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해제 MB5년]<3>정두언 실종사건(上)
“국세청에 내 자료 왜 달라고 해?” MB는 鄭을 다그쳤다
대선이 끝나고 이듬해인 2008년 1월 1일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 보좌역인 정두언 의원이 한복을 입고 서울 종로구 삼청동 대통령직인수위원회 구내식당에서 떡국을 받아 가고 있다. 그때만 해도 누구나 정두언이 MB 정권에서 승승장구할 것으로 내다봤다. 본인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걱정스러운 눈빛이었다.
대선 이듬해인 2008년 1월 초 어느 날, 이명박 대통령(MB)은 서울 종로구 통의동 대통령당선인 집무실로 정두언 한나라당 의원을 불렀다.
“얼마 전 인사동에 밥 먹으러 갔는데 사람들이 자기네들끼리 ‘인수위는 다 정두언 사람이래’라고 하더라….”
정두언은 MB에게 별 해명은 하지 않았다. ‘보는 눈이 많으니 몸가짐을 더 조심하라’는 뜻이겠거니 했다. 당시 대통령 당선인 보좌역으로 새 정부 인선 작업을 총괄하던 정두언은 명실공히 최고 실세였다. 서울시장 시절부터 함께했고, 선거 기획을 주도한 정두언에 대한 MB의 믿음은 절대적이었다. MB는 대선 직후 그런 정두언을 불러 “인수위 인선안을 짜라”고 지시한다.
정두언은 박형준 한나라당 의원, 곽승준 고려대 교수, 김원용 이화여대 교수, 그리고 박영준 MB선대위 네트워크팀장 등으로 인수위 인선팀을 꾸렸다. 훗날 지식경제부 2차관 등을 지내며 ‘왕 차관’으로 불린 박영준은 이때만 해도 정두언 팀의 ‘실무자’에 불과했다. 정두언은 밤낮으로 인선 작업을 한 끝에 박영준을 데리고 2007년 12월 말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호텔 내 미팅룸에서 MB에게 인수위원 명단 24명을 보고했다. MB는 극비 보고를 받을 때마다 이 미팅룸을 자주 이용했다. 24명 중 2명을 제외하곤 정두언 안이 그대로 통과됐다. 자연히 인수위 전문위원, 자문위원도 정두언의 손을 거쳤다.
인수위가 발족한 직후인 2008년 1월 첫째 주부터 여권에선 “인수위가 정두언 판이다”라는 말이 돌기 시작했다. “정두언이 고교(경기고)-대학(서울대) 동문들을 대거 인수위에 심었다”며 특정인의 이름도 거론됐다. 인수위 전문위원으로 들어갔던 조원동 당시 재정경제부 차관보(현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가 대표적이었다. 두 사람은 1975년 경기고를 졸업한 동기동창. 정두언이 “원동아”라고 부르는 친구였다. MB는 이런 말이 자신의 귀에도 들리자 정두언을 불러 시중의 이야기를 들려준 것이다. 정두언은 주변에 “인재를 쓰려다 보니 경기고, 서울대 출신이 많은 거지 나랑 친한 사람을 쓴 건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실제로 영국 옥스퍼드대 경제학 박사인 조원동은 변양호 전 재경부 금융정보분석원장 등과 함께 관가에서 ‘천재’로 통하는 사람이었다.
정두언은 MB에게 ‘한 소리’를 듣고 더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청와대 인선과 새 정부 조각 작업을 하던 정두언은 함께 작업하던 팀원들을 불렀다.
“우리끼리 하는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는 것 같다. 인사위원회 비슷한 구조를 만들어야겠다.”
다들 수긍하자 정두언은 이를 MB에게 보고했고 인선팀은 MB를 위원장 격으로 하는 위원회 형식으로 재편된다. 전문가 그룹에서 몇 명이 추가로 합류했다. 박영준도 위원회의 정식 멤버가 됐다. 정두언의 결정이 한몫했다.
역시 인수위 발족 직후였다. 정두언은 곽승준과 서울 마포구 서울가든호텔에서 점심을 하려다 박영준의 전화를 받았다. 박영준도 식사 자리에 합석했다.
박영준=“형님, 대선에서 제가 이끌던 선진국민연대 사람들 고생 많았는데 인선에서 좀 고려해 주시죠.”
정두언=“음, 그러면 그냥 네가 와서 직접 (인선) 해.”
이렇게 박영준까지 합류한 위원회에선 인선을 놓고 제법 난상토론도 벌어졌다. MB 정부에서 행정안전부 장관, 국가정보원장을 지낸 원세훈 등 주요 인선 후보군에 대한 거침없는 토론도 이뤄졌다. 어느 날 MB가 “원세훈 그 사람 쓸 만하지 않나”고 물었더니 한 위원은 “그 양반 밥도 혼자 먹어서 주변에서 ‘원 따로’라고 부르던데요”라며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다.
이렇게 인선 작업이 한창이던 1월 중순, 정두언에게 예기치 않은 사건이 발생한다.
대선 당시 국세청이 ‘도곡동 땅 의혹’ 등 MB 관련 자료를 수집했다고 본 정두언은 선거가 끝난 직후부터 한상률 당시 국세청장에게 문제의 자료를 넘겨 달라고 요청했다. 국세청이 그 자료를 갖고 나중에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상률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자료를 넘기지 않았다. 하루는 남산의 서울 그랜드힐튼호텔에서 한 청장을 직접 만나 채근하기도 했지만 결국 자료는 받지 못했다. 정두언이 한상률에게 전화를 걸어 목소리를 높였다.
“그 자료 좀 달라는데 무슨 이유가 그리 많습니까?”
정두언은 통화 후 전화기를 집어던지듯 세게 내려놨다. 튕겨져 나간 수화기가 줄에 매달린 채 사무실 바닥에 닿을 정도였다. 그러고 얼마 뒤. MB가 정두언을 불렀다.
MB=“국세청에 내 관련 자료를 달라고 했다면서? 왜 시키지도 않은 쓸데없는 일을 하고 다녀!”
정두언=“….”
얼마 전 ‘인사동 민심’을 전할 때와는 달랐다. 노기(怒氣) 서린 목소리였다. 대선 기간 내내 도곡동 땅 의혹에 시달렸던 MB였다. 자신의 의도와 달리 뭔가 단단히 오해를 한 듯한 MB 앞에서 정두언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정두언은 한상률과의 통화 사실이 MB에게 전해진 과정을 은밀히 알아봤다. 정두언은 결국 한상률이 어떤 경로로든 MB에게 보고했을 거라고 여겼다. 정두언 주변에선 서서히 세를 키우던 박영준이 이 과정에서 모종의 역할을 한 것 같다는 얘기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 후에도 MB에게 한두 차례 더 “조심하라”는 얘기를 들은 정두언은 결국 1월 중순경 MB에게서 청천벽력 같은 통보를 받는다.
“계속 인사에 관여하다간 아무래도 (네가) 다칠 것 같다. 아끼는 마음에서 하는 말인데, 앞으로 인선에서 손을 떼라.”
2002년 7월 서울시 정무부시장으로 인연을 맺은 후 MB 대통령 만들기에 다걸기(올인)했던 정두언은 ‘멘붕’에 빠졌다. MB 주변에선 대선 직후 시작해 이듬해 1월 중순 소낙비에 벚꽃 지듯 끝나 버린 정두언의 이 전성기를 ‘보름 천하’로 부르기도 한다.
