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조선] 노현정 시어머니 "결혼 반대했었는데, 정몽준 의원이…"
‘본태박물관’ 개관
왼쪽부터 정대선 현대 비에스앤씨 대표, 본태박물관을 연 이행자 고문, 며느리 노현정 전 아나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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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눈이 왔다. 내리는 눈을 보며 이행자 고문이 입을 열었다. “자기들, 럭키하네.” 40여 년간 모아온 소장품들을 모아 본태박물관을 연 그가, 켜켜이 쌓였던 이야기도 함께 풀어놓았다. 그동안 한 번도 말한 적 없는 현대가 며느리의 삶. 아들 정대선 대표와 노현정 전 아나운서의 러브 스토리도 최초 공개한다.
공영방송 아나운서보다 현대가의 며느리가 더 어울리는 옷이 됐다. 결혼 7년 차, 방송을 중단한 후 좀처럼 근황을 알 수 없던 노현정 전 아나운서를 제주도에서 만났다. 아이가 어려서 함께 오지 못했다는 말을 듣고야 ‘아, 두 아이의 엄마였지?’ 하고 끄덕일 만큼 활동하던 시기와 변함이 없는 모습(그에게는 여섯 살, 네 살 아들이 있다). 얼굴선을 타고 흘러내리는 커트 머리, 흰 얼굴, 여린 몸매도 여전했다. 달라진 게 있다면 한 가문의 완연한 며느리가 되었다는 것. 시어머니인 이행자 고문이 소장품을 모아 서귀포시에 ‘본태 박물관’을 개관했다. 셋째 며느리 노현정은 이곳저곳을 분주하게 오가며 초대한 손님들을 살뜰히 챙겼다. 음식이 모자라지는 않는지, 보일러가 너무 세게 돌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살피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이행자 고문은 40여 년간 장롱, 소반, 보자기 같은 민속품, 공예품을 수집했다. 그 소장품들이 박물관을 열 정도의 규모로 쌓였다. 창고에 있던 소품들이 세상 밖으로 나왔다. 불어로 ‘아름다움을 찾아서’, 한국어로는 ‘원래의 모습’, ‘본때’라는 뜻의 본태박물관은 세계적인 건축가인 일본의 안도 타다오가 직접 설계했다. 안도 타다오가 지금처럼 널리 알려지기 전인 15년 전, 일본 여행에서 그의 건축을 보고 감명받은 이 고문이 그를 찾아가면서 둘의 인연이 시작됐다. 박물관 관장은 둘째 며느리인 김선희 씨가 맡았다. 그는 대학에서 미술사학을, 대학원 과정으로 미술을 공부했다고 한다. 인터뷰를 위해 이행자 고문과 둘째 며느리 김선희 관장, 셋째 며느리 노현정이 나란히 테이블에 앉았다. 첫째 며느리인 구은희(LS산전 구자엽 회장의 장녀) 씨는 어머니가 상중인 까닭에 참석하지 못했다.
시아버지 정주영 회장 눈치 보느라 못 했던 숙원을 풀다
“마음이 힘들거나 어려운 일이 있을 때면 인사동이나 장한평에 갔어요. 거기 골동품 가게에 쪼그리고 앉아서 이것저것 구경하고 있으면 근심 걱정을 잊었지. 그렇게 보다가 빈손으로 나오기 뭣해서 하나둘씩 사 모았던 게 이렇게 모였어요. 이 중에 비싼 물건은 없지만 저한테는 다 보물이에요.”(이행자)
40년을 모았다. 처음에는 큰 자개장롱 같은 걸 모았는데 자리를 많이 차지하고 보관할 데도 없어 그 후로는 소반을 모았다. 소반만 200점을 모으니 개중에는 보기 드문 것도 많았다. 그 다음에는 보자기, 조각보를 모으고 조각보에 어울리는 수예품들을 모았다.
