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취 미/연 예 가

“평생 술·노름·여자 모른 덕분에 요즘도 전국 쏘다니며 웃겨” (문화일보 2010-07-16

<오랜만입니다>

“평생 술·노름·여자 모른 덕분에 요즘도 전국 쏘다니며 웃겨”

원로 코미디언 임희춘 노인복지후원회장

기사 게재 일자 : 2010-07-16 14:07
▲ 임희춘씨가 14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 자택에서 현역 코미디언 때 유행시켰던 “어이구야”를 다시 해보이고 있다.
원로 코미디언 임희춘 노인복지후원회장

“어이구야∼.”

처진 반달눈에 스마일 입 모양. 주름 하나 없는 홍조 띤 얼굴을 하고 1970년대 중반 아이들이 너도 나도 따라했던 당대 히트 유행어를 해 보이는 원로 코미디언 임희춘(78)씨. 14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합정동 자택에서 기자와 만난 임씨는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30여 년 전 흑백TV에서 돌쇠분장을 하고 나와 “어이구야”를 연방 해보이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지금 세대야 “그게 뭐가 웃겨” 하겠지만 당시에는 임씨가 “어이구야” 대사를 한번 치면 웃음이 ‘빵빵’ 터졌다. 당시 ‘웃으면 복이와요’‘명랑극장’‘고전유머극장’ 등 홈코미디 인기는 지금 개그콘서트 등 인기 프로에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별다른 오락거리가 없던 그 시절에 이런 코미디 프로는 전국민을 웃겼다 울렸다 하는 마법을 갖고 있었다.

김희갑, 구봉서, 배삼룡, 이기동, 서영춘, 이주일, 임희춘, 심철호, 송해씨 등 1960∼1980년대를 주름잡았던 희극배우들 중 지금 생존해 있는 코미디언은 원로인 구봉서(84)씨를 비롯해 임희춘, 송해(83)씨 등 손에 꼽을 정도다. 세월과 함께 그들은 갔지만 그들이 남긴 웃음의 여운은 여전하다.


임씨는 코미디 1세대 중 현재도 가장 건강하고 의욕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지금은 대한노인복지후원회 회장으로 전국을 순회하며 노인들을 위한 쇼와 봉사활동을 벌이고 있다. 워낙 연예계에 발이 넓다보니 임씨가 동원령을 내리면 오지 않는 가수, 개그맨이 없을 정도라고 한다.

자신을 ‘具라인(구봉서 라인)’의 대표라고 자임한 임씨는 “얼마전 배삼룡씨를 보내고 나니 이제 구 선배밖에 없는데 다리가 좋지 않아 바깥출입을 하지 못해 마음이 아프다”면서 “정말 자기 관리가 철저하신 분이고 나를 있게 한 분인데…”라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연예계에 데뷔하신 것이 1952년이시죠.

“광복 이후 서울에 올라와 한남동에서 용산중학교를 다녔어요. 아버지가 공무원이셔서 괜찮게 살았는데 6·25전쟁이 모든 것을 바꿔 놓았죠. 피란 중에 부모님이 다 돌아가셨고 형제들과도 헤어졌어요. 졸지에 고아가 됐지요. 구두닦이도 하고 냉차도 만들어 팔고 안 해본 것이 없어요. 1952년에 길에서 우연히 광고판을 봤는데 극단 동협에서 ‘피어린 역사’라는 작품의 배우를 모집한다고 해서 바로 지원했죠. 먹고 잘 곳이 해결되는 게 너무 좋았지요.”

처음에는 연기를 하셨는데 어떻게 코미디언의 길로 가셨나요.

“‘피어린 역사’라는 연극에서 내가 과수원 주인집 아들 역할을 했는데 헐벗은 애들이 서리하는 것을 붙잡아서 혼내는 역할이었어요. 처음으로 공연을 하니 얼마나 떨렸겠어요. 관객들도 입추의 여지 없이 빼곡한데 내가 나가야 할 장면에 다리가 떨어지지 않더라구요. 무대 뒤에서 벌벌 떨고 있는데 극단 운영자인 김칠성씨가 ‘이놈 여기서 뭐하냐’고 하면서 발로 나를 무대로 차버린 거예요.얼떨결에 무대로 나갔는데 중심을 못 잡고 허우적거리는 데다 대사도 잊어먹어 말까지 더듬거리자 객석에서 웃음이 빵 터진 거예요. 그전까지 눈물 짜던 장면이 완전 웃기는 장면이 되어 버린 거죠. 운명의 장난 같지만 그게 코미디언이 된 결정적 계기였어요.”