정두언에게 ‘인선 작업 중단’을 통보한 MB는 대신 자신의 스피치라이터였던 류우익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에게 인사위원회를 새로 꾸리라고 지시한다. 류우익은 대선 직후 정두언이 짠 인수위원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그 후 “내 소임은 끝났다”며 세계지리학회 참석차 홀연히 프랑스 파리로 떠났다가 숙부의 부고를 듣고 1월 초 입국해 있었다. 정두언에게서 인선 자료를 건네받은 류우익은 이윤호 당시 전국경제인연합회 국제경영원장, 김병국 고려대 교수, 서대원 전 국가정보원 제1차장, 주호영 당선인대변인, 행정학 교수 A 씨(현 고위 공직자), 그리고 박영준으로 구성된 2차 인사위를 꾸렸다. 정두언이 이끌었던 인사위 멤버 중 박영준만 살아남은 것이다. 초기부터 인선에 참여했던 박영준은 삽시간에 ‘류우익 인사위’의 핵심으로 부상했다.
정두언은 피가 거꾸로 솟았다. 그리고 ‘한상률 사건’이 MB에게 알려지게 된 배후로 박영준을 본격적으로 의심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박영준을 보좌관으로 오래 데리고 있던 이상득 전 국회부의장(SD)이 자신을 견제하는 것으로도 생각했다. 당시 ‘정두언 인사위’에 있던 B 씨의 주장. “박영준이 ‘정두언과 한상률 사건’을 MB에게 알렸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하지만 정두언이 나이브(순진)했던 것은 분명하다. 박영준이 끝까지 자기를 ‘형님’으로 모실 걸로 착각했던 것 아닌가.”
MB 정부의 조각을 주도하던 정두언은 하루아침에 인사위 회의에도 참석하지 못하는 처지로 전락했다. 하지만 ‘백수’로 그냥 호락호락 물러날 정두언은 아니었다. (다음 주 ‘정두언 실종사건(下)’편에 계속됩니다.)
[비밀해제 MB5년]<4>정두언 실종사건(下)
(동아일보 2013-04-20 16:05:37)
MB, 鄭 불러 “할말 있으면 지금 해”… 그렇게 둘은 끝났다
![](http://dimg.donga.com/wps/NEWS/IMAGE/2013/04/20/54568176.1.jpg)
“결국은 청와대다….”
이명박(MB) 정부 인선 작업에서 손을 떼게 된 정두언 당선인보좌역은 ‘멘붕(멘털 붕괴)’에 빠진 상태에서도 끊임없이 자문했다. 인사위원회를 접수한 류우익과 이를 실무적으로 주도하는 박영준을 막지 못하면 썰물 빠지듯 권력에서 멀어지는 건 당연지사였다. 정두언은 류우익으로부터 인사위 ‘실무위원’ 제안을 받았지만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 대신 정두언은 초대 대통령실장 자리에 주목했다. 임기 초에는 어느 때보다 권력이 청와대로 쏠린다. 마침 초대 실장에 윤진식이 유력하다는 말이 돌았다. 노무현 정부에서 산업자원부 장관을 지냈고 인수위 산하 국가경쟁력강화특별위 부위원장을 맡고 있던 그 윤진식이었다. 정두언은 자신과 큰 인연은 없었지만 류우익과 박영준을 견제하기엔 제격이라고 봤다. 명분도 그럴듯했다. ‘경제 대통령’을 표방한 MB 밑에 경제관료 출신 대통령실장 조합이었다. 이때까지도 정두언이 인사 작업 전반을 류우익, 박영준에게 넘긴 사실은 극비 중의 극비였다. 정두언까지 가세한 ‘윤진식 유력설’은 여의도를 중심으로 더욱 확산됐다. 일부 언론은 2008년 1월 16일자에 이 소식을 취재해 윤진식 유력설을 보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비슷한 시간, ‘류우익 인사위’에선 전혀 다른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1월 중하순 어느 날. 인사위 멤버들이 서울 종로구 ‘경희궁의 아침’ 오피스텔 내 사무실에 속속 모여들기 시작했다. 인수위 멤버들이 베이스캠프로 활용하던 곳이다. 이 자리에선 ‘초대 대통령실장은 류우익’이라는 MB의 메시지가 전달됐다. 참석했던 A 씨의 증언. “류우익이 인사위를 꾸린 후로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다. 초대 대통령실장이 청와대 인선과 조각을 주도하지 않으면 누가 하겠나?”
이 소식은 오래지 않아 정두언 귀에도 들어갔다. 깊은 허탈감이 몰려왔다. 정두언은 1월 25일 오후 오랜만에 삼청동 인수위 기자실을 찾았다. 여전히 ‘최고 인사 실세’로 통했던 정두언을 수십 명의 기자가 삽시간에 에워쌌다. 그는 씁쓸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정두언=“그런데 인사는 어떻게 되는 거야?”
기자들=“에이, 인사를 하는 분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정두언=“기자들이 나에게 전화를 많이 하는데, 사실 나는 (인사와 관련해) 아는 게 없다는 것을 고백하러 왔어.”
대부분의 기자는 정두언이 특유의 너스레를 떠는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당시 정두언은 진심이었던 것이다.
MB는 2월 1일 류우익을 초대 대통령실장으로 공식 임명한다. 류우익은 임명 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은연중에 대통령실장 내정자로 일해 왔음을 내비쳤다. “그냥 늘 대통령에게 조언해드리고 상의했다. 청와대가 어떤 곳이고 대통령 직무가 어떤 것인지 등은 따로 설명 안 해도 알 만큼 알게 됐다.”(동아일보 2008년 2월 2일자 A2면)
‘류우익 대통령실장’이 막상 현실화되자 정두언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대로 가다간 류우익, 박영준, 더 나아가 이상득(SD) 전 국회부의장 판이 되는 건 시간 문제였다. 주변에선 “어떻게 만든 정권인데 이대로 물 먹고 있을 거냐”는 하소연이 이어졌다.
정두언은 대통령수석비서관 인선에 승부를 걸기로 했다. 대선 직후 검증을 시작해 나름 오래 준비한 카드가 있었다. 정두언과 주변 그룹이 만든 대통령수석비서관 인선안의 핵심은 △정무수석 김인규 MB선대위 방송전략팀장(훗날 KBS 사장) △국정기획수석 곽승준 고려대 교수 △경제수석 소장경제학자 B 씨(MB 선대위에서 활동) △외교안보수석 현인택 고려대 교수 △사회정책수석 박재완 한나라당 의원 등이었다. 정두언은 MB와 인사위에도 이 안을 전달했다. 당시까지 정두언은 정치권에 여전히 ‘인사 실세’로 알려져 있었다. 여론을 등에 업은 영향력은 기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2월 초 어느 날 인사위 회의가 소집됐다. 류우익은 정두언이 만든 대통령수석비서관 인선안 중 특정인을 주목해서 들여다봤다. 현인택이었다. 참석자 중 일부는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한나라당 대선 경선이 한창이던 2007년 여름 어느 날. 현인택은 김태효 성균관대 교수(전 대통령대외전략기획관) 등 외교안보자문교수단과 함께 MB에게 현안 브리핑을 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MB 옆에 류우익이 앉아 있었다. MB의 스피치라이터였던 류우익은 저명한 지리학자지만 외교안보 전문가는 아니었다. 그런 그가 외교안보 브리핑을 듣겠다는 것이었다.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현인택=“브리핑을 하려고 하니 자리를 비켜주셨으면 합니다.”
류우익=“연설문을 쓰려면 여러 정책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결국 둘은 MB를 사이에 두고 자존심을 건 논쟁을 벌였다. 브리핑 방식은 류우익 뜻대로 정리됐지만 둘 간의 감정은 그 후로도 정리되지 않았다. 그런 상태에서 류우익이 ‘현인택 외교안보수석’ 안을 본 것이다.
