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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Pub] 영화 ‘명량’에 나오는 배설 장군, 과연 그렇게 비열한 인물이었나? (조선일보 2014.09.21 17:06)

[조선Pub] 영화 ‘명량’에 나오는 배설 장군, 과연 그렇게 비열한 인물이었나?

 


	배설 장군 후손들이 영화 '명량'의 감독과 작가 등을 '사자(死者)의 명예훼손' 혐의로 경북 성주경찰서에 고발장을 접수하고 있다. /이하 사진 출처 성산배씨 성주공파 종친회 카페
배설 장군 후손들이 영화 '명량'의 감독과 작가 등을 '사자(死者)의 명예훼손' 혐의로 경북 성주경찰서에 고발장을 접수하고 있다. /이하 사진 출처 성산배씨 성주공파 종친회 카페

영화 ‘명량’에 악역으로 등장한 배설(裵楔, 1551~1599년) 장군 후손들의 반발이 거세다. 지난 9월 15일, 배설 장군의 후손들과 경주 배씨 문중은 명량의 김한민 감독과 전철홍 작가, 소설가 김호경 씨 등을 ‘허위사실 적시에 의한 사자(死者)의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배 장군 후손들은 고소장에서 “영화에서 묘사한 배설 장군은 사실과 다르다”면서 “1천700만 명이 넘는 관객들에게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게 해 실존 인물인 배설 장군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했다”고 주장했다.

고소에 앞서 경주 배씨 문중은 ‘소설ㆍ영화(명량)관련 비상대책위원회(이하 비대위)’를 만들고 국민권익위원회와 문광부 등에 ‘명량’의 상영 중지를 요청하는 등 민원을 제기했지만 ‘법률에 의한 사법부의 판단이 필요한 사안’이라는 답변을 들었다.



	'명량'에 악역 배설 장군으로 나온 김원해
'명량'에 악역 배설 장군으로 나온 김원해
후손들이 영화에서 문제 삼은 부분은 크게 4군데다. 칠천량(漆川梁) 해전에서 배설이 싸울 생각은 하지 않은 채 처음부터 도망갈 모의를 한 후 의도적으로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도망쳤다는 것, 왜군과 내통하며 왜(倭)의 스파이 노릇을 하며 명량해전을 앞두고 이순신 장군을 제거하기 위해 암살을 시도했다는 것, 명량해전을 앞두고 이순신을 궁지로 몰아 후퇴를 유도하고자 거북선을 불질렀다는 것, 이후 도망가다가 휘하 장수였던 거제현령 안위(安瑋)의 화살을 맞고 죽었다는 것 등이다.

이밖에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소설로 쓴 김호경 소설가에 대해서는 “많은 분량을 할애하여 사자(死者)를 인격적으로 모욕하고 폄훼하는 데 몰두하고 있으며, 역사적 사실과 무관한 허위의 내용을 유포하고 있다”며 고소 이유를 밝혔다. 이 같은 고소 건에 대해 영화 제작사 측은 “일주일 간의 시간을 주면 공식입장을 발표하겠다”는 입장을 언론에 밝힌 상태다.

극중(劇中) 인물에 대한 왜곡 시비가 일어날 때마다 작가와 제작사 측은 ‘예술에 대한 표현(창작)의 자유’와 ‘극적인 효과를 위한 각색’라는 이유를 둘러댄다. 문제는 역사극에서 예술적 표현의 자유나 극적인 효과를 넘어서는 사실 관계의 근본적 왜곡이 빈번하다는 것이다.

배설 후손, "역사적 사실과 너무나 거리 멀어"

배설 장군의 13대 후손이자 비대위 회장을 맡고 있는 배한동 전 경북대 교수는 “경주 배씨 50만명 문중과 직계후손 10만명은 영화 개봉 후 경악을 금치 못하며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며 “배설 장군에 대한 간단한 사료 검색으로도 알 수 있는 역사적 진실을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악의적으로 폄훼한 것은 사자의 명예를 훼손하기 위한 의도라고 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영화를 본 사람들의 소감을 들어보면 ‘왜군(倭軍)보다 배설이 더 죽일 놈’이라는 의견이 대다수”라며 “배설 장군의 자손들은 현재 일상생활이 힘들 정도로 정신적 충격과 고통에 빠져 있다. 문중의 자녀들이 학교나 군대, 사회에서 조롱과 왕따를 당하는 등 이중ㆍ삼중의 고통의 늪에 빠져 있다”고 말했다.

