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커버스토리]MB 손 부들부들 떨며 분노…“당신 많이 컸네”
■ 비화(秘話) 시리즈를 시작하며
《 역대 정권은 대통령 재임 기간의 일들을 정리해 자료로 편찬해 냈다. 하지만 공식 활동 자료를 집대성한 ‘정부 기록물’ 수준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처음으로 ‘백서(白書)’를 시도했다. 그냥 기록물 편찬 수준이 아니라 반성적 의미의 리뷰라는 뜻일 게다. 심혈을 기울였지만 역시 아무런 주목을 받지 못했다.
동아일보가 이명박 정부 5년의 비화(秘話) 시리즈를 시작하는 이유도 반성적 리뷰를 위한 것이다. 시리즈에 등장하는 화자(話者)는 주로 이명박 정부의 국정운영에 참여한 사람들이겠지만, 청자(聽者)는 향후 5년의 국정을 책임진 박근혜 정부 인사들이기를 기대한다.
기자들은 전력을 다해 그때그때의 일들을 취재하고 기록한다. 그러나 지면에 모든 것을 다 담지는 못한다. 여러 가지 이유로 지면에 보도하지 못한 기록들은 내부 정보보고로 남긴다. 하지만 그 역시 국민이 알 권리가 있는 공공재산. 시리즈의 제목을 ‘비밀해제(declassification)’라고 한 것은 그런 내부 정보보고까지 최대한 공개해 이명박 정부 5년의 리뷰 자료로 내놓겠다는 뜻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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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황식 총리 발굴과 정동기 낙마 파동 ▼
김태호 국무총리 후보자와 박연차 태광실업 전 회장이 함께 찍은 사진을 보는 순간 정진석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은 “이제 끝났다”고 생각했다.
까면 깔수록 의혹이 쏟아져 나온다고 야당과 언론에서 ‘양파 총리 후보’라고까지 조롱하고 있던 터였다. 무엇보다 2007년 4월 미국 뉴욕의 한인식당에서 박 전 회장에게서 수만 달러를 받았다는 의혹이 핵심이었는데 김 후보자는 “그 시점엔 일면식도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2006년 2월 어느 출판기념회에서 박 전 회장과 함께 찍은 사진이 공개된 것이다. 2010년 7월 이명박 대통령에게서 정무수석 임명장을 받은 지 겨우 한 달 남짓. 한국일보 정치담당 논설위원 출신으로 16, 17, 18대 국회의원을 지낸 정 수석의 기자적 후각이나 ‘여의도 감각’은 아직 살아 있었다.
“그러나 대통령은 김 후보자와 박 전 회장의 사진이 공개된 그날 아침까지도 강경한 자세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임태희 대통령실장과 저를 불러 ‘김무성 원내대표를 만나 밀어붙이라’고 했습니다. 김 원내대표를 만나긴 했지만 정말 미치겠더군요.” 마지막으로 임채민 국무총리실장을 만났다. 임 총리실장은 8월 8일 개각 때 김 총리 후보자와 함께 발탁된 인물.
정=“도대체 어떻게 했기에 준비가 그렇게 소홀한 겁니까?”
임=“나는 청문회 준비하는 사람들 곁에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청문회 준비는 (경남지사를 지낸 김 총리 후보자가) 김해에서 데리고 온 측근 몇 사람이 다 했습니다.”
더 물어볼 것도 없었다. 정 수석은 임 실장에게 “대통령에게 총리 교체를 건의합시다”라고 운을 뗐다. 임 실장은 “(대통령이) 아침에만 해도 ‘밀어붙이라’고 했는데…”라며 난감해했다.
임 실장의 등을 떠밀다시피 해서 본관으로 올라갔다. 대통령은 버럭 화부터 냈다. “천성관 케이스하고 다르잖아!” 이 대통령은 1년 전 ‘스폰서 검사’ 논란 끝에 낙마한 천성관 검찰총장 후보자 얘기까지 꺼냈다. 김태호 후보자가 아니라 임명권자인 대통령 스스로 벼랑 끝에 몰린 듯한 절박감을 느끼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 순간 ‘내가 여기서 물러서면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정색을 하고 말씀드렸습니다. ‘천성관보다 더하면 더했지, 다르지 않습니다. 더 밀어붙이면 각하만 다칩니다. 이걸 리더십 손상으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오히려 민심에 귀를 열고 있다는 이미지를 줄 수 있습니다’라고요. 화를 가라앉히며 듣고 계시던 대통령이 툭 내뱉듯이 ‘임 실장이 (김태호를) 한번 만나봐’라고 지시하더군요.”
JP(김종필) 이후 거의 40년 만에 탄생한 40대 총리로, 여당의 대권구도까지 뒤흔들 수 있는 카드로 급부상하던 김태호 드라마는 이렇게 조기 종영됐다. 하지만 버리면 얻는다고 했던가. 김태호를 버리면서 MB는 김황식 총리를 얻는다. MB는 퇴임 인터뷰와 백서에서 ‘역사적 의미를 갖는 인사(人事)’라고까지 자부했다.
▼ 총리 찾던 MB, 김황식 카드 ‘더블 메리트’에 무릎 쳐 ▼
물론 김태호에서 김황식으로 직행한 건 아니다. ‘청빈 판사’로 유명한 조무제 전 대법관도 검토됐고, 한국일보 주필과 사장을 지낸 장명수 씨도 접촉했다. 일부 친이(親李)계는 맹형규 행정안전부 장관을 밀었다.
장명수 전 한국일보 사장은 역시 한국일보 출신인 정 수석의 아이디어였다. 정 수석은 임 실장과 함께 서울 중구 정동의 음식점 ‘달개비’에서 장 전 사장을 만났다. 요즘엔 ‘안철수-박원순 회동 장소’로 유명해졌지만 과거 민주화세력의 사랑방으로 불리던 세실 레스토랑이 한정식 집으로 바뀐 곳이다.
“제가 논설위원으로 있을 때 장 전 사장이 주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정 수석이 잘 알면서 왜 그래. 내가 지금 나이가 칠십인데 어디 가서 새로운 일을 벌이겠어? 그리고 내가 그동안 (국정과 시사 문제에 대해) 쓴 글이 잘된 글인지 아닌지도 모르는데…. 여하튼 외도는 하고 싶지 않아’라며 한마디로 거절했습니다. (장 전 사장의 그런 언론인다운 태도에) 임 실장도 감탄하는 눈치였습니다. 다음 날 또 전화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장 전 사장은 거듭 ‘정 수석이 나를 누구보다 잘 알면서 왜 그래’라는 말만 되풀이했습니다. 그러다 다음에 고른 인물이 김황식 총리입니다. 돌고 돌다가 대어(大魚)를 고른 거죠.”(정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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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총리는 정 수석의 표현대로 ‘대어’였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가 부활한 이후 최장수(2년 5개월) 총리라는 기록만 해도 우선 그렇다.
