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공산성 지하에서 백제가 깨어나다
백제 시대 완전한 형태의 대형 목곽고와 깃대꽂이 최초로 발굴
23일 공개된 공산성 성안마을 7차 발굴현장 전경.(사진제공=문화재청) |
문화재청(청장 나선화), 충청남도(도지사 안희정), 공주시(시장 오시덕)는 공주대학교박물관(관장 이남석)과 함께 공주 공산성에 대한 올해 제7차 발굴조사에서 백제 시대 완전한 형태를 갖춘 대형 목곽고(木槨庫)를 최초로 확인했고, 백제 멸망기 나․당연합군과의 전쟁 상황을 추론할 수 있는 다량의 유물을 발굴했다.
공산성 백제 왕궁 부속시설 발굴조사는 지난 2008년부터 연차적으로 진행됐고, 올해에는 부속시설 영역 중앙부에 해당하는 곳을 조사했다.
그 결과 건물지군과 도로, 배수로, 저수시설, 축대 등이 기능과 위계에 따라 구획되어 있어, 백제 시대의 생활공간 활용과 건물 배치 기술까지 직접 확인할 수 있게 됐다.
목곽고 전경.(사진제공=문화재청) |
◆ 백제를 담은 타임캡슐, 대형 목곽고 최초로 발굴
이번에 발굴조사한 유구 중 가장 주목되는 것은 건물지군 북단의 대형 목곽고(木槨庫)이다.
크기는 가로 3.2m, 세로 3.5m, 깊이 2.6m이며, 너비 20~30㎝ 내외의 판재를 기둥에 맞춰 정교하게 조성했으며 수종은 참나무다.
바닥면에서 벽체 상부까지 부식되지 않고 조성 당시 모습 그대로의 원형이 남아 있다.
특히 기둥 상부의 긴 촉이 테두리보 상부까지 솟아나 있고, 내부에서 기와 조각이 다수 출토된 점 등으로 보아 상부에 별도의 지붕 구조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백제 유적에서 목곽고는 대전 월평동 산성, 부여 사비도성 내에서도 발굴됐다.
하지만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으며, 하단의 바닥과 50㎝ 내외 높이의 벽면만 일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공산성 목곽고는 상부 구조까지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목조 건축물이라는 데 큰 의미가 있으며, 당시의 목재 가공 기술을 실증적으로 보여주고 있어 백제 시대 건물 복원과 연구 등에 획기적인 자료가 될 것으로 평가된다.
목곽고 내부 출토유물.(사진제공=문화재청) |
내부에서는 복숭아씨와 박씨가 다량 출토됐다.
이와 함께 무게를 재는 석제 추와 생활용품인 칠기, 목제 망치 등의 공구도 수습됐다.
석제 추는 원형으로 중앙에 고리가 있으며, 무게는 36g이다. 칠기는 목재를 가공하여 만든 것으로, 표면에 옻칠이 정교하게 칠해져 있다.
또 나무망치를 비롯해 목제 공이와 손잡이, 목제 가공품 등이 수습됐다.
특히 원통형의 망치는 너비가 19㎝이고, 손잡이 길이는 15.5㎝로 간단하게 휴대할 수 있는 것으로, 목재를 결구할 때 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나무망치는 가장 기본적이고 원초적인 공구로, 현재도 이러 형태가 사용되고 있을 정도로 디자인 면에서도 매우 뛰어나다.
목곽고의 용도에 대해서는 연구를 진행 중이며, 저장시설 또는 우물 두 가지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
우선 벽면에 오르내릴 수 있는 말목구멍이 있으며, 외면에 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점토 다짐을 한 점과 내부의 틈새를 점토로 메운 것으로 볼 때 저장시설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나 저지대에 물이 많이 모이는 지역에 입지하는 위치를 볼 때 우물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대형 목곽고는 백제의 목재 가공 기술이 고스란히 드러나며, 추와 목기, 씨앗류 등 백제의 생활문화상을 풍부하게 담고 있는 타임캡슐이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 백제 시대 건물 복원과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를 제공한 공주 공산성 발굴현장은 관계전문가 회의를 거쳐 보존방안을 마련할 예정이다.
저수시설 출토 dbanf.(사진제공=문화재청) |
◆ 백제 멸망기 전쟁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저수시설
건물지 북쪽의 저수시설에서는 완전한 형태의 철제 갑옷, 옻칠이 된 마갑(馬甲), 철제 마면주(馬面冑, 말의 얼굴 부분을 감싸는 도구), 마탁(馬鐸, 말갖춤에 매다는 방울)과 함께 대도(大刀), 장식도(裝飾刀), 다량의 화살촉, 철모(鐵牟), 각종 철판 외에 다양한 기종의 목제 칠기도 다수 수습됐다.
