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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치

'남겨진 자의 고독' 김종필이 바라본 김영삼 서거(뉴데일리 2015.11.22 15:10:18)

'남겨진 자의 고독' 김종필이 바라본 김영삼 서거

의원직 제명 반대·3당 합당·토사구팽… 얽히고설킨 인연

JP, 빈소 차려지자마자 YS 조문… "신뢰의 분, 다른 사람 못할 일 했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22일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유족인 차남 현철 씨를 위로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22일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유족인 차남 현철 씨를 위로하고 있다.

 

 현대정치사를 이끌어온 풍운의 3김(김영삼·김대중·김종필) 중에 이제 김종필 전 국무총리만 남겨졌다. 22일 휠체어를 타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대병원을 찾은 김종필 전 총리는 만감이 교차하는 듯 많은 발언을 남기지 않았다.

김종필 전 총리는 이날 오전 빈소가 개방되자마자 조문에 나섰다. 거동이 불편해 휠체어를 탄 채 조문을 마친 김종필 전 총리는 취재진과 만나 "신념의 지도자로 국민들의 가슴 속에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며 "더 살아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애석하기 짝이 없다"고 애통한 심경을 짧게 표현했다.

이후 김종필 전 총리는 먼저 도착해 빈소를 지키고 있던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최고위원을 만나서도 ""(김영삼 전 대통령은) 신뢰의 분"이라며 "신뢰로 못할 것, 어려울 것, 다른 사람이 못하는 일을 하신 분"이라고 고인을 회상했다.

◆현대정치 이끌어온 3김… 남겨진 JP, 빈소 차려지자마자 YS 조문

김종필 전 총리(JP)는 이날 서거한 김영삼 전 대통령(YS), 6년 전 먼저 세상을 떠난 김대중 전 대통령(DJ)과 함께 우리나라의 현대 정치를 이끌어와 통칭 '3김'으로 불린다. 1987년 대선에서는 셋이 나란히 대선에 출마해 함께 낙선의 고배를 마시기도 했다.

이후 김종필 전 총리가 있는 쪽이 이기고, 이기는 쪽에 그가 있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1992년 대선에서는 김종필 전 총리를 등에 업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 김대중 전 대통령을 눌렀다. 5년 뒤에 치러진 1997년 대선에서는 역으로 김종필 전 총리와 'DJP 연합'을 형성한 김대중 전 대통령이 당선되기도 했다.

3김은 각자 부산·경남, 광주·전라, 대전·충남이라는 확고한 지역 기반을 바탕으로 수많은 이합집산과 창당 등을 해왔다. 그 과정에서 독보적인 카리스마로 타 정치인들과는 레벨이 다른 위상을 구축했다. 정계 개편이나 신당 창당 등이 난관에 봉착할 때마다 정치권에서는 "이런 것은 3김이나 할 수 있었던 일"이라는 말이 항상 회자되곤 했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22일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를 찾아 조문한 뒤 취재진과 만나 문답을 나누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22일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를 찾아 조문한 뒤 취재진과 만나 문답을 나누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김종필, 김영삼 제명결의안에 "아무리 대통령 뜻이라도"

3김 중에 유일하게 현세에 남겨진 김종필 전 총리와, 이날 서거한 김영삼 전 대통령과의 인연은 결코 작지 않다.

5·16 혁명과 민주공화당(공화당) 창당의 주도자였던 김종필 전 총리와, 민정당~민중당~신민당에 몸담은 야당 소장파 의원이던 김영삼 전 대통령은 줄곧 정적(政敵) 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서로는 이 시절부터 내심 서로의 능력을 인정하고 있었다는 게 정치권의 중론이다.

그 속내가 세상에 드러난 것이 1979년 김영삼 전 대통령의 제명안 의결 때였다. 그 해 9월 16일 김영삼 전 대통령이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를 통해 "미국은 국민과 끊임없이 유리되고 있는 정권과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다수, 둘 중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지를 분명히 할 때가 왔다"며, 미국이 직접 나서서 유신 정부를 제어할 것을 압박했다.

이 인터뷰를 보고 '이거 심상치 않겠다'고 느낀 김종필 전 총리는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왜 국내 문제를, 대통령 욕을 외국 신문에 이야기하느냐"고 꼬집자, 김영삼 전 대통령은 "국내에서 (보도가 전혀) 되지 않으니, 외국에 이야기해서 역수입이라도 해야겠다"고 맞섰다.