“박물관을 하려다 보니까, 제가 갖고 있고 싶기보다 더 내놓고 싶어요. 여기 와서 보면 되니까. 아끼는 거니까 내가 가져야지, 아들 줘야지, 이런 마음은 없어요. 혹시 시시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안도(타다오) 건물에 해놓으니까 빛이 나네요. 사실은 소박하고 값진 물건은 아니에요. 희소해서 가치가 있지.”
시어머니의 말에 며느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홀로 된 시어머니에게 소박한 민예품은 아들, 며느리도 손주도 줄 수 없는 위안을 주었다. 다른 친구들이 골프를 치러 갈 때 이 고문은 골동품 가게에 갔다.
“어머님이 처음에 박물관을 여신다고 했을 때 왜 하실까 했어요. 살아온 삶도, 관심 있는 분야도 잘 몰랐으니까요. 워낙 전통문화에 관심이 있으세요. 예전엔 늘 쓰던 생활용품들인데 요즘 아이들은 전혀 모르니까. 그런 게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으셨대요.”(노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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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집안이 좀 보수적이에요. 봉건적인 면도 있고요. 저는 며느리들한테 가르칠 게 없어요. 저희 집에서 하는 제사 몇 번만 해보면,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감이 와요.”
이 고문은 그때나 지금이나 제삿날은 누구보다 먼저 본가에 간다. 늘 앉는 자리에 앉아 전을 부친다. 왼손으로는 반죽을, 오른손으로는 지짐을 하는 손길이 능숙해, 전집 내도 되겠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다.
왼쪽부터 큰 며느리 구은희, 이행자 고문, 작은 며느리 김선희, 막내 며느리 노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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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부터 혼자 아들 셋을 키우는 게 보통일이 아니었어요. 그 후로는 저도 변했죠. 일도 해야 하고 아이들도 키워야 하고, 바빠 죽겠는데 말을 돌려서 하고 이럴 정신이 없잖아요. 그래서 저는 간접화법, 이런 건 못해요. 다 직설적으로 하지.”
남편 잃고 홀로 아들 셋 키워낸 지난 23년
이 고문은 직설화법을 쓴다. 하지만 말을 많이 하는 건 아니다. 딱 필요한 말만 콕 집어서 한다. 며느리들한테 이야기할 때도 여러 말 하지 않는다. 주변에서는 그를 ‘1등 시어머니’라고 부른다는데, 뭘 잘해줘서라기보다는 긴 말 안 하고 자주 부르지 않아서란다.
“아들보다는 며느리 입장에서 생각하려고 많이 하세요. 맛있는 거 보내주실 때도 아들 이야기는 안 하시고, ‘이거 너랑 애들 나눠 먹거라.’ 그러세요. 저희 어머니가 싫어하시는 건 저희가 안 예쁘게 하고 나타나는 거.(웃음) 미학적인 안목이 있는 분이라, 예쁘게 안 하고 다니는 거 싫어하세요. 아들들도 살찌면 빼라 그러시고.”(노현정)
“저는 결혼해서 한동안 어머님이랑 같이 살았어요. 물건들 대하시는 걸 보면서 얼마나 아끼시는지 알았죠. 그런데도 이번에 박물관 준비하면서 정말 놀랐어요. 하루에 백 가지 일을 하시는데, 박물관 주변 쓰레기도 아침 일찍 일어나 직접 주우세요. 저는 어머님 시키시는 거 하기에도 정신이 없는데, 그러면서 사업하시고 박물관 개관하시고 집안일까지 챙기시는 거 보면 말하지 않아도 그냥 존경이 앞서는 거죠.”(김선희)
이 고문이 하는 일 중에는 메이크업과 ‘헤어 그루프 말기’도 있다. ‘샵에 다녀온 줄 알았다’고 했더니 “누가 내 머릴 해주느냐”며 “다 직접 했다”고 한다. 하나부터 열까지 직접 하는 게 그의 스타일이다.