제작사 측을 고소한 배설 장군 후손들은 “금전적인 보상은 일절 원하지 않으며, 제작사의 진심 어린 사과와 배설 장군에 대한 명예를 회복해줄 방법을 찾아 조치를 해주면 된다”고 밝혔다.

먼저 비대위 위원장을 맡고 있는 배한동 교수와 전화 통화를 해 보았다.

-영화를 본 느낌이 어땠습니까.

“정말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 심정을 모를 겁니다. 선조(先祖)가 비겁자를 넘어서 이순신 장군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거북선을 불태우고 도망가다 부하장수였던 사람에게 죽는 걸로 묘사되는데 이는 사실과도 맞지 않고, 후손으로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모독입니다.”

-이런 경우 제작사나 작가는 대부분 ‘역사적 상상력’이나, ‘예술적 창작의 범주에 해당하는 각색’이기 때문에 이해해 달라고 하는데요.

“당연히 실존 역사 인물을 극화(劇化)할 때는 다소의 과장과 축소 등의 각색이 있을 수는 있습니다. 요즘 세상에 그것을 용인하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번 경우는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너무나 멀고, 없었던 사실을 꾸며냈기 때문에 역사 왜곡이자 실존 인물과 사자(死者)에 대한 명예훼손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몇 백년 전의 인물도 명예훼손이 해당할까요.

“법정에서 판단할 부분이겠지만, 우리도 법률적 검토를 거쳤습니다. 영화를 본 사람들이 배설 장군의 행동을 사실로 믿고 있는 상황이고, 배설 장군의 직계 후손들이 있는데 허용할 수 있는 수준을 넘었다고 봅니다. 소설 ‘명량’에서는 노골적으로 배설 장군이 왜군에 매수된 인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선대(先代)께서 졸지에 왜놈 앞잡이가 되었는데 이것을 어떻게 그냥 넘어갈 수가 있습니까.”

-구체적으로 영화의 어느 부분이 사실과 맞지 않다는 건가요.

“배설 장군은 오랜 바다 생활에서 얻은 병(수질: 어지럼증 등)으로 이순신 장군에게 요양신청을 내서 허락을 맡은 후 군영을 떠났습니다. 이 사실은 이순신의 ‘난중일기’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후 계속 병세가 호전되지 않아 병가 상태에서 고향에서 휴양 중이었는데 임진왜란이 끝난 후 조정(朝廷)의 모함을 받아 느닷없이 모반죄로 걸려들어 참형(斬刑)을 당했습니다. 그 6년 후(선조 38)에 조정은 배설 장군을 다시 원종1등공신에 책록하면서 ‘가선대부 호조참판’에 추증했습니다. 당대 조정에서 이미 판결의 잘못을 인정하고 명예와 신원(伸?)을 회복 시킨 것입니다.”

-그 그만큼 배설 장군이 임진왜란 때 세운 공이 컸다는 것인지요.

“맞습니다. 이미 당대에 배설 장군과 집안은 명예가 훼복되었지만, 고종황제께서 유림의 의견을 받아들여 다시 배설 장군을 요즘의 국방부 장관에 해당하는 ‘자헌대부 병조판서’에 추증합니다. 한 왕조에서 두 번이나 사후 추증했다는 것은 그만큼 공이 지대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입니다.

왕조국가에서 가장 큰 죄가 바로 역적죄입니다. 역적이나 모반(謀反)은 곧바로 멸문지화(滅門之禍)로 이어집니다. 만약 그 후손들이 살아 있다 해도 왕조가 존재하는 한 관직 진출이 영원히 막힙니다. 하지만, 배설 장군은 이미 당대 조정에서 복권되었고, 후대에 오면서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집안입니다. 한 사람을 영웅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굳이 다른 인물을 악인(惡人)으로 왜곡해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제작사 측에서 공식적으로 연락해 온 게 있는지요.


	배설 장군 묘소에서 고유제를 올리고 있는 경주 배씨 성주공파 종친들.
배설 장군 묘소에서 고유제를 올리고 있는 경주 배씨 성주공파 종친들.

 

“전혀 없습니다. 형사고발을 했으니까 자기들의 입장을 밝히겠죠.”