아니나다를까 이 인터뷰가 다시 국내 신문에 보도되자 박정희 전 대통령은 '사대주의'라고 펄펄 뛰며 "저런 친구가 국회에 있으면 국회를 버리니, 내쫓아야 한다"고 지시했다.

이에 박준규 공화당 의장대행이 회의를 소집해 '대통령의 지침'이라며 공화당과 유신정우회의 단독 본회의로 제명결의안을 강행 처리할 뜻을 비추자, 김종필 전 총리는 "아무리 대통령의 뜻이라 해도 세상에는 되는 일이 있고, 안 되는 일이 있다"고 강하게 반대했다. 결국 당시 5선 의원이자 공화당 상임고문이었던 김종필 전 총리는 공화당과 유정회 의원을 통틀어 유일하게 부표를 던진 의원이 됐다.

◆'서울의 봄' 때 김종필, 김영삼에 "춘래불사춘" 조언했지만

이후 사태는 10월 16일 부마 항쟁으로 이어졌으며, 부산과 마산 시민들은 "김영삼 총재 제명을 철회하라"고 들고 일어났다. 그로부터 열흘 뒤 박정희 전 대통령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흉탄을 맞고 비명에 갔다.

10·26 사태로 유신 정부가 붕괴하자, 자연스레 3김의 움직임에 정치권의 시선이 쏠렸다. 1980년 2월 25일 인촌 김성수 선생의 추도식을 계기로 김종필 공화당 의장(당시)과 김영삼 신민당 총재(당시), 그리고 김대중 씨(당시)가 회합했다. 1963년 3공화국 성립 이래로 정치를 주도해 온 세 사람이지만 공개 석상에서 한 자리에 모인 것은 처음이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자신의 제명결의안 의결이 기폭제가 돼서 부마 항쟁이 터지고 유신 정부가 무너진 만큼, 마치 이미 대통령이라도 된 양 의기양양해 있었다. 김종필 전 총리는 그런 김영삼 전 대통령을 향해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는 말을 아느냐"고 넌지시 말을 건넸다.

"봄이 온 것 같지만 진짜 봄은 아니란 뜻"이라며 "봄이 오기도 전에 외투를 벗으면 감기에 걸리고 폐렴이 돼 죽을 수도 있듯이, 지금 봄이 왔다고들 하는데 생각지도 않은 일이 벌어질 것 같다"고 경고했었다던 김종필 전 총리는 최근 중앙일보에 연재되고 있는 회고록에서 "나의 경고성 발언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귀에 들어가지 않은 것 같았다"고 털어놨다.

당시 중앙일보에 소속돼 공화당을 출입하던 김영희 기자는 "정치권외에서 부는 바람에 예상되는 게 없느냐"고 질문했고, 김종필 전 총리는 "지금 항간에 돌고 있는 이야기들이 기우이길 바란다"며 "정치하는 사람들이 옳게 하면 기우는 현실화되지 않을 것"이라고 다시 꼬집었지만, 역시 김영삼 전 대통령은 알아듣지 못했다는 지적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1989년 골프 회동을 하고 있다. ⓒ뉴시스 사진DB
▲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1989년 골프 회동을 하고 있다. ⓒ뉴시스 사진DB

 

◆87년 대선·88년 총선 거치며 공동 운명 모색

이후 5·17 등이 이어지며 허망하게 신군부에 정권을 내주고 뿔뿔이 흩어졌던 김종필 전 총리와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87년 대선 국면에서 다시 조우했다.

이듬해 총선에 나설 생각으로 창당했기 때문에 기실 대통령 당선에는 뜻도 없었고 노리지도 않았던 김종필 전 총리가 보기에 판세는 명약관화했다. 이대로라면 노태우 전 대통령이 당선되는 것이었다. 김종필 전 총리는 이희일 비서실장을 통해 '야3당 후보 회동'을 제안했고, 여기에 김영삼 전 대통령이 "먼저 김종필 후보가 사퇴하고 나에 대한 지지를 선언해준다면 함께 만나겠다"고 화답하는 듯 하면서 불가능한 조건을 내걸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측은 "김영삼 씨가 사퇴하지 않을 것"이라며 처음부터 거절했다.