그런데 정작 김 전 총리는 퇴임 직후 기자와 통화하면서 “아직도 내가 어떻게 (총리로) 천거됐는지 잘 모르겠다. 나도 궁금하다”고 했다. 그만큼 김황식 발탁 배경은 주목을 받지 못했다. 김태호 낙마라는 태풍이 지나가고, 그 상처를 치유해줄 ‘힐링 카드’로 검토했던 조무제 장명수 총리 안(案)까지 허사로 돌아가자 MB는 물론이고 여권 전체가 깊은 허탈감에 빠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총리 자리를 마냥 비워둘 수는 없는 일. 새 총리감에 대해 여러 갈래로 여론을 수집하고 있던 장다사로 민정1비서관이 새로운 착안점을 찾아낸다. 바로 ‘헌정 사상 최초의 전남 출신 총리’라는 콘셉트였다.
“전남 장성 출신인 김황식 감사원장을 염두에 두고 총리 후보를 천거한 건 아니었습니다. 잘 알지도 못했습니다. 김두우 기획관리실장하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중 ‘지금까지 전남 출신 총리가 한 명도 없었다더라. 그런데 사람들이 의외로 그런 사실을 잘 모르더라’라는 얘기를 했습니다. 김 실장하고는 워낙 친해서 청와대에 같이 있는 동안 서로 허심탄회한 얘기를 많이 나눴습니다.”(장다사로)
김 실장은 곧바로 대통령을 면담했다. 사실 직책으로만 보면 김 실장의 대통령 독대는 좀 어색했다. 정무비서관, 정무1기획비서관, 메시지기획관을 거쳐 그 얼마 전에 신설된 기획관리실장을 맡았지만 수석급은 아니었다. 수석(차관급)과 비서관(1급) 사이의 어정쩡한 위치였다.
그런데도 김 실장은 수시로 대통령을 따로 만났다. 김 실장에 대한 이 대통령의 신뢰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어쩌면 최고경영자(CEO) 출신인 MB가 대기업 기획조정실장을 연상시키는 기획관리실장 자리를 만들어 김두우 기획관을 앉힌 배경도 그런 역할을 기대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여하튼 김 실장은 대통령에게 ‘김황식 총리안의 세 가지 장점’을 역설했다.
김 실장=“전남 출신 총리는 헌정 사상 처음입니다. 민주당도 반대하지 못할 겁니다. 그리고 청문회 때문에 곤욕을 치렀는데 김 총리는 대법관에 감사원장까지 했으니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대통령=“그래? (혼잣말처럼 황인성, 고건 전 총리의 이름을 입 밖에 내면서) 정말 다 전북 출신이네….”
김 실장=“마지막으로 경우에 따라서는 (호남) 민주당의 (영남) 노무현만 있나, (영남) 한나라당의 (호남) 김황식도 있다는 메시지를 줄 수 있습니다.”
대통령=“…….”
MB는 김 실장이 말한 세 가지 장점 중 ‘전남 출신 최초’라는 점과 ‘청문회 통과 확실’이라는 점에 꽂혔다. 연락은 임 실장이 맡았다. 김 총리 후보는 고사했지만 결국엔 받아들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 대통령이나 김 실장, 장 비서관은 김 총리가 ‘전남 출신 최초’를 넘어 ‘명(名)총리’라는 평가까지 받게 될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유명한 얘기지만 김 총리는 재임 중 연필로 쓴 단상(斷想)을 사진으로 찍어 페이스북에 올렸다. 100편의 글을 올렸고, 떠나면서 ‘연필로 쓴 페이스북, 芝山通信’이라는 책으로 남겼다. 어느 글 하나 그의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 게 없다. 광주법원장 시절, 우파나 좌파가 아니라 소외계층을 따듯하게 보듬는 ‘중도 저(低)파’가 되고 싶다고 했던 그의 철학이 물씬 묻어난다. 글을 보면 사람을 알 수 있다.
한 가지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설사 민정수석실에 ‘역대 총리 중 전남 출신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여론이 접수됐다 하더라도 장 비서관과 김 실장이 아니었다면 과연 위기 돌파 카드로 살아날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1980년대 중반 민정당 공채 출신으로 당료생활을 시작한 장 비서관은 전북 김제 출신이다. 김 실장은 TK(대구경북) 출신이지만 과거 중앙일보 정치부 기자 시절 야당 출입을 훨씬 더 많이 했다. 지역과 정당을 넘나드는 두 사람의 그런 커리어가 좀더 폭넓고, 유연한 상상력을 갖도록 만든 것 아닐까.
김황식 총리 청문회는 예상했던 대로 별 탈 없이 넘어갔다. 하지만 또 다른 고비가 남아 있었다. 김 총리 지명으로 공석이 된 감사원장 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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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安 “정동기 사퇴 촉구”에 MB 손 부들부들 떨며 진노 ▼
“감사원장은 누가 좋겠어?”
2010년 10월 초 어느 날. 김황식 감사원장의 국무총리 임명 절차를 마친 이명박 대통령(MB)은 청와대 참모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정운찬 총리 사퇴 후 김태호 총리 후보자가 낙마한 뒤 어렵사리 찾은 김황식 카드 인선을 마무리한 직후였지만, 헌법기관장인 감사원장을 오래 비워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며칠 뒤 청와대 본관 집무실에 임태희 대통령실장과 참모 몇 명이 들어섰다. 목영준 헌법재판관 등이 후보로 거론됐고, 대통령도 긍정적이었다.
청와대 인선 실무진은 이 중 목 재판관을 우선순위에 놓고 접촉을 시작했다. 하지만 당사자의 반응이 시원치 않았다. 목 재판관의 증언. “제안을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만 현직 헌법재판관이 감사원장으로 곧장 옮긴다는 게 내키지 않았어요.” 일각에선 재산(2010년 당시 헌법재판관 중 최다인 46억6491만 원)이 문제될 것이라는 말도 나왔다. 청와대는 결국 목영준 카드를 접었다.
