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톡톡튀는 문제해결 방안/꼭 필요한 생활의 지혜

육아일기 1년 쓴 할아버지 "응석받이 만든다는 편견 깨고 싶었다" (중앙일보 2013.06.01 00:30)

육아일기 1년 쓴 할아버지 "응석받이 만든다는 편견 깨고 싶었다"

조부모 육아 가구 250만 시대

 

맞벌이 가구 500만 시대. 보건복지부가 최근 발표한 아동보육 실태조사에 따르면 맞벌이 가정의 영·유아 두 명 중 한 명은 할머니·할아버지 손에 자란다. 지난해 한 대형 인터넷 서점에서 60대 독자가 가장 많이 구입한 베스트셀러 1, 2위도 조부모 육아 관련 서적이었다. 하지만 조부모 육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마냥 좋지만은 않다. ‘애 봐준 공은 없다더라’ ‘황혼 육아에 등골이 휜다’ ‘집에 손자가 오면 반갑고 갈 땐 더 반갑다’는 자조 섞인 말도 들린다. 아이는 부모 밑에서 자라는 게 가장 좋다는 건 만고불변의 진리. 하지만 조부모의 손길이 불가피하다면 3대가 모두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찾는 게 현명할 터다.

돌잔치 때 할아버지 육아일기 선물

손녀 김이소양을 돌보며 꼼꼼히 적어둔 일상을 300쪽에 달하는 육아일기로 펴낸 홍기자·이동권씨 부부(사진 위). 김현준·안신영씨 부부가 손주들과 나란히 앉아 포즈를 취했다(아래 왼쪽 사진). 김영옥씨가 7년간 기른 쌍둥이 손주의 어릴 적 사진을 들고 활짝 웃고 있다. [황정옥 기자]


 디자이너 이정혜(41)씨는 3년 전 딸 이소(4) 돌잔치 때 하객 답례품으로 외할아버지 이동권(72)씨가 쓴 육아일기를 내놨다. 정혜씨는 2009년 진통이 한 달 일찍 찾아오는 바람에 출산 준비도 제대로 못했고, 결국 부모님께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육아는 정혜씨와 외할머니 홍기자(68)씨가 나눠 맡았고, 외할아버지는 곁에서 이소의 일상을 꼼꼼히 적었다. 100일부터 돌까지의 기록은 300쪽이 넘는 책이 됐다. 『김이소 육아일기』엔 매일 몇 시에 일어나고, 젖은 몇 mL를 먹고, 낮잠은 얼마나 잤는지 등이 깨알같이 적혀 있다. 부록으론 그림까지 곁들인 ‘영아 응급처치법’이 첨부돼 있다.

 -어떻게 육아일기를 쓰게 됐나요.

 할아버지=집사람과 연애편지 주고받을 때나 글을 써봤을까. 그런데 손주가 자라는 걸 보니까 뭔가 남겨주고 싶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위아래가 단절된 채 자라는 요즘 아이들에게 핏줄의 정도 알려주고 싶었고. 할머니·할아버지 손에 자라면 응석받이가 된다, 말이 늦는다는 우려도 많은데 열심히 육아일기를 쓰면서 그런 걱정을 떨쳐낼 수 있었죠. 글씨도 엉망인데 나 몰래 답례품으로 내놔 얼마나 놀랐나 몰라.

 옆에 있던 정혜씨가 “육아일기를 읽고 감동한 남편이 ‘혼자 읽기 아깝다’며 몰래 책으로 엮었다”고 거들었다.

 -어린 손녀와 대중교통을 애용했다면서요.

 할머니=이소가 말문이 트이기 전부터 둘이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서울 곳곳을 놀러다녔어요. 신사동 가로수길에서 새우튀김을 먹고 압구정동에서 아이스크림 사먹는 게 단골 데이트 코스였죠. 빨간색 광역버스도 종종 탔는데, 만화 ‘꼬마버스 타요’에 나오는 ‘가니’ 탄다고 얼마나 좋아했는지 몰라요. 이젠 이소가 ‘할머니, 우리 가니 타고 새우튀김 먹으러 가자’고 조를 정도죠.

