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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테크/창 업

스티브 잡스 되기(중앙일보 2015-04-08 01:15:22)

스티브 잡스 되기

 

지금으로부터 딱 10년 전인 2005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인근 애머리빌에 있는 픽사 스튜디오에 취재를 간 적이 있습니다. 스티브 잡스가 애플에서 쫓겨난 뒤 영화 '스타워즈'를 만든 루카스 필름의 컴퓨터 그래픽 부서를 1000만 달러에 인수해 만든 바로 그 애니메이션 제작사 말입니다. 세계 최초의 100% 컴퓨터 그래픽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1995) 등 숱한 히트작을 내놓으며 잡스는 재기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죠.

 당시 픽사에 가서 가장 놀랐던 건 자유로운 분위기의 업무환경이었습니다. 한창 일을 하고 있어야 할 오전 시간이었는데, 사옥 로비엔 킥보드를 타고 복도를 누비거나 요가 매트를 끼고 요가하러 가는 요가복 입은 사람을 쉽게 볼 수 있었습니다. 마치 직장이 아니라 어디 휴가라도 온 사람들처럼 말이죠. 

 애니메이터들 사무실을 보곤 더 놀랐습니다. 네모반듯한 책상과 파티션으로 이뤄진 한국의 흔한 사무실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입니다. 모두들 자신이 원하는 집 한 채씩을 만들어 그곳에서 놀듯이 일하고 있었습니다. 한두 평 남짓한 그리 넓지 않은 공간에 누구는 중세 유럽 성을, 또 다른 누구는 통나무 집을 직접 짓고는 그 안에서 원하는 자세로 원하는 시간에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집들은 언제든 원하면 부수고 새로 지을 수 있는데, 비용은 모두 회사가 부담한다는 겁니다. 취재 당시 픽사의 2인자였던 '토이 스토리'의 존 래시터 감독이 든 이유는 단 하나, "평소 재미있게 일해야 재미있는 애니메이션이 나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설명을 듣고는 "역시 미국 애니메이션 제작사는 일반 기업과는 다르구나, 달리 '꿈의 공장'이 아니구나" 라고만 여겼습니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로스엔젤레스 인근 버뱅크에 있는 디즈니 스튜디오를 가보곤 잘못 생각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똑같은 미국 서부의 애니메이션 제작사지만 디즈니는 분위기가 전혀 달랐으니까요. 아날로그적 감성이 물씬 묻어나는, 애니메이터들의 그림 원본으로 가득 찬 창고가 인상적이긴 했지만 사무실은 여느 일반 기업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애니메이터들이 일하는 공간 역시 픽사보다는 차라리 일반 기업에 가까웠습니다. 

 사무실만 얼핏 둘러봐도 픽사는 분명 직원을 존중하고 상상력을 붇돋아 실적과 연결시키는 훌륭한 회사라는 걸 알 수 있었고, 잡스라는 인물에 대해 막연한 호감을 느꼈습니다. 

 2006년 74억 달러 규모로 디즈니에 매각하긴 했지만 2005년이면 아직 잡스가 픽사를 소유하고 있을 때입니다. 애플에서 아이폰을 출시하기 전이라 지금처럼 한국의 일반 대중들에게 잡스의 개인적인 모습이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았죠.  그래서 픽사 취재 직후 '이렇게 유연하게 사람을 부릴 줄 아는 오너라면 잡스는 분명 굉장히 열린 사람일 것'이라고 제멋대로 추측을 한 겁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잡스의 천재성과 함께 그의 냉혹한 인간성도 같이 속속 드러났습니다. 사이코패스라고 불릴 정도로 난폭하게 아랫사람을 대한 그 숱한 일화들 말입니다. 

 그런 얘기를 접할 때마다 좀 혼란스러웠습니다. 물론 애니메이션 제작사와 컴퓨터 회사는 속성이 전혀 다르겠지만, 애니메이터가 "어깨가 아프다"고 하면 침술사까지 회사로 불러 다 나을 때까지 무료로 치료해주는 꿈의 일터를 만들었던 인물이, 가차없이 거친 말을 내뱉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면전에서 사람을 해고하는 바로 그 냉혹한 경영자와 같은 사람이라니. 

 잡스와 오래도록 친분을 유지했던 '포춘'의 전 편집장 브렌트 슐렌더가 지난달 미국에서 내놓은 잡스의 새 전기에 대한 다양한 서평을 읽은 후에야 한동안 품고 있던 의문이 조금 풀렸습니다. 애플에서 쫓겨난 후 넥스트(NeXT)와 픽사를 운영하면서 그는 다른 사람이 됐다는 겁니다. 애플 초기엔 오만하고 미숙하고 성급한 인물이었지만 다시 애플로 돌아왔을 때는 좀더 성숙하고 사려깊은, 다시 말해 전과는 다른 잡스가 됐다는 얘기입니다. 


 물론 타고난 성질을 완전히 바꿀 수는 없었겠죠. 결정적인 순간엔 여전히 냉혹한 판단을 내리기를 주저하지 않았고요. 하지만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여전한 카리스마로 사람들을 끌어당기면서도 더이상 말도 안되는 요구를 하며 사람을 쳐내는 일은 없었다'고 하네요. 

 이와 관련해 픽사 회장인 에드 캣멀 얘기가 등장합니다. 캣멀은 몸소 실천을 통해 잡스에게 어떻게 하면 회사를 창의력 넘치는 공간으로 유지할 수 있는지, 또 그러려면 어떻게 직원을 대해야 하는지 가르쳐줬다는 거죠. 
 잡스는 또 이런 과정을 통해 자신의 아이디어가 항상 옳을 수만은 없으니 다른 사람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점도 배웠습니다. 그리고 결과가 바로 애플 앱스토어입니다. 잡스는 처음엔 아이폰용 앱을 외부 개발자가 참여하는 걸 반대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곧 주위의 조언을 받아들여 방향을 수정했고, 이는 오늘날 아이폰의 성공으로 이어졌다는 분석입니다. 

 그동안 국내에선 천재와 망나니, 이렇게 정형화한 두 가지 모습의 잡스만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제 아무리 잡스라도 어떻게 이 두 가지 면모만으로 한 인물을 온전히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과도한 신격화나 도에 지나친 비난 대신 팀웍을 중시한 뛰어난 관리자로서의 잡스를 차분히 들여다볼 때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