그해 11월 11일 서울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앞두고 후임 감사원장 건이 해결되지 않자 MB의 피로감은 쌓여 갔다. 9월에는 임기 초부터 함께한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이 딸의 ‘외교부 특혜 채용’ 의혹을 받다 낙마했다. MB는 G20 정상회의를 마친 11월 중순 다시 후임 감사원장을 놓고 고민에 들어갔다. 그러다 정동기 전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 카드가 나왔다. 2007년 대검차장을 지낸 뒤 2009년 천성관 검찰총장 낙마 파문의 책임을 지고 민정수석에서 물러나 정부법무공단 이사장으로 가 있던 그 정동기였다.
하지만 그에 대해 고교 후배(서울 경동고)인 임 실장 정도를 제외하고 청와대 참모들은 썩 내켜하지 않는 눈치였다. 당시 청와대 핵심 참모인 A 씨. “이상하게도 정무, 홍보, 민정수석 모두 정동기 감사원장 카드에 대해 흔쾌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크게 반대하지도 않았지만….”
그러나 대통령의 마음은 정동기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김두우 기획관리실장의 전언. “천성관 낙마 건도 사실 100% 정동기 전 수석의 책임은 아니었어요. 천성관을 추천하지 않았거든요. 그런데도 책임지고 민정수석에서 물러났죠. 그만두는 게 상식이지만 대통령은 그 점을 고마워했고 마음에 부담을 가졌을 겁니다.” 결국 정 전 수석은 그해 12월 31일 개각 발표에서 감사원장 후보자로 지명된다.
정치권의 반응은 냉담했다. 야당인 민주당은 정 전 수석이 2007년 대검차장 당시 MB의 도곡동 땅 관련 의혹 등을 덮어줬다고 주장했다. 한나라당 분위기도 다르지 않았다. 특히 ‘민정수석을 지낸 대통령 측근이 어떻게 헌법기관장을 맡을 수 있느냐’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여기에 2007년 대검차장을 그만두고 7개월간 변호사 수임료로 7억 원을 받았다는 게 더해져 여론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됐다.
결국 정동기 지명 열흘 만에 일이 터졌다. 2011년 1월 10일 오전, 안상수 한나라당 대표가 최고위원회의 도중 “정동기 내정자 스스로 거취를 결정하는 게 국민의 뜻을 따르고 대통령을 위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며 자진 사퇴를 촉구했다. 집권 여당이 청와대와 논의 없이 MB 임기 중 처음으로 대통령 인사권에 대해 공개적으로 ‘선상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 시간 MB는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하고 있었다. 대통령 경호상 휴대전화 전파를 차단해 참석자들은 이 소식을 아직 알지 못했다. 그 대신 원희룡 당 사무총장으로부터 회의 결과를 ‘통보’ 받은 김연광 대통령정무1비서관이 회의장으로 뛰어가 직속상관인 정진석 수석을 찾았다. 정 수석은 밖으로 나와 원 총장에게 “당신 정치를 어디서 이 따위로 배웠어!”라고 호통을 친 뒤 다시 회의장에 돌아왔다.
“대통령님, 지금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정동기 후보자의 자진 사퇴를 요구했습니다.”
당시 청와대는 대통령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실제로 정 수석의 보고를 받은 MB는 손까지 부들부들 떨며 ‘최고 수위’의 분노를 표출했다고 한다. 당시 한 참석자. “대통령은 2009년 천성관에 이어 2010년 김태호, 유명환이 잇따라 낙마하며 극심한 인사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여당이 대통령 등에 칼을 꽂은 격이었죠.”
청와대 분위기는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감사원장은 국회가 동의안을 통과시켜야 임명할 수 있는 만큼, 여당의 자진사퇴 요구는 정동기 카드의 폐기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임 실장 등 주요 수석들이 줄사표를 낼 상황이었고, 주무인 권재진 민정수석은 실제로 사표를 내려고 했다. MB는 참모들이 국회와 접촉하며 정동기 카드를 설득해내지 못한 점을 불만스러워했다고 한다. 이상 기류를 감지한 김두우 실장은 이날 저녁 청와대 집무실로 대통령을 찾아갔다.
김 실장=“지금 참모들을 문책하시면 당에서 청와대를 치고 들어오는 게 성공하게 됩니다. 문제가 더 심각해질 수 있습니다.”
MB=“그럼 어떻게 하면 돼?”
김 실장=“임 실장에게 힘을 실어주십시오. (그 의미를 알릴) 방법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결국 이틀 후인 1월 12일 정동기 전 수석은 기자회견을 열고 감사원장 후보에서 물러났다. MB는 그날 오후 정진석 수석 등과 회의를 하던 임 실장의 집무실을 찾았다. 청와대는 이례적으로 이 사실을 언론에 알렸다. 사태의 확산을 막기 위한 제스처였다. 당시 언론은 “대통령이 임 실장에게 힘을 실어주었다”고 해석했다.
하지만 그런 제스처와 별개로 대통령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 MB는 이 자리에서 참모들에게 정동기 카드를 선택한 이유를 장시간 설명했다.
“그 사람이 한양대 출신이다. 완전 비주류다. 그런 사람이 검찰에서 그 자리(대검차장)에까지 올라가려고 얼마나 자기 관리를 잘했겠느냐. 나하고 가깝다고 감사원장 시키려 한 게 아니다. 정치인들이 자기들은 얼마나 깨끗하다고 시비하느냐.”
대통령의 열변을 듣고 있던 정 수석이 입을 열었다.
정 수석=“제가 정 후보자를 만나 소주 한잔하며 위로하겠습니다.”
MB=“뭐? 당신 혼자 인간적인 척하지 마! 가슴이 아파도 내가 더 아프고, 정동기를 알아도 내가 더 잘 알아!”
MB의 분노는 오래갔다. 13일 청와대는 그달 26일 잡혔던 대통령과 한나라당 지도부의 만찬을 연기한다고 밝혔다. 자신을 배신한 여당과는 밥도 먹기 싫다는 것이다. 그러던 MB는 폭설이 내리던 1월 23일 오후 당 지도부에게 청와대 안가에서의 ‘저녁 번개’를 제안했다. 안상수 대표와 김무성 원내대표, 심재철 정책위의장, 원희룡 사무총장이 나왔다. MB는 참석자들에게 막걸리를 따라주며 싸늘하게 말했다.
“안 대표, 당신 많이 컸네.”
