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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림사건 속 노무현 대통령, '변호인'과 얼마나 닮았나? (머니투데이 2013.12.23 12:26)

부림사건 속 노무현 대통령, '변호인'과 얼마나 닮았나?

흥행 돌풍·예매취소 사태까지… 영화와 '회고록' 전격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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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과 영화 '변호인' 속 송우석(송강호 분)/ 사진=노무현 사료관, 영화 '변호인' 홈페이지

 

영화 '변호인'이 개봉 5일차인 22일 175만 관객수를 기록하며 흥행 돌풍을 일으키면서 영화의 모티브가 된 실제 인물들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변호인'은 1981년 신군부 정권이 22명의 독서모임 회원들을 불법 감금, 고문당한 '부림사건'이 배경이다. 영화 속 변호인 '송우석'(송강호 분)과 노 전 대통령을 비교해봤다.

◇세금 전문 변호사 노무현, 진짜 변호인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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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울산 공장 건설 일용직 시절/ 사진=노무현 사료관

영화 속 송우석은 상고 출신으로 아파트 미장이로 일하며 사법고시를 준비한 인물로 등장했다. 돼지국밥집에서 밥을 먹고 낼 돈이 없어 도망쳐나올 정도로 가난했던 것. 그는 사법고시에 합격해 판사가 됐으나 그만두고 부산으로 내려온 뒤 등기 전문 변호사로 돈을 번 후 요트를 타고 돈 자랑을 하는 등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하는' 삶을 산다.

노 전 대통령도 고등학교 시절 자취, 하숙교사, 회사 사무실 등을 전전하며 살았다. 그는 고생과 설움 속에서 공부하며 "나는 이 다음에 커서 출세를 하면 그 지긋지긋한 고생을 벗어나 설움도 갚고 나처럼 고생하며 사는 사람을 도와주리라 다짐하곤 했다"고 회고록에서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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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 시절 요트를 타던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사진=노무현 사료관

또 실제 노 전 대통령도 요트를 탔다. 노 전 대통령은 막상 판사가 되고 변호사가 되고 나니 세상이 다르게 보였다고 회고했다. 그는 "돈 걱정 따윈 안 해도 되고 알아주는 사람 많고 굽실거리는 사람도 많아 편한대로 생각하면 정말 살 맛이 나는 생활이었다. 그러다보니 출세해서 가난하고 힘 없는 사람들을 도와주겠다던 어린 시절의 꿈은 간데온데 없이 사라져 버렸다"고 회고록을 통해 밝혔다.

◇시큰둥하던 변호인, 법정에서 맹수로 돌변하다
송우석은 선배 변호사 김상필(정원준 분)에게 국가보안법 사건 변호를 부탁받을 때만 해도 시국사건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자신이 고시공부하던 시절 신세를 졌던 국밥집 아주머니의 아들이 '부림사건'으로 재판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 사건 변호인을 맡으면서 점차 당시 사회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노 전 대통령 역시 김광일 변호사에게 부림사건의 변호를 부탁받을 때만 해도 시큰둥했다. 그는 김광일, 이흥록 변호사 등과 함께 부림사건 변호인을 맡았다. 노 전 대통령은 당시 재판 변호인을 맡으면서 가치관이 송두리째 바뀌었다고 회고록을 통해 말했다.

노 대통령은 "재판을 맡고서부터 나의 이기적인 삶의 껍질이 균열되기 시작했다. 대공분실에 끌려가 무려 57일간이나 가족들에게 아무 연락도 못하고 짐승처럼 지내야 했던 청년들, 매를 얼마나 맞았던지 온몸이 시퍼렇게 멍이 들고 발톱이 새까맣게 죽어버린 몸을 내보이면서도 얼마나 고문에 시달렸던지 변호사마저도 정보기관의 첩자가 아닌가 눈치를 살피던 파리한 몰골의 청년들,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의 죽었던 가슴은 서서히 분노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고 회고록에 적었다.

