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가출세대― 집을 버린 아이들] [1] "PC방은 우리 아지트"
입력 : 2010.07.19 07:30 / 수정 : 2010.07.19 07:50
채팅창 띄운 채 "밥 사고 재워줄 분 구해요"
하루 1만원이면 숙식 해결…
돈 궁한 가출10代 모여들어 '조건만남' 등 일탈 창구 돼
지난달 21일 오후 3시쯤, 초등학생 성폭행범 김수철이 10대 가출소녀 이모(18)양을 만났던 서울 영등포역 뒷골목의 PC방을 찾았다. 김수철은 이 PC방에서 이양에게 접근해 동거를 시작했다.
오후 7시쯤 담배연기 자욱한 PC방으로 한 손엔 핸드백, 한 손엔 천가방을 들고 줄무늬 원피스를 입은 10대 소녀 A양이 들어왔다. 시간당 요금이 300원인 이 PC방에는 영등포역 주변 노숙자들로 가득했다. A양이 노숙자들 사이에 있는 자리에 앉자, 한 30대 남성이 일어나 A양 주변을 왔다갔다했다. 이 남성은 "몇 살이냐, 집이 어디냐, 게임은 안 하느냐"고 물어보며 A양 주변을 맴돌았다.
A양은 한 채팅 사이트에서 채팅에 열중하며 이 남성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지만, 남성은 1시간 동안 A양에게 말을 걸었다. A양이 이용한 사이트는 10대 가출청소년들 사이에서 '조건만남' 상대자를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1시간쯤 후 조건만남 상대 남성을 구한 A양은 "부천으로 가 봐야 한다"며 PC방을 나섰다. 30대 남성은 A양이 나가는 것을 보고 바로 뒤따라 나갔지만, A양이 상대를 해주지 않자 자리에 멈춰 서 담배를 피워물며 A양의 뒷모습을 계속 지켜봤다. 이 남성은 "여자애가 예쁘고 갈 데가 없는 것 같아서 재워주려고 했다"며 "아직 어리니까 어른이 데리고 살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태연하게 말했다.
◆혼숙, 조건만남… 가출청소년 일탈 창구가 되고 있는 PC방
PC방은 가출청소년의 아지트다. 줄여서 '피방'이라고 부른다. PC방은 하루 1만원 정도면 밤을 지새울 수 있고 컵라면 등으로 끼니를 때울 수 있다. 돈이 궁한 가출청소년들이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이다.
- ▲ 지난 5일 밤 10시쯤 서울 송파구 잠실동 신천역 부근의 한 PC방에서 10대 가출소녀들이 여러 채팅 창을 동시에 켜 놓고 조건만남을 제안하고 있다.
지난 10일 오후 11시쯤 서울 천호동의 PC방에는 앳된 얼굴의 남녀 청소년 5명이 담배를 피우며 게임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이날 처음 만난 사이라는 이들 중 4명은 가출청소년이었다. 짧은 치마에 짙게 화장을 한 가출청소년 B(16)양은 "여자애들끼리만 이런 데 있으면 남자 어른들이 와서 찝쩍거려서 위험한데 또래 남자애들이 합류하면 안전하다"며 "오늘 만난 남자애들과 주변 폐가에 가서 같이 술 마시고 자기로 했다"고 말했다.
PC방은 10시 이후엔 18세 미만 청소년은 출입할 수 없게 돼 있다. 이 PC방 주인은 "겉모습이 어른 같은 데다 담배 피우는 모습이 익숙해서 청소년인 줄 몰랐다"고 했다.
가출한 여중·고생에게 PC방은 '조건만남'으로 돈을 벌 수 있는 창구였다. 지난달 28일 새벽, 신천역의 한 PC방에서 가출소녀 C(18)양은 채팅으로 남성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무려 24개의 대화창을 동시에 켜 놓고 '조건만남'을 제시했다.
"시간당 7만원, 변태 안 됨, 2만원 추가 항목도 있음." C양은 익숙한 듯 남성들에게 성관계시 지켜야 할 조건을 내걸었다. C양은 1시간 동안 4명의 남성들과 미팅 약속을 잡았다. 이들 중 3명은 실제로 신천역 부근으로 와서 휴대전화를 통해 자신들의 인상착의를 알려줬다. "자유롭게 살고 싶어 가출했다"는 C양은 "'조건만남'으로 물주(돈 있는 사람)를 구하면 당분간 먹고사는 문제도 해결된다"고 했다.
◆PC방에서 '스폰서' 찾는 가출청소년들
'조건만남'이 이뤄지는 채팅 사이트에서는 오후 6시부터 10시까지가 가장 붐비는 시간이다. '조건만남' 상대자를 구하는 가출 여중·고생들이 그때까지 이른바 '스폰서(상대남)'를 잡고 밤이 되면 그들을 만나러 가기 때문이다.