―처음에는 작고하신 김희갑씨하고 함께 하셨다고요.

“당시 김희갑씨가 팔도강산으로 공전의 히트를 하고 있을 때였죠. 한번은 극단 동협에 아주 웃기는 놈이 있다고 해서 연극을 보러오셨어요. 공연 끝나고 만나서 같이 한번 해보자고 해서 김희갑씨를 따라다녔죠. 지금의 매니저 같은 역할이지만 당시에는 ‘가방모찌(‘모찌’는 가질 지(持)자의 일본어 표기)’라고 했지요. 모든 일정 챙기고 섭외하고 자리 비면 연기도 하고 다 했어요.”

―구봉서씨와는 어떻게 만나게 되셨나요.

“김희갑씨가 팔도강산 해외로케를 한 6개월 나가는데 나를 데려갈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구봉서씨한테 맡겼지요. 그때 구봉서씨는 잘나가는 초특급이었지요. PD들이 배역을 구봉서씨가 넣으라면 넣고 빼라면 뺐으니까. 구봉서씨 덕분에 배역을 많이 했어요. ‘구봉서쇼’ 사회는 내가 봤어요. 나중에 김희갑씨가 귀국해서 구씨한테 나를 돌려달라고 했는데 ‘내가 다 키워놨는데 무슨 소리냐’고 해서 구씨와 일을 계속했어요.”

임씨가 코미디언으로 제자리를 잡은 것은 TBC 시절부터다. 신생방송사였던 TBC가 코미디프로를 하기 위해 당시 최고 인기를 끌었던 구봉서, 배삼룡, 이기동씨를 영입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서영춘씨와 임씨를 전속으로 스카우트해 갔다.

―유행어인 ‘어이구야’는 어떻게 탄생하게 됐나요.

“서영춘씨하고 고전유머극장에서 ‘검객 시라노’라는 코너를 하는데 서씨가 시라노역할을 하고 내가 시종역할을 했어요. 시라노는 코를 길게 분장을 했는데 내가 서씨의 코가 옷걸이인 줄 알고 모자를 코에 걸었어요. 그 모습을 보고 즉흥적으로 ‘어이구야 희한하네’라고 했는데 그게 히트를 한거예요. PD가 아무때나 ‘어이구야’를 맘대로 하라는 거예요. 그래서 슬플 때는 우는 표정으로, 좋을 때, 황당할 때 모두 다른 표정으로 했지요. 그게 히트를 했나봐요.”

‘어이구야’가 유행할 1975년쯤에는 가수 송대관씨의 ‘해뜰날’의 “쨍”, 강부자씨의 “나 좀 봐야 해”, 한진희씨의 “죽갔네”, 서영춘씨의 ‘시골영감 서울 가는 기차놀이에 …’ 등이 유행했다.

―주로 하인, 돌쇠, 종업원 등의 역할을 많이 하셨죠.

“내 평생 사장, 양반, 주인 이런 역할을 한 번도 못했어요. 좀 바보 같이 짓밟히는 역할만 했어요. 남한테 속고 어수룩하고… 그런데 그때 바보는 바보가 아니에요. 올곧게 살고 정석대로 사는 사람이 바보였지요. 약삭빠르고 남을 등치던 사람이 성공하던 때였으니 인정 많고 곧이 곧대로 사는 사람은 다 바보였어요. 그래서 사람들이 좋아했던 것 같아요.”

1980년대까지 그야말로 임씨의 전성시대였다. 그러나 1980년 신군부의 등장과 함께 코미디계에도 찬바람이 불어닥쳤다. 사회문화를 문란하게 했다는 이유로 삼청교육대에 끌려가는 코미디언이 많았다. 한번은 모 실세장관의 아들이 아침밥을 먹는데 밥상에 계란이 있자 “어이구야. 계란이네”라며 임씨 흉내를 냈다고 한다. 이 장관이 아들에게 “어디서 그런 바보 같은 것을 배웠느냐”고 물었더니 “요즘 TV코미디프로에서 인기다”고 했다는 것. 이 장관이 TV프로를 모니터하니 배삼룡의 ‘개다리춤’, 땅딸이 이기동의 ‘쿵따라 다따 삐약 삐약’, 서영춘의 ‘품바라품바 품바바’, 임희춘의 ‘어이구야’ 등 바보 시리즈가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당시 정부는 세계장애인대회 등 국제대회 등을 핑계로 TV의 바보 코미디 프로를 모두 폐지시키고 코미디 프로도 방송사별 1개씩으로 축소시키는 조치를 내렸다.