“……”(안 대표)
날씨만큼 얼어붙은 이 자리에서 MB는 더이상 대통령의 권위에 도전하지 말라고 당에 엄중 경고했다. 안상수는 막걸리잔에 입을 대지도 못했다.
[토요판 커버스토리]연평 포격후 새 국방장관 이희원 점찍었던 MB… “호랑이상 무인 필요” 참모 조언에 김관진 낙점
(동아일보 2013-03-30 04:37:39)
김관진 국방장관은 아무래도 민심이 직접 호출한 ‘국민장관’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 박근혜 대통령도 의혹투성이인 김병관 전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을 국방장관에 앉히려다 막판엔 결국 김관진이라는 인물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듯이, 2년 4개월 전의 MB도 그랬다.
연평도 사태 직후 군의 대응태세에 대한 비난여론과 함께 국회에서 MB의 ‘확전 자제 발언’ 논란이 일었다.
김태영 당시 국방장관은 MB가 마치 ‘확전 자제’를 지시한 것처럼 답변해 논란을 키웠다. MB는 결국 김태영 장관을 ‘경질’하고 후임엔 이희원 안보특보를 점찍었다. 경북 상주 출신으로 천안함 사태 직후 신설된 대통령안보특보에 발탁된 인물이었다.
2010년 11월 27일. 홍상표 홍보수석의 발표 10분 전까지도 TV 자막에는 ‘이희원 유력’이 떠 있었다. 이날 아침 조간신문도 모두 이희원을 기정사실화했다.
MB의 의중은 확실해보였다. 하지만 정진석 정무수석과 김두우 기획관리실장이 브레이크를 걸었다. 정 수석은 “지금은 참모형 국방장관으로는 안 된다. 호상(虎相·호랑이 얼굴)을 가진 무인이 나와야 한다. 그래야 북한에 시그널도 주고 국민도 안심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김 실장은 MB에게 직접 “이럴 때일수록 군내에서 신망을 받는 야전형 인물을 내보내야 한다”고 설득했다. 이희원은 호랑이상도, 야전형도 아니었다.
정 수석은 “그래서 2시간 만에 찾아낸 사람이 바로 김관진”이라고 기억했다. 김관진 장관은 ‘국방부 창설 이래 정권이 바뀌었는데도 유임한 첫 장관’이라는 기록 아닌 기록을 갖게 됐다. 하지만 그를 부른 건 MB도, 박근혜 대통령도 아니었다. 불안한 민심이었다
최초공개-임태희 전 실장이 털어놓는 MB정권 남북 비밀접촉 비화 (21)
(동아일보 2013-03-27 7:00 am)
남북 정상회담 비밀접촉 주역 임태희 전 대통령실장이 털어놓는 남북 비밀접촉의 비화.
평양으로 가야 국군포로를 데려오는 거지, 장소를 판문점으로 바꾸자고 하면 그게 되겠어요? 생각해보라고요.”
임태희 전 대통령실장은 이명박 정부 남북관계의 극적인 순간과 관련해 아쉬운 게 많은 듯했다. 그는 2009년 10월 싱가포르에서 김양건 북한 통일전선부장을 만났다. 남북은 임태희-김양건 협의로 정상회담 문턱까지 갔으나 최종협상은 결국 결렬됐다. 이듬해 3월 천안함 폭침, 11월 연평도 포격 사건이 일어나면서 남북관계는 파국으로 치달았다.
정상회담이 성사됐더라면 한반도 정세는 다른 국면으로 흘렀을 것이다. 임 전 실장이 김 부장을 만난 2009년 10월부터 천안함 폭침 사건이 발생한 이듬해 3월까지 남북한 간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임태희-김양건 협의 전모와 결렬 과정은 지금껏 베일에 싸여 있다. 임 전 실장이 그간 철저하게 함구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임 전 실장이 1월 9일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의 증언을 직접 듣는 것은 남북관계를 취재하는 기자라면 누구나 욕심내는 특종이다. 그가 싱가포르 접촉의 전말과 협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밝힌 것은 ‘신동아’ 인터뷰가 처음이다. 그는 작심하고 증언에 나선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내가 북측과 접촉하던 시기에 실제로 있었던 일과는 다른 얘기가 언론에 사실처럼 보도되면서 남북관계에 악영향을 끼칠 게 우려돼 내가 한 일의 팩트(fact·사실)를 공개하기로 했다. 입 다물고 있으면 남북관계가 더 악화될 것 같았다.”
“얘기 다 끝난 상태에서 깨졌다”
임 전 실장은 ‘북한이 정상회담 뒷돈 요구를 거절당하자 천안함 폭침을 저질렀다’는 최근 언론 보도와 관련해 “북한이 정상회담 대가를 요구한 적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김양건 부장을 설득해 비핵화 문제를 정상회담에서 다루기로 했으며 이산가족, 국군포로, 납북자 고향 방문과 이산가족 상봉 정례화, 6·25전쟁 전사자 유해 공동 발굴 등을 협의해 서면으로 정리했다”면서 “이명박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이 정상회담에서 큰 그림에 최종 합의한 후 남북이 실무 논의를 거쳐 북한이 인도적 조치를 실제로 이행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쌀, 비료를 지원하는 프라이카우프 방식으로 논의를 진행했다”고 덧붙였다.
임 전 실장은 특히 이 대통령이 김정일과 정상회담을 한 뒤 국군포로, 납북자와 함께 귀환하는 이벤트가 무산된 것을 아쉬워했다. “싱가포르 협의 결과가 쌀, 비료가 급한 북한으로서는 얼마나 모욕적인 협상, 자존심 상하는 협상이었겠나”라고도 했다.
그는 협상 결렬과 관련해 “얘기가 다 끝나고 실무적 사안이 조금 남은 상황에서 깨졌다”면서 “협상이 깨지는 과정의 팩트를 정확히 해두는 것은 앞으로 남북이 신뢰를 구축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임 전 실장은 1월 9일 인터뷰에서는 ‘싱가포르 합의’ ‘장관급 회담에서 합의한 내용’ 등의 표현을 썼으나 1월 14일 ‘합의’라는 표현을 ‘협의’로 바꿔달라고 했다. 합의문이라는 표현도 ‘서면으로 정리한 문서’로 바꿔달라고 했다.
