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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 육

한국의 `교육 양극화` 美보다 심하다 (조선닷컴 2010.07.06 02:53)

[사다리가 사라진다] 한국의 '교육 양극화' 美보다 심하다

개천에서 용나던 '한국神話' 무너져…
美는 최상층·최하층모두 성적 올랐지만 한국은 학력差 더 벌어져

지적(知的) 재산권 분야에서 톱클래스로 꼽히는 오관석(48·'김앤장'소속) 변호사는 1981년 서울대 법대에 진학할 때 예비고사 전국 수석을 했다. 당시 그가 언론 인터뷰에서 밝힌 1등의 비결은 "학교 수업을 꾸준히 예·복습했다"였다. 제주도 출신인 그는 8세 때 아버지를 여의었고, 어머니와 삼형제는 친척들 도움으로 살았다. 과외는커녕 학비조차 막막해 중·고교를 학생잡지사(社)가 주는 장학금으로 다녔다. 이후 오 변호사는 서울대 법대를 수석 졸업했고 대한민국 최상위층이 됐다. 기자가 30년 전 얘기를 꺼내자 그는 "그때는 환경이 아무리 어려워도 이 악물고 노력하면 반드시 성공한다고 믿었다"고 말했다.

가난해도 본인만 열심히 공부하면 좋은 대학 가고 좋은 일자리를 구해 중·상위층이 될 수 있는 '교육의 계층 상승 사다리'는 아직 살아있을까. 취재팀 의뢰로 자문단의 김경근 고려대 교수(교육학)가 한국과
미국의 '교육 사다리' 현주소를 심층 분석했다.

46개국 만 13세(중2) 학생들을 똑같은 시험지로 평가하는 팀스(TIMSS) 시험의 수학과목 성적(1999~2007년)을 토대로, 부모의 학력·소득 등 사회·경제 배경이 두 나라 학생의 점수 격차에 각각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따져봤다. 분석은 부모 학력과 소득 등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라 최상층(상위 2.3%), 중류층(상위 50%), 최하층(하위 2.3%)의 3개 계층으로 나눠서 진행했다.

그 결과 지난 8년 사이 미국은 부자든 가난하든 모든 계층에서 팀스 수학 성적이 26.0~28.7점씩 올랐다. 반면 한국은 최상층이 22점 올랐지만 최하층은 2.6점 떨어졌다. 교육 양극화 측면에서 미국은 '현상 유지'를 했지만, 우리는 가정 형편에 따른 아이의 성적 격차가 8년간 24.6점이나 늘어나는 '양극화 심화'를 보인 것이다.

2007년 결과를 놓고 보면, 우리 최상층-최하층(사회·경제지위 상·하위 2.3%) 간 점수 격차는 128.0점으로, 미국의 두 계층 간 점수차(71.5점)보다 1.8배나 컸다. 가정 형편에 따라 자녀 성적이 좌우되는 효과가 미국보다 훨씬 더 크고, '교육의 사다리'가 미국보다 더 크게 망가졌다는 얘기다.

이에 대해 김경근 교수는 "우리의 2000년대 이후 경제적 양극화의 속도가 미국보다 빨랐던 측면도 작용했을 것"이라며 "하지만 무엇보다 '3불'(본고사·고교등급·기여입학 금지)이나 무상급식 등 경직된 정책 논쟁에 빠져 정작 소외계층에 필요한 실효성 있는 대책 논의가 부족했던 탓이 크다"고 말했다.

교육 사다리의 붕괴는 결국 저소득층의 무기력감을 키워 사회 갈등요소로 작용한다. 서울 노원구의 임대아파트에 사는 최일형(가명·20)씨는 "희망이 없다"고 말하는 많은 저소득층 젊은이 중 한 사람이다. 최씨는 초등학교 입학 전에 아버지를 여의고, 중졸 학력의 어머니와 월 40만원의 기초생활수급비를 지원받으며 함께 살고 있다.

