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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황후 원나라 황후가 된 고려 여인 (네이버 발행2011.07.04)

기황후 원나라 황후가 된 고려 여인

기황후 이미지 1

중국 원나라의 황제 순제(順帝)의 황후인 기황후(奇皇后, ?~?)는 고려의 여인이었다. 13세기 몽골의 초원에서 일어나 14세기 동아시아를 거점으로 중동을 지나 러시아와 동유럽까지 아우르는 거대 영토를 가진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제국이었던 원나라의 황후가 고려의 출신의 여인이라는 것은 꽤나 흥미로운 일이다. 게다가 이 기황후는 황후의 자리에 오른 것에 그치지 않고 황후가 된 이후 37년간 적극적으로 정치에 개입하여 원나라와 고려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고려의 공녀에서 원나라 황후가 되기까지

타이페이 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기황후의 초상화.

칭기즈칸[成吉思汗]이 몽고 부족을 통합하고 나선 정복 전쟁은 중국 대륙뿐만 아니라, 이웃 나라를 닥치는대로 치고 들어가 끝도 없이 영토를 넓히는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파죽지세로 일어나 그 누구도 당할 자 없었던 몽골제국의 7차례나 되는 침입에도 고려는 30여 년간 꿋꿋이 항거하였지만, 결국 대제국 건설의 강렬한 야망 앞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고려는 장기간에 걸친 항거 덕분에 몽골제국(원 세조(쿠빌라이 칸)가 수도를 대도(현재 북경)로 옮기고 국호를 원으로 한 것이 1271년의 일이다. 이시기에는 아직 몽골 제국이었다.)이 정복한 다른 지역들과는 달리 완전히 복속되지 않고 자체적인 국호와 정권을 인정받는 독립국가로 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세계제국이었던 원나라의 테두리 안에 들어간 100여 년 동안 고려는 원조정으로부터 수많은 내정간섭에 시달려야만 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왕자들은 인질로 원나라에 가야만 했고, 왕은 원 조정에서 마음대로 갈아치웠으며, 혼인 통교를 앞세워 원나라 공주가 고려의 왕비가 되어 들어와 고려 정치에 간섭하는 일이 생겼다. 한반도의 북쪽 땅은 원나라의 직접 통치구역이 되었고 원나라의 정복 전쟁을 돕는다는 명분하에 수많은 물자와 군사가 약탈에 가깝게 동원되어야만 했다.

그중에서도 원나라는 고려에 공녀라는 매우 야만적인 요구를 해왔다. 공녀란 말 그대로 여자를 공물로 바치는 것이다. 원나라의 공녀 요구는 80년간 정사에 남아 있는 것만 50여 회에 이르고 왕실이나 귀족이 개인적으로 요구한 일도 허다하였다고 한다.

원의 공녀 요구 이유는 유목민족 출신인 원나라 왕실에 여자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원나라에는 왕실에서 필요로 하는 여자 외에도, 원의 귀족·고관이 요구하는 여자도 공급해주어야 했으며, 어떤 경우에는 군인 집단 등의 혼인을 위해 많은 수의 여자를 필요로 하기도 하였다.

공녀는 고려 전체에 큰 시련을 안겨주었다. 어린 딸을 공녀로 빼앗기지 않기 위해 일찌감치 결혼을 시키는 일이 많아져 조혼의 풍습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공녀는 하층민에서만 차출하는 것이 아니라 원나라 왕실의 요구에 상응하는 정도의 신분을 가진 여자도 필요했기 때문에 귀족의 여식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고려에서 간 공녀들은 대개 원나라 궁궐의 궁녀나 고관 귀족의 처첩이 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거리의 기생으로 팔려가 이국땅에서 슬픈 생애를 살아야만 하기도 했다. 공녀는 그만큼 고려 여인들의 앞날을 가늠할 수 없는 치욕이었기 때문에 개중에는 공녀로 뽑히면 가지 않기 위해 자살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원나라의 마지막 황제 순제(북원의 혜종).

기황후도 이런 고려 공녀 중의 한 명이었다. 기황후의 본관은 행주이고 아버지는 기자오(奇子敖)이다. 기자오는 문하시랑평장사를 한 기윤숙(奇允肅)의 증손으로 음보로 관직을 할 정도였으니 그렇게 한미한 집안은 아니었던 것 같다. 기황후는 이 기자오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위로 오빠가 다섯에 언니가 둘 있었다. 기황후는 공녀로 뽑혀 1333년 고려 출신 환관이던 고용보(高龍普)의 주선으로 원왕실의 궁녀가 되었다. 당시 원나라 왕실에는 고려 출신 환관들이 많았다. 원나라는 소수의 몽고족이 다수의 한족을 다스리는 나라였기에 한족들이 중앙정부로 진출해 힘을 얻는 것을 극도로 막고 있었다. 하지만 지배구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식자층이 필요했다. 유목민 출신으로 교양을 쌓을 틈이 없던 원나라 지배층들은 이런 요구를 고려에서 바친 글을 아는 환관들을 통해서 해결했다. 고용보도 고려에서 원으로 간 환관이었다.

고용보는 조국, 고려에서 온 기황후를 차를 따르는 궁녀 자리에 앉히고 황제인 순제의 눈에 띄게 했다. 당시 원나라 황제인 순제(혜종)는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었다. 어린 시절 그는 왕실 정쟁의 틈바구니에서 고려의 대청도에 1년간 귀양을 간 경험이 있었다. 고려에서 살았던 경험 탓이었을까? 순제는 곧이어 기황후를 총애했다.

황제의 총애는 황후의 질투를 불러일으키기 마련이다. 기황후는 당시 순제의 제1황후이던 타나시리로부터 핍박을 받았다. 타나시리는 기황후에게 수시로 채찍질을 하고 인두로 살을 지지기도 했다고 한다. 순제의 제1황후 타나시리는 순제와 정적 관계이던 집안의 딸로 순제와의 사이도 무척 좋지 않았다. 기황후가 순제의 총애를 받은지 2년 되던 1335년 황후 타나시리의 형제들이 순제에 반대하는 모반을 일으키지만 실패하였다. 이 사건으로 황후 타나시리도 반란에 가담하였다는 벌을 받고 죽었다.

순제는 총애해 마지 않는 기황후를 황후 자리에 올려놓으려 했지만, 실권자이던 바얀[伯顏, 메르키트 바얀]이 몽고족이 아니면 황후가 될 수 없다고 반대하여 결국 이 일은 무산되고 말았다. 결국 황후 자리는 몽고 옹기라트 부족 출신의 바얀 후투그(伯颜忽都)에게 돌아갔다. 바얀 후투그는 매우 어진 성격으로 황후가 되고 나서도 거의 앞에 나서지 않는 인물이었다고 한다.

한번 황후의 꿈이 좌절되었던 기황후는 이후 1338년 아들 아이유시리다라[愛猷識里答臘]를 낳고 이듬해 메르키트 바얀이 실각하자 마침내 제2황후로 책봉되었다.

원나라의 실권자로 부상하다

기황후는 황제의 총애를 배경으로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어차피 제1황후는 허수아비 황후와 다름없었다. 그녀는 황후 직속 기관인 휘정원을 자정원으로 개편하여 고용보를 자정원사(資政院使)에 앉히고 왕실 재정을 장악하였다. 막대한 왕실 재정을 틀어쥐게 된 기황후는 이를 바탕으로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1353년에는 황제를 압박하여 자신의 아들인 아이유시리다라를 황태자의 자리에 오르게 하였고, 같은 고향출신인 환관 박불화(朴不花)를 군사 책임자인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 삼아 군사권도 장악하였다.

기황후가 실권을 장악하면서 원나라에서는 고려의 풍속이 크게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고려양(高麗樣)이라고 한다. 고려의 복식과 음식들이 원나라 고위층들을 중심으로 유행하기 시작했고 명문가에 속하려면 고려 여자를 아내로 맞아야 한다는 생각이 퍼졌다.

기황후의 아들 아이유시리다라. 그는 북원의 소종이 되었다.

한편, 기황후가 원나라 정치를 쥐락펴락하게 되자 고려에 남은 그녀의 가족들도 덩달아 득세하기 시작하였다. 원나라에서는 그녀의 아버지 기자오를 영안왕(榮安王)으로, 부인을 왕대부인으로 하였으며, 선조 3대를 왕의 호로 추존하였다. 또한, 기황후의 오빠 기철(奇轍)을 원나라의 참지정사, 기원(奇轅)을 한림학사로 삼자, 고려에서도 이들을 덕성부원군, 덕양군에 봉할 수밖에 없었다. 기씨 집안이 고려를 넘어서 원나라로부터 힘을 얻게 되자 고려 조정은 기씨 집안의 눈치를 안 볼 수가 없는 형편이 되었다. 문제는 이 기씨 집안의 아들들이 원나라의 힘을 고려에 유익하게 쓰기보다는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이용했다는 데 있었다. 기황후도 가족들을 위해 고려에 대한 내정 간섭을 지나치게 했다. 기씨 집안의 악행은 결국 공민왕(恭愍王) 즉위 후 원나라 힘이 약해진 틈을 타 이들을 비밀리에 제거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이때도 기황후는 공민왕을 제거하고 충선왕(忠宣王)의 셋째 아들 덕흥군을 왕으로 세우려고 고려를 침공하였으나 이때 이미 원나라의 국세가 기울고 고려가 원나라 군대를 잘 막아내서 실패로 그쳤다.

물론 고려여인인 기황후가 원나라의 황후가 되어서 좋은 점도 있었다. 충렬왕 때 시작되어 80년간 지속된 공녀 징발이 금해진 것도 이 시기였고, 고려가 원나라의 테두리 안에 들어간 후 계속 제기되었던 입성론(立省論), 즉 고려의 자주성을 인정하지 않고 원나라의 한 개의 성으로 만들자는 논의가 사라진 것도 이때였다.

원나라의 몰락과 기황후의 최후

원나라는 순제 때 문치주의 정치를 펼치면서 문화적으로는 전성기를 맞았다. 그러나 순제 즉위 전 있었던 왕위 다툼의 여파가 여전히 남은 상태에서 기황후가 정권을 잡은 후 시작된 황위를 둔 정쟁이 원나라의 힘을 점차 약화시켰다. 원나라는 소수의 몽고족이 다수의 한족을 다스리는 체제였기 때문에 작은 혼란도 국가의 존망을 좌지우지할 위기로 비화될 가능성이 많은 나라였다.

기황후는 남편 순제에게 황제 자리에서 물러나 장성한 자신의 아들에게 황위를 물려 줄 것을 종용했다. 순제는 이를 거부했고 그 와중에 황태자 반대파와 지지파 사이에 내전이 일어났다. 반 황태자파의 지도자 볼루드 테무르가 1364년 수도 대도를 점령했을 때 기황후는 포로로 잡히기도 했다. 이 내전은 결국 황태자 지지자인 코케 테무르(擴廓 帖木爾)가 1365년 대도를 회복하면서 수습되었다.