특히 극중 7년 전 밥값 신세를 지며 정을 쌓은 국밥집 아들 박진우(임시완 분)와 같은 청년들의 삶을 존경하게 됐다고 밝혔다. 이후 노 전 대통령은 박진우의 실제 인물인 장상훈씨의 결혼식 주례도 볼 정도로 돈독한 사이로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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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변호인' 속 박진우(임시완 분),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결혼식 주례를 본 실제 인물 /사진= 영화 '변호인' 홈페이지, 노무현 사료관

◇부림사건을 계기로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다
영화 '변호인'에서 송우석은 손꼽히는 건설기업의 스카우트 제의까지 거절하고 부림사건의 변호를 맡은 뒤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 이후 1987년 '박종철 고문 치사사건'으로 사망한 고 박종철 군의 추도회를 주도했다는 죄명으로 법정에 선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다. 변호인이 판사에게 건넨 변호인 명단에는 해당 재판장에 착석해 있던 99명의 변호인 이름이 적혀 있었다.

노 전 대통령은 실제로 1987년 2월7일 열린 고 박종철군 추모대회때 경찰에 연행되기도 하고, 잦은 구속 끝에 1987년 11월에는 변호사 업무정지 명령까지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나는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며 "내가 그 자랑스런 역사의 현장에 뜨거운 동지들과 함께 있었다는 것은 내가 지금까지 받고 있는 박해를 보상하고도 남는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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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에 앞장서는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사진=노무현 사료관

노 전 대통령은 부림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때부터 나는 학생사건, 노동사건 등의 무료 변론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한편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들의 일을 내일처럼 도맡아 하게 되었다. 그러자 눈멀었던 나의 눈에 화려한 사회의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힘없고 가난한 사람의 희생과 고통을 똑똑하게 보게 되었고 시간이 갈수록 그들의 아픔이 가슴에 전달되어 오면서 어린 시절 나의 고통과 울분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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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변호인' 마지막 장면 모델이 된 수인복 입은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실제 사진/ 사진=노무현 사료관

이후 6월 민주항쟁에서 부산 시민들 속에서 '독재 타도'를 외친 노 전 대통령은 1988년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의 제의로 정치에 입문, 부산 동구에서 제13대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盧대통령 영화 '변호인', 송강호 "중요한 건···"

  (머니투데이 2013.12.23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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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변호인'으로 '설국열차' '관상'에 이어 흥행몰이에 성공한 배우 송강호/ 사진=머니투데이

 

 

2013년은 단언컨대 배우 '송강호'(46)의 해다.

그가 주연을 맡은 영화 3편이 연달아 흥행에 성공하면서 송강호는 한국 영화 역사상 최초로 한해 2000만 관객을 동원한 배우가 됐다.

그는 '관상'으로 대종상 남우주연상과 한국영화평론가협회 남자연기상을 받은 데 이어 한국갤럽이 선정한 '2013년을 빛낸 영화배우'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2008년에 이어 5년 만이다.

◇ '초록물고기'로 시작해 '넘버3'로 대중에게 알려져

대한민국 대표 배우로 자리잡은 그의 필모그래피 시작점엔 이창동 감독의 1997년 작(作)인 '초록물고기'가 있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꿈꿔온 배우의 꿈을 연극 무대에 펼치고 있던 그에게 '초록물고기'는 영화배우로서 성장할 수 있는 단초를 마련해 준 셈이다. 송강호 역시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초록물고기는) 지금의 제가 있을 수 있게 한 아주 중요한 작품이다"라며 "이 영화를 통해 비로소 '영화 연기'에 대해 느낄 수 있었다"라고 고백한 바 있다.

같은 해 개봉한 '넘버3'는 그의 존재를 대중에 확실히 각인시키는 계기가 됐다. 그가 맡은 '조필' 캐릭터 특유의 어투는 신드롬을 일으켰다. "내 말에... 토토토토토다는 새끼는 배반형이야 배반형..배신 배신형..무슨 말인지 알겠어?"라는 대사는 지금까지도 성대모사의 단골 소재로 사용되며 회자될 정도다. 같은 해 그는 대종상 신인남우상과 청룡영화제 남우조연상을 휩쓸며 1997년 가장 주목받는 배우가 되었다.

