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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분야/우리 경제

[김상조의 경제시평]구리왕 차용규의 진실은? (경향신문 2014-08-12 20:59:57)

[김상조의 경제시평]구리왕 차용규의 진실은?

김상조 | 한성대 교수·경제개혁연대 소장

 

구리왕 차용규, 선박왕 권혁, 완구왕 박종완 등등. 엄연한 공화정 체제인 우리나라에 무슨 왕이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다. 2009년 이후 국세청이 세정개혁 중점과제 중의 하나로 역외탈세 차단을 위한 노력을 기울여 왔고, 그 결과 거액의 과세 조치가 이루어진 사건들에 대해 언론이 붙여준 선정적 호칭들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 주요국들이 금융비밀주의에 대한 압박 내지 조세피난처에 대한 규제를 강화한 가운데 우리나라 국세청도 이러한 국제적 흐름에 합류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왕들에 대한 조치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구리왕에 대한 조치는 과세전 적부심사(납세자가 세금을 내기 전에 이의를 제기하는 절차) 단계에서 취소되었다. 선박왕의 탈세 혐의는 1심 유죄 판결이 항소심에서 뒤집혀 사실상 무죄가 선고되었다. 완구왕은 1심에서 무죄가 선고되었다가 최근 항소심에서 2000~2008년의 혐의 기간 중 초반 2년에 대해서만 탈세 혐의가 인정되어 간신히 검찰의 체면을 살려주었다.

각설하고, 경제개혁연대와 특별한 인연을 맺은 구리왕 차용규에 초점을 맞추어 보자. 구리왕이 세인의 입에 오르내린 것은 2007년과 2008년 연속해서 포브스지가 선정하는 세계의 거부 명단에 들어가면서부터다. 몇몇 재벌총수를 제외하면 한국 최고의 부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샐러리맨의 신화로 넘기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너무 많았다.

차용규는 삼성물산의 직원으로 카자흐스탄에서 근무하다가 2000년대 초반 퇴사했다. 당시 삼성물산은 카자흐스탄의 구리 제련업체인 ‘카작무스’를 위탁경영하면서 지분 42.55%를 보유한 최대주주가 되었는데, 2004년 8월경 느닷없이 지분을 모두 팔고 철수했다. 그리고 1년여 후 카작무스는 영국 런던 증시에 상장하여 시가총액 100억달러가 넘는 잭폿을 터뜨렸다. 지분을 매각하기 불과 두 달 전에 카작무스의 실권자로 알려진 ‘블라디미르 김’이 상장 계획을 언급한 사실이 세계 유수 통신사에 보도되기도 했는데, 삼성은 왜 이 대박나는 물건을 헐값에 팔아버렸을까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지분을 인수한 ‘서류상 회사’(페이퍼 컴퍼니)의 대표이사로 등재된 차용규가 구리왕에 등극했으니, 당시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고백으로 삼성의 비자금 의혹에 대한 특검 수사가 진행 중인 상황에서 온갖 억측이 난무한 건 당연하다.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삼성을 사랑하는(?!) 경제개혁연대가 삼성특검에 이러한 의혹을 제보했으나, 사실상 수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국세청이 구리왕에 대해 역외탈세 혐의로 과세 조치를 했다는 언론 보도를 접하고선 다시금 삼성에 대한 애정이 발동하여 작년에 이건희 회장 등 삼성물산의 이사들과 차용규를 배임 혐의로 정식 고발했다. 무려 1년이 지난 최근에야 증거불충분으로 모든 피고발인들을 무혐의 처분한다는 검찰의 통지서가 날아왔다.

솔직히 나는 검찰의 수사 결과에 승복하지 않는다. 경제개혁연대의 고발 이전까지만 해도 삼성은 이른바 ‘카자흐스탄 마피아의 협박’ 때문에 어쩔 수 없어 철수했다는 식의 변명을 암암리에 퍼뜨렸었다. 그러나 장장 15쪽에 이르는 검찰의 불기소결정서 어디에도 협박 운운하는 내용은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비록 협박에 의한 것일지라도, 회사에 손해가 될 줄 알면서 헐값 매각했다면 배임죄를 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삼성은 정상적인 가격으로 카작무스 지분을 매각했다는 주장을 폈고, 검찰은 이를 그대로 인용했다. 그 논리에는 허점들이 여럿 눈에 띈다. 자세한 내용은 8월4일자 경제개혁연대 논평에 담았으니 참조하기 바란다.

수사 결과에 승복하는 것은 결코 아니나, 항고는 하지 않기로 했다. 카작무스 건은 해외에서 벌어진 일이기 때문에 삼성과 검찰의 논리를 뒤집을 증거를 찾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판단에서다. 이제 사흘 후면 공소시효 10년이 완료된다. ‘실체적 진실’이 무엇이든 간에, 구리왕 차용규에 대한 ‘법률적 사실’은 그대로 굳어질 것이다. 너무나 아쉽다. 그래서 마지막 수단으로 영국의 세무당국과 금융감독기구에 관련 사실을 제보하기로 했고, 주한 영국 대사관에도 협조를 요청하기로 했다. 검찰의 불기소결정서에 ‘영국 영주권자인 차용규의 카작무스 지분은 블라디미르 김의 차명재산’이라는 진술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한국 검찰을 믿지 못하고 외국 기관에 넘기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