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도(竹島) 정여립① 조선 최초의 양반사대부 출신 혁명가
호(號), 조선선비의 자존심⑱
▲ 정여립
[한정주=역사평론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왕조 체제의 전복을 꿈꾼 조선사 최초의 인물이 허균이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 허균이 죽음을 맞은 1618년 보다 30여 년이나 이른 1580년대에 이미 ‘천하(天下)는 공물(公物)이므로 따로 주인이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외치면서 왕정(王政)을 부정한 사람이 있었다.
원로 정치학자인 신복룡 교수는 그를 가리켜 ‘우리나라 최초의 공화주의자’라고 했고, 재야 역사학자인 신정일씨는 “영국의 올리버 클롬웰보다 50년 앞선 최초의 공화주의자”라고 까지 평가했다. 이 사람은 바로 죽도(竹島)라고 자호(自號)했던 정여립이다.
정여립은 1544년(중종 39년) 전라도 전주 남문 밖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나이 27세가 되는 1570년(선조 3년) 대과(大科)인 식년문과(式年文科) 을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섰다.
또한 이 무렵 경기도 파주에 머물며 강학(講學)하던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문하에 들어갔다.
일찍부터 유학의 경서(經書)는 물론이고 제자백가서에 두루 통달했던 정여립은 대단히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로 변론(辯論)에 능숙하고 박학다식해서 율곡과 우계의 신망을 얻었고 정치적 후원까지 받았다. 정여립의 앞날에는 정치적 출세 가도가 활짝 열려 있었다.
그러나 나라와 백성보다는 자신들의 당파를 더 중시하는 서인의 파당적 행태에 비판적이었던 정여립은 율곡이 사망한 후 서인을 떠나 동인(東人)이 되었고, 이듬해인 1585년(선조 18년) 4월 경연(經筵) 석상에서는 한때 스승으로 모셨던 율곡과 우계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이로 인해 조정과 사림 안에서 큰 논란이 일어났고 선조가 나서 정여립을 크게 질책하자 미련 없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버렸다.
낙향한 정여립은 고향집과 가까운 진안의 죽도(竹島)에 서실을 짓고 전국 각지에서 그의 명성을 따라 찾아온 사람들을 만났다. 또한 스스로 ‘죽도(竹島)’라는 호를 썼기 때문에 이때부터 제자들은 물론 호남 일대의 남녀노소가 모두 그를 ‘죽도선생(竹島先生)’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죽도는 ‘육지 속의 섬’이다. 금강 상류의 두 물줄기가 만나 사방을 에워싸고 흐르기 때문에 마치 섬처럼 보인다. 죽도 앞에 자리한 천반산에 올라 내려다 본 죽도의 모습은 절경 중의 절경이다.
또한 이곳에는 산죽(山竹)이 무성하게 자라서 한 겨울에도 하얀 눈 사이로 맑고 깨끗한 대나무 잎이 보인다고 한다. 죽도(竹島)라는 이름은 이러한 까닭에 붙여진 것이다.
눈보라 몰아치는 혹독한 겨울에 오히려 더욱 푸르른 기운을 발산하는 것이 ‘대나무’다. 아마도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이후 정여립은 부러질망정 결코 굽히지 않는 자신의 기개와 기상을 대나무를 통해 드러내고 싶었기 때문에 더욱 죽도(竹島)라고 자호(自號)했던 듯하다.
죽도(竹島)를 주요 무대로 삼아 활동한 정여립은 단순히 학문을 닦고 제자들에게 강론하는 일보다는 일종의 사회조직인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고 훈련시키는데 더 힘을 쏟았다.
▲ 전라북도 진안의 죽도(竹島). <한국관광공사 홈페이지> |
그런데 그가 조직한 대동계는 당시 조선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신분 질서와 장벽을 깨뜨리는 매우 파격적인 형태를 띠고 있었다. 여기에는 양반사대부와 사림의 선비는 물론 서얼, 무사, 무뢰배, 노비, 승려, 도사, 산적들까지 참여했다.