◇ 어떤 역할이든 모두 '송강호 스타일'로 재해석

송강호의 저력은 그만의 느낌에서 나온다. 실제로 스크린에서 송강호의 다양한 변주를 봐온 관객들은 그의 매력을 '송강호다움'이라고 표현한다. 관객들은 '반칙왕'의 회사원, '살인의 추억'의 형사, '우아한 세계'의 조폭 모두에서 '연기하는 송강호'가 아닌 '배우 송강호' 그 자체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고 말한다.

어떤 배역을 맡든 송강호 특유의 소탈함과 능청스러움으로 소화해내기 때문이다. 한 관객은 "송강호의 연기를 보다보면 송강호가 배역을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배역이 송강호를 연기하는 것 같단 느낌을 받는다"고 그의 연기를 평하기도 했다.

실제로 그는 시나리오를 한번 정독한 후엔 다시 읽지 않는다고 한다. 그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내가 어떤 역할이고 어떤 감정이라는 것 정도는 전체적으로 알고 있어야 하지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지금 찍고 있는 그 장면에 집중한 채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그냥 '툭'하는 거다"라고 덧붙였다.

'조용한 가족'을 함께 촬영한 배우 최민식은 송강호에 대해 "감각이 있어도 배우는 일단 몸으로 설득력 있게 표현해야 한다. 그런데 송강호는 그게 완벽하게 표현이 된다"라고 평하기도 했다.

◇ 어느 때보다 다양한 도전을 했던 2013년

2013년 송강호의 도전이 더욱 의미있는 이유는 그동안 보여주었던 연기의 스펙트럼이 확장됐다는 데 있다. 그는 영화 '설국열차'에서 처음으로 외국배우들 사이에서 한국어로 연기를 했으며 영화 '관상'에서는 'YMCA야구단'보다 더 이전의 시대로 돌아가 사극연기에 도전하기도 했다. 또 '변호인'을 통해 처음으로 실존인물을 모티프로 한 영화에도 도전했다.

'변호인'은 그가 데뷔 후 처음으로 대사 연습을 한 영화기도 하다. 그는 다수의 매체 인터뷰를 통해 영화를 둘러싼 정치적 논란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그는 "무엇보다 시나리오가 갖고 있는 스토리의 힘에 주목했다"며 "우리 영화 만드는 사람들은 '어떻게 전달하느냐'에 대해 더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이번 영화에 대해 "관객들이 순수한 의도로 받아들이든 정치적으로 해석하든 영화를 보고 어떤 자유로운 의견과 감상을 말씀해 주셔도 좋다"고 했다.

그는 관객들이 '변호인'을 통해 그가 연기한 '송우석'의 진심을 봐주길 기대한다. 송강호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변호인'에 대해 "보통 그 사람의 이미지로 판단하며 고정관념에 빠진다. 하지만 연기의 기본은 이미지가 아니라 내면의 정서를 잡아내는 것"이라며 "중요한 건 송우석의 진심, 이것이 가장 중요한 키다"라고 말했다.

 

 

[리뷰]거칠고, 불친절하고, 솔직하지 못한 영화 <변호인>

 (경향신문 2013-12-25 16:21:26)

 

영화 <변호인>이 무서운 흥행 속도를 기록하고 있다. 25일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을 보면, <변호인>은 전날 전국 839개의 상영관에서 44만6754명의 관객을 동원해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했다. 지난 18일 개봉 이후 일주일 동안 누적 관객 수는 247만4211명에 달한다.

이는 1000만 관객을 동원했던 영화 <7번방의 선물> <광해>보다 더 빠른 흥행 속도다. 이처럼 흥행에 성공하고 있는 이유는 <변호인>이 뛰어난 영화라기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라는 특정 인물에서 모티브(동기)를 얻었고, 1980년대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어 평소 영화관을 자주 찾지 않던 40~50대 장년층 관객도 영화관을 찾기 때문으로 보인다.

‘영화 관객 2억명 시대’의 첫 해로 기록될 2013년. 올해 마지막까지 그 열기를 이어가는 영화 <변호인>은 이 같이 흥행할 자격이 있을까.


 

1980년대 초 부산. 고졸 출신으로 사법고시에 합격한 ‘우석’(송강호)은 시쳇말로 빽도 없고, 돈도 없고, 가방끈도 짧은 변호사다. 대전에서 판사로 일하다 부산으로 내려온 우석은 부동산 등기·세금 자문 등 관련 법 개정으로 열린 ‘블루 오션’에 뛰어든다. 그는 탁월한 사업수완으로 부산에서 제일 잘나가고 돈을 잘 버는 변호사로 이름을 날린다.