배설은 '국가 유공자' 가문

배설은 이미 그를 벌주었던 조정에서 공로를 재평가 받은 인물이다. 하지만 그가 죽은 지 400여년 뒤 대한민국 최다 관람객을 기록한 영화에서 그는 민족의 영웅 이순신 장군을 암살하려하고, 거북선을 불지르고 달아난 가장 비열한 모습으로 우리곁에 등장했다.

영화의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쓴 소설에서는 더 심하다. 소설에 묘사된 배설은 ‘한번 싸워 볼 각오도 갖지 않은 채 닻을 올리고 줄행랑을 쳤다’ ‘그 때 비겁한 심성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다’ ‘그 위인이 못난 것은 천하가 다 아는 바 였다’는 작가 시점의 묘사와 함께, 왜장의 입을 빌려 아예 ‘쥐새끼 같은 놈’이라고 욕을 퍼부었다.

이쯤되면 후손들이 영화나 소설에서 배설 장군이 왜군보다 더 악인으로 묘사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과장이 아닌 것이다.

대부분의 장수가 그랬듯이 배설은 임진왜란과 관련하여 스스로의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그에 대한 대중의 인상은 이순신의 사적인 일기나, 그를 처벌했던 시점의 조정이 바라보던 시각에서 굳어져 있다.

하지만 남겨진 기록을 종합해서 판단해도 배설이 참수형을 당할 만한 죄를 저질렀는지는 의문이 있다. 배설이 참수형이 옳았는가를 두고 당시에도 논란을 일으켰을 것이란 상상을 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임진왜란 당시 모반죄로 참수당한 사람이 불과 6년 후에 일등공신으로 재평가 되는 경우가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의병장으로 공을 세운 김덕령(金德齡) 장군이 모반죄로 처형당한 후 관작과 신원이 회복되는데 70년이 걸렸다.

이쯤에서 논란이 된 배설 장군의 임진왜란 당시 행적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다. 배설 장군 가(家)는 요즘으로 치면 '국가유공자'이자 대단한 호국(護國)의 집안이다.

그의 아버지와 형제들이 모두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왜군과 싸여 공적을 세웠다. 아버지 배덕문(裵德文)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68세의 고령에 의병을 일으켜 적장의 목을 베고 성주를 지킨 공으로 선무원종2등공신에 책봉됐다. 배덕문의 아들은 4형제인데 첫째가 배설 장군이며, 둘째 건(楗)과 셋째 즙(楫)은 정유재란 당시 전사했다.

배설 장군 가계는 그의 할아버지가 성주로 이주한 후 지금까지 이 지역의 명문을 이루고 있다. 배설의 후손들은 영남 유림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순신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배설

1551년 태어난 배설은 1583년(선조 16년)에 무과(武科) 별시에 급제한 후 변방 방어 활동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합천군수, 동래부사, 진주목사, 경상우수사 등을 역임하였고,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경상우수사(수군절도사: 두번째 우수사 역임)로 부산포해전, 다대포해전, 칠천량 해전에 참전했다.

실록(實錄)에는 배설의 공직 생활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전한다. 그가 진주목사직을 수행 중일 때 경상좌수사로 발령받았다. 이 때 배설의 부임이 늦어졌는데 그 이유에 대해 실록은 “진주의 백성들이 배설이 떠나는 것을 막아 그대로 머물러 있게 하여 온 경내의 노인과 어린 아이들이 떼를 지어 에워싸고 지키며 나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배설이 아직도 부임하지 못했다”며 보고한 대목을 기록해 놓았다.

이에 앞선 1592년, 배설이 선산부사로 재직 할 때 2년에 걸쳐 전략요충지인 금오산성 수축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이 성은 나중에 도체찰사(都體察使: 전시 특정지역의 군정과 민정을 총괄하던 임시관직)의 본영이 되어 왜적의 북상을 막는데 기여했다.

배설은 이순신 장군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을 때 여러 장수가 교서(敎書)에 숙배(肅拜)를 했는데 배설은 교서에 숙배하지 않았다. 이순신은 이 일을 무척 괘씸하게 여기며 일기에 “그 업신여기고 잘난 체 하는 꼴을 말로 나타낼 수가 없다. 너무 놀랍다. 이방과 그 영리에게 곤장을 쳤다”고 하는 등 불편한 심기를 노골적으로 기록해놓았다.