기황후는 1365년 제1황후이던 바얀 후투그가 죽은 후 제2황후라는 딱지를 떼고 원나라의 제1황후로올라섰다. 그러나 그녀의 영광은 오래가지 못했다. 원나라 중앙 정부의 정치가 문란해지자 그동안 몽고족의 지배에 반감을 품었던 한족들이 홍건적이 되어 일어나면서 원나라는 수습할 수 없는 혼란으로 치닫게 되었다.

1368년 마침내 주원장이 이끄는 명나라 대군이 원나라 수도 대로를 점령하자 원나라 왕실은 피난길에 올랐다. 기황후도 이때 남편 순제와 아들 아이유시리다라와 함께 피난길에 올랐다. 피난을 떠나면서 기황후는 구원병을 보내주지 않는 고려를 원망했다고 한다. 원나라 왕실은 응창부로 수도를 옮겼다가 카라코룸까지 피난했다. 피난 와중에 순제는 죽고 그 자리를 기황후의 아들 아이유시리다라가 이어 북원의 소종이 되었다. 대도를 떠나 응창부까지 가는 동안의 기황후에 대한 기록은 있지만 기황후의 최후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우리나라 연천에 기황후의 능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조선시대 기록인 [동국여지지]에 전하고 있다. 능이 있었다고 전하는 지역에 고려시대 양식의 기와가 많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이 능을 둘러싼 담장의 기와였다는 것이다. 어쩌면 기황후는 응천부에서 카라코룸으로 가지 않고 고려로 돌아와 여생을 보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때 동아시아와 유럽을 호령했던 대제국 원나라의 황후였던 고려 여인 기황후는 오랫동안 원나라 망국의 한 원인으로 평가되면서 우리나라에는 거의 소개되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기황후라는 존재가 14세기 말 고려와 원나라의 역사에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상당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다.

김정미 이미지
김정미 | 시나리오 작가, 역사 저술가
글쓴이 김정미씨는 대학원에서 역사를 전공, 역사적 사건과 인물에 관심이 많다. 역사 속 인물들의 면면에서 영화적 캐릭터를 발견하고 시나리오를 옮기는 작업을 하는 한편 역사관련 글쓰기도 병행하고 있다. [역사를 이끈 아름다운 여인들], [천추태후-잔혹하고 은밀한 왕실 불륜사], [어린이 역사 인물사전], [세계사 여자를 만나다], [그들은 어떻게 세상을 얻었는가] 등의 책을 썼다.
그림
장선환 | 화가, 일러스트레이터
서울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학과와 동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화가와 그림책 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현재 경희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http://www.fartzzang.com

 

좋고 나쁨을 떠나 궁에서 살아남으려면 권력이 필요했고, 권력을 잡다 보니 쉽게 그 권력을 이용만 하는 자가 늘어 났을테고, 궁안에서는 궁외의 상황을 알리 없을 테고, 역사는 쓰는 사람 마음일 테고, 피난 갈때 지원군 안보내준게 희안해서 고려갔다가 고려에 잡혀서 못왔을 수도 있을테고. 가봐서 확인 하니 기황후 친척들이 개판쳐논거 알게되서 지 아들 볼 면목도 없을테고.. 어차피 한인간이 할수 있는 한계가 있음.. 잘 고려하고 인물에 대해서 평가하시길... 그냥 생존을 위해서 충실했던 사람이고 뛰어난 사람임에는 틀림없는듯

아무리 정치적인 이유였다 해도 내가 공물로 바쳐져 내 인생 자체가 내동대이 쳐졌다면..내가 다시는 고향으로 갈수없게 됐다면. 어떻게 인정 이란걸 베풀수 있겠는가? 내가 그릇이 좁은 사람이 그런지 모르겠지만 기황후 그녀 인생하나로 본다면 그렇게 못된 여자라고 만은 생각지 않는다.

자신을 노예로 혹은 성노리개로 팔아넘긴 나라라면 솔직히 나같아도 애국심보다는 복수심이 더 클것같긴함..공녀로 끌려갈때 못볼꼴 정말 많이 볼것이고 당했을거고... 오히려 죄책감은 나라가 그 개인에게 가져야하는것일지도.. 개인이 모여 국가가 되고 역사가 되지만 그 개인의 인생과 개인의 역사를..겪어보지않는이상 그 개인에게 뭐라하고싶지는않다...

저 당시 고려조정에서는 자진해서 고려를 원나라의 일개 성으로 바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원나라에서 고려출신 공녀가 황후가 되면서 그러한 논의는 없어졌다고 하네요. 만약 기황후라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고려가 원나라의 복속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고 후에 등장하는 명나라도 원의 영토를 이어받으면서 우리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소유권을 주장했을겁니다. 기황후가 비록 친원파들의 거두임에는 분명하지만 전 그녀의 존재로 인해 지금의 우리나라가 있을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또한 한명의 개인의 관점에서 봤을때 힘없는 고려에서 태어나 공녀로 끌려가 인고의 세월을 버티고 황후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해본다면 그녀가 모국인 고려에 대해서 마냥 애국적인 생각만 가지고 있을거라는건 무리가 있다고도 생각됩니다. 기황후라는 인물에 대해서 마냥 비난만 할게 아니라 그녀가 처했던 시대적 현실도 함께 고려하면서 공과 과를 생각해 보아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드라마로 관심을 가지고 보왔는데, 국가적인 위인은 아니더라도, 망해가는 나라로 인해 잡혀간 한 여성이 황후 자리 까지 올라가는 것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이드네요. 그런 그녀가 고려와 손을 잡고 더욱 강력한 정치를 펼쳤다면, 좋았겠지만, 몰락해 가는 나라로인해 자신이 팔려갔는데, 좋게 생각할 수가 있을까요? 그의 집안들이 고려에서 악질적인 행실은 하는 것은 그 당시 고려가 얼마나 무능한지를 보여주는 확실하다고 봅니다. 하여간 대단하네요...

기황후의 긍정과 부정은 주관적인 입장이 아닌 상황과 정세를 보고 판단해야 합니다! 고려가 힘이 없어 공녀들이 끌려가는 비참한 상황속에서 기황후가 운명을 극복했으니 내정 간섭 받았던 일도 일견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닐까요? 나라가 지켜주지 못한 백성이 스스로 권력자가 되다~!

<건국의 정치> 하는 책을 참고하자면 기황후는 고려의 내정개혁을 적극장려하고, 친척들에게 전언을 보내 '고려가 개혁을 하는데에 방해되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전언합니다. 기철일가가 그 말을 듣지 않고 정권의 주도권늘 놓지않다가 결국 살해 당하죠. 기황후가 이것을 정도가 지나쳤다고 생각해서 고려왕을 폐위하고 벌하려 하였지만 실제로는 원순제와 함께 고려개혁을 적극 권장하던 입장이었습니다. 또 공민왕 초기의 일련의 개혁정책도 기황후대에 고려인이 원조정에 집권하면서 다져놓는 기반이 어느 정도 기여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역사는 승자의편 기황후 그누구도 하지못한 대제국 몽골의 황후인것응 누구도 부인할수없지 않은가 무능한 고려의 황실은 무엇을 했단말인가 자기나라 뱃성도 못지킨 정권이 아니든가 기황후 부정적인면도 인지만 긍정적인면도 있으리라 그누가 대제국 몽골을 다스렸는가 그래도 위대한 고려여인이 아니든가

어떤 위인도 권력을 잡은후 모든행동이 옳진않았지... 정철선생도 위인이라하지만 엄청난사람들을 죽였고... 다 권력을 잡으려는 것들... 딴건 모르겠지만 기황후가 황후가되서 공녀를 폐지하고 고려의 지위가 원나라에서 좀 높아진것만 봐도 너무부정적으로만볼인물은아닌거같은데..

저초상화 기황후 아니에요! http://m.cyworld.nate.com/blog/postView.php?home_id=a1619396&post_seq=3254178 빨리수정바랍니다

고려가 기황후를 비롯한 공녀들을 팔아먹은 폐악은? 당신은 우리나라가 당신을 노예로 팔아먹어도 애국심을 가질 수 있습니까? 말이 궁녀지 실제로는 노예와 같아서 아무도 궁녀가 되질 않으려 하자 공녀를 원했고 고려는 돈 받고 팔았습니다. 이미 고려 조정은 썩을 대로 썩어 있었어요.

고려 공민왕은 1356년 원나라가 약화되는 틈을 타서 기철을 비롯한 친원파 권겸 등을 멸하였다. 1364년 이로인해 기황후는 공민왕을 폐위하고 타시 테무르(충선왕(공민왕의 조부)의 서자(庶子) 셋째 아들 덕흥군.공민왕의 삼촌)를 고려의 왕으로 세우려 고려로 1만의 군사를 보냈지만, 압록강을 건너던 중 고려군에게 폐퇴하게 된다. 공민왕은 10년간 원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었던 인물이다. 원이 고려왕을 내정할때의 기준에 들지 않은것을 기철이 천거하여 고려왕이 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기황후는 공민왕에 의해 참살된것에 더욱 격분한 나머지 1만의 군사를 고려인 최윤장수 에게 맏겨 보내서 공민왕을 폐위시키기 위한 출정이었던 것이다

과연 고려를 버린 위인 일까요? 버릴려고 했다면 고려를 한개의 성으로 합치는데 왜 반대 했을까요? 정말 고려를 버리고 원만을 위해 살려고 했다면 왜 공녀 없앴을까요? 고려침략은 가족영향이 컸겠죠. 고려 망치러 침략한것도 아닐테구요. 공녀 반대마져 완강히 이겨낸것만해도 원나라 쥐락펴락 한게 느껴지는군요. 최고의 권력을 가지고도 모국을 버리지 못한 소심한 부분도 있는것 같은데 나쁘게만 보는건 아닌것 같네요. 드라마로 왜곡 이라고들 하시는데 드라마덕에 이렇게 알아가는게 더 도움 주는것 같은데 드라마욕들만 하시는분 많네요. 오히려 드라마가 여럿 위인 알리미 역활 하는거 아닌가요..... 사극드라마 보면 위인 검색해보는건 기본인데 왜곡 쪽으로 모는것도 아닌것 같습니다만....

기황후 관련기록엔 태어난 기록이 없다고 했는데 궁동은 고려여인으로 원나라 황후가 된 중국의 원나라 황제(순제)의 황후 기씨가 탄생한 곳이라 전해져 온다. 충북 진천군 이월면 궁동마을에 전해지는 이야기들이다. 무형문화재로 명맥 잇는 얼씨구 좋을시고 궁동마을 노래가 있다. “옥녀봉 기를 받아 옥녀처럼 어여쁘고도 기골이 장대했다던 기씨가문 그처녀 원나라 황후가 됐네 얼씨구 좋을시고 까치가 중매했든 瑞氣따라와 맺어졌든 이왕지사 원나라 황제 마음에 들었으면 황제님 마음을 녹여 고려를 도와주었어야지 세상에 제 힘만으로 성공한 사람 있다던가 기황후 기른 것은 고려의 정기였으련만 조국을 착취의 대상 그것으로만 여기다니 더 많이 긁어모아 천하를 살것인가 어차피 권력이란 물 흐르듯 하는 것을 차라리 덕이나 쌓았다면 멸문지화는 면했겠지 修身齊家治國平天下 남자에게만 해당될까 과욕에 눈먼 오라비들 나라섬기게 했더라면 지금도 이마을에서 궁전 구경할 텐데“ 기황후에게 반한 원나라 황제 순제는 이 마을에 거대한 궁전까지 세워 주어서 마을 이름이 宮洞(궁골)이 되었다는 유래가 있다 .