1987년 대선과 1988년 총선을 거치며 정국은 4당 체제로 굳어졌다. 총선이 끝난 직후인 1988년 5월 18일, 3김은 김종필 전 총리의 야3당 총재 회동 제안으로 국회 귀빈식당에서 오랜만에 다시 한 자리에 섰다. 이 자리에서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 김대중 평화민주당 총재,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는 5공 청산을 위한 특위 구성에 합의했다.

◆3당 합당 위한 靑 회동… 김종필, 김영삼에 "그쯤 하라"

5공 청문회가 끝난 뒤 정국은 다시 한 번 급변했다. 이번에는 김종필 전 총리의 제안으로 민정당과 공화당의 합당이 추진됐다. 여소야대 속에서 정국이 마비될 것을 우려한 제안이었는데, 여기에 박철언 청와대 정책보좌관의 아이디어가 끼어들어 민주당까지 포함해 거대 여당을 구축하는 '3당 합당' 프로젝트로 발전했다.

이런 국면 속에서 1989년 10월, 김종필 전 총리와 김영삼 전 대통령은 골프 회동을 가졌다. 라운딩이 끝난 뒤에는 "두 총재가 우정과 소신을 가지고 협력해 나가기로 한다"는 합의문까지 발표됐다. 바야흐로 김영삼 전 대통령이 만 26세에 국회에 입성한지 38년, 김종필 전 총리가 5·16 혁명을 통해 출사한지 29년 만에 두 사람이 한 배에 몸을 싣을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1990년 1월 22일, 노태우 전 대통령과 김종필 전 총리, 김영삼 전 대통령이 마침내 청와대에서 만났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3당 합당을 한 뒤에는 (노태우) 대통령이 명예총재를 맡고 내가 총재, 김종필 총재께서 최고위원을 맡으시는 게 좋겠다"며 막판에 노태우 전 대통령이 총재를 맡기로 한 기존 합의를 뒤엎으려 했다. 이 때문에 노태우 전 대통령과 김영삼 전 대통령이 설전을 벌이기 시작해 3당 합당이 마지막에 어그러질 위기에 봉착했다. 회동은 9시간째 진행되고 있었다.

이에 김종필 전 총리가 나서서 "김영삼 총재, 그쯤 하시라"고 면박을 줬다. "다음 시대의 주연은 김영삼 총재일 테니 그렇게 알고 돕겠다"고 '다음 대권'에 대한 확약을 주기도 했다. 그러자 비로소 김영삼 전 대통령이 수긍해 3당 합당이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1989년 골프 회동을 하고 있다. ⓒ뉴시스 사진DB
▲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1989년 골프 회동을 하고 있다. ⓒ뉴시스 사진DB

 

◆김종필, 김영삼을 '홍곡' 자신을 '연작'에 비유했지만

1990년의 3당 합당으로 김종필 전 총리와 김영삼 전 대통령은 한 배에 올랐다. 이후 1992년 민자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도 김종필 전 총리는 민정계의 박태준 최고위원이나 이종찬 의원 대신 김영삼 전 대통령의 손을 들어 그를 대선 후보의 길로 이끌었고, 끝내 당선까지 시켜냈다.

이 과정에서 민자당을 출입했던 경향신문 이용호 기자의 회고에 따르면 1992년 4월 8일 밤 9시,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종필 전 총리는 하얏트 호텔에서 독대를 하고 △국무총리를 당에서 지명 △박정희 전 대통령 기념관 건립을 조건으로 김종필 전 총리는 김영삼 전 대통령을 대통령으로 지지하기로 하는 합의를 했다.

하지만 1993년 김영삼 전 대통령이 마침내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약 3년간 같은 배를 탔던 두 사람의 관계는 삐꺽거리기 시작했다. 토사구팽이 발생한 것이다.

집권여당인 민자당의 대표최고위원으로서 김영삼 전 대통령과 주례회동을 하던 김종필 전 총리는 "홍곡의 큰 뜻을 연작이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느냐"라고까지 말하며 극진한 예의를 갖췄으나, 김영삼 전 대통령은 김종필 전 총리를 내치기로 마음먹은 상황이었다. 김종필 전 총리는 김영삼 전 대통령을 가리켜 "어려움은 함께 했어도 즐거움은 함께 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한탄하며 당을 떠났다.

