딱 봐도 눈에 띄는 붉은 벽돌집이다. 미국 만화에 나오는 교회나 성당 같기도 하다. 1919년 미국 한 통신사의 서울 특파원으로 일했던 앨버트 테일러가 짓고, 살았던 서양식 건축물이다. 딜쿠샤는 힌두어로 행복한 마음이라는 뜻이다.

딜쿠샤 근처에 봉선화, 고향의 봄 등을 작곡한 홍난파 가옥도 있다. 그의 대표곡이 대부분 이 아담한 벽돌집에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1930년에 독일 선교사가 만들었는데 당시 서양식 주택 특성이 잘 보존돼 있다. 서울시 등록문화재 제90호로 민간 소유 였다가 2004년 종로구가 매입했다.

 

 

[한양순성기] ⑤4.19때 총상입은 인왕산 '할머니슈퍼' 여주인

(조선일보 2015.07.11 07:00)

 

서울 인왕산자락을 따라 도미노처럼 놓인 성곽을 내려오면 구멍가게 하나를 볼 수 있다. 이름이 '할머니슈퍼'다. 워낙 가게가 작아 쉽게 찾을 수 없지만 인왕산 자락을 자주 찾는 등산객들에겐 유명한 가게다.

지나 6월 26일 서울 성곽을 내려오는 길에 가게에 들어섰다. 백발이 된 할머니 한 분이 한발짝 한발짝 조심스럽게 걸어 나왔다. 아이스크림 몇개와 음료수 몇개를 사서 얼마냐고 할머니에게 물으니 1분 안돼 계산을 마쳤다. 거스름돈도 척척 내놓았다. ‘할머니슈퍼’의 주인인 김정자 할머니다.

◆6.25로 남편 잃고 4.19혁명 때 총상 입은 현대사 산증인 ‘김정자 할머니’


[한양순성기] ⑤4.19때 총상입은 인왕산 '할머니슈퍼' 여주인


김 할머니의 나이는 올해로 91세다. 행촌동 고개넘어 위치한 지금 그 자리에서 40년 넘게 74세 딸과 함께 슈퍼를 운영하고 있다. 할머니는 당시 나이 17세에 딸을 낳았다. 이후 잠시 떨어져 살다가 딸이 16세 되던 해 서울에서 같이 살기 시작했다. 할머니가 33살에 먼저 서울로 올라왔고 이듬해 16살 딸을 데리고 왔다.

김 할머니가 서울로 올라온 계기는 남편의 갑작스런 납북때문이었다. 김 할머니가 충남 예산에 살 때 남편은 퇴군하는 북한군에 끌려 납북됐다. 생사도 모르는 남편을 찾았지만 북한군에 끌려간 남편은 오리무중이었다. 당시 할머니 나이는 25세였다.

그렇게 혼자 지내던 할머니는 1950년대 후반, 명동에서 소위 '돈놀이'를 하던 ‘김 여인’을 따라 서울로 올라왔다. 김 할머니는 김 여인이 머물렀던 주인 집의 '식모살이'를 시작했다. 그 이듬해 16세 딸을 데리고 왔고 행촌동 자락에서 가게를 차렸다. 그러던 중 1960년 4.19혁명이 터졌다.

당시 김 할머니는 동네 여인들과 함께 과거 금천교 자락 시장을 구경중이었다. 그러다 뭔가가 어깨로 날아들어왔다. 총알이었다. 금세 붉은 피가 옷을 적셨다.

할머니는 학생들의 도움으로 동숭동 서울대병원으로 실려갔다. 할머니 어깨를 맞춘 총알은 옆구리에 머물렀고 조금만 가까이 맞았다면 위험했을 수도 있었다. 김 할머니는 "그때 의사가 ‘총알도 할머니를 잘 피해갔다’라고 말했어"라며 웃었다. 할머니는 그 사건 이후 4.19 유공자로 등록돼 지금도 월 100만원 넘은 연금을 받고 있다.

◆명동주먹 김두한이 좋아한 17살 소녀

[한양순성기] ⑤4.19때 총상입은 인왕산 '할머니슈퍼' 여주인


김 할머니의 딸 역시 서울로 올라오자마자 ‘김 여인’에 이끌려 명동 소재 ‘향원’이라는 음식점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향원이라는 식당은 당시 한정식 집으로 김두한을 비롯한 명동을 주무대로 활동했던 지역 유지들이 자주 드나들었던 유명한 곳이었다. 김 할머니 딸은 "내가 당시 예쁘게 생겨서 음식점(향원)에 가면 김두한이 나에게 용돈도 주고 어린이 대공원도 데려가 주곤했다"고 회상했다.

지금은 없어진 향원은 지난 1965년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원충연 대령(당시45세)과 이인수 대령(35세)이 자주 드나들었던 곳이다. 원 대령과 이 대령은 1965년 5월 10일 향원에 모여 당시 정권을 비판하며 쿠데타 계획을 세웠다는 혐의를 받았다. 결국 당시 정부는 원 대령을 포함한 장교 6명과 예비역 군인 1명을 체포했다. 원 대령은 사형선고를, 이 대령은 무기징역을 받았고 그 둘은 1981년 특별사면을 받았다.

'할머니슈퍼' 여주인들은 한 자리에서 40년을 보내면서 많은 변화를 목격했다. 평당 7만원하던 땅값은 이제 천만원을 넘어갔다. 넝마주이들이 모여살던 가게 앞 공터는 이제 연립주택단지가 됐다. 자동차가 지나지 못했던 울퉁불퉁했던 흙길도 깨끗하게 정비됐다. 바로 옆에 있던 '옥경이슈퍼'도 3년 전에 대기업 편의점으로 바뀌었고 할머니슈퍼 매상을 갑절로 올려줬던 성정여중도 이제는 다 사라지고 그 흔적만 남았다.

현대사의 풍파를 직접 체험한 두 여인은 우리 시대의 살아있는 증인들이다. 그들은 현재도 역사를 기록하며 서울 북쪽 끝자락에 조그만 가게를 운영하며 조용하게 살고 있다. 김 할머니는 “다 잊었던 줄 알았던 옛일이 오늘은 마치 어제처럼 생생하게 느껴진다”라며 “이제 살만큼 살았지만 남은 소원은 딸과 100살까지만 이 가게를 운영하는 거야”라고 수줍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