 

기황후

[ 奇皇后 ]

요약
중국 원 나라 혜종의 황후. 고려 출신으로 공녀(貢女)로 원 나라로 보내졌다가 황후가 되었으며 북원(北元) 소종(昭宗)의 생모이다.
  • 출생-사망

    ? ~ ?

  • 본관

    행주

  • 별칭

    올제이 후투그(完者忽都, Öljei Khutugh), 보현숙성황후 (普顯淑聖皇后)

  • 국적

    고려, 중국 원(元)

  • 활동분야

    정치

고려 출신으로 몽골명은 올제이 후투그(完者忽都, Öljei Khutugh), 시호(諡號)는 보현숙성황후(普顯淑聖皇后)이다. 본관은 행주(幸州)이며, 기자오(奇子敖)의 딸이다. 공녀(貢女)로 원 나라 조정으로 보내져, 1333년 고려 출신의 환관(宦官) 고용보(高龍普)의 추천으로 궁녀(宮女)가 되었다. 혜종(惠宗, 順帝라고도 함. Toghun Temür, 재위 1333~1368)의 총애를 받아, 1338년 황태자 아유르시리다라[愛猷識里達獵,  Biligtü Khan Ayursiridara, 북원의 昭宗, 재위 1370~1378]를 낳았다.

혜종(惠宗)은 기씨(奇氏)를 총애하여 1335년 킵차크(Kypchaks) 출신의 다나슈리[答納失里, Danashri] 황후를 일족의 반란 사건을 이유로 폐위시키고 기씨를 황후로 삼으려 하였다. 하지만 조정의 실권자인 바얀(Bayan, 伯顏, ?~1340년)이 이를 반대하자, 1337년 옹기라트(Onggirat) 부족 출신의 바얀 후투그(伯颜忽都, Bayan Khutugh)를 황후로 삼았다. 그러나 1338년 기씨가 아유르시리다라[愛猷識里達獵]를 낳자, 그 이듬해에 그녀를 제2황후로 책봉했다.

기황후는 혜종의 총애를 배경으로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녀는 재정과 번위(番衛)를 맡아보는 황후 직속 기관인 휘정원(徽政院)을 자정원(資政院)으로 개편하여 고용보를 초대 자정원사(資政院使)로 삼았다. 그리고 1353년 자신의 아들인 아유르시리다라[愛猷識里達獵]를 황태자의 자리에 오르게 하였으며, 동향(同鄕) 출신의 환관 박불화(朴不花)를 군사 책임자인 추밀원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 삼아 군사권도 장악하였다. 이렇듯 기황후가 원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면서 원(元) 나라에서는 고려의 풍속이 크게 유행하였다.

한편, 고려에서는 기황후의 오빠인 기철(奇轍, ?~1356)을 필두로 한 기씨(奇氏) 일족이 기황후의 배경을 믿고 권세를 휘두르다 1356년 공민왕의 반원 개혁정책으로 주살되었다. 그러자 기황후는 공민왕을 폐하고 원 나라에 있던 충숙왕의 아우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삼기 위해 1364년 고려 출신인 최유(崔濡)로 하여금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고려를 공격케 하였다. 그러나 최유는 고려의 명장인 최영(崔瑩)에게 대패하였다.

이 무렵 원 나라 조정에서는 황태자 지지파와 반대파 사이에 정쟁(政爭)이 격화되었다. 기황후는 혜종의 양위를 받아 황태자를 황위에 앉히려 하였는데, 1364년 반(反) 황태자파 장군인 볼라드 테무르[孛羅帖木児, Bolad Temür, ?~1365]는 도성인 대도(大都, 지금의 베이징)를 점령해 기황후를 사로잡았다. 황태자는 타이위안[太原]에 주둔하고 있던 코케 테무르[擴廓帖木爾, Köke Temür, ?~1375]에게 피신하였고, 이듬해인 1365년 대도를 공격하여 볼라드 테무르[孛羅帖木児]를 죽였다.

1365년 제1황후인 바얀 후투그(伯颜忽都, Bayan Khutugh)가 죽자 기황후가 정후(正后)가 되었으나, 황태자의 황위 계승을 둘러싼 정쟁으로 원의 국력은 급격히 쇠퇴하였고, 각지의 반란 세력이 크게 성장하였다. 결국 1368년 주원장(朱元璋)은 반란 세력을 통일하여 명(明) 나라를 세우고 북벌(北伐)을 단행하여 대도(大都)를 점령했고, 이로써 원(元)은 멸망하였다. 혜종과 황태자 아유르시리다라[愛猷識里達獵] 등은 상도(上都, 지금의 內蒙古自治區 多倫縣)로 피신하였다가, 이듬해 다시 응창부(應昌府, 지금의 内蒙古 克什克腾旗)로 퇴각하였다. 1370년 혜종이 죽자 아유르시리다라[愛猷識里達獵]가 북원(北元) 소종(昭宗)으로 즉위하였다. 몽골 지역으로 패퇴한 뒤 기황후의 행적은 기록이 전해지지 않는다.

한편, 한국의 경기도 연천군 상리(上里)에는 기황후의 묘로 알려진 고분(古墳)이 있다. 실제 기황후의 묘인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1656년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이 편찬한 <동국여지지(東國與地志)>에도 ‘속전원순제기황후묘(俗傳元順帝奇皇后墓)’라며 이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어, 조선 후기 이전부터 이에 관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기황후 [奇皇后] (두산백과, 두산백과)

 

저 당시 고려조정에서는 자진해서 고려를 원나라의 일개 성으로 바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원나라에서 고려출신 공녀가 황후가 되면서 그러한 논의는 없어졌다고 하네요. 만약 기황후라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고려가 원나라의 복속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고 후에 등장하는 명나라도 원의 영토를 이어받으면서 우리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소유권을 주장했을겁니다. 기황후가 비록 친원파들의 거두임에는 분명하지만 전 그녀의 존재로 인해 지금의 우리나라가 있을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또한 한명의 개인의 관점에서 봤을때 힘없는 고려에서 태어나 공녀로 끌려가 인고의 세월을 버티고 황후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생각해본다면 그녀가 모국인 고려에 대해서 마냥 애국적인 생각만 가지고 있을거라는건 무리가 있다고도 생각됩니다. 기황후라는 인물에 대해서 마냥 비난만 할게 아니라 그녀가 처했던 시대적 현실도 함께 고려하면서 공과 과를 생각해 보아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기황후 [奇皇后] (두산백과, 두산백과)

 

 

기황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기황후(중국어: 奇皇后, 1315년경 - 1369년)는 원나라 원 혜종황후였다. 몽골명은 솔롱고 올제이 후투그(ᠥᠯᠽᠢᠶᠺᠣᠲᠣᠭ, 한자肅良合 完者 忽都 숙량합 완자 홀도)이며, 존호는 보현숙성황후(普顯淑聖皇后)이다. 고려 출신의 여자로, 고려후기의 무신 기홍영의 증손녀이자 고려 고종의 사위인 기온의 종손녀였다. 원나라에 바쳐지는 공녀 중의 한사람이었다고 추정된다. [1] 고려 출신 환관 고용보(高龍普)의 주선으로 황궁의 궁녀가 되었다가 원 혜종의 총애를 얻어 귀빈으로 책봉되고, 훗날 혜종의 뒤를 이어 황제로 등극하는 아들 아유르시리다르를 낳았다. 정적관계였던 제1 황후 타나실리가 역모죄로 사사되자 외국인은 정궁으로 삼을 수 없다는 재상 메르키트 바얀의 반대를 견뎌내고 제2 황후가 되었고, 1365년에 제1황후인 곤기라트 출신의 바얀 후투그 사망하자 제1 황후로 등극하였다. 이후 아들 아유르시리다르를 황태자로 옹립하였고, 휘정원을 자정원(資政院)으로 개편해 심복인 고용보를 초대 자정원사(資政院使)에 임명한 뒤 고려인 출신 환관과 고려인 출신 관리 및 일부 몽골관료들을 포진시켜 자신의 친위대로 삼았다.

친정인 기씨 일족을 통해 고려 왕실에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나 얼마 못 가 사라졌다. 공민왕에 의해 친정오빠 기철 등이 살해되자 원 혜종을 사주하여 충선왕의 서자 덕흥군을 왕으로 앉히고 고려를 침공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태자인 아유르시리다르의 비(妃) 역시 고려여인으로 정하여 권씨(權氏)를 태자비로 삼았다.

생애[편집]

출생과 가계[편집]

본관은 행주이다. 기순우의 후손으로, 그녀의 부친은 사후 영안왕[2]에 추증된 기자오(奇子敖)이고, 어머니는 전서 이행검의 딸 이씨이다. 오빠로는 기식(奇軾), 기철(奇轍), 기원(奇轅), 기주(奇輈), 기륜(奇輪) 등이 있었다. 또한, 그녀는 원나라의 황제인 혜종의 배우자이며, 북원의 아유르시리다르 빌레그트 칸의 어머니이다. 몽골명은 올제이 후투그(Öljei Khutugh, 完者 忽都)였다.

종고조부 기윤위는 희종 때인 1211년 왕준명, 우승경 등이 최충헌을 제거하려 할 때 최충헌을 구출하였으며, 이후 최충헌의 측근으로 활동하였다. 고조부 기윤숙은 상장군과 중서,문하성의 양성의 관직을 지내고 문하시랑 평장사에 이르렀으며, 증조부 기홍영은 좌우위보승낭장을 지내고 사후 은청광록대부 상서좌복야에 추증되었다. 종증조부 기홍수문하시랑을 역임했고, 기홍영의 아들이자 할아버지 기관의 형제였던 기온(奇蘊)은 고려 고종의 부마였다.

첫째 기식은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기철이 사실상의 장남이었다.[3]

고려의 공녀 차출[편집]

원나라에서는 해마다 고려공녀를 차출해갔다. 그런데 공녀의 명단에 그가 있었다.

목은 이색은 "공녀로 선발되면 우물에 빠져 죽는 사람도 있고, 목을 매어 죽는 사람도 있다"고 말할 정도로 비참한 상황이었다.[4] 그러나 그녀는 침착했고 오히려 걱정하는 자신의 친정 부모를 위로하였다.

자원한 공녀길은 아니지만 이왕 뽑힌 이상, 이를 새로운 인생의 계기로 삼겠다고 결심했다. 세계를 지배하는 원나라이니 만큼 더 많은 기회가 있으리라고 판단한 것이다.[4] 공녀로 원나라에 가게 되어 대도의 황궁에 도착하였다.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그는 원나라생활 중 부처에게 기도하였다. 이때 고려인 출신 내시 고용보(高龍普)를 만나게 된다.

