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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 미/여행정보

무주에서 즐기는 세 가지 단풍놀이 (내일신문

무주에서 즐기는 세 가지 단풍놀이
산야에 붉은 꽃송이, 피다!


자꾸 눈이 감겼다. 올해만은 단풍놀이를 놓칠 수 없다는 욕심에 새벽 6시부터 집을 나선 후유증이었다.


운전대를 잡은 남편에게는 미안했지만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그렇게 서울 톨게이트에서 달리기를 2시간 30분.
눈을 뜨니 소백산 줄기의 산들은 경쟁이라도 하듯 하늘로 뻗어 있고, 자동차는 뾰족한 산 사이를 시원하게 내달리고 있었다. 우리의 단풍 여행은 붉게 물들어가는 무주의 산세를 감상하는 시간이었다.


뉴스에서 떠드는 단풍 절정기가 아니라 해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처마 아래 단풍, 적상산 안국사

내비게이션이 연신 빨간색 S자를 그려댔다. 정신이 몽롱했다. 구불구불한 산길은 끝없는 미로를 찾아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핸들을 돌리고 돌려 겨우 도착한 곳은 안국사. 해발 1천 미터, 적상산 중턱에 있는 소박한 사찰이다. 단풍으로 물든 산세가 여인들의 붉은 치마를 연상시킨다는 적상산을 호젓하게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아침 시간 사찰은 조용했다. 차가운 구름만이 바람에 휩쓸려 본전인 무량수전에 내려앉고 있었다. <가요무대>에서 뿌연 안개를 뿌려주는 것처럼.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기자 그제야 오래된 처마와 사찰 담장에 붉은 단풍이 찾아왔음을 알 수 있었다. 아니, 시야를 넓히니 사찰을 에워싼 적상산 자체가 군데군데 홍조를 띠었다. 사실 안국사에는 재미있는 전설이 내려온다. 학이 단청을 칠하다 날아갔다는 옛날옛적 이야기. 가을에 이곳을 찾으니 학이 못다 한 작업을 붉은 단풍이 마무리하는 듯했다. 단풍을 바라보며 사찰 한쪽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데 다람쥐 한 마리가 재빠르게 움직였다. 앗, 조금 전 주차장에서 본 놈(?)이다. 조용한 사찰에서 유일하게 호들갑스럽게 뛰어가던 주인공을 신기하게도 다시 만났다. 사람들이 단풍 구경에 넋을 놓고 있을 때도 다람쥐는 겨울 준비에 한창이었다. 단풍이 끝나면 곧 겨울이야, 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안국사에서 잠시 쉬었다 다시 내달린 목적지는 적상호 전망대. 무주양수발전소의 조합 수조로 상부 저수지인 적상호와 하부 저수지인 무주호의 지하수를 연결하는 곳이다. 솔직히 적상호 전망대는 이제까지 봐온 전망대 중에서 외관이 가장 우스꽝스러웠다. 색색깔이 칠해진 원통을 재미없게 세워놓은 모습이랄까. 하지만 이곳에서 감상하는 경치는 무주에서 손꼽을 정도로 유명하다. 물론 날씨가 맑다는 전제 아래 말이다. 우리가 찾은 날에도 구름과 안개의 방해로 세상은 온통 뿌옇기만 했다. 전망대에 나선형으로 놓인 (오금 저리는) 계단을 체험했다는 것에 위암을 삼을 수밖에.


전망대에서 내려오는 길. 갑자기 멀미 증세가 나타났다. 비행기를 탄 사람마냥 귀도 멍멍해서 연방 입을 쩍 벌려야 했다. 해발 1천 미터의 산길을 몇 분 만에 굽이굽이 돌아 내려왔으니 어쩌면 자연스러운 몸의 반응이었다. 산으로 둘러싸인 무주에서는, 그래서 잠시 쉬어가는 지혜가 필요했다.


Tour Info. 위치 전북 무주군 적상면 북창리 934 문의 063-322-6162



하늘 아래 단풍, 덕유산 향적봉

불편한 속을 진정시키며 향한 곳은 덕유산의 무주리조트. 스키어들로 북적대는 겨울철이 아니어서일까. 커다란 리조트는 텅 빈 도시마냥 한적했다. 그나마 이곳을 찾은 사람들의 공통된 목적은 오직 한 가지. 덕유산을 단걸음에 올라가 파노라마 시야로 단풍을 감상하기 위해서다.


덕유산 향적봉은 해발 1천614미터. 곤돌라를 이용하면 해발 1천525미터 설천봉까지 단번에 오를 수 있다. 관광객들이 두 발로 걷는 높이라고는 90미터가 전부. 도보로 20분이면 대한민국에서 네 번째로 높은 산에 오르는 셈이다.