결국 몇 차례 회의를 거쳐 MB가 확정한 대통령수석비서관 인선은 △정무수석 박재완 △국정기획수석 곽승준 △경제수석 김중수 한림대 총장 △외교안보수석 김병국 고려대 교수 △민정수석 이종찬 전 서울고검장 △사회정책수석 박미석 숙명여대 교수 △교육과학문화수석 이주호 의원 등이었다. 현인택이 ‘류우익 인사위’ 멤버인 김병국으로 교체됐고 정두언이 민 B 씨는 현재 한국은행 총재인 김중수로 바뀌었다. 김인규는 KBS 사장을 고집해 사회정책수석으로 유력하던 박재완이 자리를 옮겼다.
정두언은 2월 10일 대통령수석비서관 인선 발표를 접하고 또 한 번 충격을 받았다는 후문이다. 이후 인선은 더욱 류우익, 박영준의 페이스대로 진행됐다. 특히 청와대 비서관, 행정관, 정부 차관급 인선에선 정두언이 손 쓸 공간이 더더욱 줄어들었다. 한번은 청와대 행정관 인선을 놓고 자신의 뜻이 관철되지 않자 주변에 대놓고 박영준을 비난하기도 했다. 정두언은 MB가 취임하던 2008년 2월 25일 자신의 홈페이지에 ‘뒤늦게 대선을 마무리하며’라는 글을 올려 류우익, 박영준, 그리고 MB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그대로 드러냈다.
“대선 뒤처리 중 제일 크고 힘든 일이 (선거에서) ‘고생한 사람들’에 대한 처우 문제다. 한마디로 말하면 고통 그 자체다. 오죽하면 낙선한 측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까. (…중략…) 지금 진행되고 있는 정부 인선이나 한나라당 공천은 총선에서 압승한다는 전제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 같다. 참으로 아슬아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MB와 정두언이 이렇게까지 틀어지게 된 배경을 놓고선 아직도 여러 해석이 있다. 정두언이 MB 의혹 관련 자료를 한상률 국세청장에게 요구한 ‘또 다른 이유’에 대해 MB가 의문을 갖게 됐고, 이 과정에서 박영준과 SD가 모종의 역할을 했다는 말도 있다. 정두언은 MB에게 “국세청이 자료를 갖고 장난칠 수 있으니 관련자를 문책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MB는 오히려 정두언이 ‘장난’칠 수 있다고 인식했다는 주장이다. MB와 정두언이 서로를 평생의 ‘정치적 동지’로는 생각하지 않았다는 해석도 있다.
취임 직후인 2월 말 어느 날. MB는 정두언과 초기 인선팀 몇 명을 청와대 내 관저로 불렀다. 점심을 함께하며 그동안의 수고를 격려하기 위한 자리였다.
MB=“지금 하고 싶은 말 있으면 다 해봐, 들어줄 테니.”
놀란 정두언은 이 자리에서 그동안의 소회를 밝혔다. 인사 관련 부탁도 나왔고 MB는 대부분 수용했다. 정두언은 이후 한두 차례 더 만난 뒤 MB를 따로 만나지는 못했다. 이 자리를 지켜봤던 C 씨는 “지금 생각해보니 서로 정치적으로 ‘중간 결산’하는 분위기였다”고 기억했다.
MB 정부의 인선을 넘어 총선 공천까지 짜려 했던 정두언은 이렇게 빠르게 MB로부터 멀어졌다. 그리고 이는 정두언-이재오-이상득(박영준)으로 나뉘어 있던 권력지형의 균형이 무너지고 이상득으로 힘이 쏠릴 것을 알리는 시그널이기도 했다. 역사엔 가정이 없다지만 정두언이 정치적으로 ‘실종’되지 않았다면 MB 정부의 5년은 어떠했을까?
[비밀해제 MB5년]<5>박희태가 사는 法
(동아일보 2013-04-27 15:22:54)
“날 치겠다고?” 안강민 집 앞에서 2시간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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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뭐라고?”
18대 총선(4월 9일)을 40여 일 앞둔 2008년 2월 하순 어느 날, 지역구인 경남 남해-하동에서 선거운동을 하고 있던 박희태 의원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평소 친분이 있던 당 공천심사위원 L이 전화를 걸어 공심위 분위기를 귀띔해 준 것. 그는 ‘설마 내가?’라면서도 불길한 예감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세상이 알다시피 그는 이명박 대통령(MB)이 박근혜 후보와 건곤일척의 대선후보 경선을 치를 때 캠프의 선거대책위원장이었다. MB, 이상득, 최시중, 김덕룡, 이재오와 함께 이른바 ‘6인 회의’의 멤버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18대 총선에서 6선 고지에 오르면 전반기 국회의장은 그의 몫이었다. 그런데 정작 당의 공천 기류에 이상신호가 감지된 것이다.
그는 믿을 수가 없었다. 다음 날 무작정 서울로 향했다. 찾아간 곳은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공천 칼자루’를 쥐고 있던 안강민 공천심사위원장의 집이었다.
5선의 박희태는 무려 2시간가량 밖에서 기다렸다. 사법시험 기준으로 안강민은 11기나 아래였다. 새까만 후배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자존심을 챙길 겨를이 없었다. 아파트 입구에서 박희태를 만난 안강민은 당황했다. 박희태가 설마 집까지 찾아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게다가 그 시점엔 안강민의 머릿속에도 ‘박희태 공천 탈락’ 카드는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박희태에게 공심위 내부 상황을 전한 L의 기억은 다르다. “안강민은 내가 있는 자리에서 ‘박희태는 나이(70세)가 너무 많지 않으냐’고 얘기했어요. 그래서 내가 전화로 얘기해줬습니다.”
어쨌건 안강민을 만난 박희태는 다시 지역구로 내려갔지만 공심위 안팎에선 심상치 않은 기류가 계속 이어졌다. 우선 민주당 박재승 공심위원장이 ‘비리 전력자 전원 탈락’ 방침을 강하게 밀어붙이면서 상대적으로 한나라당의 공천 개혁 부진을 지적하는 여론이 높아졌다. 총선 판도까지 흔들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안강민은 고심했다. 그는 잠시 ‘판관’ 역할을 맡은 객(客)이 아니었다. 대선후보 경선 때 후보검증위원장까지 맡았던 그였다. 이명박, 박근혜 후보가 너무 ‘피 튀기는’ 공방을 벌이자 두 후보를 각각 만나 자제를 당부하기도 했다. 누가 됐건 10년 좌파정권 종식을 위해서는 본선 경쟁력을 아껴놔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총선도 마찬가지였다. 중원을 장악해야 이길 수 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텃밭인 영남에서 공천바람을 일으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를테면 성동격서(聲東擊西)의 국면전환 카드인 셈이다. 영남은 어차피 누굴 내보내도 상관없는 곳 아닌가. 그 대신 소리를 내려면 제대로, 크게 내야 한다고 내심 마음을 다졌다.
안강민은 주저하지 않았다. 먼저 MB를 만났다. MB와 독대를 마친 안강민의 표정은 밝았다. 중간에서 연락책을 담당한 여권 핵심 인사의 전언. “아침 10시 공심위 회의 전에 당사로 왔는데 얼굴이 환했어요. MB가 뭐라고 얘기하더냐고 물으니 ‘알아서 하세요’라고 들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본격적인 영남권 심사를 사흘 앞둔 3월 7일 박희태와 공천 경합을 벌이던 하영제 남해군수가 산림청장에 전격 임명됐다. 내부 여론조사에서는 하영제가 앞서고 있었다. 당시 친박(親朴)을 대변하던 강창희 공심위원(현 국회의장)은 뒷날 “나를 포함한 일부 위원은 뒤통수를 얻어맞았다며 흥분했다”고 털어놨다. 안강민도 뭔가 ‘야합’ 비슷한 느낌을 받은 듯하다.