저수시설서 나온 화살촉 등.(사진제공=문화재청) |
이는 저수지 주변 건물지 대부분이 대단위 화재로 폐기되어 있는 정황을 함께 고려하면 660년을 전후한 백제 멸망기에 나․당연합군과의 전쟁과 같은 상황이 공산성 내에서 전개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판단된다.
지난 2011년 발굴 당시 저수시설에서는 ‘정관19년(貞觀十九年, 645년)’이 적힌 옻칠 갑옷과 말갑옷이 나와 주목을 끈 바 있다.
그런데 올해 저수시설 발굴조사에서도 명문이 적힌 옻칠 갑옷이 출토됐다.
옻칠 갑옥의 명문.(사진제공=문화재청) |
명문은 ‘叅軍事’ ‘○作陪戎副’ ‘○人二行左’ ‘近趙○’(‘참군사’ ‘○작배융부’ ‘○인이행좌’ ‘근조○’) 등 20여 자를 확인했다.
명문에 대한 정확한 판독이 완료되면 저수시설에서 출토된 유물의 역사적 성격이 더욱 명확해질 것으로 기대된다.
깃대꽂이.(사진제공=문화재청) |
◆ 백제 깃대꽂이 최초로 발굴돼
저수시설에서 발견된 유물 중 가장 주목되는 것은 백제 유적지에서는 최초로 발견된 말안장 뒤쪽에 세워 기를 꽂는 용도의 깃대꽂이다.
깃대꽂이는 철로 만들어졌으며, 약 60㎝의 크기로 S자 모양(巳行)으로 구부러져 있다.
삼국 시대 깃대꽂이는 가야는 합천의 옥전고분에서 실물이 발견되었으며, 고구려는 쌍영총과 삼실총 벽화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쌍영총의 벽화.(사진제공=문화재청) |
하지만 백제 깃대꽂이는 서산 여미리 출토 토기 문양으로만 볼 수 있었다.
이번 공산성 발굴조사를 통해서 실물이 최초로 출토됨으로써 백제 기승(騎乘)문화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를 확보하게 됐다.
이번 발굴은 공산성이 백제 왕궁지로서 진정성과 가치를 한층 더 높일 수 있는 획기적인 발굴성과로, 백제역사유적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정받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발굴단은 제60회 백제문화제가 진행되는 오는 26일부터 다음달 5일까지의 기간 동안 매일 오전11시와 오후2시에 발굴조사 현장을 방문하는 국민을 대상으로 설명회도 개최할 예정이다.
이를 통해 국민은 백제문화 축제 속에서 진정한 백제 문화재를 직접 접할 기회가 될 것이다.
의자왕 항복한 공주 공산성…백제 멸망기 유물 쏟아져
(동아일보 2014-09-23 18:34:05)
저수시설에서 출토된 옻칠갑옷, 철갑옷, 각종 무기류 등(문화재청 사진제공
최초로 발견된 백제의 깃대꽂이(문화재청 사진 제공)©
23일 충남 공주시 공산성 발굴조사현장에서 공개된 백제시대 목곽고
목곽고 내부에서 출토된 복숭아씨와 목제 도구 등.
저수시설에서 출토된 명문이 적힌 옻칠 갑옷 편.
백제 마지막 군주인 의자왕이 나당연합군과 최후의 일전을 준비했던 공주 공산성에서 멸망 당시 전쟁상황을 엿볼수 있는 유물이 대거 발굴됐다.
의자왕은 당시 수도인 사비성(부여) 함락 직전 탈출해 백제 군사적 요충지였던 공산성에서 여전히 세력을 유지하던 지방군을 기반으로 망국의 물줄기를 되돌리려다 석연찮은 연유로 며칠만에 항복했다.
공산성은 백제시대 축성된 산성으로 백제 때에는 웅진성으로 불렸지만 고려시대 이후로는 공산성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문화재청은 올해 공주대박물관이 공산성에서 벌인 7차 발굴조사에서 백제시대 완전한 형태를 갖춘 대형 목곽고(木槨庫)를 처음 확인하고 나당연합군과 백제의 전쟁에 쓰인 무기류들도 대거 발굴했다고 23일 밝혔다.
이번 조사는 2008년부터 실시된 공산성 백제 왕궁 부속시설 발굴 사업의 일부로 성내 부속시설 영역 중앙부에 해당하는 곳에서 진행됐다.