탑승장에는 곤돌라 100여 대가 끊임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우리는 평소 한번 손대면 정신줄 놓고(?) 먹어대는 과자를 사서 곤돌라에 탔다. 사실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남들보다 미리 단풍을 보겠다고 왔으니, 예쁜 단풍 구경은 아직 무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게 웬일일까. 단풍은 우리 발밑에 놓여 있었다. 산 곳곳에 붉은 꽃송이가 피어 있었다. 게다가 고도가 높아질수록 한층 시원하게 펼쳐지는 산의 풍경은 언제나 그렇듯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렇게 멍하니 산세를 감상하다 설천봉에 내렸다. 지상에서 발을 뗀 지 딱 15분 만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정상 향적봉까지는 열심히 걷는 일뿐. 다행인 건, 사이사이 반가운 얼굴을 만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바로 사진작가들의 작품에서 종종 볼 수 있었던 상제루와 구상나무다. 전자가 설천봉에 자리한 전통 정자라면, 후자는 우리나라에만 자생하는 희귀 나무다. 모두 무협 영화에나 등장할 법한 독특한 모양이 공통점이랄까.


향적봉에 닿자 사람들은 저마다 인증 사진을 찍어대기 시작했다. 봉우리 돌에는 ‘덕유산 향적봉’이란 글자가 또렷했다. 고개를 돌리니 적상산, 마이산, 가야산, 무등산 등이 360도 파노라마로 펼쳐졌다. 역시 대한민국은 지천이 산인 나라다. 게다가 그 산들은 가을이면 꽃송이가 된다. 단풍 잔치가 벌어지는 것도 당연했다.


그렇게 호젓한 감상에 빠졌을 때 방금 올라온 듯한 아줌마 무리가 “세상 참 붉다!”면서 야단스럽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런데 이어지는 한 마디에 정신이 몽롱해졌다. “참, 그런데 덕유산이 어느 쪽이지?” 갑자기 입이 간질거리기 시작했다. 성질 같아서는 “아유, 여기가 덕유산 정상이잖아요!”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한껏 오른 아줌마들의 흥을 깨고 싶지 않았다. 단풍이 곱다면야 여기가 덕유산이어도, 지리산이어도 상관없었다.

Tour Info. 위치 전북 무주군 설천면 심곡리 43-15 곤돌라 운영 시간 오전 10시~오후 4시(금·토요일은 오후 4시 30분까지) 요금 어른 1만2천 원, 어린이 9천 원 문의 063-320-7381(muju resort.com)



돌담 위의 단풍, 지전마을

단풍놀이의 마지막 여행은 지전마을로 잡았다. 30여 가구가 사는 소박한 마을이 세상에 이름을 알린 것은 2006년. 17세기 후반부터 지어진 마을의 돌담을 문화재로 지정하면서다. 지금은 약 700미터에 달하는 돌담을 문화재 262호로 등재해 보존·관리하고 있다.


마을의 유일한 볼거리는 돌담. 호젓하게 마을을 둘러보는 것이 전부다. 지전마을의 돌담은 흙과 돌을 섞어 쌓은 뒤에 시멘트 기와를 얹은 형태다. 오래된 담장은 무너져 내려서 보수 공사가 한창이었다. 그래서 마을에는 깨끗하게 손질된 담장과 허물어진 담장이 공존했다. 손질된 담장은 깨끗하기는 했으나 시간의 흔적은 사라진 듯했다.


사실 마을을 산책하면서 우리를 가장 놀라게 만든 주인공은 따로 있었다. 마을 입구를 걷는데 갑자기 뒤에서 묵직한 소리가 들렸다. ‘척!’ 뒤돌아보면 아무도 없었다. 알고 보니 집집마다 심어놓은 감나무에서 감이 바닥에 추락(?)하는 소리였다. 오래된 돌담 위에도, 마을 길에도, 담장 너머 안마당에도 지전마을은 주홍빛으로 물들었다. 마치 주홍빛 단풍 같았다.


순간 돌담 구경은 뒷일이 됐다. 우리는 길에 떨어진 감을 주워서 흙을 털어내고는 열심히 봉지에 담았다. 돌담 하나 걸었을 뿐인데 비닐봉지는 제법 묵직해졌고, 우리는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어디 단풍 줍는 재미가 이만큼 흥미로울까, 싶었다.


무주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길. 고속도로는 차들로 가득 찼다. 피할 수 없는 단풍놀이의 대가였다. 자연히 속은 허전했고 몸은 피로했다. 우리는 휴게소로 들어가는 대신 지전마을에서 주운 감을 꺼내서 한입 베어 물었다. 가을이 참 달았다.

Tour Info. 위치 전북 무주군 설천면 길산리 문의 관광 안내 전화(063-1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