1995년 1월 10일 두 사람 간의 마지막 청와대 주례회동에서 김종필 전 총리는 "당을 떠나겠다"고 통보했고, 김영삼 전 대통령은 김종필 전 총리가 자신의 생각대로 순순히 정계를 은퇴해 줄 것으로 믿었던지 "네에? 당을 나가서 뭘 하시려느냐"고 놀라움을 표했다.

◆97년 3김 최후의 대회전… 김영삼 승부수, 공중에 붕 떠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고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대항한 김종필 전 총리는 1995년 4월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약진한 데 이어 이듬해 4·11 총선에서도 무려 50석을 얻는 대성공을 거뒀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신한국당은 과반 의석에 훨씬 모자라는 139석에 그쳤다. 이렇게 되자 다시 아쉬워진 것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었다.

그 이듬해에 벌어진 1997년 대선은 3김 간의 얽히고 설킨 인연을 마무리짓는 최후의 대회전이었다. 김종필 전 총리는 이 해 1월 4일 자민련 신년 기자회견에서 "이번 대선은 3김 씨의 마지막 싸움"이라며 "3김의 싸움은 반드시 밟아야 할 과정이고 현실이며 순서"라고 정의했다.

김종필 전 총리는 중앙일보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자신이 출마할 수는 없지만 평생 경쟁자인 김대중 전 대통령의 집권만은 막아야겠다는 일념으로 후계구도를 짜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며 "한편, 김대중 전 대통령은 오매불망 대통령을 향한 도정에 나를 끌어들여 반드시 당선하겠다는 집념으로 넘쳐났다"고 회고했다.

여기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종필 전 총리 간의 마지막 접촉과 제안이 오고갔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자민련에 접근해 "김영삼 대통령이 95년 탈당하는 총재님(JP)을 붙들지 못한 걸 몹시 안타까워한다"며 "지금이라도 내각제 개헌을 추진해 총재님과 손을 잡자고 했더니 대통령께서는 '그렇게 할 수 있으면 좋겠구나'라고 했다"고 전했다.

이에 김종필 전 총리는 그 해 9월 5일 기자회견을 자청해 "김영삼 대통령이 내각제를 결심하고 선두에 나서 개헌을 위한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면 적극 협조할 생각"이라며 "개헌을 위해서라면 대선을 연기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화답했다.

하지만 이후 청와대의 반응은 없었다. 한보·기아그룹의 부도 사태에 이어 차남 현철 씨가 구속되는 등 악재가 잇따르면서, 차기 대권주자군의 반발을 무릅쓰고 청와대가 나서서 개헌을 추진할 동력이 없었다. 이렇게 김영삼 전 대통령의 김종필 전 총리를 향한 마지막 제안은 허공으로 떠올라버렸다.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종필 전 국무총리. ⓒ뉴시스 사진DB
▲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종필 전 국무총리. ⓒ뉴시스 사진DB

 

◆김종필 "김영삼이 다른 사람 못해내는 일 해내는 이유는…"

이날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를 방문해 조문한 김종필 전 총리는 최근 중앙일보에 연재된 회고록에서 평생 함께 정치를 해온 3김 파트너,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 촌평을 남기기도 했다.

김종필 전 총리는 김영삼 전 대통령을 가리켜 "김영삼 전 대통령은 상황 판단이 집중·단선적이고, 권력의 본성을 감각적으로 느낀다"며 "하나회 청산은 전격적으로 이뤄져야 하며 꼭대기 전두환·노태우를 정리해야만 완성된다는 판단이 그런 류의 것"이라고 설명했다.

반면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생각이 복합적이고 신중하며 논리적인 연결을 중시하며, 단계적이고 복선적인 접근 스타일"이라며 "서생적(書生的)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으로 실제 정치에서 따지고 의심하고 계산하는 측면이 많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혹자의 평가를 빌려 "누구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 동물적 후각이 발달했다고 하고 김대중 전 대통령은 유리한 결론을 도출해내기 위해 설득논리 개발에 능하다는 얘기를 했는데 사실 그런 면이 있다"고 대조했다.

반면 '김영삼 전 대통령이 김대중 전 대통령보다 기가 세다'는 정치권 일각의 평가에 대해서는 고개를 저었다.

김종필 전 총리는 "김대중 전 대통령은 김영삼 전 대통령에 비해 마음이 약하지 않다"며 "권력을 쟁취할 때 보면 (김대중 전 대통령의) 그 끈기와 오기, 강인함을 따라갈 사람이 없다"고 단언했다.