승승장구하던 우석은 10대 건설 기업스카우트 제의까지 받는다. 그러던 우석은 7년 전 밥값 신세를 지며 정을 쌓은 국밥집 아들 ‘진우’(임시완)가 뜻하지 않은 사건에 휘말려 재판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우석은 국밥집 아줌마 ‘순애’(김영애)의 간절한 부탁을 외면할 수 없어 구치소 면회라도 도와주겠다고 나선다. 우석은 구치소에서 마주한 진우의 믿지 못할 모습에 충격을 받고, 모두가 회피하기 바빴던 사건의 변호를 맡기로 결심한다.



우선 이 영화는 거칠다. 작게는 컷이 넘어가는 호흡부터, 크게는 이야기 전체의 흐름이 매끄럽지 못하다. <변호인>에서 가장 눈에 띄는 법정 롱테이크(컷을 나누지 않고 길게 찍는 것)는 명장면으로 꼽을 수도 있겠지만, 전반적인 영화의 흐름과 비교하면 너무 튄다. 이야기 전개도 우석이 어떻게 성공하는지에 대한 내용은 다소 긴 것과 달리, 영화의 중심이 되는 법정 장면 등은 상대적으로 짧다. 그리고 영화는 러닝타임에 쫓겨 급히 마무리하듯 끝난다. 이를 영화의 주제이기도 한 비상식적인 상황에 대한 불편함 등을 표현·전달하기 위한 감독의 의도로 보더라도, 관객의 입장에서는 다소 껄끄럽게 느껴진다.



이 영화는 불친절하다. 많이 알려져 있듯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젊은 시절이 영화의 모티브가 됐다. 1981년 부산에서 벌어진 용공조작 사건 ‘부림사건(부산 학림사건)’을 다뤘다. 이에 대한 내용은 영화를 통해 비교적 자세히 이해할 수 있지만, 영화 말미에 등장하는 우석의 장면은 다소 불친절하다. 그 많은 이들이 왜 우석의 변호인이 됐는지에 대해서 영화는 설명해주지 않는다. 영화는 이에 대해 이해가 안 되고, 궁금한 관객은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라고 말하는 듯하다.



영화 <변호인>은 솔직하지 못하다. 아니, 정확히 얘기하면 제작진을 비롯한 <변호인> 관계자들이 솔직하지 못하다. 그들은 이 영화가 노 전 대통령의 젊은 시절을 모티브로 만들었을 뿐, 그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한다. <변호인>의 각본·연출을 맡은 양우석 감독은 “실제 부림사건이 이 영화의 모티브가 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영화가 가지고 있는 이야기 구조와 팩트는 다를 수 있다”고 말했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도 이를 강조하는 자막이 나온다. 그러나 영화를 본 관객이라면 누구나 노 전 대통령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영화와 실화가 차이나는 부분도 많지 않다. 영화에 대한 선입견을 최대한 줄이려는 관계자들의 노력은 이해하지만, 이건 ‘모티브 그 이상’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같은 단점을 모두 만회하는 <변호인>의 매력이 있다. 바로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다. 우석이 즐겨 찾는 국밥집 아줌마로 등장하는 김영애는 연기의 ‘진수’를 선보인다. 아무리 차가운 심장을 가진 관객이라 하더라도 김영애의 열연을 보고 있으면, 눈이 촉촉해질 것이다. 또 진우의 고문을 담당하는 경찰 ‘동영’을 맡은 곽도원의 연기도 눈에 띈다. 법정에서 동영이 증인으로 출석해 우석과 신경전을 벌이는 장면에서 곽도원은 한국 최고의 배우 중 한 명인 송강호에 전혀 밀리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 영화의 백미는 우석을 열연한 송강호다. 그는 올해 개봉한 영화 <설국열차> <관상> <변호인>의 잇따른 흥행으로, ‘2000만 배우’라는 별명이 붙었다. 2000만 배우로 불리는 그의 용기에 박수치고 싶다. 노 전 대통령이 모티브가 된 인물을 연기하는 것은 배우 입장에서 매우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노 전 대통령은 정치적 성향에 따라 호불호가 극단적으로 갈리는 실제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등으로 송강호는 캐스팅 제의를 한 차례 거절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영화에 출연하기로 결심했다. 출연하는 영화마다 ‘대박’을 터뜨려 더 이상 배우로서는 부러울 것이 없을 정도의 위치에 올라선 그가 이 영화에 출연한 것은, 부러울 것 없이 잘 나가던 우석이 진우의 변호인을 자처한 것과 매우 닮아 있다. 이런 면에서 송강호보다 우석을 잘 소화할 수 있는 배우는 없을 것이다. <변호인> 관계자로부터 캐스팅 제의를 받은 송강호는 아마도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제가 하께요, <변호인>. 하겠습니더.

