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를 세운 홍무제 주원장이 고려사람인가요 ?
유명한 사람이 태어난 장소는 보통 길이길이 보존이 되는 것이 흔한 일입니다.
특히 일국의 宰相정도만 되어도 동네가 난리가 나고 몇 백년을 흘러 후손대대로 보존이 되건만, 어찌하여 일국의 왕이 그것도 태조에 해당하고 武帝라는 칭호를 얻은 사람의 고향이 불분명한 것일까요?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은 한고조처럼 미천한 신분으로 명나라를 건설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洪武帝인 주원장의 출생지 즉 고향이 어디인지를 중국역사가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이니지. 그 이유가 뭘까요?
주원장은 원래 고향이 안휘성이라고 사전에 되어있다고 하는데 정확하지가 않다고 합니다. 장소가 정확하다면 그 동네 중국사람들이 호들갑을 떨어도 떨었을 것인데, 암말 없이 어딘지도 모르고 있다는게 말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원장은 원래 고려의 도적출신인데 죄를짓고 중국으로 쫒겨가서 홍건적을 일으켜 명나라를 세웠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고 되려 이 말이 더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이런식으로 유난히도 주원장에 관해서는 우리나라와 연관된 설들이 많이 전해 내려오는데, 특히 그 전설에는 이성계와 관련된 것들이 많이 전해 내려온다고 합니다. 그중 유명한 것이 유현설화로써 전라남도 해남 근처에 천하제일의 명당자리가 있는데 그것을 두고 이성계의 아버지가 먼저 그 묘소를 발견하나 주원장이 먼저 자기 조상의 묘를 쓰는 바람에 중국의 왕이 되고 또 다른 자리가 있는데 그 자리는 천하에서 둘째가는 명당자리로써 이성계의 조상 묘를 쓰게되어 조선의 왕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고도 합니다.
명나라의 통지 [대명일통지]에는 주원장이 이르기를 "짐의 조상은 조선인이다. 짐의 조상의 묘소가 조선에 있다."라는 구절이 나온다고 하며, 그의 성씨가 신안주씨일 것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리고 주원장의 아내가 고려인 한영정의 딸이며 한확의 누이로 주원장과 교려비 사이에 태어난 주숙(朱肅)은 후에 永樂帝가 되는 것도 홍무제가 주원장이 고려인라는 근거가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과연 주원장은 고려인이었을 까요? 그렇다면 전설속에 주원장과 항상 같이 등장하는 이성계 역시도 짱꼴라가 아닌 토종 고려인간일 수도 있어 보입니다.
아시는 분들 답변 부탁드립니다.
명 태조 주원장은 고려인 참고 바랍니다 ^^
그리고, 명나라 초기사에 등장하는 조선인들의 정체는 무엇이며, 주원장이 명태조에 즉위하기 전 또 다른 高麗妃를 맞는데 석비(碩妃)이며 함산공주(含山公主)를 낳는다.또 高麗妃의 동생 한계란韓桂蘭은 후에 明 선종宣宗 선덕제宣德帝의 恭愼夫人 이다. 부인께서는 溫柔敬愼(온유경신)하여 아름답고 착함이 칭찬하기에 족하며 궁중에 일을 맡아 오랫동안 공로가 드러났고 壽福(수복)이 康寧(강녕)하여 마땅히 큰 복을 누릴 것인데 병으로 세상을 떠나신 訃音(부음)을 들으니 슬픔에 탄식하옵니다. 이에 특별히 공신부인을 추증하고 관원을 보내어 諭祭(유제)하며 또한 유사에게 명하여 장례를 치르게 하옵니다. 아아! 살아서는 어질고 착하셨으며 돌아가서는 영화로운 이름을 얻으셨습니다. 당시, 중국은 제갈공명 다음으로 유기의 수많은 논문을 쏟아 내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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正史와 픽션의 차이를 얼마나 알고 글을 썼을까? 한 문중의 기록을 오도하는 행태를 보며, 드라마 ‘선덕여왕’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1%의 史實에 허구를 첨삭하는 놀라운 재능에 국민들은 열광하고 있다. 