초등학교 때만 해도 반에서 5등 정도 하면서 '교육 사다리'를 올라탈 희망이 보였다. 하지만 "중학교 이후엔 하루하루가 내리막길이었다"고 최씨는 말했다. 중1 첫 영어시간에 선생님이 "read(읽다) 단어 모르는 사람, 손들어"라고 말했다. 교실에 앉아 있던 33명 중 손을 든 것은 최씨를 포함, 학원에서 선행학습을 하지 않은 3명뿐이었다. 그는 "커다란 '벽'을 느꼈다"면서 "학교에선 대부분 선생님들이 학원 다니는 아이들 기준으로 수업을 해 따라잡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지난해 수능시험을 치른 뒤 대학 2곳과 전문대 1곳에 떨어진 최씨는 요즘 백화점 구내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밤 8시까지 해도 한 달에 손에 쥐는 돈은 80여만원(시급 4110원) 수준인 '88만원 인생'이다. 최씨에게 "왜 학원에서 가서 재수 공부 안 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한 달에 50만원이나 하는 학원비도 없고, 지금 와서 1년 더 공부한다고 몇 년씩 학원에서 공부해온 아이들과 경쟁이 될 것 같지도 않다"고 했다.

가톨릭대 성기선 교수(교육사회학)는 "계층을 순환시켜 상위층엔 긴장감을, 하류층엔 희망을 주는 교육의 순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며 "교육제도가 계층이동 기능을 제대로 해주지 못하면 사회 불안과 갈등 증폭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현장 목소리를 듣기 위해 취재팀은 15~27세 저소득층 가정의 중고교생·청년 24명과 전화·대면 인터뷰를 했다. 이들 중 "중·고교 시절 주변에 역할 모델이 있었다"고 응답한 이는 4명(16.6%)에 불과했고, 24명 전원이 "학교 수업만으론 사교육 받는 아이들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고 응답했다. "내년에 무엇을 할 것이냐"고 질문하자 23명은 "구체적인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나머지 한 명의 대답은 "군 입대"였다. 교육 사다리에서 탈락한 이들에겐 꿈과 목표가 없었다.

[사다리가 사라진다] "우리 땐 능력 우선… 대졸 안부러웠는데"

전문계高의 어제와 오늘
"지금은 공고 나오면 입사조차 안된다니…"

서울 한양공고 42회 동문인 이모(39)씨는 중소기업 CEO다. 국세청에 신고된 이씨 연봉은 1억6000만원. 1990년 한양공고를 졸업한 뒤 전문대 전자과를 나와 'H공작'이라는 중소업체에서 연봉 2500만원으로 첫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이씨는 "어설프게 대학 나온 사람들보다 초봉이 높았고 회사에서도 금세 인정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씨가 졸업한 20년 전만 하더라도 전문계고는 가정 형편이 어렵지만 똑똑한 학생들을 위한 '성공 사다리'였다. 당시 이씨와 함께 졸업한 동창생 대부분이 번듯한 직장에 취직했다.

한양공고 41회(1989년) 졸업생인 전용상 ‘바텍’제조부 차장은“전문계고에서 기술을 일찍 배운 게 사회에서 자리 잡는데 큰 도움 됐다”고 말했다. /조인원 기자 join1@chosun.com

1989년 2월 한양공고 전자과를 졸업한 전용상(40)씨는 현재 의료장비회사 '바텍'의 제조부 차장이다. 대기업 직원 못지않은 연봉(5000만원)을 받는 그는 "전문계고는 기술로 세상에서 경쟁하려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사다리 역할을 해줬다"고 말했다.

방사선 의료기기 전문업체 '세영엔디씨' 기술팀장인 1990년 졸업생 노근택(40)씨 역시 "우리 땐 대부분 가정 형편상 공고에 진학했지만, 오히려 인문계고·대학 나온 친구들보다 생활이 빨리 안정됐다"고 말했다.

요즘도 괜찮은 일자리를 구하는 졸업생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난해 한양공고를 졸업한 김모(19)씨는 4년제 대졸자도 가기 힘들다는 유수 대기업에 취직했다. 하지만 김씨 동창생 300여명 중 안정된 일자리를 구한 사람은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취재팀이 한양공고에 의뢰해 1989년 전자과 졸업생 56명과 2009년 전자과 졸업생 29명에게 전화 설문조사를 통해 졸업 후 진로를 물어보았다. 42명이 응답한 1989년 졸업생들은 대부분 현재 버젓한 직업이 있었다. 이들 중 23명(54.8%)은 졸업하자마자 전공 분야에 취직했고, 졸업 직후 비전공 분야에 취직한 학생들은 13명(14.3%)이었다. 나머진 자기가 원해서 대학이나 전문대에 진학했다.