정여립의 대동계는 당시 재지사림들이 성리학의 이념과 풍속을 확산시키기 위해 지방에 구성한 ‘향약(鄕約)’과 같은 향촌 사회조직들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대동계는 왕조체제와 양반사대부 중심의 신분 질서와 통치 때문에 굴곡진 삶을 살아야 했던 다양한 부류의 피지배 계층이 다수 참여하는 독특한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동(大同)’이라는 조직의 명칭 자체가 이미 어떤 신분 차별이나 사회적 불평등도 용인하지 않겠다는 ‘만민평등의 사상’을 담고 있었다.
대동(大同)이라는 용어는 『예기(禮記)』 ‘예운(禮運)’편에 나오는데 많은 인문학자들은-비록 유가의 경전에 실려 있지만-이것을 유가(儒家)의 인물이 아니라 춘추전국시대에 만민평등과 반전(反戰) 사상을 설파했던 묵가(墨家)의 창시자인 묵자(墨子)의 학설이라고 보고 있다.
“큰 도(道)가 행해지니 천하는 공민(公民)의 것이 된다. 현명하고 유능한 자를 선출하여 이 믿음을 이루고 화목으로 다스린다. 이러한 까닭에 백성들은 자신의 부모만을 돌보지 않고 자신의 자식만을 사랑하지 않는다. 늙은이는 제 수명을 누리고, 젊은이는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펼치고, 어린아이는 잘 자라날 수 있다. 홀아비, 과부, 고아, 외로운 장애자와 병자들 또한 모두 부양(扶養)을 받는다. 남자들은 모두 각자의 재주와 능력에 따른 직분(職分)이 있고, 여자들은 모두 시집을 갈 수 있다.
재물이 땅에 버려지는 것을 싫어하지만 반드시 자신만의 소유로 저장하지 않는다. 자신의 몸으로 일하지 않는 것을 미워하지만 반드시 자기만을 위하여 일하지 않는다. 이러한 까닭에 몰래 모의하거나 어울리지 않으니, 도둑이나 난적(亂賊)이 생겨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문을 닫지 않고도 살 수 있다. 이것을 ‘대동(大同)’이라고 말한다.”
여하튼 신분 차별이 없는 만민 평등사상에 의거해 조직된 정여립의 대동계는 호남 일대의 백성들로부터 절대적인 신뢰와 지지를 얻었다고 한다. 특히 대동계는 당시 전라도 해안 지역을 침탈해 백성들을 괴롭히고 살육했던 왜구(倭寇)들에 대한 무력행사까지 주저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여립에 대한 신망과 존경심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정여립은 ‘대동계’의 조직을 호남 주변 지역으로 제한하지 않았다. 그는 황해도 안악의 변숭복, 해주의 지함두, 운봉의 승려 의연 등을 대동계로 끌어 들여 전국적인 규모의 세력을 갖추었다.
특히 그는 매월 15일 대동계의 구성원들을 한 자리에 모아 활쏘기․말 타기․칼 쓰기 등 무술을 연마하는 한편 자신의 급진적인 사상을 강론했다고 한다. <계속>
죽도(竹島) 정여립② 지배체제 전면 거부한 ‘천하공물설·하사비군론’
(헤드라인뉴스 2014.10.17 08:00:04)
호(號), 조선선비의 자존심
▲ 전라북도 완주군 상관면 신리 월암마을에 소재한 정여립 생가터. <상관면 홈페이지> |
[한정주=역사평론가] 당시 정여립이 대동계의 구성원들에게 강론한 급진 사상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그 하나가 “천하는 모든 사람의 소유물이므로 일정한 주인(임금)이 있을 수 없다”는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이다. 이에 대한 기록이 『선조수정실록』22년(1589년) 10월1일자 기사에 이렇게 실려 있다.
“사마광은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 (유비가 세운 촉(蜀)나라가 아닌) 위(魏)나라를 정통으로 해 기년(紀年)을 삼았다. 이것이 바로 직필(直筆)이다. 그런데 주자(朱子)는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비난했다. 대현(大賢)의 견해라는 게 각자 이렇게 다르다. 천하는 공물(公物)인데 어찌 정해진 주인이 있겠는가. 요(堯)임금, 순(舜)임금, 우왕(禹王)은 서로 임금 자리를 전했는데, 이들은 성인이 아닌가?”