발굴 유물, 유적 중 우선 주목되는 것은 건물지군 북단의 대형 목곽고다. 목곽고는 목재로 만든 저장시설로 당시 생활상을 담은 타임캡슐로 불린다.
이번 유적의 경우 크기가 가로 3.2m, 세로 3.5m, 깊이 2.6m이며 너비 20~30㎝ 내외의 판재를 기둥에 맞춰 정교하게 제작됐다.
바닥면에서 벽체 상부까지 부식되지 않고 조성 당시 모습 그대로의 원형이 남아 있다.
특히 기둥 상부의 긴 촉이 테두리보 상부까지 솟아나 있고 내부에서 기와 조각이 다수 출토된 점 등으로 볼 때 상부에 별도의 지붕 구조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문화재청은 추정했다.
그간 백제 시대 목곽고는 대전 월평동 산성, 부여 사비도성 내에서도 발굴됐지만 심하게 훼손돼 있어 고고 사료로서의 가치에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공산성 목곽고는 상부 구조까지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목조 건축물로 당시의 목재 가공 기술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어 백제 시대 건물 복원과 연구 등에 획기적인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목곽고 내부에서는 복숭아씨와 박씨가 다량 출토됐다.
무게를 재는 석제 추와 생활용품인 칠기, 목제 망치 등의 공구도 모습을 드러냈다. 원형으로 중앙에 고리가 있는 석제 추의 무게는 36g이다. 칠기는 표면에 옻칠이 정교하게 칠해져 있다.
목곽고 용도에 대해 문화재청은 저장시설 또는 우물 두 가지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벽면에 오르내릴 수 있는 일종의 나무발판인 말목 구멍이 있고 외면과 내부 틈새를 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점토를 다진 점에 비춰 일단 저장시설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저지대에 물이 많이 모이는 지역에 위치한 입지성을 볼 때 우물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특히 건물지 북쪽의 저수시설에서는 백제 멸망기 전쟁의 흔적을 유추할 수 있는 유물들이 쏟아져 관계자들의 탄성을 자아냈다.
완전한 형태의 철제 갑옷, 옻칠이 된 마갑(馬甲), 철제 마면주(馬面?·말 얼굴 가리개), 마탁(馬鐸·말갖춤에 매다는 방울)과 함께 대도(大刀), 장식도(裝飾刀), 다량의 화살촉, 철모(鐵牟) 등이 대거 수습됐다.
또한 지난 2011년 발굴 당시에도 저수시설에서는 서기 645년인 '정관19년(貞觀十九年)'이 적힌 옻칠 갑옷과 말갑옷이 나왔는데 이번 조사에서도 20여자의 명문이 적힌 옻칠 갑옷이 출토됐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저수지 주변 건물지 대부분이 대형 화재로 폐기된 정황을 고려할 때 백제 멸망시점인 660년을 전후해 나당연합군과의 전쟁과 같은 상황이 공산성 내에서 전개됐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분석했다.
공산성과 백제 멸망을 연결하는 고리는 백제 31대 마지막 왕인 의자왕이다.
그는 660년 7월 13일 수도인 사비성이 함락되기 직전 탈출해 공산성으로 지휘부를 옮긴다. 중앙군은 무너졌지만 지방군이 건재했던 기대 때문이다. 하지만 며칠 뒤인 18일 돌연 항복했고 이는 한국 고대사의 미스테리로 남아있다.
이와 관련 '삼국사기'는 의자왕이 태자 및 방령군을 거느리고 스스로 웅진성을 나와 항복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최근의 고고학적 성과는 상반된 얘기를 들려준다.
지난 2006년 중국 당나라 시대 고도였던 시안(西安)에서 출토된 백제 유민이자 당나라 무장인 예식진의 묘지명이 세상에 공개되면서 역사학계 논쟁의 불씨를 당겼다.
묘지명에 의하면 예식진은 백제 웅천(공주) 사람으로 당에서는 좌위위대장군을 지냈으며 할아버지는 지금으로치면 장관격인 좌평까지 오른 예다(藝多)이고 아버지 역시 좌평을 역임한 사선(思善)이다.
예식진은 구당서 소정방 열전에 보이는 백제 대장군 예식과 동일인물이라는 게 현재 중국 및 우리나라 역사학계의 유력설로 대두되고 있다.
구당서 소정방 열전에는 의자왕 항복 당시를 '其大將?植 又將義慈來降(기대장니식 우장의자래항)'이라는 11자의 문장으로 압축하고 있다.
여기서 앞 부분의 장(將)은 명사로서의 장수를, 뒷 부문의 장(將)은 동사로서 체포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 즉 백제 공산성 장수인 예식진이 의자왕을 붙잡아 당나라에 넘긴 반역행위를 했다는 뜻으로 봐야 한다는 게 일부 학자들의 주장이다.