 


 '변호인' 실제인물 "노무현, 실제 판사와 싸웠어요"

 (한겨레 2013.12.28 11:40)

[토요판] 르포 / '변호인'의 실제인물을 찾아

 

▶영화 <변호인>의 개봉으로 1981년 일어난 부림사건이 재조명을 받고 있습니다. 영화 속 '국밥집 아들'의 실제 주인공인 부림사건 피해자 고호석·송병곤씨를 만나봤습니다.

두 분 모두 영화를 봤다고 합니다. 실제 사건과 영화의 차이를 설명해 주었는데, 고문은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기사에 영화 내용이 일부 담겨 있으니 조심해서 읽으세요.

고호석(57)·송병곤(55)씨가 25일 오전 11시 부산시 초량동 부산역 인근 한 철길 옆에 섰다. 널찍한 철길 한편에 2층짜리 부산 철도차량사업소 건물이 서 있었다. 고씨는 건물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했다. "이쯤에 분명 있었던 것 같은데…."

둘은 조금 더 철길을 따라 걸었다. 꼭 찾고자 하는 건물이 있었다. "철길 바로 옆에 내외문화사라는 간판을 내걸어놓고 출판사 건물인 척 있었어요. 허름한 시멘트를 바른 2층 건물이었어요. 사복을 입은 경찰들이 정문 앞을 지키고 있었고, 건물 앞에는 조그만 마당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해요." 고씨와 송씨는 1981년 여름. 이곳 대공분실로 끌려와 갖은 고문을 당했다.

30여분을 주변에서 헤매었지만 과거 대공분실은 찾지 못했다. 주변의 2층짜리 건물은 철도 관련 시설이 유일했다. 7층 규모 모텔 건물과 5층 규모 복합상가 건물이 철길을 따라 늘어서 있었다. "아마 다 헐리고 새 건물이 들어선 것 같아요. 하긴 30년도 전의 일이니까…." 얼굴에 검버섯이 피기 시작한 고씨가 말했다. 머리칼이 희끗한 송씨는 옆에서 말없이 서 있었다.

영화 <변호인>(양우석 감독)은 어두컴컴한 대공분실 취조실에서 부림사건 피해자들이 내뱉던 피 묻은 신음 소리와 변호사 노무현의 분노를 말한다. "우리들 이야기가 30년 만에 세상에 이렇게 다시 전해질 줄 누가 알았겠어요." 고씨가 미소를 머금은 표정을 지었다. 그는 요즘 기자들로부터 쏟아지는 전화를 받느라 바쁘다.

'국밥집 아들'은 두 사람 이야기 합친 것

배가 출출해질 즈음 인근 식당으로 옮겨 점심식사를 함께 했다. 30년이 지나도 살이 떨릴 만한 고통이지만 이들은 비교적 담담하게 당시를 회상했다. 이런저런 증언을 그동안 꾸준히 해온 덕에 그리 힘들지 않게 말을 이어갔다.

전두환 대통령이 정권을 완전히 장악했던 1981년 봄. 부산에는 79년 부마항쟁이 남긴 민주화 열기의 잔불이 타고 있었다. 부마항쟁은 79년 10월 유신 철폐를 외치며 부산과 마산의 대학생·시민이 벌인 민주항쟁을 일컫는다. 81년 4월과 6월 부산대에서는 학생 시위가 벌어졌다. 당국은 배후를 캐내기 위해 분주했다. 때마침 학림사건 수사 도중 이태복(김대중 정부보건복지부 장관 역임)씨가 부산지역 청년 몇명과 접촉한 사실이 드러났다. 학림사건이란 1981년 전두환 정권이 민주화 세력을 탄압하기 위해 서울 지역 학생운동단체 등을 반국가단체로 몰아 처벌한 사건이다. 2012년 6월 대법원 재심에서 관련자들은 무죄 판결을 받았다.