때때로 역사를 난도질하여 이를 보고 쓰는 자로 하여금 正史로 각인하게 만드는 기술을 보며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윗 글과 댓글을 보자. < 그리고 주원장의 아내가 고려인 한영정의 딸이며 한확의 누이로....>, <주원장의 아내는 高麗人 한영정(韓永정)의 딸이며 한확(韓確)의 누이로... > 해당 문중의 족보까지 거론했으니,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족보 기록을 얼마나 자세히 확인했을까?. 청주한씨족보(1748년 戊辰譜)의 내용이다. 明太宗後宮은 동래정씨 鄭允厚의 1남4녀 중, 차녀이다. 韓休의 외손녀이다. 거론한 “한영정(韓永石+丁)의 딸이며 한확(韓確)의 누이”는 成祖의 麗妃이다. 成祖가 죽자 순장했다. 후일 麗妃의 동생이 宣宗의 妃인 恭愼夫人으로 明祖 三代를 거치며 조선 여인의 위상을 드높였다. 주원장은 1370년 7월 이 땅의 정기를 말살하고 天子의 맥을 끊기 위해 조천궁(朝天宮) 도사(道士) 서사호(徐師昊)를 보내어 백두대간인 단천에 쇠말뚝을 박았다. 또한 북한산성(北漢山城) 아래에다 소금을 쌓고 그 위를 덮어서 태워 마침내 염산(鹽山)이 되어 내려온 맥을 진주(鎭住)시켰다. 이 문제는 조선 개국과 동시에 제후국으로 전락되고, 공자(孔子)의 논리와 홍무(洪武)의 예제(禮制)에 의해 하늘제사(天祭儀式)를 폐지한 군주(君主)의 안위가 500년 한(恨)으로 지속된 계기가 되었음이다. < 참조; target=_blank>http://www.pluskorea.net/sub_read.html?uid=13185§ion=section78§ion2=상고사/고대사> 역사를 거론코자 할 때는 정확한 전거가 필수적이다. 좀 더 세심한 관찰을 당부하고자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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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라서 여쭤본 것인데.... ㅉ ㅉ 참... 전설이나 설화의 형태로 전해지는 내용이 물론 근거가 희박하기도 하지만, 그 희미한 실마리가 단서가 될 수도 있겠지요. 주원장이 우리민족에게 한 짓은 한 짓이고, 그의 핏줄이 고려냐 짱꼴라냐 하는 얘기를 물어보는 것이었습니다. 정말로 일설에 의하는 것처럼, 그의 고향이 중국사에 제대로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인지 등... 허구를 보고 좋아 날뛰고자 하는 게 아니고, 어차피 다시 밝혀지는 우리의 역사와 무슨 연관이 있는지를 캐고 싶어서 였으니 노여워 마세요. 자기 민족에 배신감을 느끼고 나쁜짓을 한 인간들 많습니다. 민족의 반역자라고 우리 민족이 아니라는 법도 없잖습니까? 물론 주원장이 꼭 그렇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오해 없으시길 바라고요... 우리민족에게 나쁜짓을 했냐 안 했냐를 물어보는 게 아니고, 우리민족이라는 것에 대한 근거 등이 있는지 아니면 확실히 지나족이라는 근거가 있는지를 질문드린 것이지요. 그렇게까지 얘기 하기 보다는 좀 더 자세한 역사적 사료를 들어 주셔서 이왕이면 愚問賢答을 부탁드립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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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눌님, 픽션인지 역사인지 구분도 못하면 글을 올리면 안 되나요? 모르는 사람은 질문도 못합니까? 황당합니다. 얼마나 많이 아시길레... 한단고기를 위서라고 하는 인간들이 있고, 단군을 설화라고 하는 인간들이 있는 반면 진정한 우리의 역사를 찾아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주원장이 우리의 역사라는 거 아닙니다. 저 역시, 자칫, 혹시나 맹신주의에 빠지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민족사학을 보는 사람중의 하나 입니다. 