박희태는 돌아가는 상황에 내심 불안했지만 영남 공천 전날인 12일 밤까지도 공천을 굳게 믿었다. 강재섭 대표와 이방호 사무총장, 공심위 간사인 정종복 사무부총장도 “이제 다 정리가 됐습니다. 축하합니다”라며 잇달아 전화를 걸어왔다. ‘당대표까지도 오케이하고 대통령에게도 보고가 됐다고 하니 더이상 알아볼 필요가 없겠지.’
하지만 안도의 한숨도 잠깐. 13일 지역구인 남해 바닷가 횟집에서 당원들과 느긋하게 저녁을 먹고 있던 그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 날아든다. 공심위가 자신을 포함해 친박계 좌장 격인 3선의 김무성 최고위원까지 현역 의원 25명을 탈락시켰다는 것이다. 언론도 ‘13일의 대학살’이라고 급보를 띄웠다.
안강민은 그날 오전 7시 반부터 친이(親李), 친박의 대리인인 이방호, 강창희와 비밀 회동을 가졌다. 영남권 공천 탈락자 명단을 최종 확인하는 자리였다. 대상자는 친이계 12명, 친박계 11명이었다.
여권 핵심 인사의 전언. “리스트에 순번까지 있더라고요. 친이계 리스트의 1순위는 박희태, 친박계는 김무성이었죠.”
안강민은 “(이 명단은) 일점일획도 고칠 수 없다”고 못을 박았다. 안강민은 훗날 사석에서 “박희태 의원을 날린 게 가장 가슴이 아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박희태는 다시 서둘러 상경했다. 하지만 이미 상황은 돌이킬 수 없었다. 그 사이 청와대에서 호출이 왔다. MB의 호출이었다.
MB=“비례대표는 어떻습니까.”
박희태=“이제 와서 어쩌겠습니까.”
MB의 제안은 솔깃했다. 지역구 공천은 물 건너갔지만 비례대표를 알아서 챙겨준다고 하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독대를 마치고 나오자마자 박재완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이 작정한 듯 기다리고 있었다.
박재완=“무슨 얘기를 나누셨어요?”
박희태=“비례대표를 하라고 말씀하데요.”
박재완=“아휴, 쉽지는 않을 것 같은데요. 공천의 일관성이 없게 되는데….”
박희태=“내 형편이 어려워졌는데, 지금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해요.”
잠시 설전을 벌인 그는 기분이 나빴지만 일단 MB를 믿기로 했다. 하지만 감감무소식이었다. MB에게 전화를 걸어서 어찌 됐느냐고 물어볼 수도 없고, 속은 타들어 갔다. 6인회 멤버인 최시중을 만나 하소연했다. 최시중은 즉석에서 MB에게 전화를 걸어 “박희태가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습니까”라며 강하게 얘기했다. 그러나 돌아온 답변은 실망스러웠다. MB는 최시중에게 전후 사정을 설명한 뒤 공천이 힘들다는 얘기만 했다.
비례대표 공천 발표를 나흘 앞둔 3월 20일 아침, 박희태는 이방호의 서울 자택을 찾아갔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집으로 올라가지도 않고 밖에서 기다렸다.
이방호=“(어쩔 줄 몰라 하며) 부의장님, 전화라도 하시면 제가 (집으로) 올라오시라고 할 텐데 왜 여기서….”
박희태=“내 차에 타. 할 말이 있어서….”
그는 서울 여의도 당사로 가는 동안 하소연했다. “사실 마음이 너무 아프고 죄송하더라. 하지만 비례대표는 안 된다. 공천 탈락한 사람에게 어떻게 비례를 주나. 청와대에서도 이미 결론이 난 사안이었다. 배려를 하더라도 다른 형식으로 해야지….” 이방호가 당시 동아일보 기자에게 전한 얘기다.
공천이 마무리된 3월 하순 어느 날, MB는 박희태를 다시 청와대로 불렀다.
MB=“선거가 매우 어려운데 총선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아줬으면 합니다.”
박희태=“공천에서 떨어진 사람이 선대위원장을 하면 사람들이 웃을 겁니다.”
박희태는 내심 발끈하는 마음을 이같이 완곡하게 표현했지만 차마 대통령의 부탁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그 대신 “혼자 하기는 부끄럽다”며 같이 공천에서 탈락한 김덕룡 의원을 공동선대위원장으로 천거했다.
안강민도 류우익 대통령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박희태, 김덕룡 총선 선대위원장’안(案)을 제안했다. 류우익과는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지만 ‘박희태 학살’은 그만큼 부담이 컸다.
3월 30일 박희태는 결국 김덕룡과 공동선대위원장을 맡는다. 하지만 상처는 깊었다. 그의 20년 정치인생에 찾아온 두 번째 기회였는데 뜻하지 않은 복병을 다시 만난 것이다.
첫 번째, 그러니까 꼭 15년 전 김영삼(YS) 정권이 출범할 때도 그랬다. 그는 재선의 당 대변인으로 공신 반열에 올랐다. ‘명대변인’으로 이름을 날렸다. YS 정권의 초대 법무부 장관은 당연히 그의 몫이었다. 검사 출신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법무장관으로 입각하길 꿈꾼다. 하지만 그의 재임 기간은 불과 9일. 인사검증 파동에 휘말려 낙마하고 말았다.
JP(김종필)는 정치를 속이 텅 빈 ‘허업(虛業)’이라고 했다. 예능 프로그램을 흉내 내 “박희태에게 정치란?”이라고 물으면 그는 뭐라고 대답할까. 그래도 2009년 10월 경남 양산 재선거를 통해 6선 고지를 달성한 뒤 결국은 국회의장 자리에 올랐으니 ‘허업’은 아니라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또다시 전당대회 돈봉투 사건이라는 복병을 만나 국회의장에서 중도하차했으니 역시나 “정치는 허업”이라고 할까.
영남 물갈이는 그렇게 끝났지만 2008년 한나라당의 공천파동은 또 다른 고비를 맞는다. 이상득 국회부의장의 불출마를 요구하는 ‘55인의 서명’은 공천파동의 제2라운드이자 당내 권력 투쟁의 서막이었다.
MB “형님께 공천 어렵다 말씀 드려보라” 말은 했지만…
(동아일보 2013-05-04 11:17:36)
[비밀해제 MB5년]<6> ‘형님 前上書’ 배달 미스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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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생각이 있으니 기다려 봐….”
2008년 2월 말 청와대 내 대통령 관저. 이명박 대통령(MB)은 함께 밥을 먹던 정두언 한나라당 의원에게 넌지시 이렇게 말했다. 정두언은 4월 18대 총선에서 이상득 전 국회부의장(SD)에게 공천을 주면 압승이 어려워질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직전 대선에서 사상 최대인 531만7708표 차로 승리한 직후 치르는 총선인 만큼 여권에선 내심 개헌 선(200석)을 기대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적어도 180석은 건지지 않겠느냐는 말이 공공연히 나올 정도였다. 아무튼 대통령이 그렇게 얘기하자 정두언은 MB가 어떤 식으로든 친형인 SD에게 불출마를 권유할 것으로 보고 더는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비슷한 시기 청와대 내 비서동. 류우익 대통령실장, 박재완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 김두우 정무2비서관 등도 SD 공천 문제를 논의하고 있었다.