임 전 실장이 ‘신동아’에 싱가포르 협의 전모를 밝히기로 한 것은 일부 언론매체가 정부 고위 관계자 A씨의 발언을 대서특필하면서다. A씨는 1월 2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정상회담은 조건이 맞지 않았다. 쌀 갖고 와라, 기름 갖고 와라 하면서 북한이 구체적 요구조건을 들고 왔는데, 우리는 그런 조건에서는 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천안함, 연평도 사건은 원하는 조건대로 해주지 않은 것에 대해 북한식으로 저항한 것이다. 북한이 어느 언론 보도처럼 5억~6억 달러의 현금을 요구한 것은 아니지만 돈으로 환산하면 그 정도가 될 수도 있겠다.”
‘비선(秘線) 접촉’ 아닌 ‘장관급 회담’
이튿날 언론 지면에 A씨의 발언을 인용한 기사가 실렸다. ‘北, 정상회담 뒷돈 요구 거절당하자 천안함 폭침’ ‘北, 정상회담 대가 요구…거절하자 천안함 도발’ ‘北, 쌀·비료 5억 달러 요구했다’등의 제목이 붙었다.
A씨 발언대로라면 정상회담 개최 대가로 쌀, 비료를 내놓으라는 북측의 요구를 남측이 들어주지 않으면서 2010년 1월 북한의 ‘보복 성전’ 선언→3월 천안함 폭침→11월 연평도 포격이 발생한 것이다.
임 전 실장은 A씨의 발언에 대해 “적어도 내가 북측과 접촉하던 시기의 사실과는 다르다”고 반박했다.
▼ A씨는 “북한이 우리를 ATM처럼 생각했다”라고도 했습니다.
“언제 어떤 경로로 그런 얘기를 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기억하고, 제가 상대한 사람은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없어요.”
A씨는 관료 출신의 정부 고위 인사다.
“쉽게 말해 제가 당시 일을 가장 잘 압니다. 그냥 간 것도 아니도 장관 신분으로 싱가포르에 다녀온 겁니다(임 전 실장은 당시 노동부 장관이었다).”
언론은 이제껏 ‘임태희 비선(秘線)’이라고 보도하곤 했으나 임 전 실장은 ‘장관급 회담’이란 표현을 사용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대한민국 장관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보낸 통일전선부장을 만나 공식적으로 정상회담을 논의했다는 것이다.
김양건 여러 번 만나
2009년 10월 북한 고위인사 2명이 싱가포르 샹그릴라호텔에 투숙했다. 김 부장과 원동연 통일전선부 부부장이었다. 두 사람은 5박6일간 싱가포르에 체류했다. 10월 15일 베이징에서 날아와 20일 베이징으로 돌아갔다. 접촉 장소로 싱가포르를 선택한 것은 북한 인사가 일반 관광객처럼 무비자로 입국할 수 있어 보안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임 전 실장과 김 부장은 구면(舊面)이었다. 두 사람은 두 달 전(8월 21일) 서울 그랜드힐튼호텔에서 양주잔을 함께 기울였다. 김 부장이 김대중 전 대통령 장례식 조문 사절로 서울을 찾았을 때 일이다.
“북쪽과 소통 창구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조문에 참석할 때 대통령 면담을 시켜달라는 요청이 저한테 먼저 왔습니다. 그때 제가 역할을 했습니다.”
임 전 실장은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정책위의장 시절부터 김 부장 쪽과 소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싱가포르 접촉 이전에도 김 부장을 여러 차례 만난 것으로 전해진다. 싱가포르 만남은 두 사람이 그간 논의한 내용을 합의하는 성격이었다.
▼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움직인 건가요.
“그럼요. 장관 신분이 어떻게 그냥 가요….”
그는 ‘미션(임무)’이라는 표현을 썼다.
“통-통에서 서명하기 직전까지의 과정을 마무리해놓고 오는 게 (대통령이 지시한) 미션이었습니다. 내가 맡은 임무가 거기까지였습니다.”
그가 언급한 ‘통-통’은 한국 통일부- 북한 통일전선부 회담을 가리킨다. 남북대화 채널은 크게 셋이다.
통일부가 주연 격인 공식-공개 채널은 남북이 협상장에서 논의하는 것으로 언론에도 보도된다. 공식-비공개 채널의 주연은 정보기관인 예가 많다. 통일부도 공식-비공개 라인을 가동할 때가 있다. 마지막으로 비공식-비공개 채널, 즉 비선(秘線)이 있다. 임태희 라인은 ‘장관급 회담’이었다는 점에서 공식-비공개 채널로 봐야 할 듯하다.
임 전 실장은 김양건 부장과 정상회담, 국군포로 및 납북자 고향방문, 한반도 비핵화, 이산가족 상봉 및 고향방문, 인도적 지원(쌀 비료) 문제, 국군 유해 발굴 등 6개 항목에서 의견 접근을 봤다. 두 사람은 협의한 내용을 서면으로 정리했다. 정상회담 협의사항은 통-통 채널로 넘겨 최종마무리하기로 했다.
국군포로·납북자 고향방문 공감대 이뤄
▼ 서면으로 정리한 문서에 ‘비핵화’라는 단어가 들어 있습니까.
“물론 들어가 있죠. 김 부장이 정상회담을 하겠다기에 비핵화 문제를 의제에 올리자고 했습니다. 북측은 초기에는 의제에 올리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북미 간에 대화할 문제이지, 남북 간에 논의할 게 아니라는 식이었습니다. 대화하면서 의제가 돼야 한다고 설득했습니다. 결국 정상회담에서 의제로 삼기로 정리했습니다.”
싱가포르 접촉 직전 남북 사이엔 훈풍이 불었다. 북한이 ‘숙이고 들어오는’ 자세를 보인 것. 2009년 9월 6일 북한이 임진강 황강댐 물을 방류해 남측 하류에서 야영하던 남측 주민 6명이 사망했다. 북측은 이례적으로 하루 뒤 신속하게 해명했다. 임태희 라인의 설득 덕분이었다.
2009년 추석 때 이산가족 상봉은 역사상 처음으로 식량지원 없이 이뤄졌다. 쌀을 수십만 t씩 퍼주고도 핵실험으로 뺨을 얻어맞은 과거 정부와는 달리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받아낸 것.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북한에 쌀을 주고 이산가족 상봉을 받아와 국내 정치에 활용했다. 북한은 상봉 행사와 쌀, 비료 지원을 항상 연계했다.
임 전 실장은 “한반도 비핵화, 국군포로 및 납북자 문제, 이산가족 문제, 인도적 지원 문제, 국군 유해 공동 발굴 사업을 정상회담에서 의제로 삼기로 김양건 부장과 협의했다”고 밝혔다. 정리된 서면에는 “이명박 대통령 평양 방문 시 전쟁시기와 그 후 소식을 알 수 없는 사람들 ○명의 고향방문을 실시한다”는 내용도 담겼다.