다만 김종필 전 총리는 세인들이 감히 따라갈 수 없는 김영삼 전 대통령만의 능력으로 순발력과 속전속결을 꼽았다. 김종필 전 총리는 "김영삼 전 대통령은 틀렸다 싶으면 바로 정면으로 부딪쳐 가부간 결단을 낸다"며 "다른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해내는 것은 그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대도무문' 달려온 88년, 김영삼 전 대통령은

(뉴데일리 2015.11.22 11:26:34)

특유의 명쾌한 직설화법…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김영삼 전 대통령. ⓒ뉴시스 사진DB

▲ 김영삼 전 대통령. ⓒ뉴시스 사진DB

 

 22일 새벽 서거한 김영삼 전 대통령(YS)은 만 26세에 최연소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정치를 시작한 이래, 일평생 이 나라의 정치에 투신해 온 한국 현대 정치사의 거산(巨山)이다.

1952년 국회에 입성한 이래 줄곧 정치인으로서 생활했고, 이후 1990년 3당 합당을 통해 집권여당 민주자유당(민자당)의 창당 주역이 됐다. 이후 민자당의 대선 후보로 나서 당선돼 1993년부터 1998년까지는 대통령으로서 국정을 이끌었다.

우리나라의 현대 정치사를 서술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니만큼, 현대사의 고비마다 많은 발언을 남기기도 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생전에 즐겨 남겼던 '대도무문'이라는 휘호만큼이나 거침없이 큰 길을 성큼성큼 걸어왔던 영욕의 88년 정치 역정을 주요 발언 중심으로 정리해 본다.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

1927년 경상남도 거제시에서 출생했다. 1945년 해방될 당시 통영중학교에 다니고 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일본인과 그 자녀들이 한반도에서 물러가자, 지역 명문인 경남중학교로 편입했다.

이후 대한민국의 건국이 모색되는 과정에서 대통령제가 채택될 것이 유력해지자, 김영삼 전 대통령은 부산의 하숙집 책상머리에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는 글씨를 써서 붙인 것으로 유명하다.

이후 이 결의는 "신한국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며 "우리 다 함께 고통을 분담하자"고 취임 일성을 내지른 1993년 2월, 즉 40여 년 후에 비로소 현실화되기에 이른다.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 ⓒ뉴시스 사진DB
▲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 ⓒ뉴시스 사진DB

 

◆"군의 정치 참여는 잘못된 것이라 함께 할 수 없다"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다니던 시절인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되자 김영삼 전 대통령은 기념 웅변대회에 나가 입상하는 성과를 거뒀다. 이 때 초대 외무부장관이었던 창랑 장택상의 주목을 받았다.

창랑의 선거운동 때 연설 원고의 초를 잡는 등 정치권과 가까워진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52년 3대 총선에서 자유당의 공천을 받아 거제군(당시) 선거군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만 26세의 나이에 국회의원에 당선된 것이다. 최연소 국회의원 당선 기록으로, 6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

자유당에서 정치를 시작한 김영삼 전 대통령이지만, 이후 1954년 사사오입 개헌이 단행되자 이에 반발해 민주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1990년 3당 합당 때까지 계속될 36년 야당 생활의 첫 발을 내딛은 것이다.

그의 이러한 초기 정치 이력은 1961년 5·16 혁명으로 집권한 군부의 주목을 받아, 공화당 창당 과정에 합류하라는 제안을 받기도 했으나, 김영삼 전 대통령은 "군의 정치 참여는 잘못된 것이라 함께 할 수 없다"고 딱 잘라서 거절했다. 1963년 해위 윤보선 전 대통령 등 민주당 구파가 민정당을 창당할 때 합류해 정치 생활을 이어갔다.

◆"나도 초산 테러를 당한 적이 있는데…"

이후 집권여당 공화당에 대항해 야권이 총단결해 신민당을 결성하자, 김영삼 전 대통령은 신민당에서 대변인에 이어 원내총무(현재의 원내대표)를 맡는 등 정치적으로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특히 대변인과 원내총무는 주로 정당의 '입' 역할을 맡는 만큼 그의 신랄한 독설은 정부·여당의 입장에서는 '눈의 가시'가 아닐 수 없었다.