박재완=“부의장님에게 공천을 주면 총선 판세가 어렵게 됩니다. 대통령님께 어떤 식으로든 말씀드려야 합니다.”
류우익=“하, 형님 일인데 이걸 어떻게 말씀드리나…. 박 수석이 정무수석이니까 한번 말씀드려 보세요.”
박재완은 그날 밤 청와대 본관으로 MB를 찾아갔다. 박재완은 류우익에게 했던 것처럼 MB에게 ‘SD 공천 불가’를 건의했다. 잠시 머뭇거린 MB는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박재완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럼 한번 말씀 드려 봐.”
메시지가 분명치는 않았지만 박재완은 이를 MB의 ‘오케이 사인’으로 받아들였다. 정두언에게도 이 소식은 들어갔다. 정두언은 류우익과 박영준에게 인사 작업권을 내준 뒤 힘이 빠졌지만 여전히 청와대에 ‘안테나’를 갖고 있었다. 그는 MB가 자신에게 한 말을 지키려는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방법이 문제였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일이었다. 박재완은 장다사로 대통령정무1비서관, 김두우 등과 회의를 열었다. 누구라 할 것 없이 모두 장다사로를 쳐다봤다. 국회부의장 시절 SD의 비서실장을 지낸 그였다.
장다사로도 피하진 않았다. 전화를 몇 군데 돌려 보니 SD는 마침 지역구(경북 포항남-울릉) 사무실이 있는 포항에 내려가 있었다. 그런데 SD 지지자들이 며칠 전부터 사무실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정치권에서 일고 있는 ‘SD 공천 불가론’을 접하고 서울에서 내려올지 모르는 불청객과 SD의 만남을 원천봉쇄하기 위해 만든 일종의 ‘인(人)의 장막’이었다. 장다사로가 SD를 직통 휴대전화로 찾았지만 불통이었다. 지지자들이 SD 휴대전화까지 확보했기 때문이다. 장다사로는 난감했다. 직접 듣지는 못했지만 MB의 메시지가 있었다고 하니 전달은 해야 했다. 결국 장다사로는 SD 주변 인사들을 통해 박재완이 들고 온 MB의 메시지를 어렵사리 전하긴 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며칠 뒤인 2월 29일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회는 SD의 공천을 발표했다. SD 공천 소식을 접한 정두언 등 당 내 소장파 그룹은 흥분했다. 특히 MB가 정두언을 통해 밝혔다는 ‘내게 생각이 있다’는 말의 진정성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MB가 ‘SD 공천 불가’에 동의한 것인지, 그랬다면 그 메시지를 정치적으로 책임 있는 라인을 통해 SD에게 제대로 전달했는지….
당은 들끓었지만 청와대 참모들은 ‘2·29 SD 공천 확정’ 이후 더는 거론하지 못했다. 박재완의 증언. “SD 공천 문제를 꺼낸 것도 조심스러웠는데 당이 최종 공천을 한 마당에 어떻게 더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대통령과 SD의 관계를 다들 아는데….”
청와대 상황과 달리 한나라당 분위기는 악화되고 있었다. 특히 김무성 유기준 등 영남권 친박 의원들이 대거 공천에서 탈락하는 이른바 ‘친박 학살’까지 벌어지면서 얼마 전까진 당연시되던 ‘180석+α’ 목표가 흔들리고 있었다. 조각 과정에서 류우익, 박영준, 그리고 SD에게 주도권을 뺏긴 뒤 총선 판세까지 흔들리자 소장파는 더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자연스레 SD 불출마론이 다시 거론됐다. 판세 전환과 SD계 타격을 동시에 노린 다목적 카드였다. 하지만 말뿐, 아직 별다른 액션 플랜은 없었다.
그렇게 며칠이 흐른 뒤인 3월 20일 오후. 3선의 남경필이 단신으로 포항행 고속도로를 탔다. SD와 담판을 짓기 위해서였다. “다치더라도 할 말은 해야겠다”는 심정이었다. 대부분의 소장파는 남경필의 포항행을 돌출 행동으로 여겼다. 하지만 남경필은 자기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당시만 해도 SD와는 이야기가 될 걸로 믿었기 때문이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후폭풍으로 당이 뿌리째 흔들릴 때 박근혜 대표 체제를 세우고 천막당사로 옮기는 작업을 함께 했기 때문. SD는 당시 사무총장이었고, 남경필은 원희룡 등 다른 소장파와 함께 박근혜를 전폭 지원했다. 남경필은 이후 SD와 종종 해외 출장도 함께 가는 사이가 됐고 2007년 대선 경선 때는 MB 진영에도 합류했다.
저녁 무렵 도착한 포항 사무실에 SD는 없었다. 3시간 정도 기다리니 SD가 저녁 식사를 마치고 돌아왔다. 남경필을 보더니 사무실 안쪽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SD=“출마하지 말라고?”
남=“네, 부의장님.”
SD=“누구랑 이야기하고 왔어?”
남=“저 혼자 온 겁니다.”
SD=“그래? 그렇다면 그만 못 두지….”
1시간 넘는 대화에도 SD 설득에 실패한 남경필은 인근 영덕대게 집에서 늦은 저녁식사를 하며 SD의 말을 곰곰이 되새겨 봤다. 특히 대뜸 자신의 배후를 캐물은 대목이 신경 쓰였다. 남경필은 결국 SD가 MB의 생각을 궁금해 했음을 깨달았다. 얼마 전 MB가 박재완과 장다사로 등을 통해 자신에게 불출마 메시지를 전하려 했다는 소문은 알고 있을 터였다. 남경필의 증언. “내가 정두언이나 이재오와 상의했다면 SD는 물어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출마 의지를 흔들 수 있는 유일한 사람, 바로 MB의 의지가 담겼는지를 알고 싶어 했던 것 같다. 그 사이 혹 생각이 달라졌나 해서 말이다.”
하지만 남경필 뒤에 MB는 없었고, 동생의 의중을 확신하게 된 SD는 이후 거칠 게 없었다.
남경필이 SD와 만난 다음 날 기자회견을 열고 SD의 불출마를 종용해도, 정두언 등 소장파 55인이 집단 기자회견에서 SD 불출마를 주장해도 변하는 건 없었다. SD와 동반 불출마하겠다고 ‘55인’에게 호언장담했던 이재오는 청와대 인근 안가에서 MB를 만나 SD에 대한 마음을 확인했다. 그러고는 “SD 불출마설은 없던 일”이라며 자신의 지역구에서 조용히 표밭을 갈았다. 상황을 정리한 SD는 3월 25일 “(55인은) 충정에서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대통령 친인척으로 몸 관리와 처신을 철저히 하겠다”며 총선 출마 의사를 재확인했다.
박희태, 김무성 등 중진들이 줄줄이 낙천한 가운데 SD를 공천한 한나라당은 결국 2008년 4월 18대 총선에서 예상보다 적은 151석을 얻는 데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SD에게는 대승이었다. 여권의 3대 축 중 정두언은 MB와 멀어지고 있었고, 이재오는 낙선의 고배를 마시면서 한나라당은 총선 후 급속히 SD 중심으로 재편됐기 때문이다. “몸조심을 하겠다”던 SD는 총선 후 대낮에도 종종 청와대 인근 음식점을 찾았다. 한번은 청와대 출입기자들과 길에서 마주쳤다.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기자들=“부의장님, 여기까지 무슨 일이세요?”
SD=“왜, 내가 못 올 곳 왔나?”