이순신과 배설이 사이가 좋지 않은 이유에 대해 배설 장군의 후손들은 이순신과 원균의 관계, 원균의 휘하에 있던 배설과 이순신의 관계, 조정의 인맥 관계, 인사 문제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란 분석을 내놓기도 한다. 아무튼 명량해전을 앞두고 있던 이순신은 8월 30일 난중일기에서 ‘배설이 병으로 휴가를 내었다’고 적었다.

‘배설이 적이 대거 쳐들어올 것을 겁내어 도망가려고만 했다. 하지만 드러나지 않은 것을 먼저 발설하는 것은 장수가 취할 행동이 아니므로 애써 참고 있었다. 그런데 배설이 자기 종을 보내어 청원서를 제출하기를 병세가 몹시 중하므로 몸조리를 해야겠다고 하였다. 나는 육지로 나가서 조리하라고 하였다. 배설은 우수영에서 육지로 올라갔다. 달아나려는 마음을 품고 있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가 종을 보내 병세가 위중해서 몸조리를 하겠다고 연락이 와서 공문을 보내 허락했다’고 적었다.(비봉출판사 '이순신과 임진왜란')

하지만, 그 이틀 뒤인 9월 2일 일기에 이순신은 ‘오늘 새벽에 배설이 도망갔다’고 적어놓았다. 칠천량 해전 패전과 교서에 절을 하지 않은 사건 이후 이순신은 배설에 대해 줄곧 ‘두려워하는 눈치’라든가 ‘겁을 먹고 피하여 물러났다’는 등 좋지 않은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경북 성주 경주 배씨 집성촌에 걸려 있는 항의 현수막.
 경북 성주 경주 배씨 집성촌에 걸려 있는 항의 현수막.
탈영이냐 요양이냐

그런데 왜 배설 장군은 군영으로 돌아오지 않은 것일까? 이에 대해 이순신 연구가인 해군사관학교 이민웅 교수는 ‘이순신 평전’(책문, 2012년)에서 ‘배설이 자신이 칠천량 해전 패전에 대해 책임을 질 수밖에 없는 유일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인식한 것 같다’고 분석했다. 어떤 역사가는 칠천량 해전의 충격과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란 견해를 밝히기도 한다.

하지만 배설 후손인 배한동 교수는 “탈영이 아니라, 엄연히 이순신의 허락을 받아 요양 휴가를 낸 것이며, 오랜 바다생활에서 얻은 수질(水疾)이 호전되지 못했기 사직을 제출하고 고향에서 요양을 하고 있었는데 그것을 도망으로 간주 한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실제 배설 장군이 수질이 있다는 보고가 실록(實錄)에 언급돼 있다(1595년 진주목사 시절).

배설 후손 중에는 “배설 장군은 이순신과 사이가 좋지 않아 갈등이 깊었고, 칠천량 해전 패배 후 이순신을 상관으로 임명한 조정의 인사조치에도 불만이 컸다”고 추론하는 이도 있다. 후손들의 입장을 요약하면 “배설 장군이 고향에서 몸조리 중이었는데 조정이 칠천량 해전의 패전 책임을 지우면서 동시에 역모로 몰아 처형을 했고, 이후 ‘선조수정실록’에서 배설 장군을 도망자로 낙인해 놓았다”는 것이다.

어쨌든 배설은 성주 본가에 머물다가 왜란 종전 이후인 선조 32년(1599년)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칠천량 해전에서 배설이 지휘하던 10여척의 함대를 보전하지 못했으면 조선 수군이 전멸했을 것이라는 데 학자들의 이견(異見)이 없는 편이다.

만약 그렇게 상황이 전개 됐으면 우리 역사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신에게는 아직도 열두척의 배가 남아 있나이다’라는 이순신의 비장한 명언도 나올 수 없었고, 명량해전도 당연히 없었을 것이다. 수군이 사라진 이후 왜군은 수륙병진작전을 통해 손쉽게 서울을 공략했을 것이며, 조선이 명맥을 유지했을 가능성이 희박했을 것이다. 조선 왕조가 일본에 멸망했다면 그 시점부터 우리 민족은 점차 일본에 동화되어 나갔을 것이다.

학자들은 칠천량 해전의 패인의 가장 큰 요인이 수군의 전략을 잘 모르는 임금과 조정이 왜군의 본진인 부산포를 공격하라며 무리하게 독전을 한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분석한다. 당시 조정은 재침한 왜군이 곧장 한양으로 쳐밀고 올까봐 노심초사 하며 하루라도 빨리 왜적의 본거지인 부산포를 공격하라고 수군을 압박하고 있었다.

