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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 이씨 (위키백과 2013년 2월 23일 (토) 17:42)

광산 이씨

광산 이씨(光山 李氏)는 한국성씨이다.

 

연원

광산 이씨(光山 李氏)는 신라 종성(宗姓)인 김씨(金氏) 김알지후손으로, 궁예의 5세손 이종금(李宗金)을 시조로 한다. 득성조 이종금(李宗金)은 1010년 고려 현종(재위, 1009∼1031) 때 거란 2차 침공때 전투에 참가하여 강화성을 지키는 공을 세웠고, 1018년 거란의 3차침입 때 강감찬과 더불어 공을 세워 덕종 2년(1033)에 광산군에 추증되고 이종금(李宗金)이라고 사성명 받았다. 후손들은 이종금의 8세손 이순백(李珣白)=상서공파, 이숙백(李淑白)=한림공파, 이승백(李升白)=제학공파로 분파조를 이루고 있다. 이종금은 1010년(고려 현종 원년) 거란의 40만 대군이 침략하였을 때 휘하의 주군을 이끌고 강화성을 굳게 지켰다. 1018년(현종 9) 3차로 재침해 온 거란의 10만 정예군을 맞아 강감찬(姜邯贊)의 휘하로 들어가 여러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며, 그 공적으로 1033년(덕종 2) 광산군(光山君)에 봉해지고 이종금(李宗金)이라는 성명(姓名)을 하사(下賜)받았다. 이후 그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받들고 광산군(光山郡) 일원에 세거(世居)하면서 본관을 광산(光山)으로 삼게 되었다.

진도 광산 이씨

광산이씨가 진도군에 많이 모여 사는 이유는 1589년 기축옥사(己丑獄死)의 화란을 피해 진도로 피신했기 때문이다. 기축옥사는 동인과 서인의 당쟁 속에서 정여립(鄭汝立, 1544~1589)의 모반을 조작해 동인(東人)들을 숙청했던 사건이다. 이때 동인계의 실권 배후인물이었던 광산이씨 이발(李潑, 1544~1589)과 그의 형제, 어머니, 아들 등 삼족이 죽임을 당하는 참화를 입게 되었다. 이때의 화를 피해 이발의 6촌 이윤(1573~?)의 아들 이근(李槿, 1602~1630)은 목포 달리도를 거쳐 이길(李洁, 1550~1589)의 아들 이원섭(李元燮)과 함께 진도군 고군면 원포로 들어왔고, 이발의 또 다른 6촌인 이원준(李元濬)은 진도군 의신면 중리에 자리를 잡았다.

세거 현황

진도군 임회면 피동에 자리를 잡은 광산이씨 집안의 일부 사람들은 용산으로 거주지를 옮겼고, 고군면 원포에 자리를 잡은 광산이씨 집안은 의신면 거룡과 읍내 동외리로 주거지를 확장했다. 의신면 중리로 들어온 이원준 후손들은 임회면 죽림, 읍내 남동, 지산면 삼당리, 임회면 팽목리, 지산면 사천리, 의신면 옥대 등에 자리를 잡았다. 이 집안을 남외파라 한다. 이원섭의 집안은 동외파라 하는데 동외파 중 일부가 조도면 성남도를 거쳐 조도면에 퍼졌다.

묘역

2002년에 광산이씨 5백 위를 모신 경모사를 진도군 진도읍 남산리에 세웠다.

분파

시조의 8대손으로 고려 말에 현달한 이순백(李珣白)·이숙백(李淑白)·이승백(李升白) 3형제 대에서 상서공파(尙書公派)·한림공파(翰林公派)·직제공파(直提公派)로 분파되었다.

인물

이종금

이종금(李宗金)은 광산 이씨의 득성조로 헌안왕의 6세손으로, 고려 현종(재위, 1009∼1031) 때 거란 침략을 막아내는 공을 세웠으며, 1031년 현종, 강감찬과 같은 해에 죽었으며, 본명은 김일형으로 1033년 덕종으로 부터 추증 받아 이(李)씨 성과 종금(宗金)이라는 이름을 사성받았다.