SD가 불출마를 선언했다면 한나라당 의석 수가 어떻게 변했을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한 가지. SD 공천 여부에 대한 MB의 모호한 메시지가 여권의 총선 전략에 적지 않은 혼선을 초래한 것은 분명하다. MB는 총선 후에도 SD 이야기만 나오면 주로 이렇게 세 마디로 무마했다고 한다.
“내가 안다.” “걱정 마라.” “내가 정리하마.”
어릴 적부터 어려워했고 심지어 경외의 대상이던 친형 SD. 특유의 업무 추진력으로 불도저라는 소리까지 들었던 MB도 유독 SD 문제 앞에서는 ‘햄릿’이었다. 그리고 MB의 이 같은 태도는 SD를 ‘만사형통(萬事兄通)’으로 불리게 한 정치적 토양이 되고 있었다.
[비밀해제 MB5년]<7> MB의 2촌들
(동아일보 2013-05-11 09:23:43)
MB, 이재오 권익위장을 ‘권력위원장’ 소개… 실수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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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재섭 대표다운 위로였다.
2008년 5월 하순 어느 날. 강재섭은 20일간의 ‘지리산 은둔’을 마치고 귀경한 이재오 의원에게 “저녁이나 같이하자”고 연락했다. 이재오는 18대 총선에서 창조한국당 문국현 대표에게 일격을 당한 뒤 부인, 아들과 함께 지리산을 떠돌았다.
며칠 있다가 미국 존스홉킨스대로 떠나려던 참이었다.
강재섭=“니 자동차 면허는 있나? 미국에서 운전면허 없으면 병신 된다.”
이재오=“그냥 걸어 다니지 뭐….”
강재섭=“은행에서 카드로 돈은 뽑을 줄 아나?”
이재오=“….”
강재섭=“미국에서는 비서도 없고, 부인도 없을 텐데 어떻게 살려고 그러냐?”
이재오=“그냥 해보는 거지 뭐….”
강재섭=“영어는 할 줄 아나?”
이재오=“….”
강재섭=“그래 가지고 미국에서 버틸 수나 있겠나?”
한때 당 대표 경선을 놓고 감정의 골이 깊어질 대로 깊어진 사이. 나이도 이재오가 세 살 위였지만 두 사람은 사석에서 말을 놓고 지냈다.
이재오는 그렇게 여의도를, 한국을, 아니 이명박 대통령(MB)을 떠났다.
이재오의 낙선은 MB에게도 충격이었다. 총선 직전 한나라당 이방호 사무총장은 기자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이재오는 사실 내가 보면 MB와 2촌쯤 되는 관계다. 나 같은 사람과 MB의 관계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옆에서 같이 만나보기도 했고, MB에게 이재오 얘기를 듣기도 했는데 이재오에 대한 MB의 속정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바꾸기 어려울 만큼 깊고 짙다. 그런데 이재오가 지역구에서 져봐라. MB가 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재오는 무슨 일이 있어도 살려야 한다. 이명박 대통령을 만든 가장 큰 공신은 사실 이재오다.”
이방호의 말처럼 이상득(SD) 전 국회부의장은 피를 나눈 2촌이었지만, 이재오는 MB의 ‘정치적 2촌’이었다. 사실 MB 정권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동업자(同業者) 정권’이라는 것이었다. 그 이전의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권, 아니 박정희 전두환 정권까지도 민주화 또는 쿠데타 동지들이 만든 ‘동지(同志) 정권’이었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은 ‘기브 앤드 테이크(give and take)’ 관계로 맺어진 동업자 정권이라는 것이다.
그런 동업자 정권에서 ‘2촌’은 특별한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2009년 9월. MB는 유엔총회 참석차 미국으로 떠나기 전 이재오에게 전화를 건다. “조만간 무슨 연락이 갈 거다.”
이재오는 10개월의 존스홉킨스대 생활을 마치고 귀국해 모교인 중앙대 국제대학원 객원교수를 지내며 재기를 노리고 있었다. 문국현이 비례대표 공천과정에서 6억 원의 당채(黨債)를 발행해 재판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MB가 미국으로 떠난 뒤 이번엔 정정길 대통령실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난데없이 한나라당 탈당계를 내라는 것이었다. 이재오는 황당했지만 정 실장은 별다른 설명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전화를 끊고 난 뒤 조금 있다 다시 연락이 왔다. “그게 국민권익위원장 자리를 얘기하는 것인데…. 권익위원장 자리를 맡으려면 당적이 없어야 하니까 탈당계를 내라고 했던 겁니다. 나는 (대통령의 말씀을) 전달만 하는 것이니까 나머지는 이 의원이 알아서 하세요.”
정정길은 아마 탈당계 얘기만 하면 이재오가 다 알아들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MB와 이재오는 ‘2촌 간’이니까…. 하지만 ‘이재오 권익위원장 카드’는 MB가 미국 순방 중 혼자 생각해낸 아이디어였다. 정 실장도 몰랐고, 청와대 정무라인도 전혀 알지 못했다. 이재오 자신도 “솔직히 내가 국민권익위원장이 뭐 하는 자리인지 어떻게 아나?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때 이런저런 기구가 합쳐진다는 건 알았지만 관심도 없었는데…”라고 실토할 정도였다. 국민권익위원회는 인수위 때 기존의 국민고충처리위원회와 국가청렴위원회, 그리고 행정심판위원회를 통합해 신설한 기관이었다. 이재오가 모를 만했다.
이재오는 급기야 국무총리실 국무차장(차관급)으로 있던 박영준에게 전화를 걸어 “야, 권익위원장이 뭐 하는 자리냐”고 묻기까지 했다.
결국 순방 중이던 MB가 직접 전화를 거는 수밖에 없었다. 워낙 대통령의 머리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인사안이라 청와대 실무자들은 서류 준비에도 애를 먹었다. ‘이재오의 재산’이야 세상이 다 아는 것이지만 국민권익위원장에 지명하기 위해서는 법적으로 시민단체 추천이 필요했다. 아무리 ‘왕의 남자’이지만 그래도 젊은 시절의 대부분을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던 이재오였다. 시민단체 추천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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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30일, MB는 전날 임명장을 수여한 정운찬 국무총리를 비롯한 신임 각료들과 떠나는 장관들, 그리고 이재오를 초청해 만찬을 베풀었다.
이명박=“(신구 국무위원들을 일일이 소개하며) 여기는 신임 이재오 국가권력위원장이고….”
사회(박형준 정무수석비서관)=“(당황하며) 대통령님, 국가권력위원장이 아니고 국민권익위원장입니다.”
이명박=“(웃으며) 그게 그거 아냐?”
그래서일까. 박영준은 나중에 “권익위원장은 국무회의 때 대통령, 장관과 함께 나란히 앉는데 이재오 위원장을 보는 장관들의 눈빛이 달랐다”고 술회했다.
여하튼 이재오 권익위원장 카드에 대해 한승수 전 국무총리는 “고스톱으로 치면 1타 몇 피라고 해야 할까? 대통령이 참 절묘한 수를 뒀다”고 평가했다. ‘낭인 생활’을 끝낼 수 있을 뿐 아니라 MB 표현처럼 ‘권력위원장’의 위상을 활용해 약자를 보살피고, 민생을 챙기는 ‘정치적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거기에 국무회의 군기반장 역할까지 하게 됐으니 최소 1타 3피의 효과는 거둔 셈이다.
MB에게는 이재오 말고도 ‘2촌쯤 되는 사이’가 한 사람 더 있었다. 홍준표 경남도지사다.
