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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테크/기업

[클릭! 취재인사이드] 중동에서 韓服 입은 여성 모델 달력이 대유행한 이유 (조선일보 2013.08.30 09:40)

[클릭! 취재인사이드] 중동에서 韓服 입은 여성 모델 달력이 대유행한 이유

 

국내 건설 시장이 갈수록 쪼그라들고 있습니다. 대한건설협회에 따르면 2012년 국내건설공사 수주액은 전년(110조7000억원)보다 8.3% 감소한 101조 5061억원으로, 2005년(99조3000억원) 이후 7년 만에 가장 적은 규모로 위축됐습니다. 올해는 더 줄어들 게 확실시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건설사들이 마지막 희망을 건 ‘블루 오션’이 있습니다. 해외 건설시장 입니다. 건설사들의 해외로 몰림 현상은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닙니다. 이미 4~5년 전부터 해외 건설시장에서 국내 업체 간 과당 수주 경쟁이 벌어져 입찰가를 ‘초저가 덤핑’으로 접수하는 ‘본헤드 플레이’가 잇따랐습니다.

그 후유증이 뒤늦게 불거져 최근 국내 주요 건설사들이 과거 공사에서 발생한 손실을 뒤늦게 ‘고해성사’하기도 했습니다. 실적 쇼크가 알려지면서 해외 시장이 ‘빛좋은 개살구 아니냐’는 지적도 나옵니다.

경쟁 과열과 수익성 하락은 경계해야 하지만, 해외 시장은 결코 버릴 수 없는 ‘황금 어장’입니다. 더욱이 해외 건설 시장은 연간 8조달러 규모인데도, 한국 건설사들은 올해 700억달러 수주를 목표로 하고 있으니 아직 1%에도 못 미칩니다. 우리 경제 규모나 능력을 감안할 때 앞으로 더 활발하게 진출해야 한다는 방증입니다.

◇522만달러짜리 태국 공사 수주해 300만달러 손해 보고도 함박웃음지은 이유는?

물론 한국 건설사들의 해외 역량은 예전에 비하면 크게 성장했습니다. 1975년 5억 달러에 불과했던 국내 건설업체 해외 수주액이 지난해 649억 달러로 100배 이상 증가했고, 누적 수주액은 5000억달러를 넘어섰습니다.

한국 건설사들의 ‘해외 진출 1호’는 1965년 태국 파타니~나라티왓 고속도로 공사가 꼽힙니다. 당시 현대건설은 독일(서독), 일본, 네덜란드, 이탈리아, 프랑스 등 16개국 29개 업체를 제치고 522만달러에 공사를 따냈습니다.


	태국 나라티왓 고속도로 건설현장.이 고속도로는 1965년 11월 현대건설이 최초로 해외공사로 수주했다. 이 건설경험이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기술적으로 도움이 되었다./조선일보 DB
태국 나라티왓 고속도로 건설현장.이 고속도로는 1965년 11월 현대건설이 최초로 해외공사로 수주했다. 이 건설경험이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기술적으로 도움이 되었다./조선일보 DB
현대건설은 당시 고속도로 공사 경험이 전혀 없던 상태였다고 합니다. 필사의 각오로 수주했지만 장비도 부족하고 경험도 일천하니, 공사는 그야말로 시행착오와 난관의 연속이었습니다. 오로지 뚝심과 성실성, 끈기로 공사를 밀어붙여 천신만고 끝에 완공했으나 오히려 300만달러에 달하는 손해를 봤습니다. 522만달러짜리 공사에서 300만달러 손해라니 엄청난 금액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당시 현대건설을 지휘하던 고(故) 정주영 회장은 한 연설 자리에서 이렇게 말하며 도전 의지를 불태우고 직원들을 독려했다고 합니다.

“기후와 풍토가 다르고 언어 풍습이 다른 태국에서 수많은 애로와 고통과 싸우면서 보여준 견인불굴(堅忍不屈)의 감투정신과 불면불휴(不眠不休)의 노력은 우리의 미경험에서 오는 모든 결함을 보완하고 성공적인 완공을 가능케 하였으며 우리의 노력은 태국 정부나 건설업계는 물론, 모든 국제적인 업자들에게 절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비록 해외 건설시장 개척 초기 단계에서 물질의 결손은 있었으나 아시아 전역에서 중동지역까지 건설시장을 확보하게 될 것입니다.”

	태국 파타니나라티왓 고속도로 현장에서의 故 정주영 회장
태국 파타니나라티왓 고속도로 현장에서의 故 정주영 회장

정 회장의 희망에 찬 확신은 곧 현실로 나타났고, 국내 건설사들은 현대가 첫 발을 내디딘 이후 숱한 해외 건설 현장에서 진격을 거듭해 ‘건설 코리아’의 발자국을 새겨 나갑니다.