여기에서 정여립은 비록 왕의 존재를 빌어서 누구나 임금이 될 수 있다고 했지만, 이것은 앞서 허균의 사상에서도 찾아 볼 수 있었듯이 단지 하나의 왕을 다른 왕으로 바꾸는 ‘반정(反正)’이나 혹은 하나의 왕조를 다른 왕조로 교체하는 ‘역성혁명(易姓革命)’보다 더 급진적인 입장을 피력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천하는 누군가 사적(私的)으로 독점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공적(公的)인 것, 즉 제왕이나 양반사대부의 소유물이 아닌 공민(公民 : 백성)의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백성이 천하를 차지하는 것은 본래의 주인이 자신의 것을 찾는 것일 뿐 역모나 반역이 아니다.
정여립이 강론한 또 하나의 급진 사상 역시 『선조수정실록』22년(1589년) 10월1일자 기사에 나와 있다. 그것은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겠느냐?”는 이른바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이다.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말은 왕촉(王蠋)이 죽을 때 일시적으로 한 말이지 성현(聖賢)의 공통된 의견은 아니다. 유하혜(柳下惠)는 ‘누구를 섬긴들 임금이 아니겠느냐?’라고 했다. 맹자(孟子)는 제(齊)나라 선왕(宣王)과 양(梁)나라 혜왕(惠王)에게 왕도(王道)를 행하라고 권유하였다. 유하혜와 맹자는 성현이 아닌가.”
여기에서 정여립은 앞선 주장보다 더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언사로 조선이라는 왕조국가를 부정한다.
어쨌건 정여립이 대동계의 구성원들에게 강론한 ‘천하공물설(天下公物說)’과 ‘하사비군론(何事非君論)’은 모두 조선의 지배 체제를 전면적으로 거부하는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그가 신분의 장벽과 질서를 허물고 파괴하는 형태와 방식으로 대동계를 조직할 수 있었던 이유 역시 천하는 ‘왕과 양반사대부의 사적 소유물’이 아닌 ‘만백성의 공적 소유물’이라는 급진 사상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 천반산 전경. <진안군 홈페이지> |
정여립이 언제부터 이러한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는 알 방법이 없다. 조선 최대 역모 사건의 주범으로 몰려 죽었기 때문인지, 그의 글과 기록은 물론 그와 관련한 정보 또한 정확하게 전해지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조정에서 벼슬살이를 했을 때부터 정여립이 이러한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는 정여립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 죽도를 본거지로 삼고 ‘죽도(竹島)’라고 자호했던 시기를 전후해 자신의 사상을 세우고 그에 따라 대동계를 조직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여하튼 정여립은 허균보다 수 십 년이나 앞서 왕조체제의 전복을 꿈꾼 최초의 양반사대부 출신 혁명가였다.
그러나 대동계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이상을 현실화하려고 했던 정여립의 야심찬 구상은 1589년(선조 22년) 10월 ‘전주의 정여립이 반란을 모의하고 있다’는 황해감사 한준의 비밀장계가 조정에 접수되고 토벌군이 급파되면서 처참하게 무너지고 만다.
황해도의 변숭복으로부터 조정에서 토벌군을 파견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정여립은 형세의 불리함을 직감하고 곧바로 아들 정옥남, 박춘룡 등과 함께 죽도로 몸을 피했다. 그러나 토벌군이 죽도를 덮치자 정여립은 잡혀서 심한 고문을 받을 경우 동지들을 발설할까봐 먼저 변숭복을 죽이고 다시 정옥남과 박춘룡을 죽이려고 하다 실패하자 자결했다.
당시 상황은 『선조수정실록』22년(1589년) 10월 기사에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단 이 기록은 정여립을 스승을 배반한 패륜아이자 임금에게 불충한 역적으로 여긴 서인(西人)이 남긴 글이라는 점을 고려하고 읽어야 할 것이다. 정여립이 실제 어떻게 죽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소지가 있다는 얘기다.
“정여립이 도망하여 진안(鎭安)의 산골짜기에 숨어 있었다. (진안 죽도(竹島)에 정여립의 서사(書舍)가 있었다. 이러한 까닭에 그 근처에 몸을 숨긴 것이다.) 현감 민인백이 죽도를 샅샅이 뒤져서 찾아내 토벌했다. 정여립이 아들 정옥남 등 세 사람과 더불어 밭과 풀더미 속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관군이 다가와 그들을 포위하자 형세가 다한 것을 안 정여립은 칼로 먼저 변숭복을 베고 다음에 정옥남을 베었다.