‘전쟁시기와 그 후 소식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은 납북자와 국군포로를 가리킨다. 납북자, 국군포로의 고향방문이 정상회담 전제조건이었고 이를 북한이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정상회담이 열렸다면 이 대통령은 평양에서 김정일을 만난 후 납북자, 국군포로 ○명과 함께 서울로 귀환했을 것이라는 얘기다. 임 전 실장은 이 대목을 특히 안타까워했다.
“그런 조건이 협의가 됐어요. 그게 얼마나 대단한 거예요.”
▼ 한두 명만 한국으로 돌아왔어도 남북관계가 크게 달라졌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요. 북한이 납북자, 국군포로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한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북한은 그간 국군포로 및 납북자의 존재를 부인해왔다. 임 전 실장과 김 부장이 정리한 서면에는 납북자, 국군포로 문제를 인도적 조치(쌀, 비료 지원)와 연계해 해결한다는 내용도 담겨 있다.
“쌀, 비료 당연히 요구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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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독은 냉전 시절 동독 반체제 인사 석방 사업을 벌였다. 3만3755명을 서독으로 데려온 대가로 34억6400만 마르크 상당의 현물을 동독에 건넸다. 서독은 이 프로젝트를 프라이카우프(Freikauf·‘자유를 산다’는 뜻)라고 불렀다. 임 전 실장은 이 방식을 원용해 협상했다.
“국군포로, 납북자, 이산가족 문제에 대한 북측의 인도적 조치에 상응해서 우리가 식량이나 물품을 지원하는 프라이카우프 방식으로 협의가 이뤄진 겁니다.”
▼ 북한이 정상회담 대가로 쌀과 비료를 요구한 것은 아니고요?
“앞서 밝혔듯 그것은 잘못 알려진 얘깁니다.”
그는 이렇게 부연했다.
“북측에서야 당연히 쌀, 비료를 요구하죠. 예전엔 정상회담을 하는 조건, 이산가족 상봉을 하는 조건으로 쌀, 비료를 줬습니다. 북측이 원하는 게 있듯 우리도 원하는 게 있으니 그것을 연계해서 하자는 거였습니다. 북측이 우리가 원하는 조치를 시행하려면 내부적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게 쌀과 식량이었습니다.
두 정상이 납북자, 국군포로를 포함한 이산가족 문제를 정상회담에서 논의해 해법에 합의한 후 북측이 조치를 취하는 것에 따라 남측이 경제지원을 하는 게 협의의 골자입니다. 정상회담을 여는 대가로 얼마를 주기로 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에요. 내가 접촉한 그 라인 말고 북측의 다른 곳에서 엉뚱한 얘기를 한 것일 수는 있지만,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 제가 공식적으로 정상회담 논의를 하는 과정에서 그런 얘기는 없었습니다.”
▼ 정상회담을 위한 비밀접촉 도중에 북측이 5억~6억 달러를 요구하는 바람에 회담이 무산됐다는 일부 언론 보도도 있었습니다.
“사실이 아닙니다. 보도의 근거가 뭔지를 모르겠어요.”
▼ 나중에 지원할 쌀, 비료를 합치면 그 정도 되는 것 아닙니까.
“노무현 정부 때 한 해 남북협력기금이 7000억 원가량이었습니다. 북한에 쌀, 비료 주던 예산입니다. 해마다 쌀 30만~40만t을 북한에 보냈습니다. 이명박 정부는 한 번도 집행하지 않았습니다. 프라이카우프 방식에서 인도적 지원은 이 예산 범위에서 이뤄지는 겁니다.
쉽게 예를 들어 고향방문을 실시하면 ○t, 상봉을 실시하면 △t, 서신 교환을 하면 ◇t 이런 식으로 인도적 지원을 하는 겁니다. 북한 처지에서 쌀이 급하면 고향방문을 받아들이게 되는 거죠. 고향방문이 이뤄지지 않으면 쌀을 덜 주면 되는 것이고요.
예를 또 하나 들어보죠. 황해도 사리원이 고향인 대한민국 국민이 고향을 방문합니다. 그 사람에게 남측 정부가 쌀을 줘서 보내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 지역 식량 문제가 다 해결되는 거고요. 고향방문 1만 명을 했다고 생각해보세요.
고향방문이 이뤄질 때마다 쌀을 얼마를 줄 것인지 등은 이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정상회담에서 큰 그림에 합의한 뒤 실무자들이 만나 논의하기로 했습니다. 납북자, 국군포로, 이산가족과 관련해 생사 확인, 서신왕래, 상봉, 고향방문 등 여러 패키지가 있잖아요. 고향방문의 영향력이 가장 크지 않습니까. 북으로선 시행하기 어려운 것이고요. 그것에 대해선 많은 인센티브를 주자, 이런 식이었습니다 .
또한 이산가족 상봉을 정례화하기로 합의했습니다. 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협상하지 말자, 정례화해 상시 준비하자고 했습니다. 이산가족 문제보다 더 중요한 인도주의적 문제가 없습니다. 예컨대 상봉으로 끝나면 쌀을 △t만 주고, 고향방문을 하면 ○t을 준다면 고향방문이 성사될 것 아닙니까.”
▼ 비유하자면 북한이 ‘인도적 외화벌이’를 하는 거군요.
그가 정색하고 답했다.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그것은 그렇게 표현하는 게 아니죠. 대한민국에서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 때문에 남북관계가 잘 안 돼요. 그러면 우리는 인신매매하는 거라고 봐야겠네…. 그런 식으로 사안을 보면 안 된단 말이에요.”
▼ 국군 유해 공동 발굴 사업은 뭡니까.
“우리가 6·25전쟁 전사자 유해 발굴을 남쪽에서 하고 있잖아요. 우리의 전쟁 기록을 보면 승리한 기록은 자세히 서술하고 패배한 기록은 간단히 거론합니다. 전투 기록에 따라 유해를 발굴하면 중공군, 북한군 유해가 주로 나옵니다.
뒤집어 생각하면 국군 유해 발굴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북한의 전쟁 기록을 살펴봐야 해요. 그래야 국군 유해 발굴이 제대로 이뤄진다는 말이죠. 북한군이 승리한 곳에서 유해를 찾아야 해요. 내가 김 부장에게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합리적이잖아요. 협상은 떼쓴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누구 말마따나 협박을 당하고 칼이 들어와도 체제 간엔 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합리적이어야 그 사람도 평양에 가서 설명을 하죠. 협상이 진전되려면 상대방의 입장을 세워줘야 합니다.”