1969년 6월 20일, 정국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삼선개헌 시도로 어수선하던 때 김영삼 전 대통령은 신민당 원내총무였다. 상도동 자택으로 밤늦게 귀가하던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량이 골목으로 들어섰을 때 괴한 3명 중 2명이 차 앞을 가로막고 시비를 시작해 차량은 부득불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이 때 나머지 괴한 1명이 김영삼 전 대통령이 탑승한 차량으로 다가와 문을 열려고 시도했으나, 문은 잠겨 있었다. 깜짝 놀란 김영삼 전 대통령이 기사에게 "빨리 밟으라"고 하자, 괴한은 차량에 무언가를 힘껏 던졌다. 차량의 페인트칠이 다 벗겨져 녹아내릴 정도로 강력한 초산 물질이 투척됐던 것으로 이후 확인됐다.

이 때문에 김영삼 전 대통령은 다음날 국회 연설에서 "김형욱 (당시 중앙정보부장)은 민족반역자"라며 "이건 날 죽이려는 박정희 정부의 음모"라고 격렬히 항의했다. 이후 2006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자 현 대통령인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가 친노(親盧) 세력으로부터 얼굴을 커터칼에 베이는 정치 테러를 당하자, 김영삼 전 대통령은 박근혜 대표를 병문안 와서 "나도 초산 테러를 당한 적이 있는데…"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과 박정희 전 대통령. ⓒ뉴시스 사진DB
▲ 김영삼 전 대통령과 박정희 전 대통령. ⓒ뉴시스 사진DB


 

 

◆"우린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특수관계"

이처럼 신민당에서 승승장구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지만, 그의 '민주화 동지'이자 라이벌로 불리는 김대중 전 대통령(DJ)과의 관계는 곡절로 점철돼 있다.

1971년, 40대 젊은 정치인이 전면에 나서야 한다는 '40대 기수론'을 외치며 신민당의 대선 후보 자리를 노리던 김영삼 전 대통령은 경선 1차 투표에서 최다 득표를 했지만, 결선 투표에게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역전당하며 대선 후보 자리를 내주었다.

당시 김영삼 전 대통령은 경선 결과가 발표된 뒤 "김대중 씨의 승리는 곧 나의 승리"라고 의연하게 승복하는 연설을 했으나, 관계자들의 회고에 따르면 이후 밤늦게까지 통음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1987년 대선에서는 둘이 함께 나서서 각각 2위와 3위로 나란히 낙선하고, 1993년 대선에서는 드디어 필생의 라이벌 김대중 전 대통령을 꺾고 대통령에 당선됐던 김영삼 전 대통령은, 아이러니하게도 1998년 2월의 대통령 취임식에서 직전 대통령으로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취임사를 지켜보는 입장에 놓이게 된다. 6년 전 김대중 전 대통령이 타계했을 때, 빈소를 찾아 조문한 김영삼 전 대통령은 취재진과 만나 이러한 인연을 놓고 "우리는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특수관계였다"고 만감이 교차하는 평을 내놓기도 했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오고야 만다"

1974년 신민당 총재가 돼서 박정희 전 대통령과 여야 영수회담을 갖기도 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이지만, 이후 신민당의 당권이 이철승 의원에게로 넘어가자 이를 정부·여당의 정치 공작의 결과로 의심해 강경한 반유신 투쟁에 나서게 된다.

1979년 뉴욕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박정희 정부를 강도 높게 비판하자, 이에 격노한 박정희 전 대통령은 김영삼 전 대통령을 국회에서 축출하기로 마음먹었다. 집권 공화당과 유신정우회의 강행 처리로 국회의원 제명안이 의결되자, 김영삼 전 대통령은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오고야 만다"는 성명을 발표하며 맞섰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국회의원에서 제명되자, 당시 '김영삼의 아성'이라 불리던 부산·경남 지역에서는 강한 반발이 일어났다. 이것이 부마항쟁으로 번지고, 이를 진압하는 방식을 둘러싸고 차지철 경호실장과 김재규 중정부장 사이에 이견이 발생하면서 지도부 내부에 긴장 관계가 조성되자, 결국 이러한 흐름은 '유신의 심장을 쏘는' 형태의 파국으로 끝났다.