원 황실에 포진한 고려 출신 환관들의 대표였던 고용보는 기씨 소녀같은 인물이 꼭 필요했다. 기씨 소녀라면 황제 혜종을 주무를 수 있으리라고 판단하고 그녀를 적극 추천하여 혜종의 다과를 시봉하는 궁녀로 만들었다.[4]

후궁 생활[편집]

원대의 대도

1333년(충숙왕 복위 2) 고려인 내시 고용보의 추천으로 황태자궁에 배치되고, 혜종의 눈에 띄게 되어 승은을 입게 된다.

명종의 장자로서 황태자였던 토곤 테무르(혜종)는 1330년 7월 한때 원 황실 내부의 싸움에 패배해 인천 서쪽 대청도에 유배된 적이 있었다. 1년 5개월을 대청도에서 보낸 그는 원나라로 돌아가 2년 후에 황제에 즉위한다. 동아시아에서 동유럽에 이르는 세계제국의 후계자에서 고려의 작은 섬에 유배되었던 기억은 어려운 시절에 대한 향수와 어우러져 기씨에 대한 호감으로 작용했다.[4] 원 혜종의 이러한 호감은 기씨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기씨는 혜종을 통해 자기 뜻을 펼치기로 마음먹었다.[4]

타나실리는 채찍으로 기씨를 매질할 정도로 질투가 심했으나, 기씨는 좌절하지 않았다.[4] 그녀는 혜종을 내세워 타나실리와 싸웠다. 타나실리의 친정에 불만을 갖고 있던 혜종은 기씨의 의도대로 1335년 승상 바얀과 손잡고 타나실리의 친정을 황제역모사건에 연루시켜 제거했다.[4] 그리고 타나실리에게 사약을 내렸다.[4]

황후와 황자 출산[편집]

1339년 황자 아유르시리다르를 낳았다. 이전의 황후 타나실리가 당기세의 반란으로 1340년 폐위된 후 기씨를 황후로 삼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실권자 메르키트 바얀이 그것을 반대하였다. 그러자 그녀는 원 혜종을 조종해 바얀의 축출을 기도했고, 황제를 찾아가 통곡하며 바얀과 궁궐내 그의 심복들이 자신을 괴롭힌다고 주장하였다. 기씨의 하소연을 들은 혜종은 자신의 스승 사라판과 손잡고 바얀을 탄핵, 축출하는데 성공했다.

1340년 2월 메르키트 바얀(伯顔) 세력이 숙청된 뒤 4월 드디어 제2황후로 책봉되었다. 그녀가 제2황후로 되면서 친정아버지와 할아버지, 증조부에게 왕(王)의 작위가 추증된다. 아버지 기자오(奇子敖)는 영안왕(榮安王) 또는 경왕(敬王)이고, 할아버지 기관(奇琯)의 시호는 미상이고, 증조부 기홍영(奇洪潁)은 인왕(仁王)에 추증되었다.

원 혜종은 특별히 한림학사를 보내 기자오의 묘비를 지어주었다. 어머니는 영안왕 대부인(大夫人) 작위를 받았고 기철은 원나라의 관직과 함께 고려의 정승으로 임명됐다. 더불어 기철은 덕성부원군, 동생 기원은 덕양군에 봉해졌다.[3] 기씨의 성공에는 고려 출신들을 주축으로 철저하게 현지화 전략을 펼친 것이 주효했다.[4] '원사(元史)'는 그녀가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먼저 칭기즈 칸을 모신 태묘(太廟)에 바친 후에야 자신이 먹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현지화 전략으로 명분을 축적하면서 원의 황실을 장악했던 것이다.[4]

황후가 된 뒤 곧 반대세력을 몰아내고 휘정원을 자정원(資政院)으로 이름을 바꾸고 여기에 고려인 출신 환관과 고려 유민, 고려인 유학생들을 등용하여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며, 이를 배경으로 자신의 친위대로 활용하게 된다. 그녀는 흥성궁(興聖宮:현 베이징 중남해 자리)에 거주하면서 황후부속기관인 휘정원을 자정원(資政院)으로 개편해 심복인 고용보를 초대 자정원사(資政院使)로 삼았다.[4] 자정원은 기황후를 추종하는 고려 출신 환관들은 물론 고려인 출신 관료들, 몽골 출신 고위관리들도 가담해 자정원당'이라는 강력한 정치세력을 형성했다.[4]

선정과 대규모의 아사 사건[편집]

부군 원 혜종

그녀는 고려 출신 환관 박불화(朴不花)를 이용하여 황제 혜종에게 아유르시리다르를 황태자로 책봉하도록 압박하였고, 1353년, 마침내 아유르시리다르는 황태자가 되었다. 또한 그녀는 고려 출신 환관 박불화를 군사 통솔의 최고책임자인 추밀원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 만들어 군사권까지 장악했다.[4]

공녀였던 그녀는 힘없는 백성들의 고초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원사 후비열전’은 1358년 북경에 큰 기근이 들자 기황후가 관청에 명해 죽을 쑤어주고, 자정원에서는 금은 포백·곡식 등을 내어 십여 만 명에 달하는 아사자의 장례를 치러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대규모 아사자가 발생하는 것은 원제국의 위기였다.[4] 그 때, 원나라 내부에서는 황태자의 지지자와 반대자 사이에 내전이 있었고, 반 황태자파의 지도자 볼루드 테무르는 결국 1364년 수도 대도를 점령하였다. 아유르시리다르는 황태자 지지자인 코케 테무르(擴廓 帖木爾)에게 달아났지만 기황후는 볼루드 테무르의 포로가 되었다.

고려와의 갈등[편집]

당시 원나라는 징기스칸의 확장정책으로 징기스칸의 병력이 닫는 곳은 모두 징기스칸의 휘하에 놓이게 되었다. 하지만, 고려는 30년간의 항쟁으로 직접적인 합병은 면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기황후는 대원제국의 제2황후를 거쳐 황태자를 낳고 제1황후가 된 것이다. 기황후가 황후가 되기전 원나라는 고려의 조정을 마음대로 조정하였다. 원나라의 승인이 없이는 고려 왕도 되지못한 것이 당시의 상황이었다. 30년간의 항쟁으로 합병은 면했지만 고려는 원나라의 속국이었다.


그러한 관계로 고려 조정에서는 고려 스스로 원나라의 1개성으로 들어가자는 논의가 활발했던 때가 기황후가 황후가 되기전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기황후가 원의 황후가 되면서 고려조정에서 스스로 원의 속국. 1개의 성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논의는 중단된 것이다. 그것은 기황후가 황후가 되면서 고려침략의 두려움이 해소 되었기 때문인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는 기황후가 고려의 자주권을 보장해준 역할이 된 것이었다.


황후가 된후, 고려 조정에서는 기황후의 오빠 기철을 덕성부원군에 봉하게 된다. 이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고려조정은 어떻게든 대원제국의 침략을 받지않고 안전하게 살아가기 위한 방편으로 대원제국 황후인 기황후의 오빠 기철을 등에 업고 고려왕실의 안정을 꾀하고자 먼저 작위를 내린것이 덕성부원군 이라는 벼슬이었다. 또 원나라는 기철에게 정동행성의 수장으로 임명하게 된다. 이렇게 권력이 기철에게 집중되면서 권겸을 비롯한 많은 당시의 권세가들이 기철의 수중에 들어간다. 이것은 고려스스로 왕권을 약화시키는 단초를 제공한 것이 되고만다. 이러한 것은 당시의 고려왕실이 원의 조정을 받는 허수아비 왕실인 상황에서 어쩔수없는 선택이었다. 이로 인해, 기철을 비롯한 친원파. 당시 주류층의 권세가들은 황후의 세에 힘입어 권세를 누리게된다.


이에 고려 공민왕1356년 원나라가 약화되는 틈을 타서 기철을 비롯한 친원파 권겸 등을 멸하였다. 1364년 이로인해 기황후는 공민왕을 폐위하고 타시 테무르(충선왕(공민왕의 조부)의 서자(庶子) 셋째 아들 덕흥군.공민왕의 삼촌)를 고려의 왕으로 세우려 고려로 1만의 군사를 보냈지만, 압록강을 건너던 중 고려군에게 폐퇴하게 된다. 공민왕은 10년간 원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었던 인물이다. 원이 고려왕을 내정할때의 기준에 들지 않은것을 기철이 천거하여 고려왕이 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기황후는 공민왕에 의해 참살된것에 더욱 격분한 나머지 1만의 군사를 고려인 최윤장수 에게 맏겨 보내서 공민왕을 폐위시키기 위한 출정이었던 것이다.


기황후는 당시 집안의 멸족 소식을 접하고 극도로 분노하였다.[3] 그녀는 원 혜종을 설득하여 공민왕에 대한 복수를 요구하였고, 1364년(공민왕 13년) 원나라 황제는 기황후의 뜻에 따라 '공민왕을 폐하고 충선왕의 셋째 아들 덕흥군을 왕으로 책봉한다'고 했다.[3] 그러나 자신의 명이 먹혀들지 않자 기황후는 덕흥군에게 원나라 군사 1만명을 주어 고려 정벌을 명한다. 이들은 평안도 지방까지 진출하였으나 최영·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대에 패한다.[3]

제1황후 책봉과 최후[편집]

1365년, 제1 황후인 곤기라트 출신의 바얀 후투그가 죽은 후에 기황후는 제1황후가 되었다. 이는 이민족 출신을 황후로 책봉하지 않는 원나라의 전례를 깨뜨리고 정후가 된 것이었다.

하늘 아래 사람의 도리로 부부만한 것이 없다. 황후는 천하의 어머니로 나라를 다스리는 황제를 내조하는 것 또한 고금의 도리다. 이제 그대 솔롱고씨(肅良合氏)[5]는 천하의 어머니로 공경스럽고도 근검절약하는 행동으로 천하를 이끌고 황가를 빛냈으니, 이제 옥채옥보(玉채玉寶)를 내려 황후로 삼노니 더욱 힘써 짐을 보좌하여 영원한 복이 되도록 하라.

원 혜종의 교지

기황후는 고려국 금강산 장안사에 거액의 내탕금(內帑金: 판공비)을 내어 대대적인 불사를 일으키고 많은 불상을 봉안하였다.[6] 그녀는 특별히 며느리도 고려 출신 여성으로 정하여 권씨(權氏)를 황태자비로 삼게 했다.

1368년, 주원장의 25만 명나라 대군이 대도를 점령하자 북원으로 전락한 원나라는 응창부(應昌府)로 천도를 하였다. 기황후도 이때 응창으로 이동하였다. 그 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응창은 내몽골 자치구에 있는 타알 호수(Lake Taal)에 위치했었다.

1368년 응창에서 포로가 되고 1369년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1370년, 남편인 혜종이 죽고 그의 아들 아유르시리다르가 황좌를 계승한다. 그러나 아들 아유르시리다르는 후사를 남기지 못했고 그녀가 친히 간택함 며느리 권황후는 딸만 1명 낳았다. 이로써 그녀의 후손은 끊어졌다.