 조부모가 육아에 참여하면 입체적인 가족관계가 형성된다는 게 특징이다. 정혜씨는 “저는 엄마이면서 딸, 이소는 딸이면서 손녀, 엄마·아빠는 할머니·할아버지가 되는 관계”라고 정의했다. 육아를 통해 이런 21세기형 3대 관계가 형성되면서 가족의 새로운 면도 볼 수 있게 된다. 정혜씨는 “함께 아이를 키우다 보니 전엔 몰랐던 아빠의 색다른 모습을 보게 되더라”고 했다. 아빠와 딸이 최신 육아정보를 공유하는 등 대화 내용이 풍부해진다는 장점도 덤으로 얻는다. ‘이소’라는 공통의 관심사로 대화를 이어가다 보니 밋밋했던 가족관계가 다채로워지고 화목해진다는 얘기다.

 -아이에겐 어떤 영향이 있던가요.

 엄마=화목한 가정 분위기에서 자라는 데다 가족 내에서 여러 관계를 경험할 수 있으니 좋지요. 사랑을 두루 받으니까 성격도 밝고 원만해지는 것 같고요. 다만 뭐든 ‘오냐, 오냐’ 하시니까 아이 버릇이 나빠질까 다소 고민도 됩니다(웃음).”

고생하는 장인·장모 위해주는 사위

 

초등학교 교사인 김수홍(37·여)씨는 친정 부모님과 5분 거리에 살며 육아 도움을 받고 있다. 수홍씨는 딸 나영(10)양과 아들 민석(6)군을 뒀다. 김현준(65)씨와 안신영(65)씨 내외는 손녀의 학교 생활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 아이는 조부모를 친구처럼 여긴다. 집에 오면 그날의 일상을 종알종알 떠든다. 비밀과 가슴에 품은 꿈도 털어놓는다.

 -가끔 회초리를 드나요.

 할아버지=매는 드는 순간 감정이 실려요. 교직생활을 해보니 나는 잊었는데 제자는 수십 년 전 회초리 맞았던 걸 기억하더라고요.

 엄마=제가 어릴 땐 아빠가 손바닥과 종아리를 회초리로 때리셨는데 지금은 절대 때리지 말라고 하세요. 꽃으로도 때리지 말래요(웃음). 저는 사실 매가 필요할 때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힘이 달리지는 않나요.

 할머니=솔직히 체력적으로 힘들 때도 있어요. 그래도 아이들 자라는 것 보는 보람이 크죠. 사위도 우리 고생한다고 항상 위해 주니 고맙고요.

 사위와 장인·장모 관계가 돈독해질 수 있다는 점도 조부모 육아의 장점 중 하나다. 수홍씨는 “남편도 장인·장모에게 늘 잘하려고 노력하고 서로 배려하려고 애쓰니 집안 분위기가 밝아졌다. 아이의 정서적 안정에도 큰 도움이 된다”며 반겼다. “직장생활에 힘든 저와 달리 할머니·할아버지는 아이 얘기를 끝까지 들어주고 항상 ‘네가 최고야’라고 해주죠. 아이들의 믿는 구석이랄까요. 나영이의 활달한 성격도 할머니·할아버지가 하도 기를 살려줘서 그런 것 같아요(웃음). 부모 참관 수업 때 혼자 ‘저요, 저요’ 손들고 네 번씩 발표해 제가 민망할 정도였죠.”

 전북 전주시에 사는 김영옥(78)씨는 둘째딸의 쌍둥이 남매인 윤소명(19)양과 소민군이 태어난 직후 데려와 일곱 살 때까지 길렀다. 지금도 손주들과 e메일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 중앙부처 공무원인 엄마와 박사 과정을 밟고 있던 아빠를 대신해 아이들의 엄마이자 아빠가 돼줬다. 덕분에 남매의 엄마는 지금도 직장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남매는 올해 서울 명문 사립대에 나란히 합격했다. 할머니는 남매를 기르며 적어둔 메모를 엮어 『별난 할머니와 별난 쌍둥이』라는 책도 냈다.

 남매와의 전화 인터뷰를 했더니 “할머니는 내가 뭘 하든 믿어주고, 사랑해 주고, 뭐든 해낼 거라고 말씀해 주시는데 그게 큰 힘이 됐다”고 입을 모았다. 김씨는 “아이는 먹이기만 하면 되는 짐승이 아니에요. 어린 아이라도 사랑하고 존중한다는 믿음을 심어줘야죠. 나무라더라도 감정이 상하지 않게 이해를 시키려고 노력했어요”라고 말했다.