이 때문에 김영삼 전 대통령은 평생 자신이 제명당한 것이 박정희 정부를 끝장내는 기폭제가 됐다며 자랑스러워 했다. 1987년 대선에서 패배한 직후에도 김영삼 전 대통령은 "나는 박정희 정권을 타도한 사람"이라며 "기필코 전두환 노태우 정권도 타도할 것"이라고 자신하기도 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단식 투쟁 중에 서울대병원 특실에 입원해 있다. ⓒ뉴시스 사진DB
▲ 김영삼 전 대통령이 단식 투쟁 중에 서울대병원 특실에 입원해 있다. ⓒ뉴시스 사진DB

 

◆"굶으면 죽는 것은 확실하다"

부마항쟁과 유신의 종식 이후 정국은 '서울의 봄'으로 접어들었지만, '춘래불사춘'을 직감한 김종필 전 국무총리(JP)의 예언대로 12·12와 5·17을 거치면서 신군부가 정권을 차지하게 됐다. 이후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의 이른바 3김은 신군부로부터 나란히 정치활동을 금지당한다.

국풍 81과 1982년 프로야구 출범 등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긴장이 점차 높아지자 전두환 정부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미국으로 출국시키고, 국내에 남아 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을 전격 가택연금했다. 그러자 김영삼 전 대통령은 '민주회복'과 '정치복원'을 내세우며 단식 투쟁에 돌입했다.

당시 이는 보도 통제의 대상이었지만, 언론에서는 '상도동 모 재야 인사의 식사 문제가 화제'라는 식으로 교묘하게 보도를 이어갔다. 단식이 1주일 이상 계속되고 여론이 술렁이자 '심상치 않다'고 느낀 전두환 정부는 김영삼 전 대통령을 서울대병원 특실로 강제 이송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단식은 계속돼 무려 23일 간이나 이어졌다. 결국 민정당 권익현 사무총장이 병실을 방문해 가택연금 해제를 약속하기에 이른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최장 기간(당시) 단식 투쟁은 이후 1984년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출범과 1985년의 신한민주당 창당의 동력을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처럼 단식으로 국면을 완전히 전환시킨 경험이 있는 김영삼 전 대통령은 2003년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당시)가 노무현 전 대통령 측근비리 의혹 특검법을 관철시키기 위해 단식 투쟁을 할 때 격려 방문해 "나도 23일간 단식해봤지만, 굶으면 죽는 것은 확실하다"고 조언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에 들어간다"

1985년 양김 씨가 힘을 합쳐 만든 신민당은 총선에서 돌풍을 일으켰지만, 1987년 대선은 둘이 각자 대선에 나서 1노3김의 구도가 되면서 결국 노태우 전 대통령의 당선으로 귀결됐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이끄는 민주당은 1988년 총선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평민당에도 밀려 원내 3당의 지위로 떨어지는 등 정치적 위기를 맞았다.

이 때 정국을 반전시킨 것이 1990년의 3당 합당이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민주정의당(민정당), 김영삼 전 대통령의 통일민주당(민주당),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신민주공화당(공화당)이 하나로 합당하면서, 마침내 대한민국의 현대사가 건국과 산업화를 거쳐 민주화로 연착륙할 계기가 마련됐던 것이다.

노무현 등 정치적 식견이 단견에 머무르는 일부 인사들은 당시 3당 합당에 반대했으나, 김영삼 전 대통령은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로 들어간다"며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이후 김영삼 전 대통령은 "내가 대통령에 당선돼 하나회를 청산하지 않았다면, 김대중·노무현은 대통령에 당선되지도 못했을 것"이라고 당시의 결단을 자평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과 전두환 전 대통령. ⓒ뉴시스 사진DB
▲ 김영삼 전 대통령과 전두환 전 대통령. ⓒ뉴시스 사진DB


 

 

◆"금융실명제는 민주주의의 완결에 가까운 큰 결의"

1990년 3당 합당을 통해 여건이 조성된 뒤,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2년 대선에서 집권 민자당의 대선 후보로 나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누르고 마침내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경남중 시절의 결의가 40여 년만에 실현된 셈이다.

당시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자신의 정부를 스스로 문민정부라 칭하며 도덕적 정당성과 정통성에 대한 무한한 자부심에 빠져 있었다. 특히 금융실명제를 전격 실시한 결단은 그의 통치 스타일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주는 대표 사례로 손꼽힌다.