조정의 무리한 명령을 거부했던 이순신은 서울로 송환당해 거의 죽을 뻔 하고, 파직 당했다. 이순신의 뒤를 이어 삼도수군통제가 된 원균(元均)도 수군 단독으로 부산포를 공격하는 것이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논문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당시 우리 수군의 규모는 판옥선 120여척과 협선 130여척, 병력 규모는 1만5000여 명이었던데 반해 왜군은 600여척의 大 선단과 14만여명의 군사가 부산에 상륙해 있었다.

원균은 수군 단독 출전을 피하고자 여러가지 노력을 기울였지만, 조정의 성화와 도원수 권율의 출전 닦달 앞에는 별 도리가 없었다. 거기다가 갑작스럽게 전 수군을 지휘하게 된 원균은 부하 장수들을 제대로 장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에 반해 일본은 그동안 해전의 패배를 거울삼아 전술을 가다듬고, 곳곳에 병력을 매복 해놓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춘 다음 조선 수군이 걸려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1597년 6월 18일, 조정의 성화에 못이긴 원균이 출전했지만, 왜적은 싸움을 회피했다. 권율은 이 과정에서 원균에게 조정의 명령을 어긴 죄로 곤장을 쳤다. 이어 1597년 7월 5일, 원균은 경상우수사 배설 장군을 선봉으로 삼아 한산도를 출발, 본의 본거지인 부산포를 공략하기 위해 출정했다.

칠천량 해전의 선봉장이 된 배설 장군

칠천량 해전은 그 전투의 중요성 및 피해 규모와 비교하면 상세한 기록이 거의 없는 편이다. 배설 장군이 당시 어떤 심정으로 전투에 임했는지는 자세한 기록이 없어서 알 수가 없지만, 사료를 종합하면 그도 수군 단독의 부산진 공격의 무모함을 잘 알고 있었다. 칠천량 해전 후 조정에서 수군 패배에 대한 처벌을 논의를 하는 자리에서 “배설이 ‘비록 군법에 따라 나 홀로 죽을지언정 어떻게 군사들을 사지(死地)로 들여보내겠는가’라는 말을 했다”고 실록은 기록해 놓았다.

7월 5일 한산도를 출발한 원균 함대는 칠천량에 정박했고, 다음날인 7월 6일 옥포를 거쳐 7월 7일 다대포 앞바다로 나아갔다. 이 과정에서 만난 왜선 8척을 ?아 결국 불태웠다. 선봉에 섰던 배설 함대가 도망치는 왜선을 추격했으리라고 추론 하는 것이 상식적이다.

곧이어 우리 수군은 일본의 대규모 함대를 만났지만, 이를 ?는 과정에서 풍랑을 만났다. 풍랑으로 아군 함대가 분산되며 일부 전선들이 표류하기 시작했다. 이 가운데 6척은 서생포까지 떠내려갔다. 이들은 육지에 오르다가 매복한 일본군에 걸려 전멸당했다. 이날 조선 수군은 13척의 전선을 잃고 수백명의 전사자가 발생했다.

7월 14일 원균은 원거리 출정과 풍랑으로 지친 수군 함대를 이끌고 부산 앞바다로 진격했다. 이민웅 해군사관학교 교수는 ‘이순신 평전’에서 “당시 조선 수군은 조정의 무리한 출정 독려와 갑작스런 지휘관의 교체, 원균의 지휘력과 휘하 장수들과 소통 부재 등으로 사기가 바닥”인 상태라고 분석했다.

이와 반대로 왜군은 거미줄 같은 첩보 연락망으로 조선 수군의 움직임을 손금보듯이 하고 있었다.

왜군은 원균의 함대와 본격적인 전투를 회피한 채 조선 수군을 지치게 만들면서 육지와 섬 사이의 좁은 수로(水路)로 이들을 유인했다. 일본 수군을 추격하던 원균은 함대를 일단 가덕도로 철수하였다. 가덕도에 도착한 수군은 갈증에 시달리며 물을 구하기 위해 앞다투어 상륙했다. 하지만 이곳에도 이미 왜군이 매복을 하고 있었다.

왜군의 매목에 걸려 조선 수군 전선 20여척이 파괴되고, 400명이 전사했다. 제대로 된 전투 한번 해보지 못하고 대규모 피해를 낸 어이없는 결과였다. 원균은 병력을 가까스로 수습한 후 이튿날 거제도로 돌아왔다.