많이 아시는 분이시라면 일러주시는게 도리 입니다. 쪽빠리들이 설화라고 했지만, 우리에게는 역사가 분명합니다. 주원장이 중국사에 불문명한 부분에 의심을 가지고 캐면서 연구하려는 학도들을 완전히 바보로 만드시는 군요. 겨우 한가지만 가지고 남을 비판하지 마시고, 님의 고귀한 학식으로 고견 부탁드립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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昻明人님, 노여우셨나 봅니다. 단, 제가 말씀드리고자 한 부분은 한 문중의 기록인 문중사 즉 '족보'의 상세한 검증이 필요하다는 취지였습니다. 자칫 문중사가 오도되었을 때, 한 문중이 받는 타격은 상상을 초월하는 경우를 많이 겪어 보아서 입니다. 님이 제시하신 주원장의 전설같은 부분은 높이 사고 싶습니다. 그러나 <주원장의 아내가 고려인 한영정의 딸이며 한확의 누이로 .... 근거가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지요>란 부분은 확증적 기록으로 보여 바로 잡는다는 취지에서 논했으니, 오해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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昻明人님, 혹 추후 문중사를 기록하실 때 모호한 부분이 있다면 성심껏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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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호(廟號)는 태조(太祖)이고, 재위연호(在位年號)에 의해 홍무제(洪武帝)라고도 한다. 호주(濠州:安徽省 鳳陽縣)의 빈농 출신으로, 17세에 고아가 되어 황각사(皇覺寺)라는 절에 들어가 탁발승(托鉢僧)이 되어 여러곳을 전전하였다. 홍건적(紅巾賊)의 부장 곽자흥(郭子興)의 부하가 되면서 두각을 나타내었고 곽자흥의 양녀와 결혼하여 그의 사위가 되었다. 곽자흥의 군대가 분열되자 독자적으로 군대를 모아 세력을 키워나갔으며 원(元)나라 강남(江南)의 거점인 난징[南京]을 점령하였다. 이때 그의 병력은 2만명에 달했고 자신을 오국공(吳國公)이라고 호칭했다. 홍건적 군대가 원나라의 공격을 받고 패퇴하고 나머지 남경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진우량과 소주의 장사성의 군대와 치열한 전투를 벌여 마침내 각지의 군웅들을 모두 굴복시켰다. 1368년 남경에서 명나라를 세우고 연호를 홍무(洪武)라 하였다. 동시에 북벌군을 일으켜 원나라를 몽골로 몰아내고 중국의 통일을 완성하였다. 주원장은 한민족(漢民族)의 왕조를 회복시킴과 아울러 모든 몽고 풍속을 금지시키고 중앙집권적 독재체제의 확립을 꾀하였다. 중앙에는 1380년 중서성(中書省)을 폐지하여 육부(六部)를 독립시키고 도찰원(都察院)·오군도독부(五軍都督府)를 설치하여 이들 기관을 황제 직속하에 두었다. 지방에도 포정사사(布政使司:行政)·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軍事)·안찰사사(按察使司:檢察)를 병립(並立)시키고 이들을 중앙에 직결시켜 황제는 이 통치기구 위에 군림하여 절대권력을 장악하였다. 또, 24인의 황자(皇子)를 전국의 요지에 분봉(分封)하여 제실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한편, 농민통치에도 힘을 기울여 전국의 농촌에 이갑제(里甲制)를 설치하고 부역황책(賦役黃冊)과 어린도책(魚鱗圖冊)을 만들도록 하여 조세·부역의 징수를 공평히 하고 정책의 침투를 꾀하였다. 주원장이 실현하고자 했던 군주독재권의 강화는 공포정치에 의해 실현되었는데 특히 황제의 권한을 강화하기 위해 그와 동고동락한 측근들 대부분을 숙청하였다. 이때 목숨을 잃은 측근이 2만명에 달했다고 전한다. 