“김장도 전부 직접 해요. 장도 다 담가 먹고요. 집 앞 마당에 장독대 묻어두고 꺼내다 먹어요. 애들도 나눠주고. 생전 그렇게 해와서 당연한 일이다 생각해요. 이번에 박물관 열 때도 다른 사람 손 빌린 거 없어요. 집안(현대)에 폐를 끼치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일절 도움 안 받으려고 했어요.”
아침부터 쓰레기를 줍는 일도, 찾아온 손님들 대접할 도시락 싸는 일도 새벽부터 일어나 직접 했다. 그래도 힘든 줄 몰랐다. 오랜 염원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시아버지가 살아계실 땐 엄두도 내지 못한 일이다. 집안 분위기가 워낙 보수적이기도 했지만, ‘먹고사는 일’이 중한 시대에 ‘문화를 향유하는 일’은 뒷전으로 밀리기 마련이었다. 그에게 용기를 준 건 도련님인 정몽준 의원 내외였다. “형수님 하고 싶은 일이니 하셔야 되지 않겠느냐”며 든든하게 지원해줬다.
“형수가 일찍 혼자 돼서 어렵게 사는 걸 (정)몽준 의원이 늘 안쓰럽게 생각했어요. 워낙에 각별해요. 동서랑 결혼할 때 두 사람을 소개한 게 저거든요. 우리 동서도 그래요. 형님 하고 싶으신 일 마음껏 하시라고. 그 두 분의 지지가 큰 힘이 됐죠.”
어느 날 KBS 뉴스 틀더니, “저 앵커 어때요?”
정몽준 의원에게 큰 힘을 받은 사람은 이 고문만이 아니다. 노현정 전 아나운서도 이 고문의 셋째 아들인 정대선 현대비에스앤씨 대표와 결혼할 때 그의 지지가 컸다. 7년 전이던 2006년 KBS <상상플러스>, <스타골든벨> 등으로 아나테이너의 최전방에 있던 노현정 아나운서는 당시 소개로 만난 대선 씨와 두 달 만에 결혼식을 올렸다. 시어머니 이행자 고문은 그때를 이렇게 기억한다.
“어느 날 아침에 대선이가 방에 들어오더니 TV를 켜더라고요. KBS 6시 뉴스였는데, 진행하는 앵커를 보면서 ‘저 사람 어떠냐’는 거야. ‘어떠긴 뭐가 어떠냐’ 그랬더니 ‘저 사람 사귀려는데 어떠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이 자식이 정신이 있나. 안 된다.’ 그랬죠. 우리 집안에서 방송하는 사람이랑 결혼한 일이 없으니까. 근데 셋째가 고집이 좀 있거든. 자기는 저 사람 아니면 안 된다는 거예요. 말이 잘 통한대. 하나를 말하면 열을 알아듣는대.”
처음엔 반대했다. 집안 누구도 그런 전례가 없어 조심스러웠다. 큰형 일선 씨도 반대였다. 대선 씨는 다른 선은 보지 않았다. 아들의 고집을 아는 어머니는 걱정이었다. 주변에 자문을 구했다.
“제가 강부자 씨랑 친해요. 우리 아들이 노현정이라는 아이를 만난다는데 어쩌냐고 물었더니. ‘그 사람 요즘 대세야.’ 그러더라고요. 몽준 의원이야 늘 저희 집에 관심이 많고 잘 챙기니까, 한 날은 ‘어려운 일 있으면 말하시라’는 거예요. ‘대선이가 선도 안 보고 아나운서랑 결혼한대요. 어떡해.’ 그랬더니 ‘아이고 형수, 아나운서가 얼마나 똑똑한데 모르는 소리 말아요. 하겠다고 하면 얼른 시켜요.’ 그러더라고. ‘그래요?’ 그러고는 속으로는 ‘다행이다.’ 했지. 몽준 의원 허락을 받아서.”