사후[편집]

한국의 경기도 연천군 상리(上里)에는 기황후의 묘로 알려진 고분(古墳)이 있다.그녀의 시신은 조선으로 운구되어 경기도 연천현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의 시신이 언제 조선에 운구되었는지는 불확실하다. 금강산 장안사에는 그녀의 위패가 봉안되어 넋을 기리기도 했다.

경기도 연천군에 안장된 뒤 그녀를 제향하는 큰 재실이 있어 그 주변은 재궁동(齋宮洞) 또는 쟁골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현재 경기도 연천군에는 연천읍 상1리에 기황후 묘가 존재하고 있으나, 한국전쟁으로 비석과 석물을 잃어버렸고 비지정문화재라 하여 보존처리되지 않고 있다.

가족 관계[편집]

  • 고조부 : 기윤숙
  • 종증조부 : 기홍수(奇洪壽, 1148년 ~ 1209년)
  • 증조부 : 기홍영(奇洪潁)
  • 종조부 : 기온(奇蘊)
  • 조부 : 기관(奇琯)
  • 친정아버지 기자오, 영안왕에 추증
  • 친정어머니 영안왕후 이씨, 전서 이행검(李幸儉)의 딸
    • 친정오빠 기식(奇軾)
    • 친정오빠 기철(奇轍)
    • 친정오빠 기원(奇轅)
    • 친정오빠 기주(奇輈)
    • 친정오빠 기륜(奇輪)
  • 남편 : 원 혜종

 

 

[다시 읽는 여인열전] 대제국을 지배한 여자 기황후

 (조선일보 2002/04/02 18:53)

공녀에서 元황후로…현지화 전략으로 ‘운명 개척’

 

[다시 읽는 여인열전] 대제국을 지배한 여자 기황후

훗날 세계 제국의 지배자로 군림한 기황후의 출발은 절망뿐이었다. 고려인 기자오(奇子敖)의 막내딸이 원나라에 바쳐지는 공녀(貢女)로 결정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녀의 비참한 인생길을 동정했다. 목은 이색이 “공녀로 선발되면 우물에 빠져 죽는 사람도 있고, 목을 매어 죽는 사람도 있다”고 말할 정도로 비참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기씨 소녀는 달랐다. 비록 자원한 공녀길은 아니지만 이왕 뽑힌 이상, 이를 새로운 인생의 계기로 삼겠다고 결심했다. 세계를 지배하는 원나라이니 만큼 더 많은 기회가 있으리라고 판단한 것이다. 원 황실에 포진한 고려 출신 환관들의 대표였던 고용보는 기씨 소녀같은 인물이 꼭 필요했다. 기씨 소녀라면 황제 순제(1320~1370)를 주무를 수 있으리라고 판단하고 그녀를 순제의 다과를 시봉하는 궁녀로 만들었다.

▲ 원제국에 끌려간 기황후가 거주했던 흥성궁 자리.현재 베이징 중난하이(中南海)로 중국 공산당 최고 인사들이 살고 있다./조선일보 DB사진

[다시 읽는 여인열전] 대제국을 지배한 여자 기황후

‘원사(元史) 후비열전’이 “순제를 모시면서 비(妃:기씨)의 천성이 총명해 갈수록 총애를 받았다”고 기록한 것처럼 그녀는 곧 순제를 사로잡았다. 여기에는 고려에 대한 순제의 남다른 추억도 작용했다. 명종의 장자로서 황태자였던 토곤 테무르(순제)는 1330년 7월 원 황실 내부의 싸움에 패배해 인천 서쪽 대청도에 유배된 적이 있었다. 1년 5개월을 대청도에서 보낸 그는 원나라로 돌아가 2년 후에 황제에 즉위한다. 동아시아에서 동유럽에 이르는 세계제국의 후계자에서 고려의 작은 섬에 유배되었던 기억은 어려운 시절에 대한 향수와 어우러져 기씨에 대한 호감으로 작용했다.

기씨는 순제를 통해 자기 뜻을 펼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기씨는 곧 큰 시련에 부딪쳤다. 다름 아닌 황후 타나시리의 질투 때문이었다. 타나시리는 채찍으로 기씨를 매질할 정도로 질투가 심했으나, 기씨는 좌절하지 않았다. 그녀는 순제를 내세워 타나시리와 싸웠다. 타나시리의 친정에 불만을 갖고 있던 순제는 기씨의 의도대로 1335년 승상 빠앤과 손잡고 타나시리의 친정을 황제역모사건에 연루시켜 제거했다. 그리고 타나시리에게 사약을 내렸다.

타나시리를 제거하는데 성공한 기씨는 순제를 대주주로 한 원제국의 CEO 자리를 차지하려 했다. 순제도 그녀가 황후가 되는 것을 지지했으나 원 제국의 또 다른 대주주였던 빠앤이 적극 반대했다. 관직 이름만 246자에 달했던 빠앤은 사실상 순제를 능가하는 실력자였다. 고려의 공녀 출신이 황후가 되겠다는 구상은 원나라의 지배구조상 무리였다. 몽골족은 태조 징기스칸 이래 옹기라트 가문에서 황후를 맞이하는 전통이 있었다. 이에 따라 순제 5년(1337) 황실 전통에 따라 옹기라트 가문의 빠앤후두가 황후가 되었으나 기씨는 좌절하지 않았다.

그녀는 빠앤까지 축출하기로 결심했다. 기씨는 1339년 순제의 아들 아유시리다라를 낳아 입지가 더욱 확고해졌다. 기씨의 조종을 받은 순제는 스승 샤라빤과 손잡고 빠앤을 축출하는데 성공했다. 그녀는 드디어 세계를 지배하는 원제국의 제2황후가 되었다. 기씨의 성공에는 고려 출신들을 주축으로 철저하게 현지화 전략을 펼친 것이 주효했다. ‘원사(元史)’는 그녀가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먼저 징기스칸을 모신 태묘(太廟)에 바친 후에야 자신이 먹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현지화 전략으로 명분을 축적하면서 원의 황실을 장악했던 것이다.

제1황후가 있었지만 자기 능력으로 황후가 된 기씨의 위세는 제1황후를 능가했다. 그녀는 흥성궁(興聖宮:현 베이징 중남해 자리)에 거주하면서 황후부속기관인 휘정원을 자정원(資政院)으로 개편해 심복인 고용보를 초대 자정원사(資政院使)로 삼았다. 자정원은 기황후를 추종하는 고려 출신 환관들은 물론 몽골 출신 고위관리들도 가담해 ‘자정원당’이라는 강력한 정치세력을 형성했다. 기황후는 1353년 14세의 아들 아유시리다라를 황태자로 책봉하는데 성공, 안정적인 경영기반을 구축했다. 또한 그녀는 고려 출신 환관 박불화를 군사 통솔의 최고책임자인 추밀원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 만들어 군사권까지 장악했다.

기씨는 이렇게 장악한 권력을 누구를 위해 사용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공녀였던 그녀는 힘없는 백성들의 고초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원사 후비열전’은 1358년 북경에 큰 기근이 들자 기황후가 관청에 명해 죽을 쑤어주고, 자정원에서는 금은 포백·곡식 등을 내어 십여 만 명에 달하는 아사자의 장례를 치러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대규모 아사자가 발생하는 것은 원제국의 위기였다.

기씨는 이런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원 황실의 근본적인 체질개선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원사’는 순제가 “정사에 태만했다”고 기록한다. 기황후는 이런 무능한 대주주를 젊고 유능한 인물로 교체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기황후는 순제를 양위시키고 황태자를 즉위시켜 위기를 돌파하려 했다. 칼리 피오리나 HP회장이 “디지털 경제시대에 경쟁력을 갖추려면 기업의 과감한 체질개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며 위기를 기회로 활용하는 적극적 경영마인드를 주장한 것과 마찬가지 논리였다. 피오리나의 남편 프랭크는 회사를 그만두고 피오리나가 CEO가 될 수 있게 도왔지만 순제는 달랐다. 기황후의 지시를 받은 자정원사 박불화(朴不花)가 양위를 추진하자 순제는 거칠게 반발했다. 순제는 무능·태만해도 최고경영자 자리를 내놓을 생각은 없었다. 그는 대신 황태자에게 중서령추밀사(中書令樞密使)의 직책과 함께 군사권을 주는 것으로 타협했다.

이것이 기황후의 실수였다. 당시 과감한 구조조정은 원나라의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이런 위기의 시기에 순제라는 무능한 최고경영자를 둔 원나라는 급속히 약화됐다. 1366년 원제국은 주원장에게 대도 연경을 빼앗기고 북쪽 몽고초원으로 쫓겨가야 했다. 공녀 출신으로 황후까지 된 기씨 소녀의 ‘몽골리안 드림(Mongolian dream)’도 몽골 초원에 묻혀져 잊혀졌다.

( 이덕일·역사평론가 )

 

기황후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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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황후 묘 (대한민국)
기황후 묘

기황후 묘 또는 기황후 능중국 원나라의 마지막 황후인 기황후의 능이다. 경기도 연천군 연천읍 상1리 산145에 소재해 있다. 그러나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아 주변지역은 경작지와 민묘가 들어서는 등 훼손되어 있는 상태이다. 주변에는 마정승 묘와 이정승 묘로 알려진 고분 2기가 존재하고 있으나 역시 비지정문화재로 있다. 좌표: 북위 38° 08′ 39″ 동경 127° 03′ 41″ (기황후 묘)

 

 

 

개요[편집]

기황후는 죽기 전 고국에서 장례를 치루기를 원한다 하여 시신은 고려로 운구되어 경기도 연천현에 장사하였다. 그녀의 묘소가 안장되어 있고, 기황후 묘의 재실인 재궁이 있었다 하여 주변 지역은 재궁동(齋宮洞)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그 뒤 실전되었다가 조선중기부터 동국여지승람 등의 기록에도 연천현 동쪽에 기황후의 묘소가 있었다는 기록이 전해졌고, 1656년 사학자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이 편찬한 <동국여지지>(東國與地志)에는 속전원순제기황후묘(俗傳元順帝奇皇后墓)라 하여 기황후능에 대한 기록이 존재하고 있었다.

상리 상리초등학교에서 옥계리 방향으로 가는 길 오른쪽 재궁동 언덕에 있으나 한국전쟁으로 곡장과 비석, 석물 등이 모두 실전되었다. 비지정문화재라 하여 보존처리되지 않고 있으며, 묘소 주변은 경작지로 활용되고 있고 민간인 묘소가 들어서 있다. 주변 지역에는 기황후의 측근 또는 친척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고분군인 마정승묘, 이정승묘 등이 존재하고 있으나 역시 보존처리되지 않고 있다.

재궁동의 유래[편집]

기황후의 능과 재실이 있던 지역은 재실, 재궁에서 이름이 유래하여 재궁동(齋宮洞)이라 불렸다. 이는 발음이 순화되어 쟁골이라 불리기도 했고, 아랫쟁골, 윗쟁골 등으로 마을이 나뉘기도 했다.