이런 비극을 감내했던 이유는 그의 아들에게 보다 확고한 황제의 지휘권을 물려주기 위함이었는데 큰 아들이 급사하는 바람에 손주(건문제)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되었고 왕위 계승자가 아직 어려 숙청작업은 더욱 가혹하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주원장이 걱정하였던 황제의 위협세력은 그를 도왔던 개국공신들이 아니라 26명이나 되는 그의 아들이었다. 주원장은 만년에 고독하게 살다 1398년 71세의 나이로 병사하였고 그가 죽은 이후 아들 사이에 피비린내 나는 권력 투쟁이 일어났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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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글은 아주 간략하게 소개하는 주원장입니다. 태어난 곳이 호주로 되어있네요// 설화 내용 재미있었습니다.//또한 대백제님의 글을 보니 많은 것이 새롭습니다// 그냥 설화로 볼 것이 아니라는 생각도 드네요// 그러나 명나라는 분명히 우리의 역사를 지우는 동북공정을 시작(?)한 나라이다는 글을 본적이있습니다/ 특히나 사대와 소중화라는 일부 부끄러운 조상들이 상국으로 받든 나라이며, 삼국지같은 허구로 고대사의 흔적을 지우는 뻥튀기를 한 나라이지요/ 애신각라 처럼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고 세계의 중심 국가로 살아간 분들이 있는 반면에 자신의 뿌리를 애매하게 설화로 치부하거나 명확히 밝히지 않는다는 것에는 뭔가 있지 않나 의문은 남습니다// 질문하신분이나 구리넷 선생님들의 건승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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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군요, 부끄럽습니다. 허나, 이렇게 알게되니 명쾌해지내요. |
주원장이 고려인이라고?
중국에서 한국인들이 주원장을 고려인이라고 말한다는 대목을 발견하였다. 본인 처음에는 또 한국에 관련된 루머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실제로 서프라이즈라는 프로그램에서 주원장이 고려인이라는 방송을 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 주원장 고려인설이 뭔지 한 번 보자. 처음부터 결론을 내자면 "어이없음" 이다.
* 본 내용은 아쉽게도 "조선기문朝鮮紀聞"직접 보지 못하고 쓴 글이다[각주:1].
3월 7일 방송된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는 명나라 태조 주원장의 실체를 놓고 한국과 중국의 학자간의 대립을 다뤘다.
1368년 명나라를 세운 초대황제 주원장은 이민족을 몰아내고 한족 중심의 문화를 세운 인물이다. 그는 미천한 거름뱅이에서 시작해 중국 역사상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개인으로 평가된다.
그런데 일부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주원장이 고려인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역사학자 백린은 '조선기문'에 기록된 설화를 근거로 들었다. '조선기문'에는 명태조 주원장과 이름이 같은 남자가 등장한다. 주원장은 경상도 웅천의 주씨 노부부의 아들로 5살이 되던 해 고승을 따라 절에 들어갔다가 15세에 하산했으며 총명하고 민첩했다고 적혀있다. 또 한국 민간 전설집에는 주원장이 중국으로 건너가 나라를 세웠다는 얘기가 적혀있어 더욱 신빙성을 더했다.
반면 중국학자들은 역사학자 오함이 쓴 주원장의 전기 '주원장전'을 들어 이를 터무니 없다고 반박하고 있다. 전기는 주원장이 중국 안휘성에서 태어났고 아버지 또한 중국인으로 적고 있다.
이를 반박하는 학자들은 주원장전은 조선기문에 실린 탄생 설화를 보고 만들었다고 했다. 주원장전의 발행시기는 조선기문이 발행된 뒤다. 두 책을 비교해 볼 때 주원장의 어린시절 매우 가난했다는 점과 주원장이 절로 들어갔다는 것, 그리고 주원장이 걸식하며 돌아다닌 시기가 비슷하다.