지난 1일, 한 채팅 사이트에 들어가자 '여 18, 19. 피방비(PC방비), 저녁 내줄 혼자인 착한 남 찾음. 변ㄴ(변태사절)'이라는 쪽지가 날아왔다. 노골적인 성관계 용어를 사용해 가며 '조건만남'을 할 수 있다는 가출청소년의 메시지도 여러 건 도착했다. 이날 채팅에서 울산의 19세 여학생은 "가출한 지 이틀 됐는데, 피방에서 채팅을 통해 물주와 잠잘 곳을 구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이 여학생은 채팅에서 "차비를 대주면 KTX를 타고 서울까지 올라가겠다"며 "혼자사는 거 맞느냐. 최대 며칠까지 재워줄 수 있느냐"고 묻기도 했다.
[新가출세대― 집을 버린 아이들] 14세 소녀 "오빠들과 가면 '쯩(주민등록증)' 검사 안해요"
입력 : 2010.07.20 03:01 / 수정 : 2010.07.20 09:45
[新가출세대― 집을 버린 아이들] [2] "모텔도 잘 뚫려요"
무사통과 술집·모텔 많고 인터넷엔 '가출정보' 널려
"옥상·주차장서 계속 자도 뭐라고 하는 어른들 없어
160㎝쯤 되는 작은 체구에 앳된 얼굴인 김양은 "이 주변 모텔은 참 잘 뚫린다"고 말했다. 모텔이 잘 뚫린다는 말은 미성년자 출입이 자유롭다는 가출 청소년들의 은어(隱語)다. 김양은 "오빠들이랑 다니면 '쯩'(주민등록증) 검사 안 한다. 여태까지 모텔에서 뺀찌 먹은(출입금지 당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했다.
가출 청소년들은 "가출해도 모텔, 찜질방, PC방 등 '뚫리는' 곳이 많다"고 말한다. 무턱대고 집을 나와도 먹고 잘 데가 널려 있다는 것이다. 가출 청소년들은 어느 가게에서 담배·술이 '뚫리는지(미성년자 판매)'에 대한 정보도 공유하고 있었다. 가출소녀 박송이(가명·18)양은 "남자친구들과 용산의 뚫리는 술집에 자주 간다"며 "술 먹고 부모님이 안 계시는 남자애들 집에 가서 같이 자기도 한다"고 태연하게 말했다.
- ▲ 2일 밤 인천 부평구 한 빌라 옥상으로 통하는 계단에 가출 청소년들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윤일건 기자 yoonik@chosun.com
지난 5월 가출한 이영지(가명·15)양은 인천 부평구 한 빌라 옥상에서 한 달째 자고 있다. 이양은 폐가전제품과 쓰레기가 쌓여 있는 옥상에서 큰 수건을 깔고 다른 수건을 덮고 잔다. 비가 오면 빌라 1층 실내 주차장에서 잔다. 이양은 "주민들이 가끔 '다시 오면 경찰에 알리겠다'고 말하지만 신고를 받고 경찰이 출동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했다.
집이 서울인 이양은 남자친구 정민우(가명·15)군을 따라 부평에 갔다. 지금 자는 곳은 남자친구 집 근처 빌라다. 이양이 자기 전까지 정군이 옆에 있어주고, 잠이 들면 정군은 집에 가서 잔다. 이양은 "남자친구 집에 어른들이 없을 때 잠깐 들어가서 머리만 감고 나온다"며 "낮엔 1시간에 500원짜리 PC방에 있고, 저녁엔 공원에서 시간을 보내고, 새벽 2~3시쯤 빌라 옥상에 몰래 들어가 잔다"고 했다. 더러운 티셔츠에 슬리퍼를 신고 있어 한눈에 가출 청소년으로 보이는 이양이 동네를 활보하는데도 "가출했느냐"고 묻는 어른은 1명도 없었다고 한다.
올해 초 집을 나온 박민수(17)군은 인터넷에서 만난 가출 동료들과 5만원씩 모아 1달에 30만원인 강원도 여관에 장기 투숙하고 있다. 박군은 "이 지역 모텔이나 여관은 돈만 주면 들여보내준다"며 "'○○장' 같은 모텔은 더 뚫기 편하다"고 했다. 박군은 "아예 월세방을 얻어서 가출한 친구들끼리 사는 애들도 있다"며 "알바(아르바이트)해서 월세방을 구할 생각"이라고 했다.
- ▲ 이들은 평소에는 빌라 옥상이나 계단에서 쭈그리고 자지만 비가 오는 날이면 주차장에서 잠을 청한다. /윤일건 기자 yoonik@chosun.com
◆가출 카페, 채팅으로 언제든지 가출 가능
인터넷 한 '가출 카페'에는 "이랭(일행) 찾아요", "17세 여. 자취하는 동거남 구해요" 같은 글이 하루에도 몇 개씩 올라온다. 갈 곳 없는 가출 청소년들은 인터넷을 통해 만나 무리 지어 다닌다. 한 가출 카페에 "서울 가출녀. 이랭 구함"이라고 쓰고 휴대전화 번호를 남기자, 곧 10대 소년 두명에게 연락이 왔다. 이들은 "우리는 키도 180㎝가 넘고 얼굴도 20대로 보여서 모텔, 담배 다 뚫을 수 있다"며 "이랭에 끼워주겠다"고 했다.