그런데 정옥남이 칼을 피해 죽이지 못했다. 정여립은 즉시 칼을 땅에 거꾸로 꽂고 목을 늘여 찔러 죽었다. 그 소리가 마치 소가 울부짖는 듯 했다. 민인백이 산 채로 잡으려고 군사들에게 핍박하지 못하게 하고 정여립의 자(字)를 부르며 ‘대보(大甫)! 내 말을 들어라. 조정에서 대보가 다른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테니 어명에 따라 나아가 스스로 변명하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정여립은 응답하지 않고 이내 죽었다.”
더 이상 자신의 뜻을 펼칠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정여립은 토벌군의 ‘항복하면 살려줄 수도 있다’는 설득과 회유에 일체 반응하지 않고 자신이 호로 삼았던 죽도의 대나무에 부끄럽지 않게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왕조체제와 신분 질서를 뒤엎고 만민이 평등한 대동(大同) 세상을 열려고 했던 정여립의 혁명적 사상은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고 만다.
그런데 역모나 모반 사건에 무척이나 예민했던 선조는 정여립의 죽음 이후에도 피의 살육전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송강 정철을 필두로 서인 당파를 앞세워 정여립과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사람들은 무조건 잡아들여 고문하고 처형했다.
서인 세력 역시 이 사건을 기회삼아 자신들의 정치적 반대파인 동인을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이로 인해 당시 ‘정여립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당한 사람의 숫자가 1000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정여립의 모반과 이 사건이 일으킨 여파는 곧 조선의 왕조와 양반 중심의 지배 체제가 근본적으로 위기에 이르렀다는 경고이자 가르침이었다.
진안 천반산(天盤山)과 죽도를 찿아서 2014 발자귀 / 산행 이야기
2014/01/13 23:23
http://blog.naver.com/auten10/150183085205
천반산(天盤山)
옛 기록에는 천방산(天防山) 이라 기록된 천반산(天盤山)은
첫째로 산 위가 소반과 같이 납작하다 하여 이름 붙였다 하고
두번째로 땅에는 천반(天盤), 지반(地盤), 인반(人盤) 이라는 명당 자리가 있는데
이 산에 천반(天盤)에 해당하는 명당이 있다 해서 지어졌다는 설과
세번째로 산 남쪽 마을 앞 강가에는 장독바위가 있어
이 바위가 하늘의 소반에서 떨어진 복숭아(天盤落桃)라 하여 마을 북쪽에 있는 산을 천반산이라고 한다는데,
남쪽 장수에서 흘러내리는 장수천(長水川)과 동쪽 덕유산에서 시작된 구량천(九良川)이 파(巴)자 형으로 굽이쳐 흐르다
한머리 금강(錦江)으로 거듭나는 것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곳에 위치한다
◆ 진안 천반산(天盤山, 647m) 과 죽도(竹島)를 찿아서 ◆
▶ 산행일자 : 2014. 1. 13 (월)
▶ 기상상황 : 맑음
▶ 산 행 자 : 나홀로
▶ 산행코스 : 천반산휴양림~천반산(깃대봉)~말바위~성터~~송판서굴~(이정표)~뜀바위~죽도~구량천변을 따라서~
장전마을~(49번 국도 진성로를 따라)~천반산휴양림
▶ 산행거리 : 약 Km, 10:20~14:20 (4시간 소요)
≪천반산 등산 안내도≫
진안 상전면에서 동향면으로 이어지는 49번 국도 (진성로) 중간쭘에 천반산휴양림 이정표가 있다
천반산 이정표에서 내려서서 구량천을 지나는 시멘트 다리를 건너면 ...