기황후능 동쪽에는 마정승 묘(馬政丞 墓)와 이정승 묘(李政丞 墓)로 알려진 고분 2기가 존재한다. 기황후의 측근이나 가까운 사람들의 묘역으로 추정되나 매장자의 정확한 신분은 알 수 없고 이 고분들 역시 방치되어 있다.

마정승묘는 기황후 묘소의 동쪽, 아랫쟁골과 쟁골 사이, 북쪽으로 뻗어 나온 산부리에 있다. 이는 단지 전설상에 마정승 묘라 전해 올 뿐, 피장인의 이름과 관직 등 자세한 내용이 전해오지 않고 있다. 봉분은 허물어져 형태를 알아볼 수 없고, 마을 주민들의 제보에 의하면 일제 강점기 때까지 봉분 아래 도로변에 있었던 비석 또한 논 속에 매몰되어 있다. 이정승 묘(李政丞 墓)는 마정승 묘의 동쪽, 산부리 끝에 있는 고분으로, 상석·문관석 등의 석물이 남아 있으나, 매장된 인물이 정확히 누군가는 알수 없다.

 

「구말 유래와 기황후 설화」

  

한자 구말 由來와 奇皇后 說話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충청북도 진천군 덕산면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한석수

    [상세정보]

[정의]
충청북도 진천군 덕산면 에서 구만리 장터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구말 유래와 기황후 설화」는 원세조와 기황후가 혼인을 하게 된 내력과 혼인 예식을 행하였다는 혼인담과 관련하여 '구만리'와 '구례동'이라는 지명이 생겼다는 지명유래담이다.

[채록/수집상황]
2004년 진천상산고적회에서 간행한 『진천의 구비문학』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
진천군 덕산면의 구만리 장터는 아홉 ‘구(九)’자와 말 ‘마(馬)’자를 쓰는데, 이것이 전국에 소문이 나서 과거에는 진천 구만리 장터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중국이 원나라일 때에 이 진천 이월면 군포리 동네의 기씨 집안에 처녀 하나가 있었다. 그런데 그 처녀의 몸체가 어찌나 크던지 얼굴이 박색이므로 두 노인이 어디에 시집을 보내려고 해도 몸이 보통 사람의 세 몫은 되고, 얼굴이 또한 험해서 누구도 쳐다보질 아니하였다. 그러한 용모를 지녔으니 나이 서른이 된 처녀로 늙게 되었다.

그 때 중국의 원세조의 부인이 세상을 떴는데, 중국에서 새 부인을 맞아들이려 해도 원세조의 몸이 어떻게 큰지 시집오는 여자가 없었다. 중국의 천지에 동방에서 서기가 비치자 이를 따라 원세조 일행이 군포리까지 왔다. 그런데 문 앞에서 집주인을 찾아보니 그 사이에 박색인 기씨가 천하일색의 미인으로 변신하였다. 그래서 기씨 처녀를 데리고 나오다가 목이 말라서 우물의 물을 먹었는데 그 샘의 흔적이 지금도 있다고 한다.

이 때, 이미 날이 저물어서 어쩔 수 없이 구만리 장터에서 원세조와 기황후의 예식을 올렸다. 예전의 천자는 네 마리씩 연결한 9조의 말을 타고 행차를 하는 것이 관례였다. 구만리란 아홉 조의 말이 머물렀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또한 천자가 아홉 예를 갖추어 예식을 올리고 신방을 차린 곳이라고 해서 구례동이라고도 하였다. 지금은 구례동이 논밭으로 변하였으며, 원세조와 기황후가 혼인을 했다는 유명한 전설만이 전해지고 있다.

[모티프 분석]
「구말 유래와 기황후 설화」의 주요 모티프는 ‘아홉 조의 말이 머물렀다는 구만리’, ‘구례를 갖추어 혼례를 올렸다는 구례동’ 등이다. 「구말 유래와 기황후 설화」는 원나라 순제(順帝)와 황후가 된 기씨가 혼인을 하게 된 내력과 관련된 지명유래담이다.

 

 

고용보 원나라의 환관이 되어 고려 국정에 간섭한 고려인

일러스트

고용보(高龍普, ?〜1362)는 고려의 미천한 신분 출신으로 원나라의 환관이 된 인물이다. 그는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며 충혜왕 등 고려 왕에게 수모를 주었으며 고려의 정치에 간섭하고 고려인들에게 많은 피해를 주기도 하였다. 일개 환관인 그가 어떻게 고려를 괴롭힐 수 있었던 것일까? 고용보를 비롯해 원 간섭기 환관으로 원과 고려의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들에 대해 알아보자.

원나라의 환관이 된 고려인

환관(宦官)이란 거세된 남자로서 궁중에서 잡일을 하는 자를 말한다. 원나라는 화자(火者, 고자)를 고려로부터 징발하여 환관으로 이용했다. 1300년 3명의 화자가 원나라에 바쳐진 이후, 약 100여 명의 고려인이 원나라에 들어가 환관이 되었다. 조선 역시 200여 명의 화자를 명나라에 바친 기록이 남아 있다.

끌려간 화자들은 황궁의 환관이 되어 각종 잡일을 했지만, 종종 황제의 총애를 받아 고위 관직에 오른 자들도 있었다. 일부는 사신(使臣)으로 뽑혀 고국인 고려와 조선에 칙사(勅使)로 파견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렇게 환관이 된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고국에 해악을 끼쳤다. 대표적인 인물로 임백안독고사(任伯顔禿古思, ?~1323), 고용보(高龍普), 박불화(朴不花, ?~?)가 있다. 박불화는 박티무르부카(朴帖木兒不花)로 불리며 원나라 역사를 기록한 [원사(元史)] <열전(列傳)>에 실린 반면, [고려사]에는 빠져 있다. 반면 고용보는 [원사]에는 빠졌지만, [고려사] <열전>에 실려 있다. 고용보가 박불화보다 더 크게 고려에 해악을 끼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환관이 된 고용보

고용보는 탄광(煤場)에서 일하던 사람으로, 본관은 전주였다. 환관이 된 자들이 대체로 그러하듯 고용보 또한 고려에서 낮은 신분으로 차별받는 자였다. 그가 환관으로 원나라에 간 것이 강제로 끌려간 것인지, 자발적으로 지원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고려에서 자주 화자를 원나라에 보내던 1310년대에 그도 원나라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그는 원나라에서 투만티르(禿滿迭兒)라고 불리며 환관으로 일했다. 그의 인생이 달라진 것은 1333년, 공녀로 끌려온 고려인 기씨를 추천해 원나라 15대 칸인 토곤티무르(順帝, 惠宗, 재위: 1333〜1368)의 차를 담당하는 궁녀로 들여보내면서부터였다. 기씨는 얼마 후 칸의 총애를 받아 후비를 거쳐 황후가 되었다.

기황후의 오른팔이 되다

1340년 기씨가 후비에서 제2황후로 승진하자, 고용보의 출셋길이 열렸다. 기황후는 그녀를 위해 설치된 자정원(資政院)의 원사(院使)로 고용보를 임명했다. 자정원은 황후들의 재정 관리를 담당하는 기관이지만, 차츰 궁중의 사람과 물자, 사물을 관장하는 기관으로 변모했다. 결단력이 강하고 정치적 감각이 뛰어난 기황후는 곧 황제에 버금가는 권력을 갖게 되었다. 그러자 그녀를 보좌하는 고용보의 권세도 점점 커져갔다. 원나라 황실 가족인 친왕(親王)과 최고 신하인 승상(丞相)조차 그의 눈치를 살필 정도가 되었다.

고용보의 뒤를 이어 자정원사가 된 인물은 박불화다. 박불화는 기황후와 같은 고향 출신이란 인연이 있었다. 고용보는 박불화를 추천하였고, 두 사람은 협력하여 기황후의 수족이 되었다. 이들은 원의 국정에 간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려 조정에도 간여했다.

사신으로 고국 땅을 밟아 내정을 간섭하다

원간섭기의 고려는 원나라의 정치적 상황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다. 1341년 2월, 고려는 원나라의 새로운 권력자로 떠오른 고용보에게 삼중대광 완산군이란 작위(爵位)를 주었다. 천한 신분 출신인 그를 왕족, 공신이나 가질 수 있는 군(君)에 임명했다는 것은 그만큼 고려가 기황후와 그 측근 세력을 두려워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음해 6월 원나라는 고용보와 박불화 등을 고려에 보내 기황후의 모친인 이씨를 맞이하게 했다. 그러자 충혜왕은 고용보 등을 개성 교외에 나가 직접 영접하고, 연경궁에서 연회를 베풀기도 했다. 또한 고용보와 태감(太監) 박불화에게 왕이 직접 의복을 하사하기도 했다. 고용보는 충혜왕에게 격구(擊毬)와 씨름을 보게 해달라고 요구하고 왕과 함께 관람했다. 그해 11월 27일, 충혜왕은 그들이 원으로 돌아갈 때까지 극진하게 대접해주었다. 그럼에도 자신의 출신을 잊은 그는 철저히 원의 입장에서 충혜왕을 대했다. 그는 고려에서 매를 잡아오지 않는다고 충혜왕을 마구 질책하기도 했다.

1343년 충혜왕의 황음무도(荒淫無道)함이 원나라에 알려져 그의 폐위가 논의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용보는 황제가 충혜왕에게 내리는 옷과 술을 주기 위해 그해 10월 고려에 왔다. 그런데 다음 달에 원나라에서 도치(朶赤)와 베시게(別失哥) 등을 파견해 교사(郊祀, 천지에 지내는 제사)를 지낸 후 사면을 베풀라는 조서를 보냈는데, 충혜왕이 병을 핑계로 영접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자 고용보는, “황제께서 늘 고려 왕이 공손하지 못하다고 하시는데, 만약 영접하러 나가지 않으시면 황제의 의심이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라고 경고했다. 충혜왕은 신하들을 거느리고 원나라가 고려에 설치한 관청인 정동성(征東省)에 나가 조서를 접수하려는데 도치 등이 왕을 발로 차고 결박했다. 영문도 모른 채 다급해진 충혜왕은 고용보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는 도리어 충혜왕을 꾸짖었다. 도치는 충혜왕을 잡아 원으로 되돌아가면서 고용보에게 고려의 내정을 맡겼다.

고용보는 사람을 보내어 충혜왕을 따르던 박양연(朴良衍)을 비롯한 십여 명의 고려 신하들을 체포해 감옥에 가둬버렸다. 하지만 송명리 등 평소에 그와 친하거나 뇌물을 바친 자들은 봐주었다. 그는 원나라의 힘을 바탕으로 고려를 뒤흔들었던 것이다.

꽃은 십일을 넘기지 못하고, 권세는 십 년을 채우지 못하니

원나라로 돌아간 고용보는 충혜왕을 모함하여 그를 멀리 악양으로 유배시키고 죽음에 이르게 했다. 1344년 2월 고용보는 이제 8살에 불과한 충혜왕의 원자 흔(昕)을 안고 들어가 황제를 뵙게 했다. 흔이 고려 왕위를 계승하니 충목왕(忠穆王, 재위: 1344~1348)이 되었다. 그해 5월 충목왕은 고용보에게 12자로 된 공신호(功臣號)를 내려줄 수밖에 없었다. 고용보가 원 황제 가까이에 있으면서 마음껏 권세를 누렸기 때문이다.