“당시 최고 인기를 누리던 코미디언들이 일자리를 잃으니까 생계가 막막한 거예요. 배삼룡씨가 그때 제일 인기가 있어서 돈이 많았지요.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삼강사와’가 히트를 하고 있으니 ‘삼룡사와’를 만들어 팔면 대박날 것이라고 부추겼죠. 그래서 전국 대리점망을 만들고 해서 사업을 시작했는데 중간에 경영을 맡았던 사람이 돈을 갖고 튀어버렸지요. 투자자들이 배씨 집에 와서 난리를 치자 결국 빚 독촉에 못 견뎌 미국으로 가버린 거예요. 국내 최고 인기 코미디언이 혈혈단신 미국에 갔는데 뭘 하겠어요. 로스앤젤레스에서 관광가이드를 하면서 생활을 했지요.”

배씨는 귀국 이후 TV에 잠깐 얼굴을 비치다가 건강식품판매 등을 하다 쓰러져 오랫동안 병상에 있다 지난 2월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병원비 2억여원을 내지 못하는 등 불행한 여생을 보냈다.

불행한 것은 배씨만이 아니었다. “서영춘씨는 돈을 모아서 극장식 술집을 했어요. 서영춘이 한다니까 손님이 얼마나 많았겠어요. 손님들이 다들 서씨한테 술을 한잔씩 권했는데 어떤 사람 술은 먹고 어떤 사람 술은 안 먹고 할 수가 없었지요. 다 받아 먹다가 몸이 상해 결국 세상을 떴지요. 서씨가 죽은 뒤 이기동씨가 그집을 맡았는데 이씨도 이래저래 술을 받아 먹다가 그만 몸을 다쳐 세상을 등졌죠. 우리 코미디언 중에 술 때문에 운명을 달리한 분들이 많아요. 뚱뚱이와 홀쭉이로 유명하던 양훈, 양석천씨도 술 때문에….”

―원로 코미디언들 중 노후가 넉넉지 못한 분들이 많은데 임 선생님은 알부자로 소문나 있던데요.

“저는 술도 못하고 담배도 안 피우고 노름, 여자 전혀 못해요. 구봉서씨도 스캔들 한 번 없었잖아요. 내가 구라인이다 보니 자기관리는 철저하죠. 집안 어른들이 돈 생기면 무조건 땅에 투자하라고 했어요. 그때 돈 좀 벌면 무조건 땅을 샀어요. 500만원짜리도 사고 1000만원짜리도 사고 땅에다 올인을 했지요. 그랬더니 이게 다들 지금 효자노릇 톡톡히 합니다. 어떤 동료는 잘나갈 때 술집에서 아가씨들한테 100만원 다발을 뿌리면서 흥청망청했는데 죽을 때는 월세도 못 내고 쓸쓸히 가더라고요.” 임씨는 덧붙여 자식자랑을 한참 늘어놓았다. 1남3녀 중 아들 임준씨는 건국대 생명공학과 교수이고 두 딸은 각각 유치원을 운영하고 있단다.

임씨는 자신이 젊고 즐겁게 사는 비결은 ‘웃음’에 있다고 자신한다. 지금도 어르신 상대로 강연을 가면 “보약 먹지 말고 1분이라도 웃어보라. 보약 한 첩보다 더 효과가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노인들을 상대로 봉사활동을 활발히 하는 것도 그의 큰 즐거움이다.

―요즘 후배들의 개그 프로도 자주 보시나요.

“자주 보는데 세대차이가 나서 그런지 많이 달라요. 요즘 후배들은 말로만 웃기려고 하니까 오래 못 가는 것 같아요. 우리 때 코미디가 여러 명이서 하는 축구나 농구라면 요즘 후배들 개그는 100m 달리기를 하는 것 같아요. 젊을 때 자기관리를 잘 해서 롱런해야지요.” 임씨는 기자와 헤어지면서 “항상 욕심부리지 말고 웃으면서 살라”고 몇번씩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