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정 치/법

본명 감추고 7년 유령생활… 노조위원장 출신 `벤츠 마니아`(조선닷컴 2010.01.23)

본명 감추고 7년 유령생활… 노조위원장 출신 '벤츠 마니아'
주식 한번 안해본 女검사에 덜미

전국을 돌아다니며 피라미드식 주가 조작을 통해 250억원의 부당 이득을 챙긴 일가 친·인척 등 24명이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세조사1부(부장 전현준)에 적발됐다.



일러스트=이동운 기자 dulana@chosun.com

주범인 정씨(45)는 금융전문가가 아니다. 대학을 중퇴하고 전남 여천의 화학회사를 다녔으며 노조를 결성해 위원장까지 지냈다.

정씨는 1998년 회사를 그만뒀다. 증권가에 IT붐이 일 때였다. 연일 코스닥 주가가 폭등했다. 정씨는 여기에 주목했다. 인터넷 동호회를 통해 어깨너머로 주식 매매와 차트 분석법을 배웠다. 그러다 2002년 주가 조작에 처음 발을 담갔다.

2002년 작전주(作戰株)의 원조로 불리는 '델타정보통신'을 사고 팔았던 것이다. 이 일이 나중에 적발돼 그는 집행유예 선고를 받았다. '전과(前科)'는 그를 반성하게 만드는 대신 범행을 더 치밀하게 하도록 했다.

정씨는 배신을 밥 먹듯 하는 주가 조작의 세계에서 혈육보다 더 나은 보증서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형제들을 끌어모았다. 사업가 큰형, 직업군인 둘째형에 나이트클럽을 하던 셋째형을 가세시킨 것이다.

여기에 자기 아내·조카·사촌동생·처남·사돈이 가세하니 집안 식구만 12명이 됐다. 학교 동문(同門)과 옛 직장동료까지 포섭한 결과 정씨는 전투요원 24명을 보유한 '작전세력'의 사령관이 됐다.

첫 작전에서 정씨 부대는 떼돈을 벌었다. 2004년 제일바이오 주가를 1850원에서 8330원까지 끌어올린 것이다. 시세 차익만 30억원이었다. 정씨는 대형주보다 주식 수량이 적어 큰 돈 들일 필요 없는 소형주만 골랐다.

정씨는 작전할 종목과 주식 매입가를 자기가 결정했다. 일손이 달릴 땐 월 80만원을 주고 인터넷으로 주문을 대신 내주는 '클릭맨'을 고용했다. 클릭맨을 구하기 힘들면 친인척이나 지인 중 입 무거운 사람을 골라 썼다.

정씨는 제 돈을 놓고 장사한 것만은 아니었다. 다른 투자자도 끌어들였다. 주로 친척이나 지인을 통해 '물주'를 구했다. 주가조작으로 번 돈을 반반씩 나누기로 약속했고 대부분 '작전'에서 성공했다.

정씨도 손해본 적이 있다. 작년 다른 세력과 연합해 4개월간 지속적으로 코스닥 종목을 매입했지만 금융당국에서 눈치를 채는 바람에 6억원가량을 손해보고 물러났다.

이들이 거둔 불법 수익은 250억원이 넘었지만 정씨 계좌에는 단 한 푼도 없었다. 흔적이 남으면 수사 기관에 꼬리가 잡히기 때문이다. 행여 정씨가 잡히면 이는 조직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정씨는 이미 2003년 다른 주가 조작 사건으로 수배된 처지여서 더 조심했다. 휴대전화, 은행계좌, 자동차, 아파트 명의는 물론 병원 치료받을 때도 다름 사람 이름을 댔다. 남 이름으로 살아가는 '대포 인간'이었다.

그는 조직원 중 누구라도 수사기관의 추적을 받는다는 느낌이 오면 곧바로 '작전 본부'를 옮겼다. 서울
인천 수원 일산 대전 광주 전주로 오피스텔을 구해다니며 작전을 벌였다.

유사시에 대비해 보디가드 2~3명을 대동하고 다녔다. 이들은 주가 조작으로 번 돈을 출금할 때도 은행 여러 곳을 다니며 2000만원 미만씩 인출했다. 2000만원 이상이 한꺼번에 이동하면 금융당국에 신고되기 때문이다.

막내 정씨 덕택에 그 일가는 호사(豪奢)를 누렸다. 정씨 4형제 모두 벤츠를 굴리는 '벤츠 브라더스'가 됐다. 정씨는 특히 차에 관심이 많았다. 벤틀리, 롤스로이스, 람보르기니 등 다양한 외제차를 샀다.

수사팀은 "비교적 흔한 BMW는 구입 목록에 없었다"고 말했다. 정씨는 돈을 쓸 때도 수표를 쓰지 않고 현금만 이용했다. 만일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중고 벤츠 2대를 살 때는 현찰 2억원이 든 가방을 들고 나가기도 했다고 한다.

정씨는 아내 박모씨 명의로 서울 송파구 잠실 전세 5억원짜리 아파트에 살았다. 검찰은 정씨 조카 명의로 운영되고 있는 지방 입시학원 2개와 20여개 가맹점을 가진 커피전문점의 실소유주가 정씨라고 말했다.

정씨 몰락은 동업자이자 직장 동료였던 고모(43)씨가 작년 11월 불심검문에 걸리면서 시작됐다. '성공한 사업가' '주식 귀재'로 알려진 정씨와 그 일가의 붕괴를 가져온 이는 주식 투자 한번 안 한 여(女) 검사 김남순(37)이었다.

김 검사에 따르면 정씨는 지난달 서울 워커힐호텔 골프연습장에서 체포됐다. 보디가드가 있었지만 수사관들이 워낙 단련돼 있어 큰 몸싸움은 없었다고 한다. 김 검사는 "정씨는 머리가 매우 좋은 형이었고, 노조위원장 경력 탓인지 사람을 잘 거느렸다"고 했다. 정씨는 체포된 뒤 "열심히 일해서 번 것이다. 노력과 투자 많이 했다"며 억지를 부렸다고 한다.

2003년 수배됐으면서도 7년간 체포되지 않은 데 대해 김 검사는 "정씨가 베일 뒤에 숨어 지휘만 했다"며 "정씨의 조직원이 붙잡혔을 때도 하수인에 불과해 그냥 풀려났다"고 했다.

정씨가 체포되면서 그의 집안은 풍비박산(風飛雹散)이 났다. 첫째 형은 잠적했고 둘째 형은 불구속 기소됐으며 셋째 형은 구속영장이 발부된 뒤 도주했다. 아내와 처남 등 나머지 일가 8명도 재판에 넘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