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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도시 나의 인생] 전주 / 시인 안도현 (조선닷컴 2010.06.15 23:08)

[나의 도시 나의 인생] 전주 / 시인 안도현

입력 : 2010.06.15 23:08

비빔밥처럼 잘 비벼진 전주에서 적당히 외롭게 산다

전주는 맛과 멋의 고장 이렇게 푸짐하게 차려도 남는지
손님이 주인 걱정하는 곳 전라도 쌀 먹고 산 지 30년 그 땅은 내 詩의 자양분

효자동 ‘홍도주막’에서 안주상을 받은 안도현의 입이 함지박만하게 벌어졌다. 큼직한 청어구이에 닭고기미역국, 돼지편육, 생두부, 더덕, 호박죽, 번데기…. 열 몇 가지 안주가 좍 깔렸다. 1만2000원 하는 막걸리 한 주전자에 딸려나온 안주들이다. 주전자엔 750mL짜리 3통이 담겼으니 막걸리 값만 받고 안주는 공짜인 셈이다.

한 주전자씩 더 시킬 때마다 새 안주가 나오는 건 먹을거리이기 앞서 구경거리다. 홍어삼합, 간장게장, 조기찌개, 산낙지, 광어회 식으로 갈수록 급(級)이 올라간다. 이러니 전주 막걸리집에선 손님이 주인 걱정을 한다. “이러고도 남아요?”

안도현은 막걸리집 하루 이틀 온 것도 아닐 텐데 연방 싱글벙글, 얼굴이 환하다. ‘이 맛에 전주 산다’는 표정이다. “전주를 흔히 ‘맛과 멋의 고장’이라고 부르지요. 먹고 마시는 일이 풍류의 하나라면 전주는 풍류를 즐기기에 더없이 좋은 곳입니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100곳 넘는 막걸리집을 비롯해 전주에서 맛봐야 할 음식은 꼽기도 숨 가쁘다. 비빔밥, 콩나물국밥, 한정식, 백반, 돌솥밥, 국수, 떡갈비에 민물고기뚝배기 오모가리탕, 가게에서 간단한 안주와 함께 맥주를 파는 ‘가맥’까지. 외지 사람은 몇년을 다녀도 다 떼지 못할 진미와 인심이 한가득이다. 안도현도 30년 전 처음 콩나물국밥을 접했을 땐 선뜻 먹기가 힘들더라고 했다. 경상도에서 자란 그는 냄새와 빛깔만 보고 뭐 이런 죽밥이 있나 싶었다. 그는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 안동에서 초등학교, 대구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대건고 시절 백일장을 휩쓸던 문예반 스타였던 그는 익산 원광대로 유학 왔다. 문예장학생을 뽑고 윤흥길 박범신 양귀자를 배출한 학교라는 게 그를 끌었다.

그는 1학년 말 ‘낙동강’으로 대구매일 신춘문예에 당선했다. 4학년 때
동아일보에 당선된 시는 ‘서울로 간 전봉준’이었다. ‘낙동강’은 경상도에서 자란 19년을 함축했고, ‘전봉준’은 전라도에서 살아갈 세월을 예고했다. 살아보니 전라도는 슬픈 곳이었다. 전라도 땅과 사람들 마음속에 밴 슬픔을 문학적 자양분으로 삼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전라도 땅에서 난 쌀을 먹고 산 지도 30년이 됐다.

안도현은 졸업 후 익산, 당시 이리의 사립 중학교에 교사 자리를 잡았다. 그는 “강성(强性)이어서가 아니라 불합리한 교내 구조를 깨고 싶어서” 전교조에 가입했다. 1989년엔 정부가 요구한 전교조 탈퇴각서를 거부한 1500명에 들어 해직됐다. 그는 전교조 지회를 드나들며 활동했다. 생활고 속에 글도 열심히 썼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는 ‘너에게 묻는다’도 이때 나왔다.

그는 94년 장수 산서고로 복직하면서 집을 익산에서 전주로 옮기고 통근했다. 전교생 120명쯤 되는 이 시골 학교는 큰 전환점이었다. 아이들과 함께 학교 뒤뜰에 호박을 심고 거둬 전을 부쳐 먹었다. 철 따라 마을 여기저기 피는 꽃들은 그의 눈을 세상과 사회에서 자연과 일상으로 이끌었다. 서른다섯 되도록 애기똥풀도 모르고 시를 썼다는 게 부끄러웠다. 들길 산길 거닐며 길어올린 상념들은 어른을 위한 동화 ‘연어’를 낳았다.

97년 안도현은 학교를 그만두고 전업시인으로 나섰다. 복직 후에도 학교사회가 별로 변한 게 없다는 게 곤혹스러웠다. ‘연어’가 쇄(刷)를 거듭하며 해마다 5만부 넘게 팔리자 글만 써도 살아갈 수 있겠다는 자신이 생겼다. 그때 구한 작업실이 시내에서 차로 15분, 전주 동남쪽 모악산 자락에 있다. 2004년 우석대 교수가 되기 전까지 가장 왕성하게 글을 써낸 곳이다.

작업실은 사뭇 험한 산길을 넘어 양지 바른 십여호 마을 실개천가, 방 둘짜리 작고 나직한 기와집이다. 마당엔 하얀 산딸나무 꽃이 활짝 피었다. 뒤뜰엔 때늦은 금낭화, 돌담 너머엔 개망초꽃. 70년 된 집 처마엔 딱새 한 쌍이 둥지를 틀고 새끼에게 번갈아 먹이를 물어 나른다.

그는 여기서 뒹굴거리며 책도 읽고 글도 쓰고 객(客)도 맞아들인다. 개천 쪽 야트막한 돌담 밖에 고추, 유채 심고 개천서 버들치 잡아 어죽을 끓여내기도 한다. 그가 심은 장미가 붉은 꽃을 탐스럽게 피워올리며 담을 휘감고 있다.

안도현은 “전주란 이렇게 적당히 외로워할 수 있고 적당히 그리워할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사람은 살며 외로워서 다른 사람 만나고 싶거나, 아니면 인간 너무 많아 안 보고 싶게 마련이다. 전주는 그런 허기를 둘 다 채워주는 곳이다. “전주는 한 시간 거리 안에 바다와 평야와 심산유곡이 다 있습니다. 그야말로 비빔밥처럼 잘 비벼진 도시이지요.”

그는 휴대전화가 없다. 대화나 집필을 무시로 끊고 끼어드는 게 싫어서 진작부터 없애버리려다 4년 전 잃어버린 김에 안 샀다. 일주일은 불안했다. 그 금단을 이겨내니 무심해졌다. 집 전화, 학교 전화 있으니 편리한 것이 불편한 것보다 훨씬 많더라고 했다. “굳이 말하자면 휴대전화 없는 생활도 전주여서 가능한 것”이라고 했다. 그는 만약에 서울서 활동했다면 문인으로서도 지금보다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한옥마을을 비롯해 전주는 낮아서 좋다”고 했다. 대도시 복판을 흐르는 시냇물 중에 전주천만큼 맑은 물빛을 간직한 곳도 보지 못했다. 수양버들 드리운 천변에서 키들거리며 연애를 거는 고등학생들처럼 전주는 여전히 맑고 싱싱하다. 안도현은 전주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부러움을 살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