	일본 화가가 그린 임진왜란 해상전투도(조선전역해전도 부분). 치열한 전투가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왜군이 갈고리로 판옥선을 당겨 등선을 시도하는 장면이다. 왜군의 승전을 전하기 위한 그림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칠천량 전투일 가능성이 높다. 당시 조선 수군은 전멸 직전에 몰리면서도 거세게 저항했다.
일본 화가가 그린 임진왜란 해상전투도(조선전역해전도 부분). 치열한 전투가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왜군이 갈고리로 판옥선을 당겨 등선을 시도하는 장면이다. 왜군의 승전을 전하기 위한 그림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칠천량 전투일 가능성이 높다. 당시 조선 수군은 전멸 직전에 몰리면서도 거세게 저항했다.
겹겹이 애워싼 왜적의 기습공격

다음날인 7월 15일은 날씨가 좋지 않았다. 오후가 되자 원균은 함대를 칠천량으로 이동시켰다. 칠천량은 거제도와 칠천도 사이의 좁은 바다로 파도를 피하기 좋은 곳이다. 이민웅 교수는 “이때 원균이 한산도까지 후퇴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도원수 권율에게 곤장까지 맞은 원균으로서는 출전한 지 며칠 만에 다시 한산도까지 물러날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날 밤 10시, 왜군은 원균의 함대가 정박중인 칠천량을 기습공격했다. 앞쪽에 배치되어 있던 우리 전함 4척이 불타자 여러 장수들은 어찌할 바 모르고 허둥거렸다. 새벽이 되자 왜군은 우리 수군을 겹겹이 에워싸고 총 공세를 펼쳤다. 지칠대로 지친 조선 수군은 사력을 다해 싸웠지만 역부족이었다. 왜군은 자신들의 장기인 등선육박전(登船肉薄戰)을 통해 조선 수군 전선을 하나씩 부숴나갔다.

이날의 치열한 전투현장과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온 것이 바로 배설 장군이 지휘하고 있던 함대 12척이었다. 이날 원균과 함께 전투 현장을 빠져나온 선전관 김식(金軾)은 “경상우수사 배설과 옥포ㆍ안골포 만호 등이 겨우 몸을 보전하였다”고 보고한 후 “연기가 하늘을 찌르는데 왜적들이 무수히 한산도로 향하였다”고 설명했다. 전투 현장에 있던 조정의 선전관이 배설이 애초부터 전투를 피해 도망간 것이 아니라, 겨우 몸을 보전했다고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간신히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온 원균은 모든 해로가 차단되었기 때문에 인근 육지로 몸을 피했으나 뒤따라온 왜군의 칼에 전사했다. 이처럼 포위망을 뚫었다고 해도 안전을 담보할 수 없는 상황에서 배설은 자신의 지략과 경험을 총 동원해 자신이 지휘하던 함대를 사지로부터 탈출시켰다.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은 배설이 구해낸 12척의 배 외에는 전멸했다.

배설은 재빨리 한산도 본영으로 후퇴해 왜군에게 유리할만한 병기와 막사, 양식을 불사르고 섬 안의 백성들을 피란시켰다. 적지에 아무것도 남겨놓지 않는 것은 임금이 내린 전투 교범에 따라 펼친 청야작전(淸野作戰)의 하나였다.

비보를 전해들은 조정에서는 곧바로 칠천량 해전 후 패전의 책임부터 묻는 회의를 열었다. 패전의 책임이 조정의 무모한 명령이 아니라, 현장의 장수들이 사력을 다해 싸우지 않은 데 있다 하여 그들을 어떻게 죄줄 것인지를 논의하였다. 너무나 큰 손실을 낸 전투였기에 패한 순간 이미 현장에서 전사한 장수 외에는 모두 죄인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조정의 논의에서 ‘원균은 실종상태라 좀 기다렸다 벌을 주면 되고, 배설은 지금 병선을 이끌고 바다에 있으므로 이 사람까지 제거하면 해로가 모두 비게 될 것이니 뒷날을 기다려 논의하여 처리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선조는 어전회의에서 패전의 책임을 권율이 무리하게 전투를 독려 했기 때문이라며 권율에게 돌렸다. 어찌되었던 간에 칠천량 패전에 대한 책임을 누군가는 져야 할 상황이었다.