고려대 후배이고, 15대 총선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상실해 미국 워싱턴에 머물 때 늘 곁에서 위로해주던 동생이었다. 홍준표 역시 선거법 문제로 재판에 회부되자 의원직을 사퇴하고 워싱턴에 합류했다. 홍준표는 MB를 “형님”이라 불렀고, 부인 김윤옥 여사에게도 “형수, 내 밥 좀 도∼” 하며 스스럼없이 대했다. MB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김 여사는 한나라당 여성의원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홍준표는 내 시동생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러나 이재오가 속이 깊고 충직한 ‘관우’라면 홍준표는 손아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 ‘장비’였다. 물론 홍준표의 생각은 다르다. 홍준표는 “나는 MB에게 아무런 채무가 없다. 채권만 있을 뿐. 하지만 이젠 그 채권도 포기하겠다”고 했다.
채권이 뭐냐고 묻자 홍준표는 “내가 MB를 세 번이나 구했다”고 했다.
“MB는 재선(1996년 15대 총선)에 성공하자 ‘기수 파괴론’을 내걸고 대권 도전 의사를 드러냈다. 현대건설 CEO 경력까지 합치면 자기가 4선 이상이라는 거지. YS(김영삼) 임기가 2년이나 남았을 때라 청와대로서는 그냥 좌시하기 어려운 행동이었다. 그러다 선거법 위반 사건이 터졌다. 압수수색을 해보니 ‘PLP(President Lee Plan)’라는 문건까지 나왔다. 레임덕을 걱정하던 YS는 구속수사를 지시했다. 그때 마침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국정감사장에 강삼재 당시 사무총장이 왔기에 내가 ‘이명박은 우리 시대의 신화 같은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정치판에 끌어들일 때는 언제고 선거법 위반으로 몰고 가는 건 또 뭐냐. 절대 구속하면 안 된다’고 했다. 사실은 ‘내가 검사로 슬롯머신 사건을 수사할 때 YS 대선자금도 조사한 게 있는데 (MB를 구속하면) 그걸 깔 수도 있다’고 협박했다. 아마 그날 저녁 여권 수뇌부 회의에서 ‘홍준표는 통제가 안 되는 놈 아니냐’는 얘기가 오간 모양이다. 결국 MB는 구속을 면했다.”
그리고 2002년 서울시장 출마 때 이회창 총재는 홍사덕 의원을 염두에 뒀지만 자기가 MB를 밀었고, 2007년 대선 당시 BBK 사건이 불거졌을 때도 ‘도리 없이’ 방패막이가 돼줬다는 것이다.
다시 홍준표의 증언. “MB가 김경준과 뭘 같이한다고 하기에 내가 김경준을 보니 딱 사기꾼이었다. 그래서 안 된다고 했다. MB도 ‘알았다’고 했는데 내가 없을 때 자기들끼리 그 사업을 해서 사달이 난 것이다. 나중에 문제가 되니까 ‘홍 의원이 하지 말라고 했던 건데…그래도 홍 의원이 도와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하소연해서 내가 (BBK 대책팀에) 합류한 것이다.”
18대 총선이 끝난 직후 홍준표는 원내대표로 선출된다. 말이 선출이지 홍준표 원내대표-임태희 정책위의장 팀은 단독후보였다. MB의 뜻이었다.
홍준표는 엔도르핀이 솟았다. 이춘식 전 의원의 기억. “MB 취임 첫해는 한마디로 법안전쟁이었다. 어느 정권이나 마찬가지이지만 MB 개혁안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는 국회의 뒷받침이 무엇보다 절실했다. 그런데 그해 말 대표적 개혁입법안이라고 꼽은 85건 중 50건 이상이 통과됐다. 어느 날 밤늦게 국회를 마치고 자정이 넘어 이상득 부의장과 여의도 생맥줏집에서 술을 마셨는데 SD가 ‘이 정도면 성공이다. 아쉬운 점도 있지만 홍준표가 잘해냈다’고 하더라.”
그리고 2010년 6월. MB는 홍준표를 청와대로 불렀다. “이번에 대통령실장을 3선 의원 이상으로 하면 좋겠는데 누가 좋을까? 국회의원 배지를 떼고 올 사람이 있을까?” 갑작스러운 질문에 홍준표는 “각하, 이재오 의원이 어떻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이재오는 지역구인 서울 은평을 재선거를 앞두고 있었다. 재선거도 재선거이지만 MB는 “그 사람은 참모를 할 사람이 아니야”라고 잘라 말했다.
청와대를 나와 여의도 국회의사당으로 돌아가는 길. 차가 마포대교쯤에 이르렀을 때 홍준표는 MB에게 전화를 걸었다. “각하, 임태희 의원은 어떻습니까?”
며칠 뒤 김해수 정무1비서관이 찾아왔다. 김 비서관은 홍준표의 고려대 법대 후배이기도 했다. “형님, 바보요? 다른 일은 그렇게 머리가 잘 돌아가면서 그때는 왜 그렇게 대답한 겁니까? 그러니 안 되는 겁니다. 그냥 ‘제가 들어가서 돕겠습니다’라고 한마디만 하면 될걸…. 이재오를 시킬 거면 이재오를 부르지, 왜 형님을 불렀겠소.”
김해수의 해석으로는 MB가 홍준표에 대해 ‘자기 욕심만 차리려는 놈’이라고 생각했을 거라는 얘기였다.
MB가 정말 홍준표에게 대통령실장을 제안하려고 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이후 MB와 홍준표의 애증(愛憎)은 ‘널뛰기’를 거듭한다.
어느 날, 임태희 대통령실장이 홍준표에게 환경부 장관 자리를 들고 찾아왔다. 홍준표가 원하던 건 법무부 장관이었다. 홍준표는 임태희에게 이런 말을 건넸다. “혹시 ‘타타타’라는 노래를 아느냐”고.
‘네가 나를 모르는데/난들 너를 알겠느냐/한 치 앞도 모두 몰라/다 안다면 재미없지….’ MB에게 전해 달라는 말이었다.
[비밀해제 MB5년]<8> 허당 이재오
(동아일보 2013-05-19 09:52:41)
MB “경선룰 양보하라고? 재오 너는 매번 왜 그러냐
![](http://dimg.donga.com/wps/NEWS/IMAGE/2013/05/18/55231017.1.jpg)
이재오 의원은 누가 뭐래도 ‘왕의 남자’였다. 정두언 의원처럼 ‘한때의 남자’가 아니었다.
이재오에 대한 이명박 대통령(MB)의 믿음은 순일(純一)했고, MB에 대한 이재오의 충정 또한 마찬가지였다.
대한민국 여의도에서는 ‘왕의 남자’는 곧 ‘권력의 2인자’로 통했다.
18대 총선(2008년 4월 9일) 때 안강민 공천심사위원장이 MB의 친형 이상득 의원(SD)의 공천을 지지한 이유 중 하나도 ‘2인자 이재오’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SD라도 당에 있어야 이재오를 견제할 수 있지 잘못하다간 한나라당이 ‘좌파 경력자(이재오)’의 수중에 들어갈지 모른다는 게 안강민의 걱정이었다.
친이(親李)계 신지호 전 의원도 이듬해 3월 동아일보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낙선한 이재오가 10개월간의 미국 워싱턴 낭인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기 직전이었다. “이재오 의원이 대선 전에 밥을 한번 먹자고 해서 만났는데 그때 보니 이미 2인자의 선을 넘고 있더라. 나한테 ‘MB가 대통령이 되면 MB는 경제를, 나는 정치를 맡을 거다’라고 하던데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 그 양반이 큰 착각을 하고 있더라.”