정부는 그해 81년 7월부터 부산지역 운동권 색출에 나섰다. 운동조직이라고 해봐야 대학내 동아리와 사회과학 서적 구입을 위한 협동조합(양서협동조합) 정도가 전부였지만 검경은 국가를 전복할 목적으로 활동하는 조직인 것처럼 포장했다. 딱히 조직 이름을 붙이지도 못해 서울의 학림사건에 빗대어 부림사건(부산 학림사건)이라 불렀다. 22명의 학생과 교사 등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등으로 구속했다.

이들의 유죄를 설명하는 82년 6월 항소심 판결문을 보면, '국가 전복을 꾀한 일'이라고는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사회과학 서적을 읽는 모임을 꾸리거나 송년회 자리 등에서 전두환 정권을 비판한 것 등이 전부였다.

'변호인'의 모델인 부림사건
국밥집 아들도 군의관의 폭로도
실제 사건과는 차이가 있었지만
고문받았다 주장하는 피해자와
판검사-변호인 설전은 실화
"우리 이야기가 30년 만에
다시 전해질 줄 누가 알았겠어요"
"아무도 사과를 하지 않았지만
고문 경찰들은 잘살았어요"
고호석·송병곤씨는 재심 중이다


"전두환 대통령은 체육관 선거로 당선된 거니까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고 민중 혁명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지요. 하지만 이것은 당시 국민들이 흔하게 머릿속에 품던 생각들이었어요. 우리가 어떤 단체를 조직해서 (혁명을) 준비하던 게 아니었어요. 재판 받는 사람들끼리도 서로 얼굴을 처음 보는 경우가 많았어요." 고호석씨는 아직도 억울함이 가시지 않는다.

송병곤씨는 81년 당시 부산대를 졸업하고 군 입대를 앞두고 있었다. 입대 전까지 현장 경험을 쌓고 싶어 부산의 한 밸브 제조업체에 취업했다. 그때는 이런 선택을 하는 대학 졸업자들이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여름 경찰에 끌려갔다.

"81년 7월6일 저녁으로 기억해요. 부산대 동기 호철이 집에 들렀다가 돌아가려 하는데 갑자기 경찰이 나타나 저를 잡았어요. 눈을 헝겊으로 가린 채 어딘가로 끌고 갔어요. 대공분실이었어요. 취조실 의자에 앉히자마자 40대 남자가 '너 평양 갔다 왔지?'라고 묻더군요. 저는 황당해서 피식 웃어버렸어요. 그러자 경찰은 제 옷을 다 벗기고 미리 준비해둔 군복을 입혔어요. 구타가 시작됐어요."

부산대를 졸업한 고호석씨는 1980년부터 부산 대동고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한 공장 노동자들을 위해 야학을 열었다. 그는 81년 8월2일 경찰에 끌려갔다.

"집으로 가고 있는데 시커먼 사람들이 나타나서 '고호석 선생이죠?' 한번 묻더니 곧바로 저를 대공분실로 끌고 갔어요. 데려간 날부터 구둣발로 밟고 때리고 정신없이 맞았어요."

<변호인>은 실화를 바탕으로 했지만 여러 허구적 내용이 섞여 있다. 영화 속 부림사건 피해자 중 한명인 국밥집 아들(진우)은 고호석씨와 송병곤씨 이야기가 합쳐진 것이다. 야학 교사를 하다 붙잡혀 간 것은 고호석씨의 이야기이고, 아들이 실종되자 수십일 동안 부산 곳곳을 찾으러 다닌 어머니(순애) 모습은 송병곤씨의 사연을 각색한 것이다.