선조1년(1568년) 사림의 영수 이황은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선조께 올리고
선조는 성리학을 받아들여 사림의 지지를 획득한다 (聖學 = 성리학)
사림은 무오사화를 비롯해 4번의 사화을 겪었으나
명종 말엽에는 훈구세력을 물리치고 정권을 장악했지만, 집권 사림은 곧 분열되었다
선조8년(1575년, 을해년)에 삼사의 인사권을 가진 이조전랑 문제로
김효원(金孝元)을 지지하는 동인과 인순왕후의 동생 심의겸(沈義謙)을 지지하는 서인으로 갈렸는데 (을해당론乙亥黨論)
김효원의 집이 서울 동부 건천동(乾川洞)에, 심의겸의 집이 서울 서쪽 정릉방(貞陵坊)에 있었기에 붙은 당명이다
율곡 이이는 두 당을 화합시키려 하였으나 동인에게 거듭 공격을 받고 본의 아니게 서인이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당쟁 초기에는 선조는 서인 편을 들었다
이황이 선조3년(1570년)에 사망한 후 이이가 사림의 영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율곡 이이가 사망하자 (1584년, 갑신년)
선조의 생각이 달라졌고, 선조의 마음이 변한 것을 간파한 동인은 공세에 나섰다
홍문관에서 심의겸을 공격하자 선조는 심의겸이 “국권을 마음대로 천던했다”면서 파직하여 버렀다
명종의 유조도 받지 못한 하성군을 임금으로 만들어준 인순왕후의 동생 심의겸은 이렇게 조정에서 쫓겨난 것이다
인순왕후는 선조8년(1575년)에 이미 사망했다
동인이 정권을 잡자 당적을 바꾸는 인물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전 홍문관 수찬(修撰) 정여립이 대표적이었다
정여립은 이이의 문인이었으나 이이 사후 동인으로 당적을 바꾼 인물이었다
이이는 생전에 정여립을 아꼈고,이이의 천거를 대부분 수용했던 선조였지만 정여립에게는 내내 비판적이었다
당시 정여립은 동인으로 옮겨간 이후 에 고향으로 낙향하여
천반산 일대에서 신분고하를 가리지 않고 대동계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는데,
이런한 활동들을 서인들이 정여립을 역모의 주동자로 몰기에 (동인들은 몰아내기 위한) 좋은 구실로 삼은 것이다
당시 정여립의 거침없는 발언은 선조 앞에서도 할말이 있으면 고개를 들고 당당하게 자기 의견을 피력했다고 한다
이런 와중인 선조22년(1589년) 황해 감사 한준(韓準)의 비밀 장계(狀啓)가 도착하면서 유명한 정여립 사건이 시작된다
선조는 서인 강경파 정철을 사건 조사를 담당하는 위관(委官)으로 삼았는데
사실상 동인에 대한 대량 살육을 허용하는 부월(斧鉞,도끼)을 쥐어 준 셈이었다
당시에 인구수가 약 500만명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약 1,000여명이 죽었다
그것도 학식이 있는 지식인들 이다
그러니 4년 뒤에 임진왜란을 맞아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는 인재들이 부족하여서 일본한테 개 박살이 낳지 않나요?
북인들이 작성한 『선조실록』은 이 사건을 사례를 들어서 정철을 비롯한 서인들의 정치공작으로 단정하고
동인들도 사건 자체를 서인의 정치공작으로 단정했다
이 사건으로 동인과 서인은 서로 적당(敵黨)이 되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당쟁을 이용해 왕권을 강화하려는 선조의 계산이 있었다
(조선시대 가장 무능한 임금이면서 가장 바보같은 짓을 한 왕이다)
(이런 왕이 또한 41년을 즉위하고 있었으니 조선이 잘 될 리가 없지 ?)
기축옥사 이후 당색은 더욱 강화되어 두 당이 갈려 네 당이 되고, 넷이 또 갈려 여덟 당이 되는 파벌들이 이어서 내려와서
혈연과 지연에 집착하는 희극이 21세기 오늘도 이땅에 존재하고 있으니 ......
그러면서도 지역갈등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면서 통일이 어쩌고 저쩌고 하고 있으니 ......
이것을 어떻게 받아 들어야 하는지 ???
정여립(鄭汝立)이 훈련할 때마다 천반산 제일 높은 곳에 ‘大同(대동)’ 이라는 깃발을 꽂았다는 깃대봉 이다
송판서는 세종 때 예조판서를 지냈던 "송보산(宋寶山)"을 말하고
이 능선 너머 약 1.5Km 지점에는 송판서의 부인이 기거했다는 '할미굴' 이 있다[출처] 진안 천반산(天盤山)과 죽도를 찿아서|작성자 규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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