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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빗방울 쏟아지는 녹우당 (화순군민신문 2010. 06.18. 15:55)

초록 빗방울 쏟아지는 녹우당
해남의 녹우당과 고산 윤선도
입력시간 : 2010. 06.18. 15:55



리경재 화순군민신문 객원기자

♣비자나무숲을 스치는 바람소리, 비오는 소리


녹우당(綠雨堂)은 해남 윤씨 종가의 사랑채 당호이다. 녹우당은 비자나무숲을 스치는 바람소리가 비오는 소리 같다 하여 붙인 당호다. 이 사랑채는 효종(孝宗)이 스승인 고산 윤선도에게 하사했던 경기도의 수원집을 현종(顯宗) 9년(1668년)에 바닷길로 해남으로 옮겨 지은 집이다. 녹우당 현판글씨는 동국진체의 원조로 알려진 이익의 이복형인 이서가 썼다고 전한다.

이 집은 고산 4대 조부인 효정(1476∼1543, 호 어초은)이 여기에 집터를 잡아 지은 15세기 중엽의 건물이다. 집터 뒷산이 덕음산, 앞산은 벼루봉, 오른쪽산엔 필봉이 자리 잡고 있는 명당이란다. 이 집은 안채와 사랑채가 'ㅁ'자형에 행랑채가 갖추어져 있어 조선시대 상류주택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전라도의 대표적 양반 건물이다.

녹우당 현판이 걸린 고택과 정원, 담장 넝쿨이 올라간 돌담은 고즈넉한 세월의 흔적을 알려준다. 이곳에 고산 윤선도 종가의 대종손인 윤형식(75)씨가 살면서 종중과 유물, 유산을 관리하고 있다. 마침 며칠전 광주시인협회 시화전이 열리고 있는 광주역 대합실에서 윤 회장을 우연찮게 만나 고산의 전시관 개관 소식을 들었다. 초대장을 보낼테니 꼭 참석해 달라는 윤 회장의 부탁에 고산 윤선도의 녹우당이 한걸음에 다가온다.

♣오늘날의 인물들과는 노는 물이 다른 큰 그릇


고산 윤선도(南人)는 우암 송시열(西人)보다 나이가 20살이 더 많았다. 송시열과 윤선도는 당대 최대의 숙명적 정치 라이벌이었다. 고산과 우암 사이에는 아주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물론 남인, 서인으로 갈라져 서로 으르렁거리는 두 집안을 화해시키기 위한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고산의 14대손인 윤형식씨와 큰댁 형인 윤설봉씨가 전해준 얘기에 따르면 우암 송시열이 완도에서 배를 타고 제주도로 유배 가는 도중 배에서 갑자기 토사광란이 일어난다. 너무나 고통스러운 우암은 여기가 어디냐고 묻자 사공은 보길도라고 했다. 그러자 우암은 그러면 고산이 머무는 유배지가 아니냐면서 자기 큰아들에게 한의학에 밝은 고산에게 가서 약제를 지어오라고 명했다.

녹우당


정치적으로 숙명적 라이벌인 고산인지라 우암의 아들이 한참을 망설이자 우암은 “고산의 인품을 볼 때 위급한 상황을 모른척 할 사람이 아니다”며 아들의 발검음을 재촉했다. 아들이 윤선도를 찾아가 예를 표하고 사정을 말하자 “현 조선의 정치를 이끌어 나갈만한 인물로 송시열 만한 사람은 없다”며 흔쾌히 탕제를 지어주었다.

고산에게 탕제를 지어온 아들은 혹여 독이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약재를 살피자 아니나 다를까 약재 중에 독이 들어있는 탕재가 나왔다. 아들은 우암에게 독이 들어 있는 약재가 있다고 알리자 “다 까닭이 있을 것이다”며 그 탕제를 달여 먹었다. 그렇게 고산이 지어준 약재를 달여 먹은 우암은 금세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이 일화가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이야기 속에서 크게 깨쳐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서로 아무리 원수사이라 하더라도 서로 지켜야 할 사람된 도리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고산 윤선도의 시적 이해와 감상


고산 윤선도는 치열한 당쟁으로 일생을 거의 유배지에서 보냈으나 경사(經史)에 해박하고 의약, 복서(卜筮) ·음양 ·지리에도 통하였으며, 특히 시조(時調)에 더욱 뛰어났다. 그의 작품은 한국어에 새로운 뜻을 창조하였으며 시조는 정철 (鄭澈)의 가사(歌辭)와 더불어 조선시가에서 쌍벽을 이루고 있다.

윤선도(尹善道)가 56세 때 해남 금쇄동(金鎖洞)에 은거할 무렵에 지은《산중신곡(山中新曲)》속에 들어 있는 6수의 시조는 수(水)·석(石)·송(松)·죽(竹)·월(月)을 다섯 벗으로 삼아 서시(序詩) 다음에 각각 그 자연물들의 특징을 들어 자신의 자연애(自然愛)와 관조를 표백한 것이다.

이는 고산 문학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것으로서,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잘 나타내어 시조를 절묘한 경지로 이끈 백미편(白眉篇)이다. 이러한 이유로 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시(詩) 오우가(五友歌)는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이다.

이서가 쓴 현판


"내 벗이 몇이나 하니 수석(水石)과 송죽(松竹)이라. 동산(東山)의 달 오르니 그 더욱 반갑구나. 두어라 이 다섯 밖에 또 더 하야 무엇하리"


구름빗치 조타하나 검기랄 자로 한다
바람소래 맑다하나 그칠 적이 하노매라
조코도 그츨 뉘 업기남 물뿐인가 하노라


고즌 므스 일로 퓌시며 쉬이디고
플은 어이하야 프르난 닷 누르나니
아마도 변티 아닐산 바회뿐인가 하노라


더우면 곳피고 치우면 닙디거
솔아 너난 얻디 눈서리랄 모라난다
구천(九泉)의 불희 고단 줄을 글로 하야 아노라


나모도 아닌 거시 플도 아닌 거시
곳기난 뉘 시기며 속은 어이 뷔연난다
뎌러고 사시(四時)예 프르니 그를 됴하 하노라


쟈근 거시 노피 떠서 만물을 다 비취니
밤듕의 광명(光明)이 너만하니 잇나냐
보고도 말 아니 하니 내 벋인가 하노라


녹우당 내부


♣윤선도의 삶과 자연과의 벗


고산은 성질이 강직하여 20여년을 귀양살이로, 19년간을 은거 생활로 보냈다. 이러한 가운데서 이루어진 그의 시조는 맑고 깨끗한 정서를 아름다운 우리말로 잘 살려내고 있으며, 자연을 시로써 승화시킨 천재적인 시인이었다.

고산의 귀양과 은거는 오히려 혼란한 정계에서 벗어나 자연 속에 묻혀 산수(山水)를 즐기며, 유유자적(悠悠自適)하는 생활을 노래하게 하는 듯하다. 자신이 겪은 고통에도 불구하고 나라의 군주를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성은(聖恩)으로 돌리고 있음은 조선시대 선비들의 공통된 의식구조라 하겠다.

녹음이 우거지는 6월. 온 나라가 월드컵의 열기로 가득한 가운데 멀리 남도의 끝 해남에는 옛 선비의 혼이 깃들어 있는 녹우당과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간 시대의 거목 윤선도의 향이 짙게 배어나온다. 비자나무숲을 스치는 바람소리가 선생의 넋인 듯, 지나는 나그네를 어루만지며 조용히 말을 걸어온다.

어부사시사 시비

고산 사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