고려에서는 고용보의 권세를 믿고 거기에 기대어 행패를 부리는 자들도 있었다. 첨의평리 신예(辛裔)라는 자는 자신에게 뇌물을 바친 아전 이적이란 자에게 타인의 관직을 빼앗아 준 적이 있었다. 벼슬을 뺏긴 자가 감찰사에 고소하자, 신예는 이에 앙심을 품고 감찰대부를 모욕하고 관리를 구타하기도 했다. 이런 만행은 신예가 그의 매부(妹夫)되는 고용보의 권세를 믿고 저지른 것이었다.

해평부원군에 봉해지고, 좌정승 벼슬에 있던 윤석(尹碩)이란 자는 충목왕이 즉위한 후, 고용보에게 부탁해 진국상국군 고려대원수라는 직위를 받았다. 고려의 1급 관리가 더 높은 벼슬을 받기 위해 고용보에게 의탁할 정도로 그의 위세는 막강했다.

하지만 그가 지나치게 권세를 부리자, 많은 사람들의 질시를 받게 되었다. 마침내 1347년 6월 관리들의 비리를 조사하는 어사대(御史臺)에서 그를 탄핵했다.

“고용보는 고려에서 석탄이나 캐던 자인데, 폐하의 총애를 입자 그 권세를 믿고 제 마음대로 일을 행하니 친왕(親王)과 승상(丞相)이라도 고용보의 모습이 멀리 나타나기만 하면 달려가 절을 올립니다. 뇌물을 긁어모아 금과 비단이 산처럼 쌓여 있으며 권세는 천하를 좌우할 지경입니다. 그를 처형해 천하 사람들의 마음을 통쾌하게 하소서.”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요, 세불십년장(勢不十年長)이라 했던가. 원나라 황제의 최측근으로 기황후를 천거하고, 충혜왕을 유배 보내 죽게 하였으며, 고려의 국정을 주물렀던 고용보였지만, 어사대의 탄핵은 피할 수가 없었다. 황제는 어사대의 간언을 잠재우기 위해 그를 고려 금강산으로 유배시켰다. 하지만 4개월 후 황제는 그를 다시 원나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영록대부(榮祿大夫)에 제수했다. 그러나 한번 유배를 다녀온 고용보가 원나라에서 다시 예전만큼의 권세를 부리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쓸쓸한 말년과 비참한 최후

날개가 한풀 꺾인 고용보는 고려로 와서, 기황후의 오빠인 기철(奇轍, ?~1356) 일파와 결탁해 갖은 횡포를 부렸다. 그는 무고한 사람을 죽인 일도 있었다. 법과 형벌을 맡은 관청인 전법사(典法司)에서 그의 죄를 벌하고자 했지만, 대충 조사 후 석방되었다.

하지만 고용보의 위세도 곧 꺾였다. 1352년 공민왕이 즉위한 후, 조일신(趙日新)이란 자가 기철, 고용보 등 친원 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난을 일으켰다. 조일신의 난은 실패로 끝났지만, 이때 고용보는 난을 피해 숨어 살아야 했다. 그는 스스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가야산 해인사에 숨어들었다. 그렇지만 공민왕은 자신의 친형인 충혜왕을 죽음으로 내몬 고용보를 그냥 놔두지 않았다. 공민왕은 사람을 시켜 그를 찾았다. 1362년, 10년 만에 해인사에 숨어 살던 고용보를 찾아내어 마침내 처형할 수 있었다.

조국을 괴롭힌 환관들의 말로

고용보가 고려의 왕을 먼 곳으로 귀양 보내고, 조국에서 온갖 만행을 저지른 구체적인 원인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다만 그가 고려에서 미천한 일을 하며 하대받고 살았으며, 남자로서 굴욕인 환관이 되어 고생하다가 출세를 하게 되자, 고려의 지존인 왕을 괴롭힘으로써 자신의 굴욕감을 만회하고 성취감을 가지려는 보상 심리가 있었다고 생각해볼 수 있겠다.

충혜왕의 부친인 충선왕의 경우, 고려 출신 환관인 임백안독고사의 모함으로 인해 머나먼 티베트로 유배된 바 있다. 노비 출신인 그는 원나라 인종을 태자 시절 섬긴 인연으로 총애를 받았고, 권세를 누리게 되자 충선왕에게 무례한 짓을 범했다. 화가 난 충선왕은 원나라 태후에게 청해 그에게 매를 치고 그가 남에게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원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이 사건은 임백안독고사가 충선왕을 모함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박불화는 동료인 고용보가 고려에서 죽자, 1364년 기황후를 꼬드겨 고려 공민왕을 폐위시키기 위해 원나라 1만 군대로 고려를 공격하게 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조국을 괴롭힌 임백안독고사는 사형에 처해졌고, 박불화도 결국 유배되어 죽음을 맞이했으며, 고용보 또한 공민왕에게 처형당하고 말았다.

백성을 지키지 못한 국가의 비애

고려는 원나라에서 출세한 고려 출신 환관들을 크게 우대해주었다. 1304년 이숙(李淑)이란 자가 원의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하자, 충렬왕은 그를 평창군(平昌君)으로 봉한 일이 있었다. 미천한 출신의 일개 환관이 군(君)에 봉해진 것은 고려인들에게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환관이 되어 고려에 사신으로 방문하면 그 가족이 부역에서 면제를 받는 것은 물론이고, 고려에서 벼슬을 받기도 했다. 또 그가 태어난 부곡(部曲)이나 속현(屬縣)이 현(顯)이나 군(郡)으로 승격되는 경우까지 있었다. 이 때문에 출세를 바라며 자발적으로 환관이 되어 원나라에 가려는 자들도 늘어났다. 이에 따라 원나라 환관 가운데 고려인의 숫자가 가장 많아졌고, 환관으로 출세한 자들은 고려에 사신으로 오기를 갈망하기도 했다.

원나라의 뒤를 이은 명나라에도 조선 출신 환관들이 많았다. 이들 가운데는 역시 조선에 사신으로 온 자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공녀나 화자를 뽑아서 데려가는 일을 하거나, 공물을 거두어가고, 새 국왕의 즉위를 승인하는 황제의 고명(誥命)을 전달하는 일을 했다. 조국의 사정을 잘 아는 만큼, 조선에서는 이들 조선 출신 환관 사신들을 대접하기가 더 힘들었다. 윤봉(尹鳳)이란 자는 무려 12번이나 조선에 사신으로 와서는 온갖 행패를 부려 악명이 높았다. 1429년 윤봉이 명으로 귀국할 때 그가 챙겨간 선물 궤짝이 무려 200개나 되었다고 전해질 정도다. 조선 정부는 그가 올 때마다 그의 본가에 선물을 주고 세금을 면제해주었고, 심지어는 인사 청탁까지 들어주었다. 정동(鄭同)이란 자도 5차례 조선을 방문했으며, 그때마다 엄청난 물건들을 요구해 조선 조정을 괴롭힌 인물이었다. 15세기 명나라는 의도적으로 조선에 보내는 칙사로 조선 출신 환관을 선발하기도 했다.

약소국인 탓에 자국의 백성을 지키지 못하고 화자를 바친 고려와 조선은, 결국 환관이 되어 돌아온 조국의 자식들에게 도리어 능욕을 당하는 비애를 맞보아야 했다. 패륜과 반역의 그 현장을 즐긴 것은 강대국 원나라와 명나라 사람들이었다.

역사는 국가가 그 백성들을 지켜낼 의지가 있을 때, 충신이 길러지는 것이라는 평범한 진실을 알려준다.


참고문헌
박상진, [내시와 궁녀, 비밀을 묻다], 가람기획, 2005.
이개석, <원 궁정의 고려출신 환관과 麗元관계>, [동양사학연구] 113집, 2010.
정구선, <鮮初 조선출신 명사신의 행적>, [경주사학] 23집, 2004.
이용범, <기황후의 책립과 원대의 자정원>, [역사학보] 17·18, 1962.

김용만 | 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
글쓴이 김용만은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국 고대사를 연구하고 있다. 현재는 삼국시대 생활사 관련 저술을 하고 있으며, 장기적으로 한국 고대 문명사를 집필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다 어디로 갔을까], [새로 쓰는 연개소문전] 등의 책을 썼다.
그림
장선환 | 화가, 일러스트레이터
서울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학과와 동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화가와 그림책 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현재 경희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http://www.fartzzang.com
 

 

충혜왕 방탕한 행동을 일삼았던 원 간섭기의 고려 왕

일러스트

고려 28대 충혜왕(忠惠王, 1315~1344)은 주색에 빠져 방탕한 행동을 일삼다가 원나라에 의해 폐위된 임금이다. 원 간섭기의 다른 왕들과 마찬가지로 원나라에 의해 왕의 자리에 오르락내리락했고 패륜까지 저지른 못난 임금이지만, 그는 한국 상업사에서는 매우 특별한 인물이었다.

원나라의 생활 풍습이 더 익숙했던 충혜왕

충혜왕의 이름은 왕정(王楨)이며, 몽골 이름은 부다시리(普塔失里)로, 고려 27대 충숙왕(忠肅王, 1294〜1339)과 명덕태후 홍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31대 공민왕(恭愍王, 1330〜1374)의 친형이다.

그는 고려의 생활 풍습보다는 원나라의 환경에 더 익숙해 있었다. 그는 1328년 2월 세자의 신분으로 원나라에 가서 숙위(宿衛, 황제를 호위한다는 명목으로 속국의 왕족들이 볼모로 가서 머무는 일)하며 머물렀다. 당시 고려는 원나라의 부마국이자 철저한 속국이었다.

25대 충렬왕과 26대 충선왕이 원나라에 의해 왕위를 수시로 빼앗겼던 것처럼, 그의 아버지 충숙왕도 1330년 원나라에 의해 사실상 왕위를 빼앗겼다. 겉으로는 충숙왕의 양위(讓位)를 받아, 그해 2월 그가 귀국하여 왕위를 계승하고 충혜왕이 되었다.

2년간의 짧은 1차 재위

당시 고려의 왕위 계승은 아버지가 고려의 왕이라는 혈통의 문제보다는, 원나라에 얼마나 강력한 지기기반이 있느냐에 따라 좌우되었다. 충혜왕은 세자 시절 원나라 승상 엘테무르(燕帖木兒)와 가까이 지냈다. 14살의 세자는 엘테무르와 함께 사냥도 하고 술도 마시며 그의 총애를 받았다. 게다가 그는 세조 쿠빌라이의 고손녀인 이렌첸반(亦憐眞班, 덕령공주)과 결혼했다.

왕위에 오른 충혜왕은 1331년 너무 가치가 커서 화폐로 쓰이기 힘든 은병(銀甁)의 통용을 금하고, 오종포(五綜布, 올이 다섯 가닥인 베) 15필에 해당하는 소은병(小銀甁)을 통용하게 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또 행정조직을 개혁하고, 5도(道)에 소금을 관리하는 염장도감(鹽場都監)을 설치하기도 하였으며, 원나라의 쌍성(雙城), 요양(遼陽), 심양(瀋陽) 등지에 살고 있는 고려인들을 귀환해줄 것을 요청하는 등 새로운 정치를 하려는 의지를 보였었다.