하지만 2009년 졸업생은 응답자 28명 중 취업한 사람이 1명에 불과했다. 2009년 졸업생 김모(20)씨는 "전문대 등으로 진학하더라도 취업은 워낙 힘들기 때문에 친구들끼리 장래 얘기는 잘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중소기업연구원 김세종 선임연구위원은 "전문계고 출신을 우리 사회가 믿지 않고 있어 '교육 사다리'의 일정 역할을 해주던 전문계의 고유 기능마저 무너지고 있다"고 말했다.


[사다리가 사라진다] 북유럽은 개인별 맞춤 교육… 학교가 학생 책임져

유럽은 이렇게 푼다
영국·프랑스, 등록금·생활비 지원
핀란드, 학생별 학업성취도 파악

헝가리 농촌 무바이네(Murvaine)에 사는 헤르첵 에리카(Herczeg·50)씨. 공장 생산직으로 일하다 19살 때 농사짓는 남편과 결혼했다. 새벽에 일어나 밭일하는 틈틈이 소·돼지를 돌보며 평생 우직하게 일했다.

헤르첵씨가 결혼할 때만 해도 헝가리는 사회주의 체제라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전면 무상교육이었다. 사립학교도, 사교육도 없던 시절이다. 계획경제 특성상 임금이 낮고 삶의 질이 떨어져서 그렇지 학교를 졸업하면 취업은 100% 보장됐다.

1989년 사회주의가 몰락하고 자본주의 사회가 되면서 세상이 달라졌다. 헤르첵씨는 "먹고 살기 바빠 자식들 공부를 찬찬히 봐주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세 딸을 모두 상업고교에 보냈다. 그 결정에 대해 헤르첵씨는 지금 후회와 걱정이 많다. 딸들이 안정된 직업을 구하지 못한 채 임시직과 일용직을 전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은 우리보다 앞서 '교육 사다리' 붕괴를 경험했다. 유럽이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가닥 잡은 해법은 세 가지다. ①장학제도를 발달시킨 서유럽 모델 ②공교육을 살려 사교육이 필요 없게 만든 북유럽 모델 ③전면 무상교육을 택한
독일·동유럽 모델이다.

서유럽의 장학제도 모델

영국은 전통적으로 사립학교가 많고 사립과 공립 사이에 학력 격차가 크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저소득층을 집중 지원하는 다양한 장학제도를 개발했다. '소득 연계형 등록금 후불제'는 대학 등록금을 부담하기 어려운 학생들이 일단 학업을 마친 뒤 졸업해서 취직하면 임금 수준에 따라 등록금을 나눠서 갚는 제도다. 중간에 실직하면 다시 취업할 때까지 상환 의무가 면제된다. 실질 가계소득이 연간 1만7500파운드(약 3400만원)에 못 미치는 가정도 무료로 자녀를 대학에 보낼 수 있다.

헝가리 마자르세트 인근 시골 마을. 공산주의 붕괴 이후 대다수 시골 마을은 실업과 교육 기회 차단, 교육격차에 따른 빈곤의 악순환을 겪기 시작했다. /인덱스폰트후(Index.hu) 제공

프랑스에서는 국립대학 등록금이 연간 300유로(40만원) 안팎이다.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대학에 다니는 저소득층 학생은 부모의 소득, 형제 숫자 등을 고려해 방학을 제외한 9개월 동안 매달 최대 1800유로(약 200만원)까지 생활비를 지원한다.

북유럽의 맞춤형 공교육 모델

이들과 달리
핀란드는 과외비 경쟁으로 학력격차가 벌어지지 않도록 탄탄한 공교육 시스템을 구축해 사교육이 발붙일 여지를 없애는 길을 택했다. 그 비결은 철저한 '수준별 학습'이었다.

핀란드의 초·중학교 과정인 9년제 종합학교(comprehensive school)는 기본적으로 평준화 모델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모든 학생에게 똑같은 교육을 제공하고 학교 선택권을 제한하는 '기계적 평등'이 아니다. 교사가 학생들의 학업 성취를 개인별로 세세하게 파악해 개별 학생 수준에 따라 맞춤식 교육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종합학교 7~9학년 교사는 반드시 석사 학위 소지자로 채용하고, 현직 교사는 매년 의무적으로 꾸준히 연수를 받도록 한다. 종합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에 진학하면 학생 누구나 학년에 구애받지 않고 원하는 과목을 선택해서 들을 수 있다.