결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6월에 소개로 만나 8월 초에 상견례를 하고 그달 말에 예식을 올렸다. 워낙 많은 프로그램을 하던 인기 아나운서라, 재벌가에 시집을 가는 것도 이슈인데 결혼까지 서두르니 이런저런 말이 쏟아졌다. 노현정은 결혼과 동시에 미국으로 떠났다. 방송은 물론 이전의 생활을 모두 정리했다. 한창 때인 아이를 저래도 되나, 시집살이가 센 게 아닌가 걱정한 건 되레 시어머니 이 고문이었다.
“첫인상이 착했어요. 눈이 동그래서 이렇게 보는데, 우리 아들이 하나를 말하면 열을 알아듣는다고 한 게 무슨 말인지 알겠더라고요. 막상 결혼하고는 제가 안쓰러워서 혼났어요. 결혼 전에 만나던 사람들하고는 못 만나게 되니까요. 앞으로의 생활은 이전이랑 전혀 다르니까 적응해야 한다는 거예요. ‘현대 가문의 룰을 배우고 형수들이랑 똑같이 해라.’ 이러는데, 남의 집 귀한 딸을 데려다 그래도 되나 싶고요.”(이행자)
“워낙에 소문이 많았잖아요, 저희가. 그래서 남편이 더 그런 거 같아요. 저는 살림을 남편한테 배웠어요.(웃음) 제가 단순해요.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면서 산 거 같아요. 미국에서 둘이 사는 시간이 있었으니까 그때 부엌살림부터 이불 정리, 운전하는 법까지 다 배웠어요. 저도 모르게 남편이 원하는 대로 만들어져가고 있더라고요.(웃음) 지금 돌아보면 남편이 하려고 했던 방향이 맞는 거 같아요.”(노현정)
현대가 며느리들이 보여준, 본때
“박물관을 열면 제주도에 내야겠다 생각했어요. 제주도가 너무 좋아서, 나이 먹어서도 여기 있어야겠다 했죠. 근데 갑자기 제주도가 유명해지데. 세계 7대 경관에 들고. 박물관을 생각한 건 15년 전인데, 그땐 아버지가 계셔서 무서우니까 야단치실까 봐 못 했어요. 사고 싶은 건 거의 다 놓쳤지, 돈이 없어서. 우리 아버님이 돈을 안 주셨거든.(웃음) 삼성하고 현대가 다른 점이 그거지. 홍라희 관장이라는 친구니까, 박물관 연다니까 격려를 해줬어요. 처음에는 반대했어요. 너무 힘들다고. 제가 이걸 해보니까 그 말이 맞겠구나 싶어요. 나는 조직도 없이 며느리들이랑 하잖아.”
조직도 없이 며느리들이랑 한다는데, 그 며느리 조직이 제법 괜찮아 보인다. 박물관 담당 둘째 며느리, 홍보 담당 셋째 며느리는 이 고문의 왼쪽과 오른쪽에 앉아 든든히 자리를 지켰다. 본태박물관의 ‘본태(bonte)’는 프랑스 고어로 ‘아름다움을 찾아서’라는 뜻이다. 한국말로는 ‘본때’다. 본때를 ‘보여주겠다’라고 할 때 쓰는 ‘본래 자기의 모습’. 이행자 고문은 시집온 뒤 40여 년을 누워도 잠들지 못하고, 눈물이 나도 울지 못하는 세월로 보냈다. 숙원이었던 박물관을 열고 나서야, 창고에 갇혀 있던 소품들이 세상 밖으로 나온 걸 보고야 꽁꽁 싸매고 있던 마음의 끈이 툭, 하고 풀렸다. 살면서 처음 그가 마음을 열고 내비친 속을 들여다보니 구중궁궐에 사는 것 같던 재벌가 며느리의 삶이 이리도 고단한가 싶다.
“저는 그동안 다른 사람의 10배, 20배의 삶을 살아온 거 같아요. 돌아보니 열심히 산 게 아깝지는 않아요. 열심히 살았으니까 오늘 같은 날도 볼 수 있는 거겠죠?”(이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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