‘所管의식’ 탓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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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전 실장은 정상회담 논의 과정 및 협상 결과에 자부심을 가진 듯했다. 하지만 결국 남북 정상회담은 열리지 않았다.
2009년 11월 7일, 14일 개성에서 통일부와 통일전선부가 정상회담 조건을 놓고 대화했으나 협상이 결렬됐다. 통-통 회담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역시 그간 엄밀한 증거(hard evidence)가 포착되지 않았다. 이명박 대통령, 임 전 실장, 현인택 전 통일부 장관이 지금껏 구체적 내용을 언급하지 않아서다.
▼ 정상회담 논의가 이뤄지는 흐름에 불만을 가진 쪽에서 싱가포르 협상 사실을 언론에 의도적으로 흘렸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사실인가요.
“그런 게…. 쉽게 말하면 국회의원으로 일할 때하고 장관 할 때하고 달라지더라고요. 그 점만 제가 얘기할게요. 우리나라는 이런 문제에 대해서 일종의 흔히 얘기하는 소관(所管)의식이 있습니다. 열심히 하려는 것도 좋고, 책임지고 챙기는 것도 좋은데, 그게 일을 이뤄지도록 하는 쪽으로 그렇게 해야 하는데….”
대북 라인이 ‘협상파’와 ‘대화파’로 갈라져 남북관계가 꼬였다는 관측도 있다.
▼ 현인택 당시 통일부 장관은 원칙을 강조했고, 임 전 실장은 대화를 강조해 서로 부딪쳤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통일부 장관과 노동부 장관의 의견이 달랐다면 그런 상황에서 대통령이 저를 싱가포르에 보냈겠습니까. 한번 생각해보세요. 이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제가 장관 자격으로 다녀온 것인데, 대통령이 그런 어설픈 상태로 보냈겠습니까.”
▼ 11월 7일, 14일 개성회담에선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그것은…. 나는 그것에 대해선 모릅니다. 내가 맡은 미션은 통-통 회담을 잡아놓고 오는 것까지였습니다. 통-통 회담이 잘못된 것으로 봅니다. 장관급 회담에서 이만큼 해간 것을 두고 실무적으로 뭘 논의했는지는 알지 못해요.”
그는 “내가 직접 한 일만 말하겠다”고 했다. 개성회담 때 그는 노동부 장관이었지만 이후 대통령실장을 맡았다. 대통령실장은 대통령과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낸다. 수석비서관 회의는 물론이고 각종 긴급회의에 당연직으로 참석한다. 그랬던 그가 11월 7일, 14일 발생한 일을 실제로 모르는지, 알면서도 모른다고 하는지는 알 수 없다. 정상회담 논의가 결렬되는 과정과 관련한 그의 언급에는 행간을 읽어야 할 대목이 많다.
“장관급 회담서 이만큼 해놨는데…”
흘러나오는 얘기는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북측이 쌀, 비료의 선(先)지원을 요구하면서 국군포로 납북자 문제 등과 관련해 싱가포르 협의 내용을 뒤집어 결렬됐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남측이 싱가포르 협의 때보다 많은 최소 10명 이상의 국군포로, 납북자 고향방문을 요구했으며 서울 혹은 판문점에서 정상회담을 열자고 제안해 북측이 “왜 말을 바꾸느냐”고 반발하면서 회담이 결렬됐다는 것이다.
임 전 실장의 설명은 이렇다.
“북한 처지에서 보면 (정상회담 대가로 쌀, 비료 등) 요구하지 않은 것을 요구했다고 지금 우리 측에서 얘기하는 것인데, 북한이 그런 요구를 했다면 제가 협상을 했겠습니까. 또 북이 그런 요구를 했는데 대통령이 협상을 허용할 리가 있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이 문제는요, 남북대화를 아예 안 할 거라면 몰라도 앞으로 남북이 대화할 때 이 문제와 관련한 팩트가 매우 중요해요. 김양건 부장은 그렇게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임 전 실장은 1월 9일 인터뷰 때 이 대목에서 이러저런 얘기를 했으나 나중에‘오프 더 레코드’를 요구해와 관련 언급은 기사에 싣지 않는다.
▼ 남측이 고향 방문하는 국군포로, 납북자 수를 10명 이상으로 늘리고 회담 장소를 판문점으로 하자고 해서 결렬됐다는 얘기도 있는데….
“그러니까…. 판문점에서 정상회담을 한다면 국군포로를 어떻게 데려옵니까. 평양 갈 때 데려오는 거지. 그것을 판문점으로 바꾸자고 그러면 되겠어요, 얘기가? 생각해 보라고요.”
이와 관련해 한 대북 소식통은 “북한은 이명박 정부가 말로는 원칙을 지켜가면서 대화하자고 해놓고 결정적 순간에 거꾸로 약속을 지키지 않아 망신을 줬다고 생각한다. 국군포로, 납북자를 남쪽으로 보내기로 한 것은 북한이 대단한 결심을 한 것이다. 통 큰 양보를 하면서 정상회담에 합의했는데 남측에 뒤통수를 맞았다고 여긴다”고 주장했다.
“당시 협의 토대로 대화 시작해야”
▼ 북측이 뒤통수 맞았다고 여긴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내 얘기가 바로…. 신뢰라고 하는 것은….”
그가 말허리를 돌렸다.
“그때가 진행이 거의 마무리된 상태였단 말이에요. 일부 실무적 사안이 조금 남았는데, 통-통 회담이 그것을 완성하기 위한 회의로 진행된 것이 아니라 그간 논의돼 정리된 내용이 아닌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는 식이었으면 신뢰가 깨지죠. 다 얘기가 끝났는데 새로운 문제를 내놓으면…. 어느 쪽에서 뭘 새로 제의했는지 저는 모르겠어요. 통-통에서 어떤 내용이 논의됐는지는 앞으로의 남북관계에서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북측에서 인도적 조치는 아무 것도 안 하겠다고 하면서 쌀부터 달라고 했으면 저쪽이 깬 겁니다. 우리 쪽에서 인도적 조치와 관련한 얘기를 하지 않으면서 ‘너네는 무조건 달라고만 하느냐’고 했으면 우리가 북측에 실례를 한 거고요.”