이번 조사에서는 백제 유적지에서는 처음 확인되는 말안장 뒤쪽에 세워 기를 꽂는 용도의 깃대꽂이도 발굴됐다.
이 깃대꽂이는 철로 만들어졌는데 약 60㎝의 크기로 S자 모양(巳行)으로 구부러져 있다.
삼국 시대 깃대꽂이는 합천의 옥전고분에서 가야 실물이 발견됐고 고구려는 쌍영총과 삼실총 벽화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백제 깃대꽂이는 그동안 서산 여미리 출토 토기 문양으로만 추정할 수 있었는데 이번 조사를 통해서 실물이 최초로 출토됨으로써 백제 기승(騎乘)문화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를 확보하게 됐다는 평가다.
발굴단은 제 60회 백제문화제가 진행되는 26일부터 다음달 5일까지 매일 오전 11시와 오후 2시에 발굴조사 현장을 방문하는 일반인들을 상대로 설명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의자왕의 최후는 항복 아닌 항전”
(동아일보 2014-09-24 03:00:00)
공주 공산성서 목곽창고 원형발굴
공주 공산성 공북루 성벽 안 저수지 터에서 발견된 백제 갑옷(위 사진). 중국 당나라에 파견된 백제 관직명이 새겨진 이 갑옷은 백제가 항전 의지를 다지기 위해 저수지에 수장시킨 의례용 갑옷으로 보인다. 음식 저장고로 추정되는 목곽고(아래 사진 왼쪽)와 거기서 발견된 유물과 씨앗들. 문화재청 제공
충남 공주시 공산성 공북루 성벽 바로 안쪽에서 거대한 흙더미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옆에 8m가량 파고 들어간 흙구덩이에서 백제 옻칠 갑옷과 마갑(馬甲), 칼, 화살촉 등이 오랜 세월을 건너 모습을 드러냈다. 정확히 1354년 전인 서기 660년 이곳은 10m 너비의 저수지였다. 당시는 백제 의자왕이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쫓겨 수도 사비성을 버리고 공산성으로 피신해 최후의 결전을 벌일 때였다. 이런 급박한 때 누가, 무슨 연유로 7세기 최고급 사치품인 옻칠 갑옷을 저수지에 빠뜨린 걸까.
문화재청과 공주대박물관이 23일 공개한 공산성 성안마을 발굴 유물들은 패망 직전 백제의 마지막 항전 장면을 여실히 보여준다. 저수지 근처에서는 가로 3.2m, 세로 3.5m, 깊이 2.6m의 대형 목곽고(木槨庫)도 발견됐다. 부여 사비도성 등에서도 백제 목곽고가 발굴됐지만 이번처럼 원형이 그대로 유지된 건 처음이다. 목곽고에선 복숭아씨와 박씨, 무게 추, 칠기 등이 나왔다.
수백 개의 화살촉이 저수지와 목곽고 모두에서 나왔고 주변 건물 잔해는 대부분 불에 탄 흔적이 있다. 이 때문에 ‘의자왕이 태자와 웅진방령군을 거느리고 성에서 나와 항복했다’고 기술한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통설과 달리 의자왕이 마지막까지 저항했다는 해석이 제기됐다. 이현숙 공주대박물관 학예연구사는 “삼국사기는 신라의 관점에서 쓰인 ‘승자의 역사’였음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옻칠 갑옷 유물은 백제의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된다. 대도(大刀)와 장식도(裝飾刀), 갑옷, 마갑 순으로 가지런히 놓인 채 발견된 유물들은 백제가 ‘임전무퇴’의 결의를 다지기 위해 의례를 치른 것으로 추정된다. 3년 전에도 인근에서 비슷한 모양의 갑옷 유물이 발굴됐다. 이남석 공주대박물관장(발굴단장)은 “두 갑옷이 동시에 함께 쓰인 의례용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며 “고대 중국에서도 군대 출정 전 연못에 갑옷을 빠뜨리는 의례를 한 기록이 있다”고 말했다.
특히 3년 전 발굴된 갑옷에는 당나라 연호인 ‘정관(貞觀) 19년’(서기 645년)이 새겨져 있었는데 이번에는 ‘참軍事, ○作陪戎副, ○人二行左, 近趙○(참군사, ○작배융부, ○인이행좌, 근조○)’라고 적힌 파편이 추가로 발견됐다. 참군사나 배융부는 중국식 관직명으로 조공외교의 예에 따라 당나라에 파견한 백제의 외교사절을 지칭한 용어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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