 -남매가 장난치다 사고도 많이 냈다던데요.

 “장난쳐도 매 한 번 안 들었어요. 애들이 로봇도 아니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애가 아니죠. 위험하지만 않다면 호기심 닿는 거라면 마음껏 뛰놀고 장난치도록 허락해 줬어요. 어릴 때도 안 되는 일, 위험한 일은 왜 안 되는 것인지 이치를 알려주려 했고요.”

 -최근 조부모 육아가 늘고 있는데.

 “아이에겐 엄마·아빠가 최고죠. ‘한 다리가 천리’란 옛말도 있잖아요. 시대가 그러면 어쩔 수 없는 것인데, 할머니가 육아에 참여하려면 교육을 잘 받아야 해요. 저도 유치원에서 하는 부모 교육에 한 번도 안 빠지고 참석했어요. 자기 방식이 맞다고 고집만 하면 안 된다고 봐요. 아이를 정말 위한다면 새로운 것도 배워야죠.”

아이 자라면서 갈등 커질 수도

 조부모 육아에 밝은 면만 있는 건 아니다. 은행원 송윤주(33·서울 반포동)씨는 6살·4살 남매를 시부모의 도움을 받아 길러 왔다. 송씨 부부는 분당에 마련했던 신혼집을 처분하고 시부모님 댁 근처에 전셋집을 얻어 이사했다. 하지만 송씨는 지난 연말 입주 베이비시터를 고용했다. 시부모와의 육아 갈등이 해가 갈수록 심해져서다.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젖병 소독이나 분유 타는 법, 이유식 먹이는 습관 등 사소한 문제를 놓고 의견이 갈렸다. 송씨는 소아과 의사나 최신 육아서적이 권하는 육아법을 따르고 싶어 했지만 시어머니는 그만의 방식을 고집했다. 송씨가 “어머니, 아직 이유식에 소금 간하시면 안 돼요”라고 하면 시어머니는 “적당히 간이 돼야 넘어가지. 내가 셋을 이렇게 길렀지만 누구 하나 아픈 아이 없었다”고 맞서는 식이었다.

 아이들이 자랄수록 갈등도 커졌다. 급기야 아이들 보는 앞에서 송씨와 시어머니가 언성을 높여 말다툼하는 일이 잦아졌다. “아이를 돌봐주시는 데 대한 고마움도 있지만 얼굴만 마주치면 싸우니 집에 들어가는 게 싫어질 정도였어요. 차라리 남이 낫겠다 싶어 베이비시터를 구하게 됐죠.”

  이소네나 나영이네는 갈등을 겪지 않았을까. 이소 할아버지는 갈등의 순간을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못 먹고 자란 세대라 애가 울면 우유를 더 먹이자고 했죠. 그런데 어미는 의사 말을 듣고 와 ‘수유량과 간격을 지켜야 한다, 운다고 다 배고픈 게 아니다’고 우겨 애가 탔어요. 화가 나서 그 의사한테 몇 번 따지러 뛰어가려고 했을 정도였죠.”

 딸 정혜씨는 육아 갈등 해소법으로 ‘대화’를 첫손에 꼽았다. “애 울음소리 하나를 놓고도 부모님과 제가 ‘뭘 원하는 거다’며 저마다의 해석을 내놓아 늘 의견이 엇갈렸죠. 아이를 과잉 보호하는 게 아닌가 싶어 다툰 적도 많고요. 하지만 꾸준히 대화를 나누고 중요한 부분은 부모님과 의논해 결정하다 보니 부딪칠 일이 점점 줄더라고요.”

 서울대 곽금주(심리학) 교수는 “나이 든 조부모가 종일 육아를 담당하는 건 육체적·정신적으로 적잖은 스트레스”라며 “조부모가 있더라도 보육기관 이용도 병행하며 부담을 덜 수 있도록 배려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곽 교수는 “조부모는 이미 육아를 경험한 만큼 부모보다 조바심내지 않고 참을성 있게 대하며 아이가 잘될 거란 믿음을 갖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조부모의 마음가짐이 아이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