동유럽의 무상교육 모델

독일은 전체 16개 주(州) 가운데 14개 주에서 전면 무상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체코·헝가리처럼 과거 사회주의 체제 아래 있던 동유럽 국가도 마찬가지다.

동유럽은 1989년 사회주의가 몰락하고 자본주의가 들어서고 나서도 초등학교부터 대학교(사립대·특수학교·직업학교 등은 예외)까지 국·공립 학교는 학비 없이 다닐 수 있다. 취약계층 자녀도 돈 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지만, 계속 지탱하기엔 정부의 부담이 크다는 게 단점이다.

데브레첸(Debrecen) 대학 페네쉬 하이날카(Fenyes) 교수(사회학)는 "사회주의 시절에는 우리 학교 학생 절반 정도가 농민·근로자 자녀였지만, 지금은 재학생 대부분이 중산층 이상 출신이고 아버지가 농민·일용직인 학생은 거의 없다"고 했다.

쿤(Kunn) 야노쉬
부다페스트 공대 교수는 "사회주의 시절처럼 국가가 국민 전체를 똑같이 먹여 살릴 수 없어 갈림길에 서 있다"고 했다. 무리한 재정 부담을 지지 않으면서 교육 사다리를 살릴 해법을 찾는 것이 국가적 과제라는 얘기다.

사다리가 사라진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무너진 사다리' 고쳐가는 사람들

(조선닷컴 2010.07.12 09:27)

도시지역 5000가구의 살림살이 변화를 추적한 '한국노동패널'2008년치에선 응답자 10명 중 4명이 "열심히 노력해도 경제·사회적 지위가 높아질 수 없다"고 대답했다.
자문단 방하남 한국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이 이 답변을 자세히 분석했더니 소득과 학력이 낮을수록 '노력해도 어쩔 수 없다'는 절망감이 깊었다.
상위층(소득 상위 25%)은 10명 중 7명(65.9%)이 '노력하면 올라간다'고 했지만, 빈곤층(하위 25%)은 절반 이상(52.7%)이 '불가능하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좌절감이 확산되는 중에도 우리 사회엔 아직 자포자기 대신 희망을 갖고 사다리에 다시 올라탄 사람들이 적지 않다.
'나는 안된다'고 주저앉는 대신 '포기하지 않으면 반드시 기회가 온다'고 믿고 버텨 희망을 찾아내 자신의 상승 사다리를 복원하는 데 성공한 사람들의 스토리를 추적했다.


[20] 어려운 가정형편 딛고 정규직 뚫은 20대… 전형식씨

"돈 없어도 쌓을 수 있는 스펙 활용"

"돈 없어도 쌓을 수 있는 '스펙'을 쌓았어요."

이종현 객원기자 grapher@chosun.com
올 2월 제주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전형식(27·사진)씨 집은 10년 전까지만 해도 안정된 중산층이었다. 하지만 직업군인이던 아버지가 퇴역하면서 퇴직금을 털어 문을 연 갈빗집이 1년도 안 돼 망하면서 추락이 시작됐다. 그가 고3 때였다.

그는 "스무 살부터 아르바이트를 쉬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전씨는 대학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학비를 벌기 위해 휴학했다. 동기들이 미팅이며 MT·배낭여행을 즐길 때 그는 패스트푸드점에서 월 70만원씩 벌어, 30만원은 부모님에게 생활비로 드리고 나머지는 저축했다. 복학 후에도 낮에는 수업 듣고, 평일 저녁(오후 6~12시)과 주말 새벽(밤 12시부터 오전 9시)은 일했다.

공부하려면 돈이 드는데, 돈을 벌자니 성적이 떨어지고, 성적이 떨어지니 장학금을 못 받는 악순환이 벌어졌다. 그는 "친구들이 부모님 도움으로 해외연수 떠나는 것을 보며 소외감을 느꼈다"고 했다.

전씨가 택한 해법은 없는 시간을 쥐어짜는 게 아니라, 역(逆)으로 돈 없어도 쌓을 수 있는 스펙(입증된 자격조건)을 찾아 '더 바쁘게 사는 것'이었다.