▼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이런 내용을 전혀 모릅니까.
“당선인에게 직접 설명드릴 기회는 갖지 못했습니다.”
▼ 임태희-김양건 협의를 새 정부가 활용할 수 있으리라고 봅니까.
“당시에 의견 접근을 본 부분을 존중하는 토대 위에서 대화를 시작하는 게 신뢰 구축에 가장 빠른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보완해야 할 것은 보완해야 하겠고요.”
▼ 당시 협의 내용에서 출발하면 단기간에 정상회담을 개최하는 것도 가능할까요.
“상황이 달라졌어요. 우선 북측 지도자가 바뀌었습니다. 쌀, 비료를 레버리지로 쓰는 게 예전 같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아는 것보다 북의 사정이 긴박하지는 않다고 듣고 있습니다.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협상 레버리지가 별로 없습니다. (싱가포르 협의가) 북한 처지에서 얼마나 모욕적인 협상이었겠습니까. 아주 모욕적인 협상이죠.
북한 처지에서 납북자 문제를 거론하는 게 얼마나 자존심 상하는 일이겠어요? 식량 문제가 없었다면 그런 식의 협의를 했겠습니까. 문제가 뭐냐면, 여러 경로를 통해 북에 물자가 들어가고 북한 당국이 사(私)경작을 부분적으로 허용하면서 식량 사정이 좀 개선될 겁니다. 이 경우 쌀과 비료를 레버리지로 쓰기가 어렵게 되죠. 그러면 남북관계를 풀기 어려워집니다. 우리가 주도권을 놓칠 가능성이 많아요. 지금 생각해도 안타까운 게 바로 그런 부분입니다.”
그는 “계속 입 다물고 있으면 남북관계가 더 나빠질 것 같았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했을 때까지의 일에 대해선 팩트를 정확하게 알려야 앞으로 남북대화 할 때 왜곡이 발생하지 않겠다는 생각에서 얘기를 한 겁니다. 김정일이 사망했고, 기왕에 이런저런 보도가 나온 상황에서 팩트는 팩트대로 밝혀놔야겠더군요. 남북이 나중에 대화를 재개할 때는 사실을 바탕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이명박 정부는 집권 첫 해인 2008년 20대 국정전략 및 100대 국정과제를 내놓았다. 그중 남북관계는 ①북핵 폐기를 지속적으로 추진하겠다 ②비핵·개방·3000 구상(나들섬 구상 포함)을 추진하겠다 ③남북 간 인도적 문제를 해결하겠다 등 세 가지다. 이 셋 가운데 성과를 낸 것은 하나도 없다.
▼ 이명박 정부는 남북 관계에서 성과를 낸 게 거의 없습니다.
“경위야 어떻든 천안함, 연평도 사건이 일어나 결과적으로 남북대화가 지속되기 어렵게 됐죠.”
▼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은 왜 일어났다고 봅니까.
“북한 내부 사정 탓 아니겠어요?”
“외교 장관은 나와 생각 같아”
▼ 쌀, 비료를 안 줘서 도발한 측면이 있지 않습니까.
“남북관계가 잘 안 될 때 안 된 이유를 그렇게 설명하면 쉬울지 모르겠지만 그런 시각은 남북관계 개선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봅니다.”
그는 언론에 하고 싶은 얘기라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신동아’가 남북관계가 잘 흘러가는 쪽으로 기사를 쓰려면 북한을 ‘땡깡’이나 놓는(떼쓰는) 곳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아까 질문에서 나온 것처럼 ‘외화벌이나 하는 곳’이라는 식으로 다루면 안 돼요. 보수 언론은 북한과 협의하면 ‘원칙 없는 사람’이라고 비판합니다. 고집을 부리면서 협상을 깨고 오면 원칙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요. 보수 언론이 균형 감각을 갖고 그런 부분을 들여다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일 무식한 협상가가 자기 고집만 세우면서 자기 얘기만 하는 겁니다. 그러곤 소신을 펼치고 왔다고 말합니다. 그런 사람은 협상에 나갈 자격이 없는 거예요. 하수(下手) 중 하수죠. 남북관계를 진지하게 다뤄주세요. 어떤 점 때문에 분위기가 바뀌었나, 북한에선 뭘 더 하려 했고 우리는 뭘 더 하려 했나…, 그런 게 있을 겁니다. 당시엔 협의가 틀어질 이유가 없었어요.”
▼ 한 인터뷰에서 “현 정부 들어 임기 내내 남북관계가 경색됐는데 내가 실장으로서 좀 더 강하게 관계 회복을 권유해야 했다”고 말했더군요.
“그런 말을 내가 했는지 기억이 잘 안 나는데요. 천안함, 연평도에 발목 잡혀 아무것도 못하면 역사적으로도, 남북관계의 현재를 봐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대통령께 건의했습니다.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행사 때 대통령 연설문에 ‘더 이상 천안함, 연평도에만 머물면 안 된다. 앞으로 나가야 한다’는 문구를 넣는 것을 두고 격론이 벌어졌습니다.
나와 김성환 외교부 장관은 대화를 해야 한다는 쪽이었습니다. 다른 분들은 우리보다 강경했습니다. 이 대통령이 민주평통 행사 때 그런 원칙을 천명하는 것에 그치고 행동으로는 못 간 게 아쉽습니다. 대통령이 말씀한 것을 받아 앞으로 나가기 위한 조치를 추진했어야 하는데….”
▼ 역량 부족이었나요, 못 챙긴 건가요.
“실장이 챙길 일이 너무 많았습니다. 동남권신공항, 복수 노조, 과학벨트, 농협법, 검경 수사권, 저축은행, 대학 구조조정, FTA(자유무역협정) 비준 등이 모두 2011년에 해결된 겁니다. 남북대화 문제까지 실장이 관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주무 부처 장관도 아니었고요.”
‘대한민국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고 명시한 헌법 제3조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대통령의 통일 정책, 대북 정책은 한반도 미래와 직결돼 있다. 임 전 실장이 밝힌 비밀접촉 관련 내용에는 박근혜 정부가 교사 혹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내용이 가득하다. 박근혜 당선인의 대북 정책 열쇳말은 ‘신뢰’다.
△강력한 억제력 △대화의 유연성을 토대로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실현해나가겠다는 것. 그러려면 싱가포르 비밀접촉, 개성에서의 협상 결렬,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남북간에 일어난 일을 임 전 실장의 말처럼 ‘팩트 중심’으로 복기해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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