그러나 어쩌면 신지호가 이재오라는 정치인에 대해 ‘착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명박-박근혜 후보의 대선 후보 경선을 석 달 앞둔 2007년 5월 중순. 경선 룰을 둘러싼 두 후보 진영의 싸움이 사투(死鬪)를 방불케 할 때였다. 강재섭 대표가 중재안을 냈다. 여론조사 반영 비율 산정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박근혜 후보 진영은 중재안을 거부했다. MB 캠프의 좌장인 이재오도 처음엔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재오가 느닷없이 한발 물러서자고 했다. MB는 의아했다.
이명박=“왜 마음이 변한 거야?”
이재오=“형님, 우리가 중재안을 거부하면 강 대표는 대표직도 내놓고 의원직도 사퇴한답니다. 강 대표 (외동)딸이 결혼한다고 하는데 대표직도 내놓고 의원직도 사퇴하면 그 결혼식이 뭐가 되겠습니까. 양보하시죠.”
이명박=“(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너는 마음이 약해서 큰일이다. 어떻게 매번 막판에 양보만 하느냐!”
이재오는 전력(前歷)이 있었다. 2006년 원내대표로 박근혜 대표를 모시던 시절이었다. 최고위원 회의가 시작되기 직전 박 대표가 명단을 하나 내밀었다. 새 당협위원장 20여 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미 경선을 둘러싸고 서로 신경전이 시작되고 있던 시점이었다. 아직 경선 룰이 정해지지는 않았지만 어느 쪽이 당협위원장을 많이 포섭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재오는 “대표님이 책임지고 결정하신 것이니 저는 이의가 없습니다”라고 넘겼다. MB는 그때도 “그게 몇 표인데 그냥 다 주느냐. 너는 마음이 약해서 탈이다”라며 이재오를 깼다.
“어떻게 매번 양보만 하느냐”는 MB의 질책은 그래서 나온 말이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MB는 결국 2007년 5월 기자회견을 열어 강재섭의 중재안을 받아들였다. 이재오는 그 뒤 당시 심정을 이렇게 털어놨다. “친박(親朴)이 강재섭의 중재안을 거부하고 있었고, 우리도 가만히 있었으면 강재섭은 약속대로 대표직을 내놓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면 (최고위원 선거에서 2등을 차지한) 내가 대표직을 승계할 수도 있어서 처음에는 잘됐다 싶었다. 그런데 나도 딸들이 있잖아. 딸이 결혼을 하는데 아버지가 아무것도 없으면….”
이처럼 이재오에겐 ‘여의도의 정글법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캐릭터가 있었다. 덩치만 컸을 뿐 ‘초식동물’이었다. 먹이를 물면 끝까지 놓지 않는 육식동물과는 좀 달랐다.
2008년 3월 SD의 총선 불출마를 관철하기 위해 친이 소장파 55인이 거사를 꾸밀 때도 그랬다. 이재오는 SD와 자신의 동반 불출마 카드까지 가지고 MB를 만났다. 그날 새벽까지 이재오를 기다렸던 55인 중 한 사람의 증언.
“이재오는 소장파인 우리를 말리든, 아니면 저쪽(SD)을 정리하든 둘 중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었죠. 우리는 서울 홍제동 인근에서 이재오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저녁에 청와대에 들어갔다 오겠다고 말한 사람이 새벽이 되도록 오지 않았어요. 결국 모든 것이 흐지부지되고 말았죠.”
MB를 만난 다음 날 아침, 이재오는 이방호 사무총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두 사람은 1945년생 동갑이다. 이방호의 당시 전언. “이재오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고민이다’라고 하더라. 사실 그쪽 집안 관계가 대통령이 (이상득) 부의장을 불러 대놓고 출마하지 말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래서 내가 이재오에게 ‘그냥 지역구로 가서 승부를 걸어라. 여기서 이 의원까지 불출마하면 추후에 일을 도모하기 어려워진다’고 얘기했다.”
‘55인 거사’를 기획했던 정두언은 이후 누가 이재오 얘기만 꺼내면 “그 개×× 말은 꺼내지도 마!”라고 얼굴을 붉혔다.
이재오는 결국 소장파의 배신감을 뒤로하고 2008년 4·9총선에 출마하지만 낙선의 고배를 마시고 만다.
총선에서 낙선한 뒤 이재오는 며칠째 “꺼이∼꺼이” 통곡했다. 새벽이면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홈페이지에 이런 글을 올렸다. “성난 민심의 바다는, 사실은 조각배인데 거대한 함선인 줄 알고 (나를) 침몰시켜 버렸다. 텅 빈 유세차를 아들과 함께 타고 낙선 인사를 돌았다. 시장 노점상들이 손을 흔들 때 참았던 눈물이 그냥 쏟아졌다.”
낙선 후 10개월의 워싱턴 유랑에서 돌아온 이재오는 국민권익위원장(2009년 9월∼2010년 6월), 특임장관(2010년 8월∼2011년 8월)을 연이어 맡는다. 그 사이 치러진 2010년 7월 서울 은평을 재선거에서는 혼자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는 ‘이재오식 나홀로 유세’로 당선돼 의원직을 되찾는다.
돌아온 ‘왕의 남자’였다.
하지만 그는 왕의 남자일 뿐 ‘권력 2인자’는 아니었다. 그가 낙선 직후 홈페이지에 올린 글처럼 ‘조각배’까지는 아닐지 몰라도, 권력의 2인자로서 ‘함대’를 만들지는 못했다.
국민권익위원장으로 돌아온 직후 그가 밝힌 정치 스케줄은 세 가지였다. 첫째, 대략 2009년 말까지 세종시 수정안 문제에 대한 가닥을 잡고 2010년 상반기 중 행정구역 개편을 이뤄 낸다. 둘째, 그 이후 개헌과 선거제도 개편을 패키지로 추진해 2010년 말까지 매듭짓는다. 셋째, 2011년부터 4대강 사업의 가시적 성과가 드러난다.
이재오의 정치 스케줄에 대해서는 측근들조차 그 진정성을 의심했다.
이재오가 특임장관 자격으로 개헌 논의의 물꼬를 트기 시작하던 무렵. 이재오와 권택기, 박준선 의원 세 사람이 여의도 한정식집 대방골에서 무릎을 맞댔다. 오랜만이었다. MB 대선캠프였던 안국포럼 기획실장 출신의 권택기는 세상이 다 아는 이재오 측근이었고, 검사 출신인 박준선 역시 두 번의 낙천 끝에 이재오의 도움으로 18대 국회에 입성한 인사다.
박준선=“(개헌을 띄우려는) 진심이 뭡니까? 차기 정권에서 대통령이 되기 어려우니까 박근혜 훼방 놓으려고 그러는 것 아닙니까? 솔직히 말씀해 주십시오.”
이재오=“내가 그렇게 얕은 사람이냐?”
박준선=“그럼 뭡니까?”
이재오=“내가 민중운동 하다가 한나라당에서 국회의원도 세 번 하고 정권도 잡아 봤다. 그러다 낙선하고 낭인이 돼 미국, 중국을 전전했다. 다행히 다시 복귀하긴 했지만 그런 일을 겪다 보니 내가 정치를 언제 그만두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 시기가 19대 국회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이 뭔가를 생각했다. 그게 개헌이다. 우리나라 정치 기반을 바로잡아 놓고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개헌뿐 아니라 세종시 수정안 관철, 행정구역 및 선거제도 개편, 4대강 사업은 ‘왕의 남자’로서 그에게 주어진 임무이기도 했다. 그러나 2인자로서 한나라당을 이명박당(黨)으로 만들고, 차기를 도모하는 일에서는 ‘허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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