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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문화재[족쇄와 열쇠 - 조선의 책 이야기](18) 문체반정의 구체적인 경과 (경향신문 2014-08-01 21:45:11)

[족쇄와 열쇠 - 조선의 책 이야기](18) 문체반정의 구체적인 경과

ㆍ정조, 치세 마지막까지 과거제도 통해 사상 검열

 

천주교 신도를 박해하고 관련 서적을 불태우기 시작한 것은 정조였다. 그 첫 번째 사건이 1791년(정조 15년)에 일어난 진산사건이다. 이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정조는 두 가지를 확인하지 않았나 싶다. 하나는 천주교도는 쉽게 솎아낼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다. 진산사건의 진행과정을 보면 문제가 된 윤지충이나 권상연의 행동은 쉽게 드러날 수밖에 없다. “제사를 폐지하는 것으로도 부족해서 위패를 불태우고 조문을 거절했을 뿐 아니라 그 부모의 시신을 내버렸”(정조실록 1791년 10월23일)다고 하니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다.

다른 하나는 책이 사람의 생각을 바꾸는 데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가에 대한 재확인이다. 조선의 천주교는 단지 책에서 시작되었다. 조선에서 최초로 세례를 받은 이승훈(1756~1801)은 순전히 책을 통해 천주교도가 되었고 자발적으로 북경에까지 가서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정조는 천주교에 대해서는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다. 신도를 가려내 죽이고 책은 불태우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굉도의 <원중랑집>에 실린 소품이나 소설이 유행하는 문제는 달랐다. 선비들이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으면 저절로 빠져들 것이고 어느 틈엔가 음란하고 사특한 생각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마침내 성인과 경전에 반대하고 삼강의 윤리를 무시하게 되리라는 것이었다. 정조는 이 문제가 금지나 처벌로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보았다.

정조에게 붙여진 ‘개혁군주’란 명칭은 누가 어떤 관점에서 붙인 것일까. 천주교가 아직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키기 전부터 천주교도들을 죽이고 그들의 책을 불살랐다. 사진은 천주교 박해의 시작이었던 진산사건의 순교지에 세워진 진산성당이다.


■ 초계문신도 패관소품체의 유행에 휩쓸려

거기에는 심각한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그런 패관소품체의 유행에 휩쓸린 무리가 바로 자신의 친위세력으로 키우던 초계문신(抄啓文臣)들이었던 것이다.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자신의 세력 기반이 될 문화정책 추진기관으로 규장각을 내세웠다. 그리고 젊은 선비들을 뽑아 규장각에서 위탁교육을 받게 했다. 그 젊은 선비들이 초계문신이다. 정조는 그들을 대상으로 매달 한 번 직접 강의하고 시험을 보게 했다. 실질적인 접촉을 통해 당파에 대항할 수 있는 친위세력을 구성하려 했다. 그런데 바로 그 초계문신들이 패관소품에 빠져 들었으니 정조로서는 난감했을 것이다. 그런 정조의 심정은 문체반정이 시작될 때 남공철(1760~1840)을 나무란 말에 아주 잘 드러나 있다.

“명색이 초계문신인 자가, 문청공의 아들이라는 자가 가훈을 어기고 임금의 명령도 저버리고 그렇게 금령을 어기다니 이 어찌 몹시 놀랍지 않겠는가!”(정조실록 1792년 10월24일)

문청공은 정조의 스승이었던 남유용(1698~1773)의 시호다. 정조는 남공철이 대책(對策)을 쓰면서 소품에서 글을 인용했다는 이유로 지제교라는 직함을 떼어 버렸다. 이날이 문체반정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1792년 10월24일이었다. 같은 날 또 다른 초계문신이었던 이상황(1763~1841)과 김조순(1765~1832)에 대해서도 문제 삼았다. 이 둘에 대한 이야기는 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둘은 1787년 예문관에서 숙직을 서면서 당송시대의 통속소설이었던 <평산냉연(平山冷燕)>을 보다가 들켰다. 정조는 불같이 화를 내며 그 소설들을 모두 불태워버리라고 명한 다음 이들에게 반성문을 쓰게 했다. 이상황은 두 번 다시 소설을 가까이 하지 않겠다고 반성문을 썼다.

김조순은 동지사의 서장관이라는 신분으로 중국으로 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는 반성문을 써내어야 했다. 그 반성문은 정조의 마음에 쏙 들었던 모양이다. 김조순의 반성문을 칭찬한 내용이 재미있다.

“문체가 바르고 우아하며 뜻이 풍부하여 무한한 함축미가 있다. 촛불을 밝히고 읽고 또 읽으며 무릎을 치곤 하였다. 저 부들부들하다 못해 도리어 옹졸해진 남공철의 대답이나 경박하게 듣기 좋게만 꾸민 이상황의 말, 뻣뻣하여 무슨 말인지 알기 어려운 심상규의 공초는 모두가 입술에 발린 소리로 억지로 자기변명을 하기 위해 한 소리들이지만 이 사람만은 할 것은 한다, 못할 것은 못한다고 하여 결코 스스로를 속이거나 나를 속이려 함이 없음을 알겠다.”(정조실록 1792년 11월8일)

■ 소설 읽던 젊은 선비들에게 ‘반성문’ 명령

심상규 역시 초계문신이다. 그도 같은 문제로 반성문을 써야 했는데, 그 글이 정조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며 언문으로 번역하고 주석까지 달아서 올리라고 했다. 그러고 보면 정조는 진심 어린 반성문을 원했던 것도 아니었던 것 같다. 그저 반성문이 필요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정조는 본보기가 될 만한 네 사람의 반성문을 받아낸 뒤, 그 앞뒤 사정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반성문을 조보(朝報)에 실어 널리 알리도록 했다. 그런 다음 예조에 이렇게 지시했다

“이는 많은 선비들이 타산지석으로 삼게 하고자 함이다. 직책으로나 지위로 보아 나와 아주 가까운 규장각 신하들에게 조금도 가차 없이 금지하고 꾸짖고 하여 부끄러움을 알게 하는데, 더구나 젊은 유생들이나 훗날 경·사대부가 될 자들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우선 성균관에서 보는 이번 시험부터 내 전교를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그 이름을 판자에 써서 선비들이 모이는 곳에 달아두라. 더 심한 자는 북을 치고 성토하라. 그래도 안 되면 매를 때리고 그 사실을 기록해 두라. 그리고 이번에 재가한 이 사항을 대·소과 과거 규정에 기록해 두고 예조가 알아서 처리하라.”(정조실록 1792년 10월25일)

정조는 이런 식으로 자신의 치세 마지막까지 과거제도를 통해 문체를 통제함으로써 사상을 검열했다. 고분고분하게 말을 잘 듣는 서얼 출신들은 승진시키며 우대했다. 그러나 박제가와 이덕무의 글에 대해서는 패관소품체라며 혹평했고 반성문을 쓰게 했다. 박제가는 반성문을 써서 바쳤지만 그 내용은 그다지 반성적이지 않았다. 내성적인 이덕무는 오래지 않아 죽었는데(1793년) 죽을 때까지 반성문을 쓰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