칠천량 해전 패배의 수범(우두머리)으로 몰려 참수

이순신은 칠천량 해전 패배 후 현장을 빠져나온 군사들로부터 상황을 듣는 자리에서 이미 “배설이 도망가고 보이지 않았다”고 단정했다. 하지만 그 다음날 바로 배설은 이순신을 찾아와서 칠천량 해전에 관해 상세한 이야기를 전했다. 이순신은 “이날 원균이 패하여 도망친 일을 많이 이야기하였다”고 일기에 적었다.

이렇게 해서 배설이 보전한 12척의 전함과 칠천량 전투의 상보(詳報)가 이순신에게 전해질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이순신은 명량해전을 준비했다.

칠천량에서 빠져 나온 배설은 도망을 간 것이 아니라 함대를 이끈 채 바다를 지키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조정에서 칠천량 해전 패배에 대한 처벌을 논의할 때 “배설이 아직 전함을 이끌고 바다 가운데 있다”고 한 데서 확인 할 수가 있다. 배설이 함대를 유지한 채 바다를 그대로 지킨 것은 왜군이 섣불리 추가적인 군사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 대단히 중요한 행위였다. 칠천량 해전 퇴각 과정에서 배설은 조방장인 아우 즙을 잃었다.

배설의 최후를 살펴보자. 전란 중에 임금과 조정은 민심이 동요해 변란이 날 것을 끊임없이 우려했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병조판서 홍여순이 “중국군이 철수한 뒤 변란이 날까 우려된다. 소문에 의하면 배설이 지난 가을 나주에서 도망하여 지금은 충청도에 있는데 무뢰배를 모으고 있다고 한다. 떠도는 소문이라 믿을 것은 못 되지만 환란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체포해야 한다”고 임금에게 보고했다.

이에 따라 체포 명령이 내려졌고, 배설은 이듬해 권율에 의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후 처형되었다. 실록은 “배설은 칠천량 해전 패전의 수범(우두머리)인데 외지에 망명해 있어 조정에서 찾아내지 못하였으나 권율이 잡아 올려 보냈기에 참수했다”고 기록했다.

조정이 배설에 부여한 죄목은 칠천량 해전에서 싸우지 않고 달아난 죄, 민심이 흉흉한 틈을 타 선량을 백성을 선동하여 역모를 한 죄다. 앞서 말했듯이 이미 배설은 칠천량 해전의 패배에 대한 책임을 혼자 뒤집어 쓸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배설 장군 후손인 배한동 교수는 “조선 조정은 난리 후 백성들이 선조의 퇴위를 거론하며 전쟁책임을 묻는 등 민심이 동요하자 덕망이 있는 자가 봉기하여 민란을 일으킬까 우려했다”며 “민란을 사전에 방지하고, 정권을 안정시키며, 패전에 대한 책임을 전가할 희생자를 찾던 중 배설과 그 가문이 대상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결국, 배설 장군의 처벌은 임금 교서에 대한 사은숙배의 거부로 인한 불손함, 선조의 인사 정책의 혼란, 수질(병세) 악화로 인한 미복귀와 함께 장군에 관한 모함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분석했다.


	배설 장군 묘소.
배설 장군 묘소.
배설 후손들, "공적 폄훼해선 안돼"

배설 장군 후손들은 칠천량 해전에서 배설의 퇴각은 일반적인 도망과는 다르다고 항변한다. 배설은 그가 했던 말처럼 병사들을 구하기 위해 전략적 퇴각을 한 것이며, 악전고투 끝에 포위망을 뚫고 판옥선 12척을 구해 이순신에 인계한 그를 이순신의 위대성을 부각하기 위해 매도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만약 배설 장군이 한 척의 전선도 구하지 못한 채 원균과 함께 전사하고, 한산도 본영이 왜군의 수중에 넘어갔으면 임란의 전쟁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칠천량 전투의 전술적 후퇴가 조선 수군을 살린 것을 높이 평가해야 할 부분이라는 것이다.

배설은 당대 그를 벌주었던 조정에서 공로를 인정하여 명예를 회복시킨 후 포상을 내린 인물이다. 한 사람의 영웅도 좋지만, 그 영웅을 위해 반드시 희생양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배설 장군 명예훼손 소송 사건을 계기로 역사 인물을 평가하는 기준과 균형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계기로 삼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