1993년 첫 국무회의를 주재하는 자리에서 "우리가 먼저 달라져야 한다, 우리가 먼저 깨끗해져야 한다"며 "나는 대통령인 나 자신이 솔선해야 한다는 각오 아래 오늘 나의 재산을 공개한다"고, 이른바 재산 공개 파동을 일으켜 박준규 전 국회의장 등 수많은 구 정치인들을 회오리 속으로 휘말려들게 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이후 기습적으로 특별담화문을 내고 "이 시간 이후 모든 금융거래는 실명으로만 이루어진다"고, 금융실명제를 선언했다.

대통령의 대권인 긴급재정경제명령 형태로 발표된 금융실명제는 우리 사회의 '검은 돈'을 움직이던 세력들에게 큰 충격을 줬다. 이후 이는 헌법재판소에 제소되기까지 했으나, 헌재 역시 그런 형식으로 단행하지 않았다면 효과가 없었을 것을 인정해 합헌 취지로 결정했다.

◆"군 개혁을 단행해 문과 무가 각기 제자리를 찾도록 했다"

군부 내 사조직이던 하나회를 청산한 것도 큰 공로로 손꼽힌다. 당시 우리나라는 1961년부터 1993년까지 32년간 군인 출신이 대통령을 맡았기 때문에, 군부의 정치 개입 여지가 작지 않았다. 자칫하면 터키나 미얀마처럼 군이 계속해서 정치에 주기적으로 개입할 우려가 있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취임한지 불과 11일이 된 1993년 3월 8일 새벽, 기습적으로 권영해 국방장관을 불러 "내가 육군참모총장과 기무사령관을 오늘 바꾸려고 한다"고 선언한 뒤 4시간 만에 군부 내 최고위직의 인사를 단행했다. 이후 4월 8일에는 야전군사령관급 인사가, 15일에는 사단장급 인사가 단행돼 별 40여 개가 날아가는 대규모의 숙군 작업이 이어졌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하나회를 청산하지 않았다면 김대중·노무현은 대통령에 당선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스스로 평가했다.

당시 집권여당인 민주자유당의 대표최고위원이던 김종필 전 국무총리(JP)도 이를 사전에 전혀 모르고 있을 정도였는데, 김종필 전 총리는 최근 회고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은 3월 11일 주례회동에서 '김 대표, 깜짝 놀라셨느냐? 후임자를 청와대로 바로 불러 임명장을 주고는 서둘러 들어가 부대를 장악하라고 명령했다'며 '만일의 경우 하나회의 저항을 분쇄하기 위한 전광석화 같은 조치였는데 딱 4시간 5분 걸렸다'고 자랑하더라"고 술회했다.

김종필 전 총리도 "이런 일은 YS 같은 특별한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면 해내기 어렵다"며 "하나회 청산은 전격적으로 이뤄져야 하며 꼭대기 전두환·노태우를 정리해야만 완성된다는 판단이 그런 것"이라고 평가했다.

◆"우째 이런 일이"

이처럼 도덕적 정당성에 대한 무한한 자부심으로 거침없이 '대도무문'을 걸어가려 한 김영삼 전 대통령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집권 기간 내내 '도덕성' 문제가 고비마다 발목을 잡았고 결국 정권 전체를 레임덕에 빠뜨렸다.

집권한 해였던 1993년 최형우 민자당 사무총장의 대입 부정 사건이 불거지자, 김영삼 전 대통령은 "우째 이런 일이…"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최형우 전 장관은 '좌동영 우형우'라 불릴 정도로 김영삼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었기 때문에 감쌀 수도, 감싸지 않을 수도 없는 진퇴양난이었기 때문이다.

이어서 정권 말기였던 1997년 5월에는 차남 현철 씨가 수뢰 혐의로 구속되기에 이른다. 현직 대통령의 차남이 구속된 것이다. 이 때 김영삼 전 대통령은 "세상 모든 아버지들과 마찬가지로, 나 또한 아들의 허물은 곧 아비의 허물이라는 심정"이라고 대국민 사과를 했으나, 극심한 레임덕을 피할 수는 없었다. 결국 이는 필생의 라이벌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정권을 내주게 되는 결과를 야기하게 된다.

경남중학교 시절부터 책상머리에 붙여놨던 '대통령'직. 이를 위해 달려왔던 40여 년이었지만 5년의 임기는 짧았고 영욕과 굴곡으로 점철되기까지 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퇴임사에서 "영광의 시간은 짧았지만 고통과 고뇌의 시간은 길었다"고 이를 단적으로 함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