아직 송병곤씨 어머니는 당신의 사연이 영화로 만들어졌는지 모른다고 송씨가 전했다. "제가 한달 넘게 안 보이니까 어머니는 제가 어디 끌려가 죽었는지 알고 제 주검을 찾으러 부산 시내 안 돌아다닌 곳이 없었다고 해요. 1960년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됐던 김주열 열사처럼 주검이 바다에서 떠오르진 않을까 싶어 영도다리 밑도 가보시고…."

그러나 무고한 사람을 국가 전복 세력으로 몰고 허위자백을 하지 않으면 고문을 받았던 것만큼은 허구가 아니라고 부림사건 피해자들은 전했다.

"산도둑같이 생긴 어떤 형사가 '너 김일성에게 지령 받았지?', '김대중이 너 배후지?'라고 물었어요. 제가 아니라고 부인하면 몽둥이로 이곳저곳 때립니다. 하도 맞아서 구토가 나오면 때리는 것을 멈췄어요."(고호석)

"고문 형사들 입에선 자주 술냄새가 났어요. 맨정신에 때리기엔 힘들었나 봐요. '통닭구이 고문'을 시켜도 제가 원하는 대답을 해주지 않자 저를 태종대 앞바다에 데려가 빠뜨려 죽이려고도 했어요."(송병곤)

노 변호사에게 '전환시대의 논리' 권한 고호석씨

대공분실 곳곳에서는 잡혀 온 동료들의 신음이 들렸다. 철길 옆에 위치한 대공분실에서 나오는 신음 소리는 기차 소리에 파묻혀 외부로 알려지지 않았다. 서울의 남영동 분실과 부산의 초량동 분실은 공교롭게도 모두 기찻길 옆에 위치했다.

국밥집 아들이 허구인 만큼 노무현 변호사와 부림사건 피해자들이 만나는 과정을 그린 영화 속 장면도 허구다. 피해자 어머니들은 노 변호사를 찾아 사건 수임을 부탁한 적이 없다. 부산 지역 인권변호사의 대부 격인 김광일 변호사가 검찰의 압력으로 사건을 맡지 못하게 되자, 자신과 인맥이 있던 동료 변호사들에게 피해자들의 변호를 분담했다. 노무현 변호사에게는 고호석·송병곤 등 5명의 피해자가 배당됐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저서 <운명이다>를 보면, 당시 노무현 변호사는 인권 문제에 큰 관심이 없었다. 영화에서처럼 돈만 밝히는 변호사까지는 아니었지만, 선배인 김광일 변호사가 부탁하니까 부림사건 변호를 맡은 것에 가까웠다. 노무현 변호사는 사법연수원 시절 김광일 변호사 밑에서 3개월간 시보 생활을 했던 인연이 있다.

고호석씨는 노무현 변호사를 처음 만났던 날을 기억한다. "81년 10월께 노 변호사가 구치소를 찾아왔어요. 거기서 처음 봤어요. 우리를 철없는 학생들로 생각하는 기색이 역력했어요. 제가 우리를 변호하려면 <전환시대의 논리>(리영희 지음)와 <후진국 경제론>(조용범 지음) 등은 꼭 읽어보라고 했어요. 그것을 읽고 노 변호사가 많이 변한 게 느껴졌어요."

영화 속에서 송우석 변호사는 국밥집 아들을 구치소 면회실에서 만나 온몸에서 고문 흔적을 발견한다. 그러나 실제 노무현 변호사가 발견한 고문의 흔적은 고호석씨의 빠진 발톱 흔적이 전부였다.

"구치소로 넘어가기 전에 경찰들이 고문의 흔적을 싹 지웠어요. 몸에 멍이 든 곳은 모두 소염제 연고를 며칠씩 발랐어요. 노 변호사는 (고문 장소인 대공분실이 아닌) 구치소로 면회를 온 것이라 몸에 멍이 든 것을 직접 보지는 못했어요. 다만 제가 고문으로 인해 빠진 발톱 흔적을 보여줬어요. 고문이 실제 있었다고 확신한 것은 그때예요."

법정에서 고문에 대한 폭로가 이어졌다. 그러나 원심 판사(조창호)는 관심이 없었다. 판결문을 살펴보면, 검찰 공소장 내용만 거의 그대로 반복돼 기술되어 있다. 판결문만 보면 재판정에서 고문 폭로가 있었는지조차도 알 수 없다. 고호석씨는 조창호 판사의 모습을 아직 기억한다. "고문으로 '발톱이 빠져 있다'고 말해도 '한번 살펴보자'는 말도 안 했어요."