한 포털사이트에 '가출'이라고 치자, 가출에 대한 정보가 수십개 떴다. "초6(초등학교 6학년)인데, 가출하려고요. 준비물이 뭐예요?"라는 질문에 "잘 곳 제공 가능. 쪽지 주삼"이라는 답변글이 달려 있었다.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성윤숙 박사는 "인터넷의 발달로 가출이 예전보다 훨씬 쉬워졌다"며 "가출카페 등 유해 사이트에 대한 철저한 관리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입력 : 2010.07.19 07:30 / 수정 : 2010.07.19 07:51
김군은 "(범죄를 저지를) 마음만 먹으면 돈 벌기는 쉽다"고 말했다. 가장 큰돈을 벌 수 있는 길은 가출한 여자 청소년들과 합세해 이른바 '조건 사기'를 치는 것이다. 인터넷 채팅을 통해 '조건만남'을 할 것처럼 성매수 남성들을 모텔로 유인한 뒤 현장을 덮쳐 미성년자 성매매 혐의로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것이다. 김군은 "여자 4명과 남자 7명이 팀을 짜 한 번에 200만원씩 합의금을 받아내곤 했다"며 "용돈벌이 수준의 '삥 뜯는 것'(협박해서 돈 뺏기)과 차원이 다르다"고 말했다.
인터넷 중고 게시판을 통해 "중고 아이폰이나 MP3·PMP 등을 30만~40만원에 싸게 판다"고 한 뒤 또래 청소년들에게 돈만 입금받아 챙겨 달아나는 것도 집 나온 청소년들이 돈을 버는 수법 중 하나다. 김군은 인터넷 사기 등으로 현재 밀려 있는 재판만 4건이 있다고 했다.
가출한 청소년들끼리 어울리다 보니 범죄에 쉽게 노출된다. 이군은 "얼마 전 '출가(가출)'한 '이랭(일행)'들과 본드를 마시다가 경찰서에 끌려갔는데, 화장실 간다고 속인 뒤 몰래 도망쳤다"고 했다.
이들은 "경찰이 없으면 우리도 죽는다"고 했다. 건물 옥상이나 화장실 등에서 잠을 자다 나이 많은 가출 청소년이나 부랑자에게 이유 없이 폭행을 당하면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10대 가출 청소년들에게 밤거리는 아직 '무서운 세상'인 셈이다. 지난달 10대 청소년들이 또래 친구를 살해한 뒤 시신을 훼손해 한강에 버린 사건 역시 가출 청소년에 대한 범행으로 밝혀졌다. 김군과 이군에게 얼마간의 용돈을 쥐여주며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자, 이들은 "피방(PC방)비 벌었으니 피방에서 이랭 구하기 쉬운 서울로 떠나야겠다"며 서둘러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입력 : 2010.07.20 03:01
"조건만남 채팅 사이트 폐쇄하는게 실질 효과"
경찰과 여성가족부는 지난 1월 '유스키퍼(Youth Keeper)'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여성 청소년들이 인터넷 채팅을 하다 성매매 같은 '조건 만남'을 제안하는 남성을 경찰에 신고할 수 있도록 했다. 무료 프로그램을 제공해 인터넷 대화 화면을 저장해 신고하게 한 것이다. 하지만 개발비 2000여만원을 들인 유스키퍼는 7개월째 제대로 이용되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지금까지 전국에서 유스키퍼를 통해 신고된 사례는 23건밖에 되지 않는다. 그중 10건은 처벌할 정도의 내용이 아니었고 수사지휘가 내려진 13건 중 6건은 내사종결됐고 기소가 된 것은 단 1건이었다. 기소가 된 것도 남성이 여자 청소년인 것처럼 가장해 다른 남성과 채팅하다가 신고한 사건이었다.
가출한 여자 청소년들이 생활비를 벌기 위해 조건 만남을 먼저 제안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현실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여자 청소년들이 성매수 남성을 신고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었으니 신고 건수가 적을 수밖에 없다. 여성가족부 관계자는 "유스키퍼는 성매수 남성으로부터 여자 청소년을 보호하기 위한 프로그램"이라며 "조건만남을 하려고 작정한 여자 청소년을 막을 수 있는 시스템은 없는 상태"라고 털어놨다. 경찰청 관계자는 "PC방을 일일이 다니면서 조건만남 현장을 모니터링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며 "조건만남이 이루어지는 사이트를 폐쇄하는 게 제일 효과적"이라고 했다.
유스키퍼는 오히려 성매매 단속을 방해한다는 내부 지적도 받고 있다. 일선 경찰서의 여성청소년계장은 "유스키퍼 이후 경찰이 성매수 남성으로 신고될 수 있어 위장 수사나 함정 단속은 하지 못하고 신고를 기다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그러다 보니 최근 청소년 성매매 단속 실적이 뜸해졌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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