방탕한 행실이 폐위의 구실이 되다

하지만 그는 2년 만에 왕위에서 물러나 원나라로 가야만 했다. 그를 지지해준 엘테무르가 사망하자, 원나라에서 권력을 잡은 태보(太保, 정1품 고위직) 바이안(伯顔)이 ‘충혜왕이 본래 행실이 나빠 원나라의 변방을 지키는 일에 누가 될까 염려스러우니 그의 아버지에게 배우게 하십시오’라면서 충혜왕의 폐위를 주청했기 때문이었다.

충혜왕은 총명하기는 했지만, 어려서부터 술 마시고 방탕하게 노는 것에 익숙했던지라 왕위에 오른 후에도 정치보다는 술과 여자를 탐하고 사냥을 즐겼다. 그의 나쁜 행실은 폐위의 구실이 되었다. 왕위에서 쫓겨난 충혜왕은 원나라에 가서 살아야 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원나라 황족, 귀족들과 함께 유흥을 즐기며 방탕한 생활을 이어갔다. 그가 엘테무르의 아들 등과 함께 술을 마시며 여자를 희롱하고 다녀 간혹 숙위에도 결근하자, 바이안은 그를 두고 무뢰배, 건달을 뜻하는 ‘발피(泼皮)’라며 비난했다.

누가 고려 왕이 될 것인가

충숙왕은 아버지 충선왕과의 갈등, 원나라와의 갈등으로 인해 왕권이 허약했다. 게다가 고려 왕위는 심왕(瀋王) 고(暠)가 넘보고 있었고, 그를 지지하는 신하들이 고려에 많았다. 충숙왕 역시 이런 사정 때문에, 요동 일대의 고려인을 다스리는 심왕 고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생각하기도 했다. 충숙왕은 아들을 ‘발피’라고 부르는 등 애정이 적었지만, 1339년 3월 죽음을 앞두고 유명(遺命)으로 그에게 왕위를 다시 계승하게 했다.

그런데 원 황제에게 왕위 계승의 허락을 구하고자 하는 요청을 원나라 태사(太師, 정1품 최고 직위) 바이안이 묵살하고 황제에게 고하지 않았다. 바이안은 심왕 고가 왕이 되어야 한다며 충혜왕의 즉위를 반대했다. 이 때문에 고려 왕위는 그해 11월까지 비어 있게 되었다.

아직 왕위가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충혜왕은 아버지의 여인 가운데 수비(壽妃) 권씨(權氏)를 범하고, 외삼촌인 홍융의 아내 황씨도 간음하는 등, 음란한 짓을 많이 했었다. 그는 심지어 8월 17일 서모(庶母, 아버지의 첩)인 백안홀도(伯顔忽都, 경화공주)를 강제로 능욕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녀는 원 세조 쿠빌라이의 증손녀라는 높은 신분을 갖고 있었다. 수치심을 느낀 그녀는 원나라에 이 사건을 알리고자 했다. 충혜왕은 그녀가 원나라에 소식을 전하지 못하도록 말의 거래까지 막을 정도로 단속했다. 그러자 그녀는 재상인 조적(曺頔)에게 자신이 폭행당한 사실을 알렸다.

심왕 고를 고려 국왕으로 옹립하려는 세력의 우두머리였던 조적은, 이 사건을 기회로 삼았다. 그는 8월 24일 국새(國璽)를 숨긴 채 군사 1천명으로 왕궁을 습격하는 반란을 일으켜 심왕을 고려 왕위에 앉히고자 했다. 이때 충혜왕은 직접 말을 타고 나와 화살을 쏘며 반격했다. 수적으로 우세한 충혜왕의 군사들이 활을 쏘아 조적을 죽이면서 반란을 평정할 수 있었다.

원의 정치적 혼란을 틈타 왕이 된 충혜왕

반란을 평정한 충혜왕은 사람을 보내 원나라에 가서 왕위 계승을 인정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해 11월 고려에 온 원나라 사신은 먼저 경화공주의 궁에 가서 황제가 보낸 술을 전한 후, 왕의 관저로 가서 국새를 빼앗아 경화공주에게 넘겨주었다.

충혜왕은 원나라로 압송되어 형부(刑部)에 투옥되었다. 상당수의 고려 관리들도 함께 원나라에 압송되어 투옥되었다. 자칫 왕위를 빼앗길 위기였으나, 마침 충혜왕을 미워하던 바이안이 권력을 잃는 등 원나라의 정계 개편으로 정국이 혼란스러워졌다. 이를 틈타 충혜왕은 황제의 명령을 받아 왕위에 복위되고, 6개월 만인 1340년 5월 고려로 귀국하였다.

황음무도의 결과와 귀양길에서의 죽음

아름다운 여인을 보면 신분의 고하에 상관없이 제 욕심을 차리다가 왕위까지 빼앗길 뻔했던 그였지만, 고려에 돌아온 후에도 그 버릇을 고치지 못했다. 충혜왕은 여전히 여자들을 겁탈하고 신하들을 때려 죽였다. 결국 기황후의 오빠인 기철(奇轍, ?~1356)을 비롯한 고려의 신하들이 원나라 중서성에 글을 올려 충혜왕의 황음무도(荒淫無道)를 고발함으로써, 충혜왕은 1343년 11월에 고려에 온 원나라 사신에게 구타를 당하고 포박 당해 원나라로 끌려가고 말았다.

1343년 12월, 원나라 순제 토곤테무르는 충혜왕을 죄인을 가두는 수레에 태워 게양현(현재의 광둥성 지역)으로 귀양을 보냈다. 충혜왕은 귀양을 가던 길에 다음해 1월 악양현(호남성 지역)에서 죽고 말았다. 그의 귀양길을 따른 신하는 하나도 없었을 뿐더러, 그의 죽음에도 고려 백성들 가운데 아무도 슬퍼하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원 간섭기 고려 왕들의 비행, 왜 그랬을까

8살에 즉위해 12살에 죽은 충목왕과 12살에 즉위해 15세에 죽은 충정왕을 예외로 치면, 원 간섭기 고려의 왕들은 모두 여자관계가 복잡한 난봉꾼들이었다.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 모두 몽골의 공주들과 사이가 나빴다. 자신들이 원한 결혼이 아니라, 왕으로서의 지위를 지키기 위한 정략적 결혼의 결과였기 때문이다.

또한 언제든지 원나라의 결정에 의해 수시로 왕위를 빼앗길 수도 있는 처지에 놓여 있었고, 실제로 왕위를 빼앗겼던 경험들을 갖고 있었다. 원나라 공주와 결혼해 원나라에서 황족의 대우를 받기도 했지만, 고려에 오면 왕의 권위를 제대로 누리지 못했다. 신하들이 자신이 아닌 원나라의 정세 변화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늘 불안감을 안고 살았다. 이런 불안감이 원 간섭기 고려 왕들을 난봉꾼이 되도록 만든 요인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고려에는 우탁(禹倬) 등 일부 신하들을 제외하면 왕의 난행을 막기보다는 도리어 왕에게 자신의 딸, 심지어는 부인까지 바치면서 출세하려는 자들이 넘쳐났다. 충혜왕의 황음무도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등장한 것이었다.

돈벌이에 나선 왕

충혜왕은 음란하고 방종하며 무도하였지만, 재리(財利)를 계산하는 데 세밀한 것까지 잘 따지는 영특하고 날카로운 자질도 갖고 있었다. 그는 고려왕으로 복위를 하거나, 원나라 세도가들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하기 위해서, 또 자신의 유흥을 위해서 무엇보다 자금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자금줄인 고려 왕실의 재정을 튼튼하기 위한 여러 조치를 취했다.

충혜왕은 재정 확보를 위해 상인들을 시켜 금, 은, 포목 등을 원나라에 가서 판매하여 이득을 얻도록 했다. 큰 이득을 얻어온 상인들에게는 장군의 벼슬을 주기도 했다. 상인들을 가까이 하고 우대한 충혜왕은 사기(砂器) 그릇을 파는 상인인 임신(林信)의 딸을 후궁으로 맞이하기도 했다. 그녀가 은천옹주 임씨다.

점포를 차리고 공장을 만들어 왕실 재정을 확충하다

충혜왕은 왕궁에 직속되어 왕실 재정을 담당하던 기관으로 의성고(義成庫), 덕천고(德泉庫), 보흥고(寶興庫) 등을 확대했다. 재정을 늘리기 위해 백성들의 민전을 수탈하여 불법적으로 귀속시키기도 하고, 이곳에 모아둔 베 48,000필을 자금으로 활용해 개경 저잣거리에 점포를 차려 장사를 하게 하기도 했다.

충혜왕은 신궁(新宮)을 건설하기도 했다. 신궁에는 창고가 일백 간이나 되었는데, 곡식과 비단으로 창고를 가득 채웠고, 행랑에는 채단을 짜는 여공을 두기도 했다. 또 방아와 맷돌을 많이 두었다. 이곳은 왕의 놀이터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각종 물건을 생산하는 공장이기도 했다. 신궁의 건설과 운영에는 은천옹주의 뜻이 많이 반영되었다.

충혜왕이 개경 저잣거리에 상점을 내고 물건을 직접 생산해 팔게되자, 시전 상인들이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충혜왕으로서는 별다른 선택의 기회가 없었다. 대토지를 소유한 권문세족들이 원나라와도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토지제도를 개혁하고 세금을 더 징수하여 왕실 재정을 늘리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왕실 재정을 늘리는 길로 장사를 선택한 것이다.

상업을 존중한 고려

화폐유통에 적극적이었던 고려 15대 숙종(肅宗, 1054~1105)은 개경 시가지 도로 양편에다 상업에 종사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귀천을 막론하고 누구나 스스로 점포를 지어 돈을 사용하여 이익을 크게 거둘 것을 장려하였다. 또 각 주와 현에 명령하여 미곡을 내어 술과 밥을 파는 가게를 열게 만드는 등 백성들에게 상업을 권장하고 돈의 유익함을 알도록 하라고 지시한 바 있다.

고려 시대에는 상업에 대해 적극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고,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장사를 해서 이익을 얻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중에서도 임금이 직접 상점을 차리고 수공업장을 만든 것은 매우 특별한 일이다. 하지만 충혜왕이 국제무역과 장사를 통해 왕실 재정을 확보하려고 계획하고 실천했던 것은 당시 고려가 상업을 존중하고, 그 바탕 위에서 상업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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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만 | 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
글쓴이 김용만은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국 고대사를 연구하고 있다. 현재는 삼국시대 생활사 관련 저술을 하고 있으며, 장기적으로 한국 고대 문명사를 집필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다 어디로 갔을까], [새로 쓰는 연개소문전] 등의 책을 썼다.
그림
장선환 | 화가, 일러스트레이터
서울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학과와 동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화가와 그림책 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현재 경희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http://www.fartzz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