그는 대학 봉사 동아리와 취업 동아리 회장을 자원했다. 해외 경험 기회도 자력으로 마련했다. 로타리클럽에서 운영하는 대학생 봉사단체 '로타랙트' 회장 자격으로 로타리클럽의 후원을 받아 일본을 둘러봤다. 이후 제주대가 진행한 '세계테마기행' 공모전에 입상해 7박8일간 다시 한 번 일본을 여행했다.

전씨는 혹독한 취업난을 뚫고 올 초 대형 패스트푸드 업체에 연봉 2000만원의 정규직으로 취업했다. 그는 "온 가족이 나락에 떨어진 뒤 스스로 바닥을 치고 올라오는 수밖에 없다는 걸 배웠다"며 "일·공부·동아리 활동을 병행하던 시절과 달리 일에만 집중할 수 있는 요즘이 지난 10년 사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라고 했다.


[30] '사다리는 밖에…' 해외 도전 성공 30대… 문무제씨

"남이 안 가는 길 뚫어 취업문 열었죠"

"남이 안 가는 길로 청년실업 뚫었어요."

문무제씨 제공
문무제(31·사진 가운데)씨는 현재 일본 벳푸 오기야마골프장에서 '과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2년 전 늦깎이 신입사원으로 입사해 외국인의 핸디캡을 딛고 '초고속 승진'을 한 것이다.

명지대를 졸업한 문씨는 많은 또래 세대들처럼 장기간 '청년실업'에 시달리다 해외취업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학사장교 3년 복무를 마친 뒤 기무사 7급 공채에 '올인'했다. 공부에 전념한다고 머리까지 박박 밀었지만 결과는 낙방. 아르바이트와 수험 준비를 병행하며 또 도전했지만 이듬해 다시 낙방했다.

짧지 않은 방황이 시작됐다. 그는 "대학 때부터 기회가 되면 일본에서 일하고 싶었다"며 "해외주재 업무를 염두에 두고 기무사 시험에 온 힘을 쏟았는데 떨어지니까 어떻게 살아야 할지 혼란스러웠다"고 했다. 고민과 방황을 하는 동안에도 시간은 냉정하게 흘러갔다.

문씨는 8개월 정도 지인이 운영하는 중소기업에 근무하면서
한국산업인력공단에서 운영하는 일본 취업과정을 알게 됐다. 영진전문대에서 6개월간 실무회화·일본식예절·호텔서비스실무 등을 배운 뒤 일본 업체에서 취업 연수를 받는 프로그램이었다. 연수 기간 중 오기야마골프장에서 그의 '적극적인 태도'를 높이 사 6개월 과정이 다 끝나기도 전에 채용했다.

문씨는 "일본문화에 적응하고, 드러나지 않는 차별을 극복하기 위해 일본인 직원보다 두 배로 노력했다"고 했다. 그는 현재 일본인 동료들을 제치고 골프장 VIP 고객관리 업무를 맡고 있다.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영어회화 학원도 다니고 일본의 부기(簿記) 자격증 시험도 준비하고 있다.

"기무사 시험에 낙방한 게 '전화위복'이 됐어요. 외국에서 일하니까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배울 점도 많고 시야가 넓어졌어요." 문씨는 "그때 합격했다면 지금보다 오히려 삶이 단조로웠을 것 같다"고 했다.


[40] 실직을 새 기회로 삼은 40대… 도배사 이후랑씨

"하루하루 목표 정하니 교수까지 돼"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으면 도와주는 사람이 생겨요."

전기병 기자 gibong@chosun.com
인천 계산동에 사는 이후랑(48·사진 오른쪽에서 두 번째)씨는 하루 6시간씩 대학 강단에서 '도배사 과정'을 강의한다. 명함에는 '한국폴리텍1대학 강서캠퍼스 교수'라고 찍혀있다.

이씨는 원래 반도체 조립공장 생산직 직원이었다. 남편(52)은 버스 운전기사로 일했다. 아들(20)·딸(22) 키우며 오순도순 살던 이씨 부부는 외환위기 때 나란히 구조조정 당했다. 이씨는 "세상이 미웠다"고 했다. 남편이 중국집 배달원으로 취직했지만 네 식구 먹고살기 버거웠다.