또 주원장의 주변에는 유독 고려인이 많았고 주원장의 심복인 주유도 고려인이어서 각별히 신임했다는 주장까지 더해져 주원장이 고려인이라는 주장에 힘을 실었다. 또 다른 학자는 주원장의 아들 영락제의 친모가 고려인일 가능성까지 제기한 상황이다. 아직까지 한국과 중국의 학자들은 이에 대해 뚜렷한 결론을 내지 못한 채 논쟁을 벌이고 있다.
출처 : 명나라 태조 주원장은 고려인 논란, 韓中 역사학자 대립 논쟁
1) 대체 어디를 봐서 학자들의 공방이지?
조선기문朝鮮紀聞은 잘해봐야 2차사료이다. 1885년 일본인 鈴木信仁에 의하여 쓰여진 조선의 일들을 모아놓은 책[각주:2]이다. 주원장전朱元璋传는 2차사료조차 어림없다. 중국의 역사학자 吴晗[각주:3]에 의하여 1948년에 쓰여진 책이다. 이건 연구서라로 해야된다.
대체 어떤 "미친" 학자들이 2차사료도 안되는 것을 기본으로 공방을 펼친다는 것인가?[각주:4] 솔직히 이 부분부터가 벌써 어이없음이다. 역사학 관련 사람들은 본인이 위에서 적은 조선기문과 주원장전의 간략내용만 보아도 어이없어 할 것이라고 감히 장담한다.
가장 간단히 말해서 명사明史를 보면 주원장의 아버지가 钟离로 이동했다고 나와있다. 그리고 钟离는 현재 중국 안후이펑양安徽凤阳이다[각주:5]. 그리고 명사는 1739년에 완성되었다. 정식사료인 명사를 믿을 것인가? 아니면 명사보다도 100년이상 늦게 기록되었던 전설을 믿을 것인가? [각주:6]
2) 설화는 가치있는 사료이지만 믿을 수 없는 사료이다.
설화의 가치는 상당히 뛰어나다. 오히려 정사에서 제대로 기록하지 못하는 일이 설화에 남아 있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러나 설화만을 가지고 논문을 쓰는 학자는 없다. 왜냐하면 설화 그 자체는 많은 시간동안 온갖 변형을 거쳐왔기 때문에 그곳에서 뽑아내어서 "간접 증명"으로 사용할 수는 있지만, 그것만으로 직접 증거로 사용하면 웃음거리가 되기 딱이다.
조선기문은 무려 일본인이 1885년에 출판한 책이다. 이미 주원장과 상당한 시기적인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조선인 자신이 아닌 일본인에 의해서 적혀진 내용이기에 그 정확성부터 시작하여 다양한 부분에서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잘해봐야 2차사료일 뿐인 것이다. 그 외에 출처를 아직도 모르겠는 "민간설화집" 역시 동일하다.
논란이 된다는 말 자체가 어이가 없다. 논란이 되려면 1차사료정도는 있어야되는 것 아닌가?
3) 설사 주원장이 고려인이라고 하더라도!
그래 원하는대로 주원장이 고려인이라고 해보자. 그럼 주원장은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하는 개같은 한반도"을 떠나서 "꿈을 이룰 수 있는 중국"으로 간 것이 된다. 이 점은 생각해보았는지 모르겠다. 무조건 "한국인" "한국인" "한국인"만을 말하다보니 이런 조그마한 것을 간과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주원장이 고려인이라고 하자. 그래서? 조상이 당신 밥 먹여 주지 않는다. 본인 스스로가 역사학도의 입장에서 분명히 이야기를 하겠다. 정체성을 스스로 세우지 못하고 역사에 기대지마라. 설령 조상이 아무리 위대했어도 지금 현재 빌어먹는 거지꼴이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역사라는 과거에서 교훈을 얻고 현재를 냉철하게 살피고 미래로 향하여 가는 것이다.
다시 묻겠다. 주원장이 고려인이라고 하자. 그래서??? 우리 모두 중국정령하자?!
정신 차려라. 이 내용 덕분에 중국에서의 반한정서가 왕창 상승하였다.
추가 : 혹시 주변에 중국인에게 말하고 싶은데 중국어가 안되는 경우 아래를 참고하셔요.