이정

이정(李靖)은 광산 이씨의 성을 사용한 첫번째 조상이다. 헌안왕의 7세손, 태봉대왕(궁예) 휘 선종의 6세손이며 이종금(李宗金)의 아들이다.

이선제

이선제(李先齊)는 권근(權近), 매헌(梅軒), 권우(權遇)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였고, 세종 1년(1419)에 춘추관(春秋館)의 기사관이 되어 태종실록 편찬에 참여했고, 정인지(鄭麟趾)와 고려사(考慮史) 개찬(改撰)을 관장했다.

이발

이발조선시대 중기의 문신으로 동인의 영수였다.

주요 세거지

  •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면 검승리
  • 전라남도 화순군 도곡면 죽청리
  •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도석리
  • 전라남도 나주시 왕곡면 옥곡리
  •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수양리
  • 전라남도 신안군
  • 경상북도 고령군 성산면 고탄리, 삼대리
  • 경상북도 성주군 선남면 취곡리
  • 대구광역시 달성군 논공읍 삼리리
  • 광주광역시 광산군 극락면 운암리
  • 인천광역시 부평구 부평1동

인접 본관

 

 

화순 광산이씨 승지공비

[ 和順光山李氏承旨公碑 ]

[네이버 지식백과]화순 광산이씨 승지공비 [和順光山李氏承旨公碑] (두산백과)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앵남리 도덕산에 있는 조선시대의 학자 이달선의 묘갈비(墓碣碑).

 

화순 광산이씨 승지공비

  • 지정종목

    문화재자료

  • 지정번호

    전남문화재자료 제162호

  • 지정일

    1988년 03월 16일

  • 소재지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읍 앵남리 162

  • 시대

    조선

  • 종류/분류

    비석

  • 크기

    높이 196㎝, 너비 59㎝

1988년 3월 16일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162호로 지정되었다. 이 비석은 조선시대인 1574년(선조 7)에 이달선의 둘째 아들 공충이 세웠다. 비의 크기는 높이 196cm, 너비 59cm이다.

비 머리에는 별다른 조각이 없으며 호패형(號牌形)으로 위가 넓고 아래가 좁은 형태이다. 비문은 25행 50자로 되어 있으며 조맹부체이고 비교적 자획이 선명하고 호활한 서체를 그대로 볼 수 있다. 비의 찬자(撰者)는 윤구이고 서자(書者)는 이산해이며, 율곡 이이(李珥)가 비문이 찬술되고 세워지게 된 사정을 기록하였다. 자경(字徑)은 전서 8cm, 비문 2cm, 음기 3.5cm이다. 현재 앵남역 부근에 있다.

이달선(1457∼1506)은 광산이씨 시조 이순백의 6대손으로 승정원 부승지를 지냈다. 고려사개수와 태종실록 편찬에 참여한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을 지낸 이선제의 손자이며 윤구의 딸을 부인으로 맞은 전라감사 이중호의 조부이다. 아버지인 이형원부제학이 되어 일본통신사를 지냈는데 이달선은 그의 둘째 아들이다. 23세에 아버지를 여읜 뒤 30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에 나갔다.

비문을 지은 윤구(1495∼1549)는 해남인으로 효정의 아들이며 호남 삼걸로도 지목되는 인물이다. 기묘사화로 해남에 유배되었으며 l538년 복관되었다. 이달선의 손자 이중호의 장인이기도 하며 이발은 그의 외손이다. 비문을 쓴 이산해(1539∼1609)는 서화와 산수에 능하고 문장에도 뛰어나 선조 때 팔대가의 한 사람으로 불렸다.

[네이버 지식백과] 화순 광산이씨 승지공비 [和順光山李氏承旨公碑]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