그래도 이씨는 '아무리 힘들어도 본인이 포기하지 않으면 반드시 도와주는 사람이 나온다'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이씨는 2003년
서울 금천구 YWCA에서 운영하는 3개월짜리 도배사 양성 과정을 마치고 도배 일을 시작했다. 기술을 배워 중산층으로 재기하는 사다리를 잡은 것이다.

처음엔 힘들었다. 새벽 4시 30분에 나가 밤 9시 30분 귀가할 때까지 온종일 벽지를 발라도 일당은 고작 3만5000원이었다. 그나마 일이 없는 날이 많아 한 달 수입이 30만~40만원에 그칠 때도 있었다.

이씨는 절망 대신 "이제 내가 가장(家長)"이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일 솜씨가 야무지다고 입소문이 나면서 일거리가 늘기 시작했다. 일당도 10만원으로 올라갔다.

바쁜 와중에도 이씨는 매주 1~3회씩 저소득층 가정에 무료로 벽지를 발라주는 봉사활동을 했다. 2008년, 봉사활동 하면서 알게 된 한국폴리텍1대학 교수가 "도배사 과정 강의를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이씨는 강의와 도배 일을 병행해 월 250만~300만원씩 번다. 건강을 회복한 남편도 중국집 배달원 일을 재개했다.

이씨는 "목표를 정해놓고 하루하루 노력하면 사람마다 걸리는 시간이 다를 뿐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했다.


[50] 자활 공동체로 가난 굴레 벗은 50대… 장영오씨

"이웃과 함께 일하며 희망 일궈가요"

"온 동네가 힘을 합쳐 '지속가능한 공동체'를 창업했어요."

서울 삼양동 주택가. 빨간 벽돌로 지은 다세대주택 외벽에 '솔샘일터'라는 자그마한 팻말이 붙어 있었다. 파란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수도복과 수의를 만드는 작은 봉제공장(50㎡·15평)이 나왔다.

채승우 기자 rainman@chosun.com

솔샘일터는 '가난한 엄마'들에게 중산층으로 올라설 사다리를 제공하는 곳이다. 18년 전, 인근 성당의 이기우 신부가 남편과 이혼하고 혼자 아들을 키우던 장영오(50·사진 왼쪽)씨에게 "처지가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 공장을 운영해보자"고 제안했다. 창업 아이템은 수도복을 택했다. 수요가 고정적이고, 외상이 없다는 장점이 있었다.

이 신부가 천주교 빈민사목위원회의 명례방 협동조합에서 종자돈 2200만원을 빌려왔다. 이 조합은 천주교 신자와 후원회원들이 돈을 모아 저소득층에게 저리로 빌려주는 곳이다.

조합에서 빌린 돈으로 가정집 1층을 전세 내 봉제공장을 시작했다. 패션학원 디자이너 정진숙씨가 장씨 등 솔샘일터 직원 3명에게 재단과 바느질을 가르쳤다. 세 엄마가 재봉틀을 돌리는 동안, 인심 좋은 이웃들이 아이들을 돌봐줬다.

이 신부와 수녀들이 전국 여러 수도회에 솔샘일터 개업을 알리는 공문을 보냈다. 지방 수녀원에서 전화로 주문이 들어왔다. 일감이 안정되게 들어와 외환위기도 무리 없이 넘겼다. 디자이너 정씨의 제안으로 2006년에는 수의까지 사업 영역을 넓혔다.

개업 초기 월 40만원을 받던 장씨는 현재 월 160만원씩 받고 있다. 남들은 '박봉'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그 돈으로 장씨는 임대아파트를 마련하고 아들(25)을 대학에 보냈다. 장씨는 아들에게 늘 "너는 엄마 아들인 동시에 우리 동네의 아들"이라고 했다. 일감을 준 이 신부, 육아와 교육을 도운 이웃과 교인들에게 감사하라는 뜻이다.

올 초
천안에 있는 중소기업에 연봉 2600만원의 신입사원으로 취업한 아들은 "엄마가 다 쓰세요"라는 문자 메시지와 함께 인터넷뱅킹으로 첫 월급의 절반인 100만원을 부쳐왔다. 장씨는 그 돈으로 그동안 신세 진 이웃에 선물을 돌렸다. 장씨는 "어려울 때도 많았지만, 이웃들이 없었다면 이렇게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라며 "덕분에 이제는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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