我身为在中国学古代史的的韩国人,向中国朋
朱元璋为韩国人是由于不可靠的史料(朝鲜纪
只是借这个机会向大家提醒一件事。民族主义
我希望大家尽量理性的摆脱这些民族主义和国
- 직접 구해서 볼 수 있었으면 더 어처구니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본문으로]
- 제목; 朝鮮紀聞 바로가기 (새창). 저자; 鈴木信仁 編. 발행일; 1885. 발행기관; 愛善社.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본문으로]
- 심히 정치적인 사람이었고, 이 책을 연구서 수준도 안되게 보는 사람도 많다. 吴晗은 나중에 심히 유명해진다. 문화대혁명의 기폭제가 되었다는 《海瑞罢官》이라는 명작을 내놓는다. [본문으로]
- 조금 과장하긴 했고, 본인이 1차사료를 통한 공방을 구하지 못한 것일수도 있다....그래도 어이없어!!! [본문으로]
- 《明史》第一卷 本纪第一 太祖一 太祖开天行道肇纪立极大圣至神仁文义武俊德成功高皇帝,讳元璋,字国瑞,姓硃 氏。先世家沛,徙句容,再徙泗州。父世珍,始徙濠州之 钟离 。生四子,太祖其季也。 [본문으로]
- 위의 것만 적어놓으니 혼동하시는 분이 있어서... [본문으로]]
中환구시보 "주원장이 고려인이라고?"
(연합뉴스 2010-03-26 16:24)
(베이징=연합뉴스) 인교준 특파원 = 중국의 유력 일간지가 26일 "명나라 태조인 주원장(朱元璋)이 고려인일 수 있다"는 논란이 담긴 한국의 한 방송 프로그램 내용을 자세히 소개해 눈길을 끌고 있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人民日報)가 발행하는 국제문제 전문지 환구시보(環球時報)는 이날 3면에 주원장의 실체를 놓고 논란을 벌인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지난 3월7일분) 내용을 자세히 전했다.
당시 해당 프로그램은 1368년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이 미천한 신분에서 태어나 한족(漢族)을 중국의 중심에 우뚝 세운 역사적 인물로 평가받지만 일부 역사학자들은 그가 고려인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 근거로 '조선기문(朝鮮紀文)'이 등장하는데, 여기에 명 태조 주원장과 같은 이름이 등장한다.
조선기문에는 경상도 웅천군에 사는 노부부의 아들로 태어난 주원장은 어려서부터 총명해 5살 때 고승을 따라 절에 들어가 문무를 익혔고 15살이 되던 해 하산해 장군으로 성장했다고 적고 있다.
이런 내용은 이와 유사한 책인 '한국민간전설집'에도 등장하는데 그 책에는 주원장이 중국으로 건너가 나라를 세웠다는 얘기도 적혀 있으며, 춘향전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다는 주장이 해당 프로그램에 담겨 있다고 환구시보가 전했다.
이 신문은 나아가 중국 역사학자인 오함이 저술한 '주원장전'에 주원장이 중국 안후이(安徽)성에서 태어났고 아버지가 중국인으로 적고 있지만 일부 한국 학자들은 '조선기문'이 1894년에, '주원장전'이 1945년에 발간된 점을 들어 사료로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도 소개했다.
신문은 또 두 책에 주원장이 어린 시절 매우 가난했고 어려서 절에 들어갔으며 그리고 주원장이 걸식하며 돌아다닌 시기가 비슷하게 서술돼 있고 주원장 주변에 유독 고려인이 많고 주원장의 아들 영락제의 친모가 고려인일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고 덧붙였다.
환구시보는 그러나 결론적으로 그 같은 주장은 '터무니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신문은 그러면서 최근 한국에서 '공자가 한국인', '한자는 한국에서 발명한 것' 등의 주장이 나오고 그와 관련해 논란이 분분하다고 소개하면서, 그러나 그로 인해 한.중 양국민 간에 논란이 생길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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