노무현 변호사가 법정에서 흥분해 판사와 말싸움을 벌이던 것은 실제 있었던 일이다. "항소심 결심 공판 때 노 변호사는 감정적으로 격앙됐어요. 판사에게 제지도 많이 당했고요. 가족들이 '저러다 3년형 선고 받을 것을 5년 받는 것 아니냐' 걱정할 정도였어요."(고호석) "노 변호사가 '미국과 북한이 축구경기를 할 때 북한을 응원하면 그게 국보법 위반이냐'고 따지자 검사가 '용공 발언을 삼가라' 반박하면 판사는 검사 편을 들어줬던 것도 기억이 나요."(송병곤)

영화의 하이라이트를 이룬 군의관의 폭로와 변호사들이 판사와 형량을 협상한 것 등은 모두 허구다. 원심 재판부는 피고인들 20명에게 최고 징역 7년형을 선고했다. 1983년 전두환 정권이 특별사면 형태로 이들을 석방하기까지 부림사건 피해자들은 감옥에 갇혀 있어야 했다.

고호석씨는 88년 9월이 되어서야 복직 소송에서 이겨 다시 교단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현재 부산의 거성중학교에서 영어교사로 근무한다. 송병곤씨는 법무법인 '부산'에서 사무장으로 일한다.

이들은 '부림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입을 모은다. 특히 고문 가해자들이 아직 사과를 하지 않았다. 피해자들은 가해 경찰 이아무개씨 등 2명을 부산지방검찰청에 2011년 고소했지만 검찰은 공소시효 만료를 이유로 각하했다.

송병곤씨는 마음속 상처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고문 경찰들은 저희들 사건 이후 승진해 잘살았어요. 수사를 지휘한 당시 부산지검 최병국 검사는 후에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국회의원이 되었지요. 누구 한명 저희를 찾아와 사과를 하지 않아요. 이래도 되는 겁니까."

최병국 당시 검사 "고문 주장은 자기 행동 미화"

<한겨레>는 24일 최병국 전 의원의 서초동 사무실을 찾아 부림사건에 대한 입장을 물었다. 그는 부림사건 관련자들에게 "어떤 사과도 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최 전 의원은 "그들은 고문당했다고 주장하는데 자기들 행동을 미화하려고 그러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최 전 의원은 "수사 당시 부산 대공분실로 찾아가서 고문당하고 있는지 물어본 적도 있다. 피의자들이 '고문당하지 않았다'고 대답했다"고 말했다. '고문 경찰이 보고 있는 현장에서 솔직하게 대답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는 "고문당했다고 해서 허위자백을 할 수는 없다. 또 고문을 하면 뭔가 흔적이 남게 돼 있는데 그런 흔적도 없었다"고 답했다.

최 전 의원이 전임 검사로부터 인계를 받아 사건을 맡은 것은 81년 8월 말에서 9월 초 무렵이다. 대공분실에서 웬만한 고문은 마무리된 시점이다. 최 전 의원은 고문 현장을 직접 목격하지 못했을 수 있다. 그러나 '고문은 없었다'는 경찰의 설명을 그대로 받아들인 최 전 의원의 해명은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

고호석씨는 최 전 의원의 대답을 전해 듣고 쓴웃음을 지었다. "어떻게 고문한 것을 모를 수 있을까요. 최병국 검사가 대공분실로 찾아왔던 것을 기억해요. 그때 제 왼쪽 눈에 멍이 들어 있었어요. 취조실에는 책상 하나와 의자 두개, 야전 매트리스만 있었어요. 이곳이 고문 현장이라는 것은 검사 정도면 쉽게 눈치챌 수밖에 없어요."

부산지법은 올해 3월 부림사건에 대한 재심 결정을 내렸다. 2009년 부림사건 피해자 일부가 계엄포고령과 집시법 위반에 대한 재심을 거쳐 일부 무죄를 받았지만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등에 대한 재심은 이뤄지지 않았다. 송병곤씨는 "부림사건은 아직도 청산되지 않은 우리의 현실"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