해외 건설 현장은 그야말로 사투(死鬪)의 연속입니다. 수많은 국내 건설사들은 경험이 짧은 와중에도 오로지 끝까지 해내고 말겠다는 단호한 결의로 기적 같은 역사(役事)를 숱하게 일궈냈습니다. 공사를 따내기 위해 갖은 수모를 참아가며 민관(民官)이 혼연일체 분투했던 일화들은 지금 다시 돌이켜봐도 눈물겨울 정도입니다.

◇사막 들개 잡아 보신탕 끓여먹고 ‘대나무 주스 파티’ 한다면서 몰래 소주로 회식

초대형 지방 상하수도 공사를 앞둔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왕 환심을 사기 위해 국왕이 좋아한다는 매를 잡아 비행기에 태워 사우디 왕궁까지 전달했던 일이며, 중동 지역 공사를 좌지우지하는 거물 브로커가 입국해 온갖 향응을 요구하는 바람에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임에도 자정 넘은 시각에 경찰차나 앰불런스, 청소차까지 동원해가며 갖가지 지저분한 부탁을 꾹 참고 들어줘야 했던 건설부 공무원의 육성 고백을 들으면 가슴이 짠해집니다.

1970년대 해외건설협회장과 건설부 간부들이 이역만리 열사(熱砂)에서 아무런 유흥시설 없이 공사에만 열중하던 근로자들의 숙소를 찾아가보니 출입문에 여성 모델 사진이 붙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근로자들이 어찌나 많이 만졌던지 사진 표면이 허옇게 일어나 벗겨져 있더랍니다.

그냥 웃고 넘길 법한데 방문단은 이내 착잡한 심정이 됐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악전고투하는 그들에게 “여성 모델이 들어간 달력이라도 보내주는 게 어떻겠냐”고 아이디어를 내 한복 차림 여성이 들어간 달력 수십만부를 현장으로 보냈다고 합니다. 원래는 수영복 모델 화보로 제작하려 했지만, 이슬람권에서 자칫 예상치 못한 물의를 일으킬 수 있어 한복으로 바꿨다고 합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한 건설사 임원이 현지 진출 근로자들의 사기를 높여주려고 소주를 가져왔다가 알코올 반입이 금지된 이슬람 국가인 탓에 세관에서 걸려 압수당할 위기에 처하자 ‘Korean Bamboo Juice’(겉표지에 대나무가 그려져 있는 걸 핑계로)라고 둘러대고 겨우 통과해 현지 근로자들과 ‘대나무 주스’ 파티를 벌였다고 합니다.

사람도 가리지 않고 공격하는 포악한 사막 들개들에게 먹이를 주며 살살 달랜 뒤 나중에 하나둘씩 잡아 현지에서는 맛보기 힘든 ‘보신탕’을 끓여먹었다는 근로자들 사연을 접하면 웃음이 절로 나옵니다.

당시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남편의 오랜 해외 현장 근무에 지친 아내가 다른 남자와 정분이 나 송금한 재산을 다 탕진했는데, 남편 귀국일이 가까와오자 두려운 나머지 고추장에 독(毒)을 풀어 소포로 보내는 바람에 이 고추장을 나눠 먹은 남편과 현장 동료들이 집단 사망한 사건도 있었다고 합니다. 해외 건설 시장 개척 과정에서 겪어야 했던 에피소드들입니다.

최근 한화건설 김현중 부회장은 이라크 신도시건설 수주차 현장에 갔다가 마라톤 협상에 지쳐 잠시 눈을 붙였습니다. 그 사이 캠프 앞에 박격포 포탄이 떨어졌습니다.

나중에 지역 파트너가 김 부회장을 급히 깨웠는데 너무 피곤한 나머지 포탄이 떨어진 줄도 모르고 잠에 곯아떨어졌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를 두고 현지에서는 “미스터 김은 포탄도 두려워하지 않는 독종”이란 소문이 났고, 이런 열정이 수주에 간접적인 도움이 됐다고 하더군요.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그래픽 뉴스로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조선닷컴
지난해엔 페루에서 수력발전소 예정지를 답사하다가 헬기가 추락하면서 한국 건설업체 직원 8명이 숨지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이 역시 해외 시장 개척을 위해 애쓰던 과정에서 발생한 비극입니다.

임홍재 전 베트남 주재 한국대사는 “오늘날 K팝 등 한류(韓流) 바람은 앞서 중동 등지에서 우리 건설업체들이 일궈낸 건설 한류에서 시작됐다고 본다. 한밤중에도 돌관 공사를 감행하며 성실하고 근면하게 일한 근로자들과 기업들이 민간 외교관 역할을 수행했기에 세계 각지에 한국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뿌리내릴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우리 건설기업들은 앞으로도 ‘건설 코리아’ 깃발을 내걸고 유럽과 미국·중동·남미·아프리카 등 지구촌 곳곳을 누빌 겁니다. 그들이 해외에서 흘린 피와 땀방울은 여전히 우리 경제의 값진 자양분이 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아직은 ‘저가 수주’ ‘과당 경쟁’을 놓고 무작정 꾸짖기만 말고 건설사들을 격려도 해줄 때가 아닐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