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마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과연 내세는 존재하는가? 이 두 문제는 유학자들의 커다란 화두 중의 하나였다. 인간의 마음은 성(性)과 정(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성은 측은, 수오, 사양, 시비의 마음을 말하고, 정은 희(喜), 노(怒), 애(哀), 구(懼), 애(愛), 오(惡), 욕(欲)의 마음을 말한다. 성은 다시 사단(四端)이라 하며 정은 칠정(七情)이라 부르는데 이들은 각기 ‘맹자’와 ‘예기’에 나오는 말을 따온 것이다. 이러한 사단과 칠정에 대해 퇴계 이황 선생을 비롯한 유학자들은 이理와 기(氣)로 명명하였는데 문제는 이와 기가 어떻게 드러나는가의 방법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여 이른바 ‘사단 칠정논쟁’이라는 700년 이라는 긴 세월의 논쟁이 이어졌다. 다시 말해서 우리 인간이 드러내는 여러 감정들, 그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마음이 작동한 결과인가에 대해 의견의 일치를 보기 힘들었나 보다.
사실 지금도 이는 유용한 논쟁이거니와 슬프고 기쁜 마음은 이(理)의 드러남인가? 아니면 기(氣)의 드러남인가? 그도 아니면 이와 기가 동시에 드러남인가? 이런 의문은 쉽게 풀지 못할 문제이다. 또한 기쁨의 종류에도 여럿 있을 수 있으니 가령 전 국민이 좋아할 국가적인 기쁨과 개인에 국한된 기쁨이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칠정의 하나인 희(喜)를 국가적인 기쁨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개인적인 기쁨으로 봐야 옳은가, 이의 판단에 따라 전자라면 이는 칠정의 하나인 희(喜)의 드러남이라 단정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렇다. 바로 이런 점에서 퇴계 선생과 율곡 이이, 그리고 고봉 기대승 선생은 서로 다른 견해를 가졌으며 모두는 이런 생각의 차이를 서로 인정하고 상대방을 배려하면서 소모적이 아닌 발전적 논쟁을 벌이면서 한국 철학의 깊이를 더했다.
부연해서 설명하자면 퇴계는 사람의 마음이 드러날 때는 이가 발동하는 경우가 있고 기가 발동하는 경우가 달리 있으니 대의(大義), 도학적(道學的)인 마음은 이가 발동한 것이고, 개인적, 사사로운 마음은 가가 발동한 것이라고 하여 사람 마음은 이가 발동하는 때도 있고 기가 발동하는 때도 있다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주장했는데 이중에서도 이의 발동을 중시했다 하여 후학자들은 주리론자 불렀다.
반면에 율곡은 인간의 마음이 드러내는 모든 감정은 기의 발동일 뿐, 이(理)는 발동하지 않고 기가 발동할 때 그에 편승한다는 주장을 하여 퇴계의 주장을 반박했다. 후학들은 이를 이른바 기발이이승설(氣發而理乘說)이라 하여 율곡을 주기론자라 불렀다.
이런 극단적 대립에 또 한 사람의 학자 고봉 기대승은 퇴계 선생이 말한 이의 발동에 대해서는 의견을 같이 하되 기 곧 칠정의 발동에 대해서는 생각의 차이를 드러냈으니 이른바 퇴계와 고봉간의 13년간 ‘이기왕복논쟁’이 그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고봉은 칠정(기)이 발동할 때도 이적인 발동이 있고, 기적인 발동이 있으니, 이 둘은 기의 발동이기는 하지만, 서로 다른 차원이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앞서 말한 바의 기쁨 가운데 월드컵 첫 원정 16강 진출이라는 쾌거에 드러내는 기쁨과 초상집에서 화투놀이로 돈을 땄다고 좋아하는 기쁨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으로, 전자는 대의(大義)적인 기쁨이므로 이(理)가 들어 있는 기의 발동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원로 대학자 퇴계는 자신의 주장 보다 26살 아래의 젊은 학자 고봉의 주장이 더 정치함을 인정했다. 어떤가? 고봉의 명민한 주장과 퇴계의 인자한 인품이...그래서 후학들은 고봉의 주장이 더 정밀하고 사리에 맞다고 했던 것이다.
작금 세상은 여러 차이와 다름이 존재하는 세상이 되었다. 너와 나의 다름의 차이를 소통이라는 큰 이름으로 함께 아우르는 우리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제 민선 5기가 출발하는데 벌써부터 삐그덕 소리가 들린다니 아쉽다. 사단에 의한 소신인지 아니면 칠정에 의한 감정인지 확실하게 구분하는 공직의 분위기를 기대해 본다. 모두가 다 내 마음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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